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그너의 종교철학, 그리고 반유태주의

정준극 2013. 2. 18. 08:55

바그너의 종교철학, 그리고 반유태주의

 

바그너는 한때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니체와 친구로서 지낸 일이 있다. 두 사람은 어떤 면에서 반기독교적인 견해를 비슷하게 가지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가 강조하는 섹스에 대한 지나치게 청교도적인 자세에 대하여는 '그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야 어떻든, 바그너의 유년기는 기독교적인 신앙생활로 점철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바그너는 소년시절에 어찌나 신앙이 불길처럼 뜨거웠던지 어느 때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한 일도 있었다. 바그너의 초기 작품 중의 하나인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는 복음서를 열심히 공부한 후에 쓴 것으로 신약에 나오는 구절들을 그대로 인용한 경우가 많았다. 또 하나의 작품으로 합창과 오케스트라 앙상블인 '열두 제자의 사랑의 축제'(The Love Feast of the Twelve Apostles: WWV 69)도 성경말씀에 기본을 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그런 바그너였는데 따지고보면 참으로 성경말씀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우선 여성편력이다. 십계명의 제7계명으로 '간음하지 말라'라는 것이 있으며 제10계명으로 '...네 이웃의 아내나...탐내지 말라'라는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바그너와 거리가 먼 얘기가 되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께서 '십계명에는 간음하지 말라고 되어 있지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태 5장 17-18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과는 더구나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바그너의 여성편력은 카사노바가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상당한 것이었다. 하기야 당시의 한다하는 남자들이라면 그런 생활을 할수도 있겠지만 바그너의 경우는 교양있고 정상적인 남성의 일반적인 생활이라고는 볼수 있는 것이었다. 바그너의 경우에는 상당히 지나쳤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아니, 위대한 바그너가 그런 생활을 했다니 말이나 되는 말인가?'라며 당황해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교회생활을 했던 바그너는 삶의 행복과 인생의 완성은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을 통해서 달성할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1880년 말쯤해서 바그너는 '종교와 예술'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예수가 보여준 사랑이이야말로 구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예수의 보혈이 긍휼히 여김의 원천이며 그같은 보혈은 실상 모든 인류에게 흐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평화롭고 이상에 넘친 세상을 이룩하려면 '그리스도의 보혈에 동참해야 한다'고 내세웠다. 바그너의 기독교 신앙은 정통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수 있다. 그는 구약의 내용, 특히 십계명을 경멸하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과 창조성 및 영성(靈性)간의 형이상할적 시너지에 대한 통찰력있는 견해는 그의 실제적인 생활경험과 결코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그너는 '트리스탄'을 작곡할 때에 마치 내세에 들어와 있는 듯한 마음의 상황에 있었다는 것이다.

 

바그너의 종교관은 상당히 특이한 것이었다. 사람 중에도 특이한 체질의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종교관도 특이했다. 바그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했다. 존경했다기 보다는 훌륭한 분이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바그너는 예수가 유태인이 아니라 그리스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추악한 유태인의 뿌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그가 태어났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소리였다. 그는 또한 헬레니즘적인 비교(秘敎)와 마찬가지로 구약이 신약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한 예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과 다른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구약의 십계명은 기독교의 가르침인 사랑과 자비가 부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맨날 '하지말라, 벌받는다'라고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의 다른 여러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중에서도 특히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바그너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불교 오페라를 작곡하려고 몇년이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었다. '승리자'(Die Sieger)라는 제목까지 생각해 두었다. 결국 불교적인 '승리자'는 완성을 하지 못했지만 대신 '파르지팔'이 나왔다. '파르지팔'은 기독교에 대한 바그너의 버전이라는 특이한 작품이다. '파르지팔'과 '승리자'가 연계성이 있다는 것은 예를 들어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살과 피로 대용하는 의식이 사실상 기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이교도의 의식에 가까운 것이라는 해석이다. 비학 역사학자인 조슬린 갓윈(Joscelyn Godwin)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불교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아리안주의]

바그너는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신봉했는가? 만일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 프랑스의 유명한 인종학자인 아서 드 고비노(Arthur de Gobineau: 1816-1882)의 아리안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바그너는 고비노의 이론에 별로 수긍하지 않았다. 다만, 말년에 고비노의 아리안 철학이 진실된 것이라는 확신은 갖게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귀족으로서 외교관이기도 했던 고비노는 아리안 우월주의의 이론을 정리한 사람으로 현대 인종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인종문제에 대하여 대단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런 고비노가 바그너에게 과연 영향을 주었느냐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바그너가 고비노를 만나 대화를 한 것은 '파르지팔'을 거의 완성한 단계에서였기 때문이다. '파르지팔'은 바그너의 기독교 철학과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은연히 내세운 내용이다.

