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와 루드비히
천재 작곡가와 정신병자 왕
바바리아 왕국의 루드비히 2세
바그너를 얘기할 때에 루드비히를 말하지 않을수 없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도와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다만, 루드비히는 바그너보다 서를 몇 살이나 젊기 때문에 세대의 차이는 있었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지 3년 후에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였기에 바그너가 못 다 이룬 이상을 대신 실현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아무튼 루드비히는 바그너의 생애와 작품에 있어서 대단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루드비히는 공식적으로 루드비히 2세라고 부른다. 풀 네임은 루드비히 오토 프리드리히 빌헬름(Ludwig Otto Friedrich Wilhelm)이었다. 루드비히 2세는 19세기 바바리아의 왕이었다. 1845년 8월 25일에 태어나서 바그너보다 3년 후인 1886년 6월 13일에 향년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바바리아 왕으로서의 재위기간은 22년이었다. 루드비히 2세가 세상을 떠난 1886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고종시대로서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이 문을 연 해이다. 루드비히 2세는 독일의 명문 왕가인 비텔스바흐(Wittelsbach) 가문에 속한다. 비텔스바흐 왕가는 남부 독일의 바바리아 왕국을 통치했다. 바바리아의 수도는 뮌헨이었다.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의 열렬 팬이었다. 보통 열렬 팬이 아니라 아주 광적일 정도로 바그너를 숭상했고 바그너의 음악을 애호한 사람이었다. 루드비히 2세는 평소에 바그너를 많이 도와주었다. 빚도 갚아주고 오페라 공연도 후원했으며 나중에는 바이로이트 극장을 짓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개최하는데까지 많은 재정적 지원을 했다. 바그너로서 보면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빌라. 봔프리트(Wahnfried). Wahn은 망상이라는 뜻이며 Fried는 해방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봔프리트는 망상에서의 해방이란 뜻이다. 바그너 빌라는 2015년에 완전복구되었다. 집 앞의 흉상은 루드비히 2세를 표현한 것이다.
루드비히가 바그너에 대하여 처음 얘기를 들은 것은 왕세자 시절인 13세 때였다. 루드비히의 가정교사였던 사람이 루드비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보았는데 이러이러하여 참으로 감동을 받았다고 쓴 것을 읽은 것이 바그너를 알게된 시작이었다. 루드비히는 소년시절부터 예술을 애호하였다. 루드비히 가문의 전통이었다. 화가와 조각가와 건축가와 시인, 그리고 배우와 과학자들을 위하는 전통이었다. 소년 루드비히는 '로엔그린'과 관련하여 성배의 기사 이야기, 백조의 기사 이야기, 사악한 오르트루트의 이야기, 순결한 엘자의 이야기 등을 듣고 '로엔그린'에 정신을 온통 빼앗겼다. 루드비히는 바그너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로엔그린'과 같은 훌륭한 오페라를 작곡했는가라며 대단히 궁금해 했다. 루드비히는 바그너를 더 잘 알기 위해 바그너가 쓴 글을 구해서 읽었다. 그리고 감탄하였다. 루드비히가 16세가 되던 해에 뮌헨에서 '로엔그린'이 공연되었다. 루드비히는 만사를 제쳐놓고 '로엔그린'을 보러 갔다. 이때 루드비히는 처음으로 바그너를 만났다. 루드비히는 나중에 왕이 되면 바그너를 후원해야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했다. 바그너는 루드비히를 보고 앞으로 자기의 활동에 필요한 좋은 후원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 함께 바그너는 그가 생각하는 독일 예술의 순수성이 루드비히를 통해 존속되고 발전될 것으로 기대했다.
