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오(L'Orfeo)
L'Orfeo, favola in musica(오르페오, 음악우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역사상 첫 오페라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2008년 마드리드 레알극장. 디트리히 헨셀(오르페오), 마리아 그라치아 스키아보(에우리디체)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의 '오르페오'(L'Orfeo)가 오페라의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오페라라고 주장하는데에는 음악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몬테베르디는 '오르페오'를 1607년에 완성했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자코포 페리(Jacopo Peri: 1561-1633)가 1597년에 '다프네'(Dafne)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1598년에 플로렌스에서 공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스코어가 남아 있지 않아서 어떤 형태의 오페라인지를 알수 없다. 자코포 페리는 이어 1600년에 '에우리디체'(Euridice)라는 오페라를 완성하여 공연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비록 스코어가 남아 있다고 해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페라라고 말할수는 없는 수준이다. 그러다보니 천상 1607년에 몬테베르디가 완성한 '오르페오'를 오페라 역사상 최초의 작품이라고 인정할수 밖에 없다. 실상 오페라라는 용어는 자코포 페리나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가 활동하던 시기보다 훨씬 나중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므로 당시에는 오페라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몬테베르디는 '오르페오'를 음악우화(favola in musica)라고 불렀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오르페오'는 음악의 시대적 장르에서 후기 르네상스/초기 바로크의 오페라라고 부른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오르페오'의 스토리는 그리스 신화인 오르페우스(Orpheus)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것을 알레산드로 스트리지오(Alessandro Striggio: 1573-1630)가 몬테베르디를 위해 오페라 대본으로 만들었다. 알레산드로 스트리지오의 아버지의 이름도 알레산드로 스트리지오로서 유명한 작곡가였다. '오르페오'의 기둥 줄거리는 간단하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체(유리디스)가 갑자기 죽어서 지하세계로 가자 남편인 오르페오가 지하세계로 가서 아내를 데려오지만 지상으로 나올 때에 오르페오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결국 아내를 데려오지 못한다는 얘기이다. '오르페오'는 1607년 2월 24일, 이탈리아의 만토바 공국에 있는 공작궁(Palazzo Ducale a Mantova)에서 해마다 열리는 카니발 기간에 초연되었다. 1607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선조 40년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이 끝나고 전쟁의 폐해를 추스르려고 하던 시기였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이렇듯 4백년이 넘는 오랜 연혁을 지닌 작품이지만 오늘날에도 정기적으로 공연되고 있어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감정을 되새기게 한다.
돌이켜보건대 17세기 초의 이탈리아에서는 궁정에서 어떤 특별한 날을 기념하여 연극을 공연하게 되면 막간에 음악과 발레를 수반하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여흥으로 공연하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을 인터메디오(Intermedio) 또는 인터메쪼(Intermezzo)라고 불렀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것이 발전하여 음악극 또는 '오페라'가 되었다. 그러고보면 인터메디오는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를 위한 실험적인 과정이었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이러한 실험적인 과정을 졸업하고 나온 작품이다. 만토바 공작궁에서 초연을 가진 '오르페오'는 비록 기록은 없지만 이어서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에서도 공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43년 작곡자인 몬테베르디가 세상을 떠나자 '오르페오'는 더 이상 공연되지 않았다. '오르페오'가 리바이발 된 것은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20세기 초에(1919년) 파리에서였다.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제작기법을 활용하여 무대에 올렸다. 예를 들어서 무대에 기계장치를 도입한 것이다. '오르페오'가 파리에서 인기를 끌자 유럽의 다른 극장에서도 자주 볼수 있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한편, 2차 대전 후에는 17세기의 악기를 재현하여 공연하려는 노력과 함께 '오르페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옛날 오페라는 옛날 악기로 연주해야 음악적으로 완벽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무튼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많은 오페라 팬들의 관심을 끌어서 공연도 자주되고 음반으로도 여럿이 나오게 되었다. 특히 2007년에는 '오르페오' 초연 4백주년을 기념하여서 전세계적으로 많은 공연이 있었다.