 

바그너가 고비노를 처음 만난 것은 1876년 11월 로마에서였다. 고비노는 바그너보다 세살 아래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거의 동년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로마에서 그렇게 잠시 만났지만 그후로 1880년까지 다시 만난 일은 없었다. 1880년이라고 하면 바그너가 '파르지팔'의 대본을 완성한 후였다. 다시 말하는 사항이지만, '파르지팔'은 바그너의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그너가 고비노의 인종주의적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고비노는 25년 전에 Essai sur l'inegalite des races humaines(An Essay on the Inequality of the Human Races: 인종의 불평등에 대한 에세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여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한바 있다. 그러나 바그너가 1880년에 이르기까지 고비노의 그 에세이를 읽고 무슨 감동을 받았다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바그너는 서구사회가 우등민족과 열등민족의 혼합으로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다는 고비노의 아이디어에 대하여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그때까지만 해도 게르만 민족 또는 북구의 민족만이 다른 민족에 비하여 우월하다는 생각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았던 것 같다.

 

프랑스의 인종학자 아서 드 고비노

 

고비노는 1881년에 바이로이트를 방문하여 빌라 반프리트에서 무려 5주 동안이나 묵은 일이 있다. 그때 바그너는 당연히 고비노와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의견이 엇갈려서 대체로 논쟁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바그너가 고비노의 인종 이론에 비하여 기독교를 옹호하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쳤다는 것이다. 한편, 고비노는 아일랜드인을 영국이 통치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아일랜드인을 퇴폐 민족으로 간주했고 영국인을 북구의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음악적 능력을 가지려면 흑인조상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바그너는 고비노의 아이디어에 대한 반론으로서 세편의 에세이를 썼다. '고비노백작의 작품 입문'(Introduction to a Work of Count Gobineau), '네 자신을 알아라'(Konw Thyself), 그리고 '영웅주의와 기독교'(Heroism and Christianity)이다. 모두 1881년에 썼으며 바이로이트 블래터에 게재되었다. 바그너는 '네 자신을 알아라'에서 독일 국민에 대한 사항을 다루었다. 고비노는 독일 국민을 '우수한' 아리안 민족이라고 믿었다. 이에 대하여 바그너는 독일 민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우수한 민족이라는 것은 아니며 그저 여러 민족 중의 하나라고 전제하고 문제는 '인간의 품질'(Das Reinmenschliche)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웅주의와 기독교'에서는 기독교가 모든 민족의 도덕적 조화을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일 서로 다른 인종들이 혼합한다면 물리적인 통일을 이루어서 연합된 힘이 될수 있다고 내세웠다.

 

고비노는 1882년 5월에 반프리트에 다시 묵은 일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그너와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바그너는 '파르지팔'의 초연을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민족간의 혼합이라는 생각이 계속 떠올라서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걱정을 했다. 바그너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인류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On the Womanly in the Human Race: 1883)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이 글은 인류의 창조에 있어서 결혼의 역할을 고찰한 것이다. 인류 또는 인종에 대한 바그너의 글은 별로 중요한 내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사위인 휴스턴 스투워트 챔벌레인의 생각은 달랐다. 바그너처럼 대단히 영향력있는 사람의 글을 조금 손질하여 발표한다면 그에 편승하여 자기의 주장을 펼칠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99년에 바그너의 에세이를 바탕으로 하여 The Foundations of the Nineteenth Century(19세기의 기초)라는 책을 펴냈다. 인종주의적 내용이었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는 이 책에 나와 있는 아리안 이상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반유태주의 - 바그너의 견해]

