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Hamlet) - 1
앙브루아즈 토마(Ambroise Thomas)의 5막 오페라
앙브루아즈 토마
셰익스피어가 불후의 명작인 햄릿(Hamlet)을 완성한 것은 1600년대 초반이며 프랑스의 앙브루아즈 토마가 오페라로 만들어 첫 공연을 가진 것은 1800년대 중반이다. 오페라 '햄릿'은 파리에서의 초연 이후 세계의 여러 곳에서 간헐적으로 공연되었지만 1900년대부터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오로지 위대한 공연만이 잠자고 있는 위대한 작품을 깨울수 있다. 100년이 훨씬 넘게 잠자고 있던 '햄릿'을 일깨운 공연은 2010년 3월 메트로폴리탄에서의 공연이었다. 토마의 '햄릿'은 메트로폴리탄에서 1897년에 마지막 공연을 가졌으므로 이번 리바이발은 정확히 말하자면 115년만의 것이었다. 바리톤 사이몬 킨리사이드(Simon Keenlyside: 1959-)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킨리사이드는 영국 출신의 바리톤이다. 지휘는 루이 랑그레(Louis Langrée: 1961-)가 맡았다. 랑그레는 프랑스인이다. 랑그레는 드빗시등 프랑스 현대음악의 해석에서 뛰어난 지휘자이다. 오펠리아는 독일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인 말리스 페터젠(Marlis Petersen: 1968-)이 맡았다. 원래는 나탈리 드사이(Natalie Dessay)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사정이 생겨서 출연하지 못하게 되었다. 룰루와 체르비네타로 유명한 말리스 페터젠은 불과 두어 달을 남겨두고 나탈리 드사이의 대역으로 오펠리아를 맡게 되었다. 왕비 거트루드는 미국의 메조소프라노인 제니퍼 라르모어(Jennifer Larmore: 1958-)가 맡았다. 그러고보면 영, 미, 독, 불의 합작 무대라고 할수 있다. 메츠의 공연은 예상대로 대성공이었다. 음악평론가들은 '모두의 괴로운 심정을 이해하게 만든 무대였다.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지성적이었다'라고 말했다. 특히 사이몬 킨리사이드에 대하여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라고 말하여 그에 대한 대단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제 바야흐로 세계 각국의 오페라 무대는 메트로폴리탄의 리바이발에 자극을 받아 '햄릿'에 대한 오디세이 여행을 떠날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메트로폴리탄에서의 리바이발 무대 피날레. 햄릿(사이몬 킨리사이드)이 오펠리아(말리스 페터젠)의 시신을 안고 비통해하고 있다.
앙브루아즈 토마가 1868년에 '햄릿'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을 때에는 스토리가 셰익스피어의 원작과는 여러 면에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오리지널과 가장 큰 차이점은 햄릿이 삼촌인 클라우디스를 죽이고 나서 덴마크의 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2년 후인 1870년에 런던에서 공연을 가질 때에는 피날레를 고쳐서 비극적인 종말을 보여주지 않을수 없었다. '햄릿'의 내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런던 사람들에게 햄릿이 죽지 않고 살아서 왕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얘기이기 때문이었다. 비극적 엔딩의 '햄릿'은 런던에서 공연된 이후 잠시동안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에는 토마가 처음 작곡한 대로 해피엔딩의 '햄릿'이 그나마 이곳저곳에서 공연되었다. 비극적 엔딩의 수정본이 리바이발 된 것은 극히 최근인 1996년에 제네바에서였다. 그후 런던과 바르셀로나에서의 공연도 비극적 엔딩의 것이었다. 메트로폴리탄은 채택한 스코어는 토마가 수정한 비극적 엔딩의 것이다. '햄릿'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3막에서 오펠리아의 광란의 장면이다. 도니체티의 '람메무어의 루치아'에서 루치아의 광란의 장면보더 더 길다. 그래서 메트로폴리탄의 리바이발에서는 광란의 장면에 앞서서 나오는 발레 장면을 삭제하였다. 그래서 그나마 세시간 안에 공연을 마칠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서막에 불과했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햄릿'의 탐구여행을 떠나보자.