리용 공연. 현대적 연출
몬테베르디는 1567년 크레모나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의 신동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몬테베르디는 어릴 때에 이미 음악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해서 크레모나 대성당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인 마르크 안토니오 인제네리(Marc'Antonio Ingegneri)에게서 성악과 현악기와 작곡을 배웠다. 그후 20대 중반까지 베로나와 밀라노에서 음악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만투아에 있는 빈첸초 곤자가(Vincenzo Gonzaga) 공작궁의 비올라 주자로 고용되어 가게 되었다. 몬테베르디는 곤자가 공작궁에서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노력으로 1601년, 34세 때에 드디어 음악감독(maestro della musica)이 되었다. 곤자가 공작은 음악극에 대하여 열정이 대단했던 사람이었다. 아마 가족관계로 인하여 플로렌스 궁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플로렌스의 음악가들은 전통적인 인터메디오를 새로운 형태로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더 이상 막간의 여흥이 아니라 음악극 자체로서 완성된 공연을 시도한 것이었다. 플로렌스에서 인터메디오를 개혁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음악가들을 카메라타라고 부른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자코포 코르시(Jacopo Corsi: 1561-1602)라는 사람이 카메라타 운동을 주도했다. 자코포 코르시는 동료 작곡가인 자코포 페리와 협동하여 '다프네'라는 새로운 시도의 작품을 만들었다. '다프네'는 1598년 플로렌스에서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마드리갈의 요소에 모노디(단성부의 서창곡)를 복합하고 여기에 춤과 기악곡 악절(파사지)를 넣어 드라마로서 구성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다프네'의 음악은 극히 일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나온 플로렌스 학파의 다른 작품들, 예를 들면 에밀로 데 카발리에리(Emillo de' Cavalieri)의 Rappresentatione di Anima et di Corpo(영혼과 육체의 표상), 자코포 페리의 Euridice(에우리디체),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의 Euridice(에우리디체) 등은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당시의 음악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해주고 있다. 페라와 카치니의 '에우리디체'는 오비드의 '변형'(Metamorphoses)에 등장하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음악극으로 만든 것이다.
에밀로 데 카발리에리의 '영혼과 육신의 상징극'의 한 장면. 베를린 슈타츠오퍼. 카발리에리의 오페라는 스코어가 완벽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4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간혹 공연되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만투아 궁정은 오랫동안 연극 공연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왔다. 만투아 궁정은 빈첸초 곤자가 공작이 군주가 되기 오래전에 이미 안젤로 폴리치아노(Angelo Poliziano)의 리릭 드라마인 La favola di Orfeo(오르페오 우화)를 연극으로 공연한 일이 있다. 그런데 '오르페오 우화'는 비록 연극이지만 대사보다는 노래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만투아 공작궁에 근무하게 된 몬테베르디는 1598년에 공작궁에서 조반니 바티스타 과리니(Giovanni Battista Guarini)의 연극인 Il pastor fido(충성스런 양치기)에 음악을 덧입히는 일을 지원한 일이 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목가적인 드라마가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저런 일때문에 빈첸초 곤자가 공작은 몬테베르디를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던 중에 1600년 10월 6일, 빈첸초 곤자가 공작이 플로렌스에 갔다가 메디치 가문의 마리아(Maria de Midici)와 프랑스의 헨리 4세의 결혼식에 초청을 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여흥으로 공연된 자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를 보았다. 플로렌스에서의 '에우리디체'의 공연에는 공작을 따라서 갔던 만투아 궁정의 몇몇 음악인들도 출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마 몬테베르디도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곤자가 공작은 자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를 보고서 무언가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만투아로 돌아가면 자기도 그와 같은 음악극을 공연하겠다고 다짐했다.
