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카사 베르디의 베르디 기념관

정준극 2013. 2. 5. 16:26

카사 베르디의 베르디 기념관

Museo Casa di Riposo per Musicisti Giuseppe Verdi

Museum of the Musicians' Rest Home

 

카사 베르디와 그 앞의 광장에 있는 베르디 기념상

 

밀라노의 카사 베르디(정식 명칭은 Casa di Riposo per Musicisti Giuseppe Verdi)에는 베르디를 기억하게 하는 콜렉션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방에 나뉘어 전시되어 있으며 반드시 기념관이라는 구별도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표적인 콜렉션들을 소개하면 베르디의 의상, 베르디가 사용하던 스피넷, 베르디가 살았던 집에서 가져온 식당 가구, 베르디와 주세피나의 초상화들, 베르디의 데드 마스크 등이다. 이들에 대한 연유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자. 혹시라도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베르디는 자기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사람들이 입주하게 되기를 바랬다. 왜냐하면 베르디는 자기의 능력으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굳이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베르디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02년, 베르디의 생일을 기념하여 10월 10일에 9명이 처음으로 입주하였다.

 

카사 베르디의 베르디+주세피나 묘지가 있는 영묘의 천정화

 

그보다도 먼저 카사 베르디에 대하여 다시한번 소개코자 한다. 베르디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899년 12월 16일에 밀라노의 비아 만초니 29번지에 있는 집에서 '음악인을 위한 안식의 집 재단'(Casa di Riposo per Musicisti Fondazione Giuseppe Verdi)를 발족시켰다. 이탈리아의 음악인으로서 남녀 구별 없이 노후에 빈곤하여서 마땅한 거처가 없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낼수 있는 건물을 짓고 운영하자는 것이 이 재단의 목적이었다. 세계에서 이러한 목적을 지닌 사업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말년의 베르디는 생애의 마지막을 이 사업을 위해 전력하였다. 베르디는 평생을 통한 활동에서 이 안식처를 만들기로 한 것이 가장 보람있는 것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베르디는 젊은 시절 오로지 음악만을 위해 열정으로 지냈으나 아무런 재산을 마련하지 못하여 노년을 빈한하게 맞이해야 하는 음악가들, 특히 성악가들을 위해 무언가는 보람있는 일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안식처는 '카사 디 리포소'라고 간단히 부르며 또는 더 간단히 '카사 베르디'라고 부른다. 설계는 유명한 대본가인 아리고 보이토의 동생으로 건축가인 카밀로 보이토(1836-1914)가 맡았다.

 

카사 베르디의 설계를 맡았던 카밀로 보이토

 

베르디는 카사 디 리포소를 5각형 형태로 건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확보한 부지가 그런 건축에는 맞지 않았다. 당초의 계획과는 차이가 있게 완성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은 네오 고딕 양식으로서 당시에는 뛰어난 설계였다. 전체 건물의 가운데에 내정(Courtyard)를 마련하였고 주위에는 각각의 파빌리온이 들어서도록 했다. 3층의 본관 건물에는 사무실과 관리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본관 건물의 정면은 석재로 장식한 복아치 형의 창문들이 각각 3개씩 대칭을 이루도록 했다. 그리고 현관 위에는 세개의 창문을 달아 채광이 잘 되도록 했다. 본관 건물을 지나 내정을 바라보며 교회처럼 생긴 영묘가 있다. 베르디의 묘지와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의 묘지가 있다. 카사 디 리포소는 1936년에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했다. 

 

공중에서 내려다본 카사 베르디. 내정을 지나서 보이는 교회처럼 생긴 건물이 베르디의 영묘이다.

