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세미라미스는 누구?
Semiramis - Semiramide - Shamiram
세미라미스가 바빌론의 봉기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 장면
세미라미스는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파사)의 전설에 나오는 여인이다. 세미라미스는 아시리아의 니누스(Ninus)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아시리아의 여왕이 된 인물이다. 그리스어로는 세미라미스라고 하지만 페르시아에서는 샤미람(Shamiram)이라고 한다. 로시니의 오페라인 '세미라미데'는 세미라미스의 이탈리아식 표현이다. 마이에르베르도 '세마리드'(Semaride)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두 작품 모두 볼테르의 '세미라미스'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니누스 왕은 고대 아시리아(아수르)제국의 수도인 니느베(Nineveh: 니느웨)를 창설한 걸출한 왕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기원전 약 2천년에 융성했던 아시리아제국, 또는 바빌론제국은 오늘날 터키로부터 요르단, 시리아, 이스라엘, 시나이 반도, 이란, 이락,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포함하는 대제국이었다. 니누스 왕이 실존인물인지 또는 단순히 전설적인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아시리아제국의 열왕기에는 니누스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세미라미스는 니누스 왕의 왕비였다. 그러나 니누스 왕과 마찬가지로 세미라미스도 실존인물인지 또는 신화적인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세미라미스라는 명칭은 고대로부터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당시에는 서아시아와 소아시아의 광활한 지역의 기념비적인 지역이나 구조물에 세미라미스라는 표현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증거이다. 특히 유프라데스 주변의 고대도시 또는 페르시아제국(이란)에는 세미라미스와 관련된 명칭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심지어는 기원전 5세기경 다리우스 1세가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는 내용을 기록한 베히스툰 절벽의 기록(Behistun Inscription)에도 세미라미스의 이름이 나온다.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유프라데스 강의 흐름을 막는 인공제방도 세미라미스의 시절에 건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하는 바벨론의 공중정원도 세미라미스 시대에 만든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디오도루스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세미라미스보다 훨씬 나중에 건조된 것이므로 세미라미스의 전설에 공중정원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무튼 아시리아의 여러 지역과 메소포타미아의 전역, 즉 메데아, 페르시아, 레반트(시리아와 이스라엘 등), 소아시아, 아라비아, 코카서스 등지에 세미라미스의 이름을 담은 명칭들이 상당수 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름들이 변경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중세에 변경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터키 동부에 있는 반(Van)이라는 도시의 옛 명칭은 샤미라마게르드(Shamiramagerd)였다.
세미라미스의 서약.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작품(1569-1669)
세미라미스가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아시리아의 왕 샴시 아다드 5세(Shamshi-Adad V: 기원전 824-811년 재위)의 왕비인 샤무라마트(Shammuramat)가 세미라미스라고 내세웠다. 샤무라마트는 세미라미스를 아카디아어 및 아람어로 표현한 것이다. 샤무라마트는 아들 아다드 니라리 3세(Adad-nirari III)가 성년이 될 때까지 4년간 섭정으로 아시리아 제국을 통치했다. 샤무라마트 당시에는 아시리아가 인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이사, 이란 지역을 다스렸다. 그후 샤무라마트는 방대한 신아시리아제국을 잠시 다스리기도 했다. 신아시리아제국은 나중에 북쪽으로는 코카서스 산맥에 이르기까지, 남쪽으로는 아라바이 반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이란, 서쪽으로는 키프러스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었던 대제국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세미라미스라는 이름은 이라크, 시리아 동북부, 터키 동부, 이란 서북부 등지에 살고 있는 오리지널 아시리아인들의 여자아이들 이름에서 찾아 볼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세미라미스는 시리아에서 물고기의 여신으로 알려진 데르케토(Derketo)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데르케토는 세미라미스가 태어나자 부끄러워서 아기를 버렸고 자신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세미라미스는 비둘기들이 기르다가 왕궁의 양치기인 심마스라는 사람이 발견하여 데려다가 길렀다고 한다. 성장한 세미라미스는 니누스 왕의 장군인 온네스(Onnes 또는 Menones)와 결혼하였다. 니누스 왕은 세미라미스를 보고 그 미모에 반해서 온네스가 자살하도록 강요하고 세미라미스와 결혼하였다. 세미라미스와 니누스 왕은 아들 하나를 두었다. 니니아스(Ninyas)였다. 니누스 왕은 아시아를 정복하기 위한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니누스가 중태에 빠지자 병사들은 니니아스 왕자가 임시 통치차가 되는 것으로 믿어서 명령에 복종키로 했다. 세미라미스가 니니아스로 변장하여 군대를 통솔했다. 니누스 왕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세미라미스가 집권을 하여 42년 동안 아시리아 제국을 다스렸다. 세미라미스는 용맹하여서 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세미라미스 조각