오패라 '햄릿'은 프랑스의 앙브루아즈 토마(Ambroise Thomas: 1811-1896)이 작곡한 5막의 오페라이다. 대본은 미셀 캬레(Michel Carré: 1821-1872)와 쥘르 바르비에(Jules Barbier: 1825-1901)가 공동으로 완성했다. 캬레와 바르비에는 알렉산드르 뒤마 페레(Alexandre Dumas, pere: 1802-1870)와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폴 뮤리스(Paul Meurice: 1825-1901)이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공동으로 프랑스어로 번역한 희곡을 바탕으로 토마를 위한 오페라 대본을 만들었다. 캬레와 바르비에는 토마를 위해 '미뇽'(Mignon)의 대본을 썼고 샤를르 구노를 위해서는 '파우스트'(Faust)의 대본을 완성한바 있다. 알렉산드르 뒤마 페레는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등으로 유명한 작가이며 페레라는 단어를 붙인 것은 역시 작가인 그의 아들의 이름도 알렉산드르 뒤마이므로 아들과 구별하기 위해 아들의 이름에는 휘스(fils: 아들)라는 단어를 붙이고 자기의 이름에는 페레(pere: 아버지)라는 단어를 붙여 사용했다. 그리고 폴 뮤리스는 빅토르 위고의 가장 절친한 친구로서 잘 알려진 소설가 겸 극작가이다. 얘기가 공연히 곁길로 들어갔음을 죄송하게 생각하며 다시 본래의 '햄릿' 탐구의 길을 떠나기로 한다.
[파리의 오펠리아 매니아]
오페라 '햄릿'을 말하기 전에 우선 당대의 여배우 해리엣 스밋슨에 대하여 얘기하지 않을수 없다. 파리 사람들은 청순가련형 여인의 프로토타입인 오펠리아에 대하여 말할수 없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현상은 1827년 가을에 영국의 극단이 파리의 오데온(Odén) 극장에서 한 시즌 동안 '햄릿'을 공연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1827년 9월 11일이었다. 그날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여배우인 해리엣 스밋슨(Harriet Smithson: 1800-1854)이 오펠리아를 연기했다. 얄상하고 갸날프게도 생겼지만 그의 숨막히는 듯한 연기는 만당의 관객들을 사로 잡고도 남았다. 특히 광란의 장면에서의 연기는 백미였다. 통상적인 각본에 의한 연기가 아니라 즉흥적이고도 창의적인 연기였다. 그의 연기는 마임(무언극)이기는 하지만 놀랍도록 많은 언어를 쏟아낸 것이었다. 너무나 감동적인 연기여서 관중들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을수 없었다. 남자들도 울었다. 남이 보건 말건 체면 불구하고 눈물을 흘렸다. 헤리엣 스밋슨이 나온 연극 '햄릿'은 콘트롤 할수 없는 감동의 도가니였다. 당시 25세 밖에 되지 않았던 알렉산더 뒤마 페레도 객석에 있었다. 이제 소설가로서, 극작가로서 경력을 시작하려는 뒤마 페레는 '나의 모든 예상을 초월하는 천상의 연기였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작곡가인 엑토르 베를리오즈도 첫날 공연을 구경갔었다. 그는 '마치 나의 눈 앞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것과 같은 순간이었다. 해리엣 스밋슨은 저 멀리 심연에서 빛을 발하는 예술혼이었다.'라고 말했다. 영국대사의 부인인 레이디 그랑빌은 '파리 사람들은 미스 스밋슨의 오펠리아에 대하여 동물적인 함성을 질러댔다. 이해할수가 없다. 그런데 나도 그랬다'라고 썼다. 따지고 보면 해리엣 스밋슨은 런던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배우였다. 왜냐하면 말할 때에 아일랜드 사투리가 섞여 있었으며 음성도 별로 호소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파리에서는 달랐다. 