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21.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정준극 2013. 3. 28. 16:21

최초의 개혁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의 3막 오페라

 

스틱스를 건너기 전에 이 강을 건너면 다시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번민하는 에우리디체

 

초기의 오페라는 음성도 훌륭하고 테크닉도 뛰어난 성악가의 역할에 크게 의존하였다. 글룩은 그러한 형식에서 벗어나서 노래도 노래지만 드라마 자체를 강조하는 오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페라에 극적인 요소가 부족하면 무슨 흥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글룩의 그같은 생각을 반영한 오페라가 이른바 개혁오페라이다. 과거의 전통적이고 통상적인 스타일을 개혁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는 오페라 세리아에서 볼수 있는 이해하기 힘든 줄거리와 지나치게 복잡한 음악을 지양하고 음악과 드라마 양면에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간단하고 솔직한 오페라를 추구코자 했다. 글룩의 생각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서 상당한 반응을 일으켰다. 그 개혁오페라의 첫 작품이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오 이야기는 몬테베르디를 비롯해서 수많은 작곡가들이 무대작품으로 만들어서 너무 잘 알려져 있는 것인데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도 당시의 추세에 부응하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만들었다. 대본은 이탈리아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라니에리 데 칼자비지(Raniero de' Calzabigi: 1714-1795)가 썼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오페라의 장르로 보면 Azione teatrale(아치오네 테아트랄레)에 속한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주제는 신화적인 것으로 주인공들의 노래에 추가하여 합창과 무용도 나오는 오페라라는 뜻이다. 개혁오페라에 대하여는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설명코자 한다.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독일 바바리아 지방에서 태어나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인 1762년 10월 5일에 비엔나의 궁정극장에서 초연되었다. 1762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영조시대이다. 비엔나의 궁정극장(Burgtheater)은 당시에 호프부르크 궁전의 정문 앞의 미하엘광장에 있었다. 그러다가 도시계획으로 철거되었고 1888년에 링슈트라쎄에 새로 화려한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궁정극장에서는 이전하기 전에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1782), '피가로의 결혼'(1786), '여자는 다 그래'(1790)가 역사적인 초연을 가진바 있다. 궁정극장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1741년에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가까운 곳에 오페라극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건설되었다.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남편인 프란시스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명명일(네임 데이)을 기념하여서 공연되었다. 

 

등장인물은 오히려 간단하다. 과거의 신화적인 오페라들은 수많은 출연진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이지만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는 주연급 3명만 출연한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와 아모레이다. 오르페오는 알토 카스트라토가 맡거나 오트 콩트르(haute-contre) 맡았으나 근자에는 메조소프라노가 맡는다. 실제로 이탈리아 초연에서는 카스트라토가 맡았었고 프랑스 초연에서는 오트 콩트르가 맡았었다. 에유리디체는 소프라노가 맡으며 아모레도 소프라노가 맡는다. 이밖에 합창을 맡는 코러스와 춤을 추는 댄서들이 나오며 남녀목동들, 님프들, 악마들, 행복한 정령들, 남녀 영웅들, 그리고 복수의 여신들(Furies)인 알렉토(Alecto), 메지라(Megaera), 티시폰(Tisiphone)의 세 자매가 나온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에서는 오르페오가 지하세계에서 에우리디체를 데려나오다가 약속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에우리디체를 잃게 되어 절망 중에 있을 때 하늘에서 아폴로가 내려와서 너무 절망만 하지 말고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함께 지내자고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서는 아모레가 오르페오의 절망을 불쌍하게 여겨서 에우리디체를 다시 살려주어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장소도 몬테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트라키아라고 되어 있는데 글룩에서는 명시가 되어 있지 않다.

  

에우리디체를 찾으러 지하세계에 도착한 오르페오와 지하세계의 정령들. 라 스칼라

                             