롱비치 오페라 보존회 공연
1600년 10월 플로렌스에서의 '에우리디체' 공연에는 곤자가 궁에서 온 젊은 변호사이며 외교관인 알레산드로 스트리지오도 참석했다. 스트리지오는 음악적인 재능도 뛰어나서 불과 16세 때에 투스카니의 페르디난도 공작의 결혼 축하연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정도였다. 스트리지오는 만투아에서 빈첸초 공작의 두 아들인 프란체스코와 페르난디노와 함께 만투아의 상류층 지식인들의 모임인 Accademia degli Invaghiti(심미 아카데미)의 멤버였다. 이 모임은 만투아 극장들의 공연을 자문하는 역할도 했다. 스트리지오가 어떤 연고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의 대본을 쓰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하여튼 스트리지오는 1607년 1월부터 '오르페오'의 대본작업을 시작했다. 스트리지오가 소스로 삼은 자료들은 오비드의 '변형' 제10권과 11권, 그리고 비르질의 게오르긱스(Georgics) 제4권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폴리치아니의 1480년도 연극대본, 자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의 대본, 과리니의 '충성스런 양치기'(Il pastor fido)의 대본을 더 많이 인용했다. 스트리지오의 대본은 '오르페오'의 초연과 때를 같이하여 1607년에 만투아에서 출판되었다. 그런데 몬테베르디의 스코아가 1609년에 베니스에서 출판되었을 때 대본을 보면 1607년 스트리지오의 대본과 차이가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스트리지오의 대본은 카니발을 축하한다는 원래의 취지에 맞추어 연회장면으로 끝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나중에 몬테베르디가 수정한 대본은 아폴로가 중간역할을 하여 오르페오를 하늘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스트리지오의 원래 대본도 아폴로 엔딩으로 구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만투아 공작궁의 무대는 아폴로가 오르페오를 하늘로 올라가도록 하는 기계장치를 설치할 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에 연회장면으로 대치했다는 것이다. 몬테베르디는 '오르페오'가 다른 극장에서 공연될 때에는 그런 스페이스의 제한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아폴로 버전대로 공연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의 공연
몬테베르디는 만투아 공작궁에서 비올라 연주자였지만 원래부터 작곡에 뜻을 두고 있었다. 몬테베르디가 '오르페오'를 작곡할 즈음에는 공연음악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몬테베르디는 만투아 궁정에 16년 동안이나 고용되어 있었다. 그는 그 기간동안 비올라 연주도 했지만 주로 무대음악을 편곡하는 일을 했다. 때로는 작곡도 했다. 1604년에는 무용음악인 Gli amori di Diane ed Endimone를 카니발용으로 작곡했다. 몬테베르디의 첫 오페라 작품인 '오르페오'는 아리아, 레치타티브, 합창, 무용, 음악극적 간주곡, 그리고 대중음악이나 민속음악적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몬테베르디의 음악은 사실상 그가 창작한 것이 아니다. 그는 새로운 기법과 전통적인 기법을 혼합하여 '오르페오'의 음악을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새로운 시도였다.
오르페오가 초연된 만투아 공작궁
'오르페오'는 5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대하장편소설이었다. 그런데 각 막은 어찌보면 각기 독립적인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구성은 5막이지만 장면은 두 개가 바뀌는 것일 뿐이다. 물론 독립적인 스토리라고 해도 서로 연계는 되어 있다. 막이 바뀌더라도 인터발이 있거나 막이 내려지도록 진행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장면이 바뀔때 관중들이 무대가 바뀌는 모습을 보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오늘날 처럼 막을 내려서 무대의 모습을 잠시 감추고 장면을 바꾸는 형식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의 관례로는 연주하는 악기에 변화를 주거나 조성을 바꾸거나 음악의 스타일을 바꾸는 것으로 장면의 변화를 표현하였다. 이제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의 등장인물들을 살펴보자.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신화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추상적인 사항을 의인화하여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우화(寓話)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행복한 한때