파리의 사람들도 오래전부터 셰익스피어를 숭모하였고 더구나 '햄릿'의 번뇌를 자기들도 함께 나누려는 듯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영국 극단이 와서 '햄릿'을 공연하게 되었고 그 중에 오펠리아를 맡은 해리엣 스밋슨의 모습과 연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 잡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로부터 파리에서는 á la mode d'Ophélie(오펠리아 스타일)이 유행의 첨단을 달렸다. 그런 현상은 파리에서 아침에 기침을 하면 저녁에 감기에 걸린 주변 도시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펠리아의 해리엣 스밋슨. 어찌나 청순가련한 연기를 잘했던지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리엣 스밋슨의 오펠리아에 대하여 무한한 감동을 느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엑토르 베를리오즈였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엣 스밋슨에 대하여 집착을 하기 시작했고 그의 음악의 영감으로 삼았다. 그가 1830년에 작곡한 '환상적 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은 해리엣 스밋슨을 생각하며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곡가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음악적인 모티프로서 반복적으로 나타나서 마치 아편에 취한 상태에서 환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표현해 주고 있다. '환상적 교향곡'의 후편이라고 할수 있는 1831년도의 Lélio(렐리오) 또는 Le retour á la vie(삶에의 귀환)에는 Le pecheur(어부)라는 노래가 포함되어 있다. 이 노래는 괴테의 발라드인 Der Fischer(어부)를 바탕으로 삼은 것으로 바다의 요정인 사이렌이 어부를 유혹하여 바다의 무덤에 들어가게 한다는 내용이다. 베를리오즈는 사이렌을 해리엣 스밋슨에, 그리고 어부를 자기 자신으로 비유하였다. 1830년대의 어느때에 작곡했지만 1852년에 가서야 알려지게 된 Tristia(트리스티아)라는 작품에는 La mort d'Orphélie(오펠리아의 죽음)이라는 발라드 풍의 노래가 포함되어 있다. 연극 '햄릿'의 4막 7장에 나오는 게르투드의 독백에서 따온 발라드이다. 아무튼 베를리오즈는 해리엣 스밋슨의 오펠리아를 보고 나서 그저 밤이건 낮이건 그녀 생각뿐이었다. 결국 베를리오즈는 1833년에 세간의 관심을 모으며 해리엣 스밋슨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결별로 막을 내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해리엣 스밋슨의 스타덤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겨우 1년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오펠리아에 대한 파리 사람들의 연민의 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작곡가들을 음악으로 오펠리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에 바빴으며 화가는 그림으로, 조각가는 조각으로 오펠리아를 표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예를 들면 뛰어난 조각가인 오귀스트 프레오(Auguste Préault: 1809-1879)의 부조작품인 Ophélie(오펠리아: 1844)는 오펠리아가 긴 머리칼을 흐르는 냇물에 적시며 슬픔에 젖어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밖에도 존 윌렴스 워터하우스(John Williams Waterhouse), 알렉산드르 카바넬(Alexandre Cabanel)등의 오펠리아 그림도 유명하다.
알렉산드르 카바넬의 '오펠리아'. 1840년대의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알 라 모드 도펠리가 유행이었다. 오펠리아의 모습을 본따는 것은 물론이고 오펠리아처럼 사랑하고, 오펠리아처럼 번민하며, 오펠리아처럼 죽는 것을 고정관념(idée fixe)으로 생각했다.