1막. 오르페오가 그의 아내 에우리디체의 무덤에서 슬퍼하고 있다. 님프들과 목동들이 함께 슬퍼하고 있다. 오르페오는 그저 에우리디체의 이름만을 중얼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코러스와 오르페오의 노래가 Ah, se intorno/Ah! Dans ce bois 이다. 오르페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내고 혼자서 슬픔의 아리아를 부른다.. Chiamo il mio ben/Objet de mon amour 이다. 아모레가 오르페오에게 지하세계에 가서 에우리디체를 데려올수 있다고 하면서 다만 둘이서 세상에 도착하기 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한다. 아모르의 아리아인 Si les doux accords 는 1774년도 프랑스어 버전에만 있는 것이다. 아모레는 오르페오에게 힘을 내라는 의미에서 Glo sguardi trattieni/Soumis au silence 라는 아리아로서 지금의 고통은 다만 짧은 것일뿐이라고 말한다. 오르페오는 지하세계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1774년도 버전에는 오르페오가 아리에트를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L'espoir renait dans mon ame 라는 곡이다. 옛날 스타일의 과장된 이탈리아 노래이다. 이 곡은 원래 Il Parnaso confuso(1765)라는 오페라를 위해 작곡한 것이다. 글룩은 이 곡을 1769년도 오페라인 Le feste d'Apollo(아폴로의 축제)에서 다시 사용하였다.

 

미네소타 오페라

 

2막. 바위산이다. 복수의 여신들이 오르페오가 지하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옥문을 지키고 있는 여러 머리의 개인 체르베루스(Cerberus)의 노래를 부른다. Chi mail del'Erebo/Quel est l'audacieux 이다. 오르페오는 리라를 꺼내 들고 (오페라에서는 하프가 대신한다) Deh placatevi con me/Laissez-vous toucher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오르페오가 간절하게 노래를 부르지만 복수의 여신들의 첫 응답은 No/Non 이었다. 그러다가 오르페오가 Mille pene/Ah! La flamme 와 Men tiranne/La tendresse 라는 노래를 계속부르자 그 노래에 취하여 마음들이 풀어진다. 복수의 여신들은 Ah, quale incognito affetto/Quels chans dous 라는 노래로서 감탄과 함께 오르페오를 지하세계로 들어가도록 허락한다. 1774년도 버전에는 이 장면이 복수의 여신들의 춤으로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죽어서 지하세계로 끌려가는 에우리디체

                     

2막의 두번째 장면은 엘리지움(Elysium)이다. 1762년도 버전에는 짧은 발레가 등장했었으나 1774년 버전에는 4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축복박은 정령들의 춤'(Dance of the Blessed Spirits)로 확대되었다. 솔로 플륫의 연주가 뛰어난 파트이다. 이어 정령 중의 하나거나 또는 에우리디체가 영원한 축복으로 행복함을 얻는다는 노래와 함께 춤을 춘다. Cet asile 이다. 이 노래를 코러스가 이어 받는다. 잠시후 오르페오가 도착하여 공기의 청명하고 순수함에 놀라면서 Ceh puro ciel/Quel nouveau ciel 이라는 아리오소를 부른다. 그러나 오르페오는 에우리디체가 아직 자기와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도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오르페오는 정령들에게 에우리디체를 데려와 달라고 간청한다. 정령들이 에우리디체를 데려온다. 정령들의 합창이 Torna, o bella/Pres du tendre objet 이다.

 

지하세계에 간 오르페오. 현대적 연출

                              

3막. 지하세계에서 빠져 나와 세상으로 가게 된 에우리디체는 기쁘기만하다. 그러나 오르페오는 1막에서 아모레가 한 말을 생각하며 은근히 걱정에 싸인다. 오르페오는 뒤따라오는 에우리디체를 한번도 쳐다 보지 않는다. 에우리디체는 오르페오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여 비난한다. 오르페오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말 할수 없는 고통이지만 참고서 앞으로 가기만 한다. 두 사람의 듀엣이 Vieni, appaga il tuo consorte/Viens, suis un epoux 이다. 에우리디체는 오르페오가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에우리디체는 죽음이 더 좋다고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한다. 오르페오의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해서 부르는 에우리디체의 아리아가 Che fiero moment/Fortune ennemie이다. 오르페오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뒤에 있는 에우리디체를 바라본다. 에우리디체가 다시 죽는다. 오르페오는 유명한 아리아인 Che faro senza Euridice?/J'ai perdu mon Eurydice?(에우리디체가 없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를 부른다. 오르페노는 지하세계의 에우리디체와 함께 있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한다. 그런데 아모레가 돌아와서 그런 오르페오를 저지한다. 아모레는 오르페오의 한결 같은 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에우리디체를 살려서 세상으로 나오게 한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다시 결합한다. 4장으로 된 발레가 끝난 후에 모두들 아모레를 찬양하는 Trionfi Amore를 노래한다. 1774년도 버전에는 합창 L'amour triomphe를 발레에 앞서서 부르도록 되어 있었다.