바그너는 유태인들, 특히 유태인 음악가들을 자주 비난했다. 독일 문화에 유해한 이방인적인 요소라는 이유때문이었다. 바그너가 처음으로 공공연히 유태인들을 비난한 에세이는 1850년, 그가 37세 때에 K. Freigedank(K. 자유생각)이라는 필명으로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ur Musik)에 기고한 '음악에서의 유태인'(Das Judenthum in der Musik)이었다. 그의 에세이는 의도적으로 유태인 작곡가들에 대한 대중들의 증오와 혐모를 설명한 내용으로 바그너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또는 라이발) 펠릭스 멘델스존과 자코모 마이에르베르를 대상으로 삼았다. 바그너는 독일 국민들이 아무리 유태인들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말하고 쓴다고 하더라도 독일 국민들은 그들의 이방인적인 외양과 행동 때문에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유태인 음악가들은 천박하고 인위적인 작품만 생산할줄 안다고 전제하고 그것은 그들이 독일 국민들과 진정으로 정신적인 연결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바그너는 이 에세이의 결론으로 '유태인들이 저주의 멍에로부터 해방될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성경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처럼 구속을 얻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페르시아제국의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왕은 유태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하만 총리의 음모라는 것을 깨닫고는 유태인들을 안전하게 해주고 오히려 하만을 벌주었다. 에세이에서는 실제적인 폐지 또는 소멸을 의미했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유태인 분리주의자와 유태의 전통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바그너는 유태인들에게 루드비히 뵈르네(Ludwig Boerne: 1786-1837)의 경우를 따를 것을 권고하였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인 그는 유태교를 버리고 루터교로 개종하였으며 그후 원래 이름인 레오브 바루크를 루드비히 뵈르네로 개명하였다. 바그너는 유태인들은 이처럼 자기부인(또는 자발적인 포기)을 통해 새로운 생산적인 일에 참여할수 있으며 그럴 때에 모두 하나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바그너는 유태인들이 독일 문화와 사회의 주류에 동화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그렇게 된다는 것이 어렵다는 점도 수긍을 하였다. 바그너는 유태인에 대하여 처음 발표한 에세이가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자 1869년에  이번에는 자기의 본명을 사용하여 팜플렛으로 다시 만들어 출판했다. 이와 관련하여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공연할 때에 상당수 사람들이 바그너의 유태인에 대한 관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그와 비슷한 글을 몇번 더 썼다. 예를 들면 '독일인은 누구인가?'(1878)에도 그런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일부 바그너 연구가들, 예를 들면 로베르트 구트만(Robert Gutman)과 같은 사람들은 바그너의 유태인에 대한 반대견해가 비단 그의 집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오페라에도 나타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링 사이클'에서의 미메(Mime),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의 직스투스 베크메써(Sixtus Beckmesser)이다. 이들이 유태인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전체적인 윤곽을 보면 유태인을 빗대어서 표현한 것임을 알수 있다.

 

바그너가 반유태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에게는 유태인 친구 또는 동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휘자인 헤르만 레비(Hermann Levi)이다. 당시 뮌헨궁정극장의 지휘자였다. 바바리아 국왕인 루드비히의 신임을 받고 있던 지휘자였다. 헤르만 레비는 독일에서 태어나고 독일에서 활동했지만 유태교도로서 생활했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유태교 랍비였다. 하지만 바그너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헤르만 레비는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인 '파르지팔'의 역사적인 초연을 지휘했다. 처음에 '파르지팔'을 초연한다고 했을 때 루드비히 왕은 헤르만 레비가 지휘를 맡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이 기독교적 내용의 오페라이므로 유태인이 지휘하면 곤란하다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루드비히 왕이 집요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수락할수 밖에 없었다. 헤르만 레비는 '파르지팔'의 초연 지휘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훗날 베니스에서 세상을 떠난 바그너의 시신이 매장을 위해 바이로이트에 도착하여 장례식을 치룰 때에 헤르만 레비는 바그너를 추모하여서 가장 앞에서 운구하였다.

 

1882년 빌라 반프리트에 모인 사람들. 피아노 치는 사람이 프란츠 리스트. 한가운데가 지휘자 겸 작곡가인 헤르만 레비.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은 보면 알수 있듯이 바그너.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다.

                    

[바그너와 나치]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시기에는 유럽에서 국수주의 운동이 한풀 꺾여 있었다. 유명한 1848년의 평등운동도 이상적인 사항으로서만 잠들어 있게 되었다. 반면에 군국주의와 침략주의가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1871년에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을 주창하고 밀고 나간 것은 그러한 배경에 힘입은 것이었다. 1883년에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자 바이로이트는 바그너의 오페라에 특별한 신앙을 가진 이른바 뮈토스(Mythos)들의 구심장소가 되었다. 독일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기운이 높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이렇듯 바이로이트에 구심점을 둔 사람들을 '바이로이트 서클'이라고 불렀다. 바이로이트의 새로운 주인인 코지마가 이 서클을 양해하고 은근히 후원하였다. 코지마의 반유태주의는 바그너에 비하여 단순하지만 반면에 더 맹목적인 혐오가 있는 것이었다. '바이로이트 서클'에 속한 사람 중에는 바그너-코지마의 사위인 휴스턴 스튜워트 챔벌레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챔벌레인은 에바의 남편이었다. 참으로 신통하게도 챔벌레인은 영국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대단한 반유태주의자였다. 챔벌레인은 철학적인 소양도 많아서 반유태주의에 대한 여러 이론적인 글을 썼다. 나중에 나치는 챔벌레인의 글을 시간이 있으면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면하였다. 그 정도로 나치의 마음에 드는 주장들이었다.