[대본 준비]
명망있는 작가인 알렉산드르 뒤마 페레와 젊은 시인인 폴 뮤리스가 어떻게 협력하여서 셰익스피어의 영어판 '햄릿'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키로 한다. 다만, 뒤마-뮤리스 버전은 셰익스피어의 오리지널에 충실한 번역이었다. 그동안 다른 몇명이 '햄릿'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 있지만 내용이 충실치 않았었는데 뒤미-뮤리스는 그때까지 나온 번역물의 내용에 누락된 것을 찾아서 추가하였다. 그러나 오리지널의 첫 장면에 나오는 망루에서의 보초 장면은 삭제되었다. 대신에 1막에 햄릿과 오펠리아의 사랑의 장면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왕이 햄릿을 영국으로 보내지 않는 것으로 구성했다. 그러므로 로젠크란츠와 귈덴슈테른은 죽지 않는다. 물론 충실하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리지널과는 상관없는 내용들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제일 마지막 장면이 그랬다. 게르루드, 클라우디우스, 래르테스가 죽어가는데 부왕의 혼령이 등장하여서 죽어가고 있는 세 사람을 모두 저주하는 장면을 새로 만들어 넣었다. 혼령은 클라우디우스에게 Désepere et meurs!(절망하고 죽을지어다)라고 말하며 래르테스에게는 Prie et meurs!(기도하고 죽을지어다)라고 말하며 왕비 게르트루드에게는 Espere et meure!(희망을 가지고 죽을지어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상처를 입은 햄릿이 Et quel chatiment m'attend donc?(그러면 저에게는 어떤 처벌을 하시렵니까?)라고 묻자 부왕의 영혼은 Tu vivras!(너는 살아야 할지니라)라고 말한다는 것이고 그 후에 막이 내려진다는 것이다.
햄릿과 부왕의 혼령
대본을 맡은 미셀 캬레와 쥘르 바르비에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미 오페라 대본들을 썼던 경험들이 있다. 토마를 위해서는 '미뇽'의 대본을 썼고 구노를 위해서는 '파우스트'의 대본을 썼다. 두 사람은 '햄릿'의 대본을 쓰면서 뒤마의 번역 버전을 기본으로 삼기로 했다. 뒤마의 버전은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잘 친숙해 있던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희곡을 오페라의 대본으로 만들 때에는 내용을 짧게 하고 간단하게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는 전통적으로 내용이 복잡하게 엮어진다. 관중들은 그런 우회적이고도 복잡한 관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만일 셰익스피어의 오리지널 희곡을 오페라 대본으로 그대로 만든다면 등장인물이 30명도 넘으며 공연 시간도 네시간이 넘게 된다. 미셀과 바르비에는 '햄릿'의 오페라 대본을 씀에 있어서 등장인물을 토탈 15명 이내로 삼았다. 그중에서 너댓명은 마임을 맡도록 했다. 그리고 부차적인 줄거리도 대폭 축소키로 했다. 뒤마에서 처럼 포르틴브라스(Fortinbras)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그러므로 노르웨이의 침략을 언급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뒤마는 햄릿의 영국 항해라는 부차적인 줄거리도 삭제해 놓았기 때문에 오페라 대본에서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되니 모든 블랙 유머(병적으로 빈정거리는 농담)들은 삭제해도 좋았다. 연극의 4막에서 폴로니우스가 사고로 살인하는 장면도 삭제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알렉산드르 뒤마 페레
이처럼 등장인물들을 줄이고 부차적인 스토리도 간소화하니까 자연히 햄릿이 처한 곤경과 그 영향을 받는 오펠리아로 초점이 모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주역들은 햄릿, 오펠리아, 게르트루드, 클라우디우스의 네명이 남게 되었다. 이렇듯 남녀 주역들의 비율이 맞는 것은 마이에르베르의 Robert le diable(악마 로베르: 1831)로부터 수립된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전형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리하여 원래는 소프라노(오펠리아), 메조소프라노(게르트루드), 테너(햄릿), 바리톤 또는 베이스(클라우디우스)로 배역을 정하려 했으나 정작 토마가 작곡할 때에는 햄릿을 바리톤으로 책정하였다. 대신에 오펠리아의 오빠인 래르테(Laërte)를 테너로 설정하였고 햄릿의 친구인 마르첼러스(Marcellus)도 테너가 맡도록 했다. 스토리에서 몇가지 수정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래르테를 그다지 냉소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처음에는 햄릿에게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도록 했다. 