 

지하세계를 떠나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작별하는 정령들

 

1762년 10월에 이 오페라가 비엔나의 궁정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오르페오는 유명한 카스트라토인 게타노 과다니(Gaetano Guadagni)가 맡았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이듬해인 1763년에도 비엔나에서 다시 공연되었다. 그러나 1769년에 비엔나에서 다시 공연되기 까지는 어디에서도 공연되지 않았다. 런던 공연은 1770년이었다. 과다니가 오르페오를 다시 불렀다. 그러나 글룩의 오리지널과는 상당히 다른 노래들을 불렀다. 잉글리쉬 바흐라고 불리는 요한 크리스찬 바흐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넣었던 것이다. 하이든은 1776년에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이탈리아 버전을 지휘했다. 19세기에는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프랑스의 테너 아돌프 누리(Adolphe Nurrit: 1802-1839)가 오르페오를 공연하여서 대단한 인기를 차지했다. 1854년에는 프란츠 리스트가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봐이마르에서 지휘했다. 그런데 글룩의 오리지널 서곡 대신에 그가 작곡한 교향시를 넣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오르페오의 역할을 대개의 경우에 여성 콘트랄토가 맡았다. 가장 유명한 오르페오 콘트랄토는 영국의 클라라 버트(Clara Butt: 1872-1936)와 역시 영국의 콘트랄토인 캐슬린 페리어(Kathleen Ferrier: 1912-1953)이었다. 그 후에 메조소프라노 리타 고르(Rita Gorr), 마릴린 혼(Marilyn Horne), 자넷 베이커(Janet Baker) 수산느 마시(Susanne Marsee), 리제 스티븐스(Rise Stevens) 등이 메트로폴리탄을 중심으로 크게 활약했다. 지휘자로서는 토스카니니가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크게 후원하였다.

 

스틱스 강을 건너는 오르페오

                    

[수정본들]

비엔나에서 초연이 있은지 7년 후인 1769년, 이탈리아의 파르마에서 글룩 자신의 지휘로 공연된 일이 있었다. 글룩은 파르마 공연을 위해 몇군데 수정을 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르페오의 역할을 소프라노 카스트라토가 맡도록 격상한 것이다. 원래는 알토 카스트라토가 맡도록 했었다. 파르마 버전은 그 때 이후로 최근까지 공연되지 않고 있었다. 글룩은 1774년 파리 공연을 위해 스코어를 다시 수정하였다. 제목도 프랑스어로 Orphée et Eurydice라고 고쳤다. 이탈리아어로 된 대본을 피에르 루이 몰랭(Pierre-Louis Moline)이란 사람이 프랑스어 대본으로 만들었다. 글룩은 어떤 부분에서는 음악을 늘리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다시 쓰기도 했다. 그리고 오르페오의 역할을 카스트라토에서 하이 테너로 변경했다. 하이 테너는 프랑스에서 오트 콩트르라고 했다. 당시 오트 콩트르는 일반적인 프랑스 오페라에서 영웅적인 주인공을 맡았다. 프랑스에서는 카스트라티를 거의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프랑스 버전은 프랑스 사람들의 기호에 맞게 발레 부분을 확장하였다. 이때 추가된 발레는 '복수의 여신들의 춤'과 '축복 받은 정령들의 춤'이었다. '복수의 여신들의 춤'은 글룩의 발레인 Don Juan(돈 후안)에서 가져와서 사용한 것이다. '축복 받은 정령들의 춤'은 플륫과 현악기의 연주로 유명한 것이다.

 

1825년 경에는 오페라에서 카스트라티가 사실상 사라졌다. 그래서 오리지널 스코어를 카스트라티를 위해 작곡한 오페라의 공연은 거의 볼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카스트라티 대신에 카운터테너를 사용하는 관례는 비교적 최근인 1950년대부터 비롯한 것이다. 한편, 1784년부터 1859년에 파리의 디아파송(diapason: 콘서트 피치)는 초당 820 사이클에서 869 사이클로 점차 높아졌다. 그래서 글룩의 프랑스 버전인 오트 콩트르 버전은 사실상 실용적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테너 아돌프 누리가 1824년에 파리 오페라극장(Opéra)에서 노래를 부를 때에는 음악을 고쳐야 했다. 그러다가 오트르 콩트르보다는 오히려 콘트랄토가 더 적격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예를 들어서 자코모 마이에르베르는 프랑스의 콘트랄토인 폴랭 비아도르(Pauline Viadort)에게 오르페오를 맡아보라고 적극 권고하기까지 했다. 엑토를 베를리오즈는 폴랭 비아도르와 가까운 친구사이였고 또한 프랑스에서 글룩 음악의 전문가였다. 베를리오즈는 글룩의 파르마 버전에 대하여도 잘 알고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전 5막의 이탈리아 버전을 4막으로 고치기로 했다. 그리고 오르페오의 음악은 콘트랄토인 폴랭 비아도르를 염두에 두고 수정하였다.