세미라미스는 고대 바빌론 성읍을 재건하고 높은 벽돌 담을 쌓아 외적으로부터의 침공을 방비했다. 이어 그는 페르시아에 에크바타나(Ecbatana)를 포함한 여러 궁전을 지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베히스툰 기록은 다리우스 1세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실은 세미라미스 여왕에 대한 기록이라는 주장도 있다. 세미라미스는 아시아 여러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북 아프리카의 리비아와 에티오피아도 정복하여 제국의 우산아래에 두었다. 세미라미스는 인도의 스타브로바테스(Stabrobates)왕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난 장인들에게 나무 코끼리를 만들도록 하여 인조 코끼리들을 앞장 세워서 인도군 진지로 돌진했다. 인도군은 아시리아군이 코끼리까지 동원한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도주하였다. 그러다가 그것들이 가짜 코끼리인 것을 알고는 반격을 가하였고 그 틈에 세미라미스는 부상을 당하여 인도 서쪽으로 퇴각하였다.
세미라미스는 정조대(chastity belt)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전쟁에 나간 병사들이 안심하고 전투에 임할수 있도록 배려했다. 로마의 역사학자인 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세미라미스가 처음으로 젊은 남자들을 거세하여 환관으로 삼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성공회 성직자인 알렉산더 힐스롭이 쓴 '두 바벨론'(The Two Babylons: 1853)에 의하면 세미라미스의 아들인 조로아스터가 어머니인 세미라미스를 죽인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 이쉬타르와 길가메쉬(Ishtar and Gilgamesh)의 전설에서 가져온 얘기인듯 싶다. 세미라미스가 물고기 및 비둘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날 시리아에 있는 히에라폴리스 밤비체(Hierapolis Bambyce)에 있는 대사원에서 찾아볼수 있다. 세미라미스가 건설했다고 하는 이 대사원에는 세미라미스의 머리에 황금 비둘기가 앉아 있는 모습의 기념상이 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세미라미스를 전통적으로 가정파괴자 또는 창녀로 그리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전설에 의하면 세미라미스는 물고기의 여신인 아타르가티스(Atargatis)의 딸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다산과 사랑과 섹스의 여신인 이쉬타르의 비둘기들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세미라미스와 관련하여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전설은 아르메니아의 왕 아라(Ara)에 대한 것이다. 아라는 '아름다운 왕'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수려한 미모의 왕이었다. 세미라미스는 아르메니아의 핸섬왕 아라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사모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세미라미스가 사절단을 보내 아라 왕에게 청혼하지만 아라 왕은 세미라미스의 청혼을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세미라미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아르메니아를 침공한다. 아라 왕은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세미라미스는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계속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한 세미라미스는 아라의 시신을 앞에 놓고 신들에게 아라를 살려 달라고 간구한다. 아르메니나 군대가 아라 왕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진군해 오자 세미라미스는 신들이 아라 왕의 생명을 되돌려 주어 살아났다는 소문을 퍼트려서 전쟁을 끝냈다고 한다. 이같은 전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위대한 시인인 나이리 차리안(Nairi Zarian)이 Ara the Beautiful and Shamiram(아름다운 왕 아라와 샤미람)이라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아르메니아 문학작품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라 왕과 세미라미스에 대한 여러 종류의 전설들이 있지만 아라 왕이 결국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아르메니아의 아라 왕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미라미스
세미라미스에 대한 전설은 중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단테의 '신곡'에 세미라미스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지옥의 두번째 서클에서 욕망많은 영혼들의 하나로서 나온다. '신곡'에서는 세미라미스가 남편 니우스가 죽은 후에 자기 자신의 아들과 결혼하여 살았다고 되어 있다. 볼테르가 세미라미스 이야기를 희곡으로 만든 것은 다 아는 사실이며 이를 바탕으로 여러 명의 작곡가들이 세미라미스의 비극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도메니코 치마로사(Domenico Cimarosa), 마르코스 포르투갈(Marcos Portugal), 요세프 미슬리베체크(Josef Myslivecek), 자코모 마이에르베르(Giacomo Meyerbeer),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Pedro Calderon de la Barca), 그리고 조아키노 로시니가 '세미라미데'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들을 작곡했다. 아서 오네거(Arthur Honegger)는 1934년에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의 시를 바탕으로 하여 발레 판토마임을 작곡했다. 이밖에도 세미라미스에 대한 전설은 연극, 영화, 소설, 시 등의 소재로서 많이 인용되었다.