다만, 마지막의 무덤의 장면에서는 햄릿과 결투를 함으로서 두 사람의 비극적인 처지를 강조하였다. 게르투드를 클라우디우스의 공모자로 만든 것은 햄릿과 게르트루드간의 극적인 관계를 높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햄릿이 어머니인 게르트루드에게 침실 장면에서 공모를 자백하라고 강요할 때에 극적인 긴장감이 고조되도록 했다. 오펠리아의 아버지인 폴로니우스도 공모자로 만들었다. 그것은 햄릿으로 하여금 오펠리아와의 결혼을 거부하는 구실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셰익스피어의 오펠리아를 오페라의 오펠리아로 만든 것이다. 오펠리아가 정신이상이 된 것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이 그런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그가 자기를 거부하자 그 사람이 차지하고 있던 빈 공간을 메꿀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또 하나의 변화는 2막에서 햄릿이 연극배우들에게 건배를 하자면서 축배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런 흥겨운 분위기와 노래는 전반적으로 침울하고 비통한 분위기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또 하나의 간소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래르테, 폴로니우스, 게르트루드는 죽지 않는 것으로 설정한 것이다. 뒤마의 버전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부왕의 혼령이 나타나서 모두를 정죄하지만 오페라에서는 혼령이 게르트루드에 대해서는 수녀원으로 가서 평생을 지내도록 추방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햄릿이 살아서 덴마크의 왕으로 선포되는 것으로 설정했다. 뒤마의 버전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햄릿과 오펠리아.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의 현대적 연출의 무대
[작곡]
토마는 캬레와 바르비에로부터 대본을 1859년에 받았다. 오리지널 대본은 4막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무슨 규정이 그런지는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당시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를 초연하자면 한 시즌에 한편을 무대에 올릴수 있는데 단 5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페라 중에 발레를 넣는 것도 의무적이었다. 토마는 오펠리아의 광란의 장면이 나오는 부분과 마지막의 무덤 장면을 두 막으로 분리하였다. 그래서 전체 5막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4막에 좀 더 비중을 두기 위해 광란의 장면의 합창 도입주와 오펠리아의 레시타티브 및 아리아의 사이에 발레를 추가하였다. 작곡은 진행되었지만 시간도 지났다. 대본을 받은지로부터 4년이나 지났다. 파리오페라극장의 감독은 어서 '햄릿'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토마는 묵묵부답이었다. 또 시간이 지났다. 신문들은 토마가 아직까지 완성을 못한 것은 이상적인 오펠리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사람들은 누가 오펠리아를 맡을 지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해리엣 스밋슨과 같은 청순가련형의 오펠리아가 성악인 중에도 나올 것인지를 두고 참을수 있게 기다렸다. 파리오페라극장은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수 만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1866년에 토마의 '미뇽'이 파리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었지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상기시키며 이번에는 그 이상의 성공을 거두어야 할 것이라는 압력을 은연중에 주었다. 잘 아는대로 토마의 '미뇽'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1859년에 구노가 역시 괴테의 '파우스트'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만든 것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수 있다.
'햄릿'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바리톤 장 바티스트 포레. 마네의 그림이다.