루드비히와 바그너
루드비히는 18세의 청년으로 바바리아의 왕이 되었다. 루드비히는 정치적으로 바바리아의 독립성을 보존하고 독일연방에 속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강화할 생각이었다. 루드비히의 정치적 이상은 높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정치나 통치에 대하여 지루하게 생각하고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이상과 현실이 너무나 차이가 많아서였다. 한편, 그는 이성과의 교제가 과연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루드비히는 나이가 들어서 프러시아의 조피(Sophie) 공주와 약혼하였으나 몇 달 후에 무슨 연유인지 도저히 결혼할수 없다고 하면서 파혼하였다. 혹자들은 루드비히가 동성연애자이기 때문에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수근수근 거렸지만 과연 그랬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하지만 루드비히가 그의 시종무관인 파울 공자와 로맨틱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로맨틱한 관계를 유지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른바 동성연애를 했다고 보았다. 루드비히는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에서 동성연애라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루드비히는 여자와의 섹스생활에 대하여 혼란스러워 했다. 아무튼 루드비히는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반면에 루드비히 왕이 그토록 숭모하는 바그너는 어떠한가?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라이프치히 경찰서의 직원이었다. 아버지는 바그너가 태어나고 나서 6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얼마후 연극배우 겸 극작가인 가이어라는 사람과 재혼했다. 바그너는 의붓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다. 일설에는 그 의붓아버지가 바그너의 생부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아무튼 이상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바그너는 학교체질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라이프치히의 성니콜라스학교에서는 미운 짓만 골라하는 바람에 퇴학을 당했다. 예를 들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웬 여학생에게 정신이 빠져서 밤낮으로 그 여학생만 생각했다. 그런 바그너인데 하나님께서 무슨 생각에서 그래셨느지 모르겠지만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음악적인 재능을 주시었다. 바그너는 소년시절부터 작곡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꿈도 워낙 게으르고 여자들이나 밝히고, 공연히 정치문제에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곁길로 제대로의 길을 걷지 못하였다. 그가 하는 일은 거의 모두 일반 사회적인 규범에 어긋나는 것들이었다. 바그너는 사치와 방탕의 모델이었다. 물려 받은 재산도 없고 버는 것도 신통치 않은데 사치만 일삼았으니 빚만 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러다보니 빚쟁이들을 피해서 도망 다니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프러시아의 조피 공주와의 약혼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프린스 챠밍이라고 하면서 축하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파혼하였다.
그러한 때에 루드비히가 바그너를 바바리아 왕국의 수도인 뮌헨으로 불렀다. 루드비히는 왕이 되자 평소에 숭배하는 바그너라를 곁에 두고 그의 아이디어와 사상을 자기의 정치철학에 융합하여 독일인에 의한, 독일만을 위한, 독일의 음악예술을 꽃피우고자 했다. 아무튼 바그너라는 존재는 루드비히의 생활에 깊숙히 스며들어 있었다. 오죽하면 루드비히에게 바그너가 없다는 것은 마치 지구에 태양이 없는 것과 같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과연, 루드비히와 바그너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서로 떼어질수 없는 관계였다. 돌이켜보면, 바그너의 생애에 있어서 루드비히는 가장 막강한 후원자였다. 루드비히는 바그너의 뛰어난 두뇌에서 나온 산물들을 구현할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실제로 루드비히는 바그너의 후기 작품의 완성을 위해서, 그리고 바이로이트 극장의 완성을 위해서 거의 1백만 마르크의 재정지원을 했다. 루드비히는 바그너가 빚에 쪼들려 곤경에 빠질 때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처럼 바그너를 곤경에서 구원해 주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지체 높은 왕이 한낱 건달에 불과한 이상한 음악가의 빚까지 앞장서서 갚아 줄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일은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바그너와 루드비히의 관계가 비록 비현실적이지만 어찌보면 대단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바그너도 그랬지만 바바리아의 백성들은 루드비히를 로맨틱하고 이상적인 왕의 모델로 간주하였다. 우선 겉으로 보기에도 그랬다. 루드비히는 훤칠한 키에 강한 체격이었으며 게다가 핸섬했다. 마치 신데렐라에 나오는 프린스 챠밍(Prince Charming)과 같았다.
루드비히 2세. 사진
바그너는 루드비히에 비하여 훨씬 연장자이고 인생의 경험도 풍부했지만 루드비히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예견하지 못했다. 다만, 시종들이나 군인들 또는 심지어 연극배우들과 의견이 맞이 않아서 문제가 많았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바그너는 루드비히에 대하여 남들과는 달리 대단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정적인 면이 많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래서 매우 섬세하고 주의 깊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드비히의 비극은 바그너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이상세계와 그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 사이의 이견과 충돌때문에 생겼다. 그의 고독한 생활, 비극적인 죽음은 그가 궁정 사람들, 정치가들, 저널리스트들 등등의 사람들과 전혀 생각이 맞지 않아서 항상 혼돈과 번민 속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기인한 것이다. 루드비히에게 있어서 정치라든지 전쟁이라든지 하는 것은 도무지 관심없는 일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런 복잡한 문제들이 없는 세상에서 지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간혹 저 멀리 슈타른버그 호수 인근에 있는 슐로스 버그(Schloss Berg) 또는 호엔슈반가우(Hohenschwangau)로 도피하여 혼자 지내곤 했다. 궁정사람들이 싫었고 국정을 고민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실로 혼자 있기를 좋아했으며 책을 읽고 그가 사랑하는 바바리아의 산에 혼자서 등산하기를 좋아했다.