 

바그너의 열렬 팬인 히틀러

                      

1930년에 코지마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그 해에 바그너의 유일한 아들인 지그프리트도 세상을 떠나자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은 지그프리트의 미망인인 영국 출신의 비니프레드(Winifred)가 맡게 되었다. 비니프레드는 발이 넓어서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적인 친구였다. 하기야 히틀러는 청년시절부터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숭모하는 열광적인 추종자였으니 바그너의 유일한 며느리와 잘 알고 지낸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독일 국가를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는 영웅적인 신화와 결합코자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독일은 독일국가라는 공식적인 주체성이 없었다. 기왕에 히틀러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바그너를 광적으로 존경한 히틀러는 바그너의 친필 악보 등을 가능한한 많이 수집하여서 자기만의 공간인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 간수하였다. 빌란트 바그너는 히틀러에세 그곳에 두면 전쟁 중에 파손될수도 있으니 제발 바이로이트에서 보관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히틀러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내놓지 않았다. 결국 베를린 벙커의 바그너 친필 스코어들은 전쟁의 막바지에 폭격과 함께 재로 변했다.

 

1937년 빌라 반프리트를 방문한 히틀러가 지그프리트 바그너의 미망인인 비니프레트와 담소하고 있다. 지그프리트의 두 아들인 볼프강과 빌란트의 모습도 함께 보인다.

 

학자들은 바그너의 반유태주의 견해와 의도적인 아리안-게르만 민족주의 견해가 나치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일뿐, 근거를 찾기는 힘들다. 역사학자인 리챠드 에반스는 심지어 히틀러가 바그너의 어떤 글도 읽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실제로 바그너의 글들은 영웅주의에 대한 나치의 관념을 결코 지지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내세웠다. 예를 들어, '링 사이클'의 형식적인 영웅인 지그프리트는 천박하고 어벌벌한 존재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며 오히려 여자 꽁무니나 쫓아 다니는 보탄이 영웅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아무튼 바그너의 주장들은 나치에게 어필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바그너가 유태인 동화정책을 지지한 것은 나치에게 어울리지 않는 주장이다. 나치의 선전상인 괴벨스는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9년에 '파르지팔'의 공연을 금지했다. '파르지팔'의 전편에 감돌고 있는 평화주의적 메시지 때문이었다.

 

나치가 바그너에 매혹되어 있다는 주장은 실은 히틀러 개인에 국한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괴벨스를 포함한 나치의 고급장교들은 그런 히틀러에 대하여 간혹 실망까지 했다. 히틀러는 1933년에 뉘른베르크 집회가 열릴 때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서곡을 연주토록 지시했다. 히틀러는 심지어 나치 행동대원들에게 바이로이트 극장 티켓을 1천장이나 마련해서 나누어주고 오라고 했다. 그런데 히틀러가 극장에 들어가보니까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더구나 관객으로 참석한 일부 나치 간부들은 앉아서 졸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 다음해부터 공짜 표를 발행하지 말도록 했다. 2차 대전 중에 나치의 집회가 있거나 병사들의 위한 콘서트가 있으면 바그너의 음악이 간혹 연주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일반적으로는 독일의 음악계에서 바그너에 대한 인기가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독일에서도 베르디나 푸치니가 바그너보다 더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8-39년 시즌을 보면 독일에서는 바그너의 오페라가 단 한편만 공연되었지만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는 15회나 공연되었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독립 이스라엘에서 단 한번도 공연된 일이 없다. 간혹 콘서트에서 바그너의 작품이 연주된 경우는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말들이 많았고 국민들로부터 대단한 항의를 받았다. 이스라엘의 방송국에서도 간혹 바그너의 음악을 방송한 일이 있었다. 그럴 때에도 연주회나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다. 특히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모임이 극렬한 반대를 했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2001년도 이스라엘 페스티발에서 앙코르 곡으로 바그너의 '지그프리트 이딜'을 연주하자 이스라엘 국회에서까지 바렌보임을 보이콧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바렌보임은 '발퀴레'의 공연도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사정이 사정이니만치 결국 취소하였다. 주빈 메타도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작품을 지휘했다. 대부분 청중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며 야유와 고함이 빗발치듯 했다. 그런데 현대 시온주의의 창시자로 유명한 테오도르 헨츨(Theodore Henzl)은 바그너 작품의 열렬한 찬미자였다. 독일에 있던 유태인들은 히틀리 시대 이전에 상당수가 바그너 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