그러는 중에 이번에는 구노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바탕으로 하여 오페라를 만들고 1867년에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선을 보였다. 구노가 '파우스트'를 만들자 '미뇽'으로 응답했던 토마는 이번에도 어서 '햄릿'을 완성하여 '로미오와 줄리엣'에 응답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때에 토마는 파리에서 스웨덴 출신의 소프라노인 크리스틴 닐슨(Christine Nilsson: 1843-1927: Kristina Nilsson)을 만났다. 크리스틴 닐슨은 방금 전에 파리오페라극장과 계약을 맺었던 터였다. 크리스틴 닐슨을 만난 토마는 이제야 오펠리아를 발견했다고 하고 극장 측과 '햄릿'의 초연 날짜를 의논했다. 토마는 닐슨의 성악적 역량을 고려하여 음을 조금 변경하였다. 또한 4막의 무덤 장면에서 토마는 닐슨의 제안에 따라 오펠리아가 대사를 읊는 부분을 여성합창으로 대신하고 여성합창을 위해서는 스웨덴의 발라드를 사용했다. 그 발라드는 그리그의 작품번호 63번인 '두 개의 노르딕 멜로디'(Two Nordic Melodies)의 제1악장과 비슷한 것이었다. 소프라노는 찾았지만 가장 적합한 테너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대단히 드라마틱한 바리톤을 찾았다. 장 바티스트 포레(Jean-Baptiste Faure: 1830-1914)였다. 그래서 토마는 원래 테너를 위해 작곡한 아리아들을 바리톤 용으로 전조(轉調)하였다. 그 후의 이야기지만, 장 바티스트 포레는 '햄릿'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햄릿'의 초연에서 오펠리아의 이미지를 창조한 스웨덴 출신의 소프라노 크리스틴 닐슨
[공연 역사]
'햄릿'은 마침내 1868년 3월 9일 파리오페라극장의 살 르 플르티에(Salle Le Peletier)에서 막을 올렸다. 대성공이었다. '햄릿'은 파리 초연 이후 5년 동안 로마, 런던, 라이프치히, 부다페스트, 브뤼셀, 프라하, 뉴욕, 생페터스부르크, 베를린, 비엔나 등지에서 리바이발 되었다. 런던에서는 오페라 '햄릿'이 셰익스피어의 오리지널을 손상했다고 해서 비난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1890년 런던의 폴 몰 가제트(Pall Mall Gazette)는 '햄릿의 비극적인 주제를 감히 저속한 코미디처럼 만들어 즐기는 사람들은 야만인이거나 프랑스 사람들 밖에 없다'고 썼다. 햄릿이 독이 묻은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하는 대신에 살아서 왕으로 선포된다고 고쳐놓았으니 영국인으로서는 셰익스피어를 모독하는 처사로 보고 분개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토마는 '햄릿'의 파리 초연이 있은후 28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토마가 세상을 떠나고 또한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모두들 전쟁에 정신이 없어서 토마의 '햄릿'은 긴 잠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980년 이후부터 관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에서 리바이발이 되었다. 비엔나(1992-94, 1996), 오페라 노우스(1995), 제네바(1996), 샌프란시스코 오페라(1996), 코펜하겐(1996, 1999), 암스텔담(1997), 칼스루에(1998), 워싱턴 콘서트 오페라(1998), 토쿄(1999), 파리(2000), 툴루즈(2000), 모스크바(2001), 프라하(2002), 세인트 루이스(2002), 런던(2003), 바르셀로나(2003), 그리고 2010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서 리바이발 되었다.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는 2009-10년 시즌에 공연했도 마르세이유 오페라는 2010년에, 미네소타 오페라는 2012-13년 시즌에 '햄릿'을 무대에 올렸다.