영국 성공회 성직자인 알렉산더 히슬롭(Alexander Hislop)은 1853년에 발표한 The Two Babylons(두 바벨론)에서 세미라미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실존인물이며 다신숭배(polytheism)를 창안했으며 특히 여신숭배를 강조했다고 주장했다. 히슬롭은 세미라미스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을 세운 님로드(Nimrod) 왕과 결혼한 사이였다고 주장했다. 물론 성경에는 님로드의 처첩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히슬롭에 의하면 세미라미스는 다신숭배사상을 창안했는데 이는 창세기의 신에 대한 오리지날 신앙을 훼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세미라미스는 자기 자신을 이쉬타르 여신이라고 신격화 했으며 자기 아들은 길가메쉬 신이라고 했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궁정에 있는 여러 사람들과 심지어 세상을 떠난 남편까지도 신으로 숭배토록 했다고 한다. 히슬롭의 이같은 주장에 대하여 반론을 내세우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히슬롭이 여러 나라의 여러 신화나 전설에서 이것저것을 가져다가 짜집기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피터 브뤼겔의 '바벨탑'. 바벨탑을 세운 사람은 쉬나르의 님로드왕이라고 하며 세미라미스는 그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님로드는 노아의 증손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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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알렉산더 히슬롭(Alexander Hislop)의
'두 바빌론'(The Two Babylons)
알렉산더 히슬롭
알렉산더 히슬롭은 로마 가톨릭이 바빌론의 신비주의적 제사의식과 우상숭배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개신교만이 참 예수와 참 하나님을 믿는 종교라고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의 제례가 실은 이교도의 의식을 인용한 것이라는 주장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간혹 있었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은 히슬롭이 단연 제일일 것이다. 히슬롭은 그러한 이교도의 의식이 기독교에 접목된 것은 콘스탄틴 대제 때라고 주장했다. 특히 로마 가톨릭에서 성모와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것은 분명히 이교도의 신화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히슬롭은 로마시대의 기독교가 이교도 여신의 이름을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바꾸었고 예수는 주피터 푸에르(Jupiter-Puer), 즉 '소년 주피터'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했다. 히슬롭은 로마의 비너스 또는 포르투나(Fortuna)가 실은 고대 바빌론의 비교(秘敎)에 등장하는 이쉬타르(Ishtar)의 로마식 이름이라는 것이며 이쉬타르의 오리진은 다름 아닌 금발에 푸른 눈의 세미라미스라고 주장했다.
'두 바빌론' 책자 표지. 성모와 아기예수를 표현한 이 그림은 실은 바빌론의 세미라미스와 그가 낳은 아들을 표현한 것이라는 한다.
히슬롭에 따르면 세미라미스는 미모가 뛰어난 여인으로 남편 님로드 왕이 죽고 나서 탐무츠(Tammuz)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세미라미스가 아들을 낳은 것은 바빌론의 창시자인 님로드(Nimrod)의 부인으로서 또한 나중에는 바빌론의 여왕으로서 당연히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처녀잉태의 형식을 취한 것이어서 자기의 위상을 한결 높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같은 처녀출산은 훗날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견하는 것이라고 해석할수 있다. 다만, 그것이 사탄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님로드 왕은 나중에 죽임을 당하였으며 임신한 세미라미스는 태중의 아이가 님로드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히슬롭은 세미라미스에 대한 비교와 숭배는 세계적인 것이어서 각 지역의 문화에 따라 세미라미스의 이름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즉, 이집트에서는 이시스이며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비너스, 다이아나, 아테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름이야 어쨋든 언제나 경배의 대상이었으며 신비한 바빌론의 종교에 기본을 둔 신앙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인정한 콘스탄틴 대제는 비록 자신도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우상숭배자로서 남아 있었으며 이교도 신들의 이름을 기독교식으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 이유는 두 종교를 통합하므로서 정치적인 이익을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다만, 콘스탄틴 대제의 모든 행동은 사탄의 지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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