 

[베르디의 의상]

카사 베르디에 전시되어 있는 베르디의 의상은 베르디가 운명한 후에 밀라노 호텔(Hotel de Milan)의 그가 묵었던 방에서 가져온 것이다. 베르디는 밀라노 호텔에 자주 투숙했었다. 베르디와 관련이 있는 다른 물건들도 전시되어 있다. 호텔 소유주인 주세페 스파츠라는 사람이 정리해서 기증한 것들이다. 베르디가 썼던 모자는 밀라노의 안토니오 폰초네 모자공장이 만든 것이다. 이 공장은 왕족들에게 모자를 만들어 제공했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런데 모자 상자는 유명한 보르살리노 공작의 마크가 붙어 있다.

 

베르디가 착용했던 의상과 모자. 그리고 모자통

 

[스피넷]

16세기 중반에 베니스의 마르코 자드라(Marco Jadra)가 제작한 스피넷(Spinet)이다. 1560년 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삼나무의 일종인 사이프리스, 전나무와 너도밤나무의 목재로 만들었다. 젊은 베르디가 사용한 첫 악기이다. 1821년에 거장 스테파노 카발레티가 수선하였다. 카발레티는 베르디가 사용했던 악기를 수리했다는 것은 일생의 명예라고 말했다.

 

젊은 베르디가 사용했던 스피넷

 

[제노아에서 가져온 식당 가구]

베르디와 주세피나는 제노아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빌라 도리아였다. 빌라 도리아의 식당에 있던 가구들을 카사 베르디로 가져와서 전시해 놓았다. 이 가구들은 아마도 주세피나가 1860-70년 사이에 파리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가구에는 주세페 베르디의 이니셜인 GV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이드보드와 의자들중 대부분은 프랑스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의자들과 벽테이블 등은 이탈리아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베르디가 제노아에서 지낼 때에 사용했던 가구들

               

[베르디 흉상]

나폴리 출신의 화가인 빈첸토 제미토(Vincenzo Gemito: 1852-1929)가 1873년에 청동으로 만든 베르디의 두상이 있다. 이 작품은 베르디가 1873년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에서 아이다를 공연하기 위해 체류하고 있을 때에 만들었다고 한다. 도메니코 모렐리가 젊은 조각가인 빈첸초 제미토를 베르디에게 데려와서 두상을 만들도록 했다. 제미토는 작품료를 받으면 그 돈으로 군대에 가는 것을 면제 받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베르디는 젊은 예술가를 돕기로 작정하고 초상화를 만들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제미토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의 흉상도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베르디는 완성된 흉상들을 산타가타로 가져왔고 나중에 카사 베르디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청동

                         

[베르디 초상화]

페라라 출신의 화가인 조반니 볼디니(Giovanni Boldini: 1842-1931)이 1886년에 캔버스에 오일로 그린 베르디의 초상화이다. 1886년 3월에 파리에 있는 볼디니의 스투디오인 플라스 삐걀(Place Pigalle)에서 그린 것으로 베르디가 몇 차례나 찾아가서 포즈를 취했었다고 한다. 그럴 때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지휘자인 에마뉘엘르 무치오가 동행했다고 한다. 이 초상화를 완성하기 전에 테스트로 파스텔로 그린 것도 있었다. 현재

로마의 현대미술관(Galleria d'Arte Moderna)에 전시되어 있다. 베르디는 아리고 보이토가 오텔로의 대본을 쓰고 있을 때에 파리에 있었다. 그후 1887년 2월 5일 오텔로가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될 때에 볼디니도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볼디니는 1893년 베르디의 활슈타프가 대성공을 거둔 후에 자기가 그린 초상화를 베르디에게 헌정하였다. 베르디는 그 초상화를 제노아에 있는 빌라 도리아의 화려한 거실에 걸어 놓았었다.

 

[임종의 베르디]

밀라노 출신의 화가인 카를로 스트라글리아티(Carlo Stragliati: 1868-1925)가 1901년 1월 27일 밀라노의 호텔 드 밀란에서 베르디가 임종하기 직전의 모습을 캔버스에 오일로 옮긴 것이다. 스트라길리아티는 대단히 예민하고 주의 깊은 초상화가로서 오페라 인물들을 많이 그렸다. 예를 들면 테너 드 마르키, 가르뱅, 보르가티 등이다.

 

임종의 베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