주인공인 오르페오(T)는 1막부터 5막까지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상대역인 에우리디체(유리디스: S. 원래는 카스트라토)는 스토리상 1막과 4막에만 등장한다. 의인화된 음악(La musica)도 소프라노가 맡지만 원래는 카스트라토가 맡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의인화된 음악은 서막에만 등장한다. 메신저(La messaggera: S)는 2막에만 등장한다. 대본에는 Silvia(실비아)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의인화된 희망(Speranza: S)은 3막에만 등장한다. 나루지기인 카론(Charon: B)도 3막에만 등장한다. 프로세르피나(Proserpina: S)와 플루토네(Plutone: B)는 4막에만 등장한다. 신들의 제왕인 아폴로(Apollo: T)는 마지막 장면에만 등장한다. 에코(Eco: T)도 마지막 막에만 나온다. 님프(Ninfa: S)는 1막에만 나온다. 이밖에 님프들과 목동들(S, A, T, B), 지옥의 정령들(T, B)도 등장한다. 이야기는 두 장소에서 펼쳐진다. 1막과 2막, 그리고 5막은 트라키아(Thrace)가 무대이다. 지금의 발칸 반도 동북부에 있었다는 왕국이다. 또 하나의 장소는 지하세계로서 3막과 4막이 이에 해당된다. 의인화된 '음악'(La musica)이 등장하기 전에 화려한 토카타(toccata. 영어로는 tucket)가 연주된다. 트럼펫에 의한 팡파레와 같은 스타일이다. 의인화된 '음악'(음악의 정령)은 프롤로그를 노래한다. '음악'은 이 자리에 참석한 관중들을 정중하게 환영하고 이어 부드러운 음성으로 '음악'인 자기는 뭇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근심걱정을 가라앉힐수 있다고 말한다. 계속하여 '음악'은 음악의 힘을 찬양하는 노래(paean)를 부른 후에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오르페오를 예로 들어서 그는 노래로서 들짐승까지도 넋을 잃게 만들수 있다고 소개한다. '음악'이 관중들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요청한 후에 막이 오른다.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바르셀로나 리세우 무대
1막. 님프들과 목동들이 그리스 스타일로 합창하는 중에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가 들어온다. 그리스 합창(Greek chorus)라는 것은 드라마에서 일단의 출연자들이 한 목소리로 드라마의 사건을 소개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 시대로부터의 전통이었다. 목동 한 사람이 오늘이 두 사람의 결혼일이라고 발표한다. 그러자 코러스가 "혼인의 신인 휘멘(Hymen)이여 어서 오소서"라는 합창을 장엄하게 부르고 이어 즐거운 춤을 춘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도 서로의 사랑을 노래한다. 무대 위에 남아 있던 합창단이 '한숨이 먹을 것이고 눈물이 마실것이던 오르페오가 어떻게 하여 사랑의 힘으로 변화되어 행복의 절정에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2막. 오르페오는 코러스와 함께 돌아와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런 후에 그는 과거의 불행을 얘기하다가 '슬픔 후에는 더 만족하게 되며 고통 후에는 더 행복해 진다'고 선언한다. 그러한 무드는 갑자기 나타난 메신저(La messaggera)에 의해 깨트려진다. 메신저는 에우리디체가 들에서 꽃을 따다가 독사에 물렸다는 것이다. 코러스가 '아 쓰라린 사건이여, 아, 불행하고 잔인한 운명이여'라며 고뇌의 노래를 부른다. 메신저는 그런 나쁜 소식을 전한 자신을 책망한다. 오르페오는 슬픔과 잔혹한 운명을 삼킨 후에 지하세계로 내려가서 지하세계의 통치자를 설득하여 에우리디체를 살려오겠다고 결심한다. 오르페오의 아리아가 '나의 생명 그대는 죽었도다. 그런데는 나는 숨을 쉬고 있다'이다. 오르페오는 만일 지하세계에 가서 에우리디체를 데려오지 못한다면 에우리디체와 함께 죽음의 대열에 남아 있겠다고 말한다. 오르페오가 떠나고 코러스는 탄식을 계속한다.
현대적 연출. 조이스 디도나토
3막. 오르페오는 스페란차(희망)의 안내를 받아 지하세계에 들어가는 문 앞까지 온다. 스페란차는 문에 써있는 글인 '누구든지 이 곳에 들어오는 자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 라스키아테 오네 스페란차 보이 키인트라테: Abandon hope, all ye enter here)는 말을 가르킨 후에 떠난다. 오르페오는 나루지기인 카론(카론테)를 만난다. 카론은 오르페오에게 거친 목소리로 지옥의 강인 스틱스(Styx)를 건네어 주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오르페오는 카론을 칭찬하는 노래를 불러 그를 설득코자 한다. 오르페오의 노래가 가장 유명한 Possente spirto e formidabil nume(전능의 정령이여 능력의 신이여)이다. 그러나 나루지기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오르페오가 리라를 뜯으면서 노래를 부르자 나루지기 카론은 잠시후 잠이 든다. 오르페오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루지기의 보트를 훔쳐서 강을 건너 지하세계로 들어간다. 정령들이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자기자신을 방어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합창을 부른다. '그는 나뭇가지로 바다를 잔잔하게 했으며 바람의 분노를 무시하였도다'이다.