 

지하세계의 문에 도착한 오르페오가 노래를 불러 복수의 여신들을 감동시키는 장면

 

베를리오즈 버전은 1859년 11월 18일에 파리의 테아트르 리리크(Théatre Lyrique)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물론 오르페오는 폴랭 비아도르가 맡았다. 당시 17세였던 쥘르 마스네는 오케스트라의 팀파니 주자로서 베를리오즈 버전의 초연에 동참하였다. 베를리오즈는 리허설 중에 마스네에게 튜닝을 정확하게 했다고 하면서 칭찬을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베를리오즈 버전은 인기를 끌었다. 매일 밤 테아트르 리릭크는 초만원이었다. 베를리오즈 버전은 같은 오페라단이 도합 138회의 공연을 가질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그 다음 해에 파리의 대부분 극장들은 콘서트 피치를 디아파송 노르말(diapason normal)로 낮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글룩 시대처럼 낮은 것은 아니었다. 그후 음악위원회가 구성되어 프랑스의 피치를 A 음에서 진동을 896에서 870으로 낮추도록 권고하였다. 그렇게 콘서트 피치를 낮추었기 때문에 19세기 말에 오르페오의 역할은 콘트랄토 보다는 테너가 더 자주 맡았다.

 

베를리오즈 버전은 글룩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코어를 복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있고 가장 인정을 받고 있는 스코어이다. 1870년경에는 3막으로 재구성한 베를리오즈의 스코어가 가장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만들어진 대본을 다시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여 이탈리아에서 공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베를리오즈는 글룩의 1774년도 프랑스 버전 중에서 상당부분의 음악을 삭제하였다. 한편, 콘트랄토를 위한 스코어는 1889년에 리코르디가 발간한 것이 가장 대중적이다. 어떤 경우에는 오르페오의 역할을 바리톤이 맡도록 했다. 그럴 경우에는 오리지널 오르페오의 스코어를 한 옥타브나 아래로 조옮김을 하였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와 허만 프라이는 바리톤으로서 독일에서 오르페오를 맡았던 사람들이다. 오르페오를 맡았던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음반은 아직도 사랑받고 있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오페라 세리아를 개혁코자 하는 글룩의 의도가 처음으로 표현된 작품이었다. 아리아와 합창은 보다 짧게 만들어져서 그것들이 서로 엮어져서 더 커다란 구조가 되도록 했다. 다 카포 아리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글룩은 민요풍의 노래들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1막에서 Chiamo il mio ben cosi이다. 각 소절은 드라마틱한 레시타티브를 사이에 넣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스트로멘타토(stromentato)라고 불렀다. 스트로멘타토에서는 음성파트가 오케스트라의 일부 또는 전체가 반주를 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론도 형식도 도입하였다. 예를 들면 유명한 3막의 Che faro senza Euridice? 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예전의 이탈리아 오페라 규범은 드라마틱한 힘을 주기 위해 무시되었다. 이와 함께 스토리라인도 대폭 단축되었다. 종전의 하부 스토리들은 고려되지 않았다. 글룩은 프랑스의 트라제디 앙 무지크(tragédies en musique)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라모의 영향을 받았다. 글룩의 오페라에는 라모의 오페라에서 처럼 상당히 표현력이 풍부한 발레가 여러 번 등장한다. 그리고 합창을 많이 동원하였으며 반주가 있는 레시타티브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오프닝에서 합창으로 슬픔을 노래하는 것은 마치 라모의 Castor et Pollux(캬스토와 폴룩스: 1737)의 오프닝과 흡사하다. 이 합창은 극의 전환을 극적으로 이끌어가는 이른바 쿠 드 테아트르(coup de théâtr)이다. 그러나 다른 요소들은 글룩의 개혁 아이디어를 충실하게 반영한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활발하고 명랑한 서곡은 그 다음에 전개되는 드라마의 내용과는 관계가 없다. 오르페오가 에우리디체에 대하여 슬퍼하면서 부르는 아리아들인 Chiamo il mio ben cosi와 Che faro senza Euridice?는 아름다운 하모니로 되어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민요적인 스타일을 느낄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슬프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지하세계에서 에우리디체를 데리고 나오는 오르페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로 시작된 글룩의 오페라 개혁은 과연 오페라의 역사에 두드러진 영향을 준 것이었다. 글룩의 이상은 모차르트, 바그너, 베버 등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바그너의 총체적예술작품(Gesamtkunstwerk)는 글룩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글룩의 오페라가 성공을 거두자 종전 스타일인 오페라 세리아, 그리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성악가 위주의 공연은 점차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서 오케스트라는 종전에 비하여 더욱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하는 것이었다. 그런 예는 오르페오의 아리오소인 Che puro ciel에서 눈에 띠게 알아 볼수 있다. 이 아리아에서 음성의 역할은 위축되었으며 대신 오보에가 메인 멜로디를 이끌어나가도록 되어 있다. 오보에의 멜로디는 플륫, 첼로, 바순, 그리고 혼의 지원을 받도록 되어 있다. 또한 현악기만으로 반주를 하도록 한 부분이 있으며 콘티누오(continuo)는 글룩으로서 가장 복잡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작곡한 것이다. Chiamo il mio ben cosi 에서는 오프 스테이지 오케스트라를 사용하여 에코 효과가 나도록 했다.