루드비히 2세. 그림
시대가 루드비히를 구석으로 내몰기도 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그랬지만 바바리아도 정치적인 혼란 속에 계속 빠져 있었다. 정부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헌법상의 군주인 루드비히를 제치고 정부의 중요한 일들이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재가를 받지 않고 국정이 추진되는 경우가 많았다. 루드비히는 점차 권세를 잃어갔다. 낮에는 혼자 방에서 죽은 듯이 지내고 밤이 되어서야 움직이는 야행성 동물로 변해갔다. 그러한 때에 바그너는 링 사이클의 마지막 두 편의 오페라를 완성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바그너는 바바리아 북쪽 끝에 있는 바이로이트에 정착하였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를 그의 작품만을 연주하는 특별 극장의 적지라고 생각했다. 루드비히는 바이로이트 프로젝트에 상당한 재정적 기여를 했다. 그리고 1876년에 바이로이트에서 공연된 링 사이클 전편을 두번이나 감상하였다. 링 사이클을 보고 난 루드비히는 바그너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대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실패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바그너와 루드비히의 관계는 전보다 더 강해졌다. 그러다가 1880년대 후반에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 '파르지팔'의 전주곡을 연주하는 문제로 의견에 차이가 있었다. 그 이후로 바그너와 루드비히는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 1883년에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다. 루드비히는 자기의 모든 궁전에 있는 피아노에 검은 휘장을 덮도록 했다.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린더호프 궁전. 현재는 호텔-식당이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 루드비히는 그의 에너지를 건축으로 돌렸다. 루드비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바그너의 신화적인 오페라가 살아 숨쉬는 곳으로 생각하며 짓도록 했다. 노이슈봔슈타인 성은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가져올 마법의 낙원을 의미했다. 루드비히가 1886년에 세상을 떠날 때 노이슈봔슈타인은 절반 밖에 완성되지 않았다. 루드비히의 두번째 프로젝트인 슐로쓰 린더호프(Schloss Linderhof)는 특이하고 훌륭한 정자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장식적인 구조였다. 루드비히의 마지막 프로젝트로서 뮌헨 동남방 50 km 에 있는 헤렌히엠제 궁전(Palace of Herrenchiemsee)은 베르사이유를 본따서 짓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루드비히는 이런 성들을 건축하느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빚을 지게 되었다. 루드비히는 대신들을 여러 다른 나라에 보내어 돈을 빌려오도록 했으나 생각만큼 성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루드비히의 신하들은 루드비히가 미쳤다고 하면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바리아 정부는 루드비히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전제하고 그 문제를 다룰 특별위원회까지 구성하였다. 위원회는 왕의 정신착란적 행동들에 대한 자료들을 할수 있는대로 수집하였다. 위원회는 내각에 루드비히가 정신병에 걸렸으며 치료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과연 정신병자인지를 검사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각은 위원회의 결정사항을 받아 들여 루드비히가 더 이상 국정을 맡을 능력이 없다고 발표했다.
노이슈봔슈타인 성의 겨울. 노이슈봔슈타인은 바바리아의 휘센(Fussen) 부근, 호엔슈봔가우(Hohenschwangau) 마을에 있다. 디즈니랜드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성은 노이슈봔슈타인을 본따서 구상한 것이다. 노이슈봔슈타인은 1809년에 착공하여 루드비히 2세가 세상을 떠난지 6년 후인 1892년에 완성되었다. 이 성을 지을 때에는 막대한 국고를 낭비한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지금은 바바리아 관광수입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매년 6천명 이상씩 이곳을 찾아온다.
마침내 루드비히는 슐로스 버그(Schloss Berg)에 연금되었다. 1886년 6월 12일이었다. 슐로스 버그는 북부 바바리아의 슈타른버그 호수 근처에 있는 고성으로 루드비히는 간혹 여름이면 이곳에서 지냈다. 관계 당국은 슐로스 버그에 있는 루드비히의 거실과 침실에 미리 특별시설을 만들어서 루드비히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정신병위원회의 위원장인 구덴 박사가 슐로스 버그에서 당분간 루드비히를 보살피도록 했다. 슐로스 버그에 도착한 구덴 박사는 그 날 저녁에 루드비히와 함께 인근의 슈타른버그 호수로 산책을 나갔다. 밤 9시가 지나도록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자 수색대가 호수가를 샅샅이 살폈다. 호수에서 루드비히와 구덴 박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살인지, 암살인지, 또는 동반자살인지는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다. 루드비히의 이해할수 없는 죽음은 바바리아 사람들의 '전설따라 삼천리'가 되었다.
슈타른버그 호수 인근에 있는 슐로스 버그. 루드비히가 마지막 날을 보낸 곳이다.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 풍운아 바그너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그프리트 바그너(Siegfried Wagenr) (0) | 2013.03.07 |
---|---|
바그너의 후손들 (0) | 2013.03.06 |
국제 리하르트 바그너 협회(Der RWVI) (0) | 2013.02.19 |
바그너의 종교철학, 그리고 반유태주의 (0) | 2013.02.18 |
바그너의 영향과 유산 (0) | 2013.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