지하세계로 건너가는 오르페오
4막. 지하세계(지옥)의 왕비인 프로세르피나는 오르페오의 노래에 깊이 감동하여 남편인 플루토네 왕에게 에우리디체를 보내주라고 간청한다. 플루토네는 왕비의 간청을 들어서 에우리디체를 돌려보내주기로 결정한다. 다만, 돌아가는 중에 오르페오가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조건을 내건다. 만일 뒤를 돌아본다면 단 한번의 눈돌림으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영원히 잃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잠시후 오르페오가 앞서가고 에우리디체가 뒤를 따라 나온다. 오르페오는 에우리디체의 따듯한 가슴에 기대어 평화의 마음을 갖게 될 날을 고대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 의심의 싹이 터온다. '에우리디체가 뒤따라 오는지를 누가 확인한단 말인가?'라는 생각이다. 오르페오는 플루토네가 시기심으로 조건들을 취소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도 생긴다. 갑자기 무대 뒤에서 혼란스런 소리가 들린다. 오르페오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둘레를 살핀다. 그러자 따라오던 에우리디체의 이미지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에우리디체는 절망 중에 '너무나 사랑하여서 나를 잃어요'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오르페오가 에우리디체를 쫓아가려고 하지만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주저 앉는다. 정령들은 오르페오가 지하세계의 권세를 극복했으나 자기의 열정은 극복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합창을 부른다.
5막. 다시 트라키아의 초원이다. 오르페오는 긴 독백으로 에우리디체를 잃은 슬픔을 탄식한다. 그리고 에우리디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더니 그의 마음은 다시는 큐피드의 화살을 맞이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무대 뒤에서 코러스가 마치 메아리처럼 오르페오의 마지막 다짐을 반복하여 합창한다. 갑자기 구름 속에서 아폴로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오르페오에게 '어찌하여 그대는 스스로 분노와 비탄의 먹이가 되려고 하는가'라며 책망한다. 그러면서 오르페오에게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올라가 함께 지내자고 초청한다. 하늘나라에 가면 별들 중에서 에우리디체와 닮은 모습을 찾을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덧붙인다. 오르페오는 그같은 현명한 아버지의 자문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가치없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아폴로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 목동들이 '고통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모든 은혜의 열매를 거둘지니라'라는 합창을 부르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라 스칼라 공연. 허공의 리라로 오르페오를 표현했다.
1607년의 스트리지오의 대본에 의하면 제5막에서 오르페오의 기나긴 독백은 아폴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카스의 시녀들인 마이나스(Maenad)에 의해서, 또는 바카스 자신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다고 되어 있다. 마이나스들은 술에 취하여 광란하는 여인들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주인인 바카스 신이 분노할 것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오르페오가 여자들을 부인하고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르페오는 천상의 분노에서 피할수가 없으며 더 오랫동안 도피할수록 더 가혹한 운명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오르페오는 그 장면에서 무대를 떠나기 때문에 그 후에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마이나스들이 오페라의 나머지 부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자기들의 신인 바카스를 찬양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몬테베르디가 나중에 수정한 내용과 스트리지오의 오리지널 대본과는 차이가 있다. 아마도 마이나스들의 분노를 피하여 도망간 오르페오가 아폴로에 의해 구원된다는 것이 최종 결론이라고 본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1607년 2월 24일 만투아 공작궁에서 처음 공연되었는데 어느 홀에서 초연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확실치 않다. 다만, 갈레리아 데이 휘우미(Galleria dei Fiumi)라는 곳에서 공연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오르페오'는 만투아 공작을 대단히 만족케 하여 며칠 후인 3월 1일에 다시 공연되었다고 한다. 그후에 플로렌스, 크레모나, 밀라노, 토리노 등지에서도 공연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1614-19년도에 잘츠부르크에서도 몇차례 공연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1634년으로부터 1643년까지의 거의 10년 동안에는 베니스에서 오페라 공연이 만개되었다. 몬테베르디는 베니스에서 그의 두번째 오페라인 L'Arianna(아리안나)를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오르페오'가 인기를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오르페오'를 공연하지 않았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몬테베르디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1643년에 제네바에서, 1647년에는 파리의 루브르에서 공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659년대에 이탈리아 전역에서 상당한 인기리에 공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다가 '오르페오'는 몬테베르디라는 이름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19세기 말에 가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취리히 오페라. 현대적 연출