 

[레코딩]

여성이 오르페오의 역할을 맡도록 한 베를리오즈 버전을 취입한 음반들이 여럿이나 있다. 영국의 알토인 캐슬린 페리어(Kathleen Ferrier)와 미국의 메조소프라노인 매릴린 혼(Marilyn Horne)의 오르페오는 특별히 뛰어나다. 근년에는 비엔나 버전에서 카운터테너가 오르페오를 맡도록 한 음반도 나와 있다. 카운터테너인 데렉 리 레이진(Derek Lee Ragin), 요헨 코발스키(Jochen Kowalski), 제임스 보우맨(James Bowman), 마이클 챈스(Michael Chance)가 취입한 것이 있다. 최근의 레코딩 들은 모든 버전에 있어서 삭제하거나 수정한 것이 대부분이다. 프랑스 버전의 레코딩은 오트 콩트르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별로 없다. 1950년대 중반에 레오폴드 시모노(Léopold Simoneau)가 그의 부인인 피에레트 알레리(Pierrette Alarie)의 상대역으로 취입한 것이 있다. 1955년에는 니콜라이 겟다(Nicolai Gedda)가 오르페오를 맡아 취입한 것이 있다. 겟다의 CD는 2009년에 새롭게 발매되었다.

 

**************

 

체코 오리진의 오스트리아 작곡가로서 나중에 미국 시민이 된 에른스트 크레네크(Ernst Krenek: 1900-1991)가 오스트리아의 화가이며 시인이고 극작가인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의 독일어 대본을 바탕으로 작곡한 오페라 Orpheus und Eurydike(오르페우스와 오이리디케)가 있다. 코코슈카는 이 대본을 1차 대전 중인 1915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부상을 당해 요양을 하고 있는 중에 완성했다. 코코슈카의 '오르페우스와 오이리디케'는 1921년에 처음으로 연극무대에 올려졌다. 릴케가 '오르페우스 소네트'를 발표하기 1년 전이었다. 릴케는 1923년에 그의 소네트에 대한 부수음악(incidental music)을 작곡할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한 처지에 크레네크가 코코슈카의 대본으로 현대 오페라를 만든 것이다. 코코슈카는 구스타브 말러의 부인인 알마 말러와 열정적인 관계에 있었다. 코코슈카의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표현주의적이며 심리학적인 처리는 알마 말러(Alma Mahler)에 대한 열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크레네크가 읽고서 관심을 가져 코코슈카에게 연락하여 마침내 오페라로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크레네크는 무조(atonal) 스코어로서 작곡을 했다. 크레네크의 '오르페우스와 오이리디케'는 1926년 11월 26일 카셀의 슈타츠테아터(Staatstheater)에서 초연되었다.

 

메트로폴리탄 무대

 

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