1904년에 프랑스의 작곡가인 뱅생 댕디(Vincent d'Indy)가 '오르페오'에 매료하여 다시 공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너무 길므로 좀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막부터 시작하고 3막과 4막은 단축하여서 편집을 했다. 댕디는 이것을 가지고 1904년 2월에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댕디가 편집한 것은 모던 공연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기본으로 해서 191년 5월에 파리의 테아트르 레장(Theatre Rejane)에서 현대적 연출에 의한 공연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의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인 조반니 오레피체(Giovanni Orefice)라는 사람이 '오르페오'를 콘서트 용으로 편곡한 것이 있다. 1차 대전 이전까지 이탈리아의 여러 곳에서 연주되었다. 그리고 '오르페오'의 미국 데뷔의 바탕이 되었다. '오르페오'가 미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12년 4월 뉴욕 메트에서였다. 영국에서 무대공연으로 처음 선보인 것은 1925년 12월 옥스포드대학교 오페라협회에 의해서였다. 잭 웨스트럽(Jack Westrup)이라는 사람이 이 공연을 위해 특별히 편곡한 것이었다.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몬테베르디의 명성을 다시 일깨워 준 공연이었다. 잭 웨스트럽의 버전은 1929년 런던의 스칼라 극장에서 무대에 올려졌고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서 매사추세츠의 스미스대학에서 공연되었다. 런던 스칼라 극장에서의 공연은 커다란 적자를 본 것이었다. 그후로 이 버저은 영국에서 35년 동안 볼수 없었다.
라 스칼라 공연
'오르페오'는 2차 대전 이후에 급격히 관심을 받게 되었다. 여러 작곡가들이 나름대로의 버전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파울 힌데미트의 편곡이 각광을 받았다. 1954년 비엔나 페스티발에서 공연되었다. 그때 젊은 지휘자였던 니콜라우스 하르논쿠르트(Nikolaus Harnoncourt)는 '오르페오'야 말로 학문적으로나 완성도로 볼 때에 가장 위대한 고전이라고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후 하르논쿠르트는 '오르페오'의 챔피언 역할을 했다. 뉴욕에서의 첫 본격적인 공연은 1960년 9월 뉴욕 시티 오페라에서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의 지휘로 진행되었다. 이때 바리톤 제라르 수제(Gerard Souzay: 1918-2004)가 오르페오를 맡아서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프랑스 출신인 제라르 수제의 미국 데뷔 공연이었다. 그러나 뉴욕 시티 오페라에서의 '오르페오' 공연은 루이지 달라피콜로(Luigi Dallapiccolo)의 현대 오페라인 Il prigioniero(죄수)를 공연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거의 3분의 1인나 삭제한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는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Possente spirito(강력한 능력)마저 중간에서 단축되는 비운을 겪었다.
롱비치 오페라. 지하세계에 간 유리디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오리지널 '오르페오'의 공연이 시도되었다. 1965년에는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가 무대에 올렸고 그 후로도 여러번 공연하였다. 2007년에는 '오르페오' 초연 400 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여러 곳에서 있었다. 만투아에서는 콘서트와 무대공연을 혼합한 공연이 있어서 더욱 의미를 주었다. 2008-10년 시즌에 프랑스에 본부를 둔 Les Arts Florissants가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레알에서 몬테베르디의 3부작, 즉 '오르페오', '율리시스의 귀환'(Il ritorno d'Ulisse), '포페아의 대관'(L'incoronazione di Poppea)를 공연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오르페오'는 두 음악적 시기의 산물이다. 16세기의 전통적인 마드리갈 스타일과 새로운 플로렌스 형식을 혼합한 것이다. 특히 카메라타와 그 이후의 작곡가들이 발전시킨 레시타티브와 단성부의 독창곡을 사용한 것이 그러하다. 이러한 새로운 스타일에서는 대본이 음악을 주도한다. 반면에 신포니아와 노래 파트 이외의 기악곡인 리토르넬리(ritornelli)는 액션을 주관한다. 그러므로 관중들의 우선적인 관심은 노래보다도 대사에 집중된다. 그래서 노래부르는 사람들은 단순히 노래를 즐거운 음성을 들려주는 것을 뛰어 넘어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자기들의 성격과 감정을 깊이있게 전달해야 했다.
노르웨이 공연. 스틱스 강을 무대에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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