파리 오페라극장의 살 르 플르티에(Salle Le Peletier)에서 초연된 '햄릿'의 2막 2장 연극 장면의 스케치
[등장인물]
햄릿(Bar)은 덴마크의 왕자이다. 어느 시기라고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대체로 16세기라고 간주하고 있다. 햄릿은 성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모른다. 햄릿의 아버지(B)는 덴마크의 햄릿왕이다. 햄릿의 어머니는 게르트루드(Gertrude: MS)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두달 후에 시동생, 즉 햄릿 왕자의 삼촌과 재혼하였다. 클라우디우스(Claudius: B)가 햄릿의 삼촌이다. 클라우디우스는 햄릿의 어머니와 재혼하였으므로 햄릿에게는 삼촌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의붓 아버지가 된 사람이다. 오펠리아는 궁내성장관인 폴로니우스(Polonius: B)의 딸이다. 청순가련한 오펠리아는 햄릿 왕자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대본에는 Ophélie(오펠리)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등장한다. 래르테(Laërte: T)는 오펠리아의 오빠이다. 동생 오펠리아가 햄릿 왕자 때문에 죽었다고 믿어서 햄릿에게 결투로서 복수코자 하는 청년이다. 마르첼러스(Marcellus: T)는 햄릿 왕자의 친구이다. 호라시오(Horatio: B)도 햄릿 왕자의 친구이다. 이밖에 무덤파는 사람(Bar, T)들이 등장하며 합창단으로서는 귀족들, 귀부인들, 병사들, 하인들, 배우들, 덴마크의 농부들이 나온다. 장소는 덴마크에서 스웨덴을 바라보는 해안가에 있는 엘시노어(Elsinore) 인근의 크론베리(Kronberg) 성이다. 1585년에 완성된 성이다. 크론베리 성은 일면 햄릿성(Hamlets Castle)이라고도 부른다.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크론베리 성을 보러 한적한 이곳을 찾아온다. 엘시노어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희곡 속의 성일 뿐이다. 덴마크의 헬셍괴르(Helsingør)에 있는 크론베리가 햄릿의 엘시노어 궁성과 위치 등이 흡사하여서 헬셍괴르의 크론베리성을 마치 햄릿에 나오는 궁성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헬셍괴르에서 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 스웨덴의 헬싱보리(Helsingborg)이다.
헬셍괴르에 있는 크론베리 성. 햄릿의 무대가 된 장소이다. 16세기에 완성된 고성이다.
[1막] 1장은 덴마크 왕궁의 대관식 홀이다.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게르트루드 왕비에 대한 대관식이 진행되고 있다. 게르트루드 왕비는 고인이 된 햄릿 왕의 왕비였으나 햄릿 왕이 급작히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른 햄릿 왕의 동생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여 계속 왕비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왕이 왕비의 관을 게르트루드에게 씌워주는 것으로 대관식은 끝난다. 모두들 퇴장하자 햄릿 왕자가 나타난다. 햄릿 왕자는 어머니 게르트루드가 그렇게 일찍 재혼을 하며 그것도 삼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무척 실망해 있다. 잠시후 오펠리아가 들어온다. 햄릿과 오펠리아가 사랑의 듀엣을 부른다. 오펠리아의 오빠인 래르테가 등장한다. 노르웨이로 파견되기 때문에 작별의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햄릿은 오펠리아와 래르테가 왕와 왕비의 연회에 함께 가자고 하자 혼자 있겠다면서 거절한다. 궁신들과 병사들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접견실로 들어온다. 호라시오와 마르첼러스는 병사들에게 전날 밤에 성벽의 망루에서 선왕인 햄릿 왕의 혼령을 보았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햄릿 왕자에게도 그 말을 전하러 나간다. 2장은 성벽의 망루이다. 호라시오와 마르첼러스가 망루에서 햄릿 왕자를 만난다. 선왕의 혼령이 나타난다. 호라시오와 마르첼러스가 자리를 뜨자 혼령은 아들인 햄릿 왕자에게 클라우디우스가 독약으로 자기를 살해했다는 얘기를 해 준다. 혼령은 햄릿 왕자에게 클라우디우스에게 복수를 해 달라고 요청한다. 다만, 왕비 게르트루드만은 그냥 두라고 당부한다. 혼령이 사라지자 햄릿 왕자는 칼을 뽑아 들고 부왕의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한다.
서로의 사랑을 다짐하며 행복한 오펠리아(말리스 페터젠)과 햄릿(사이몬 킨리사이드). 2010년 메트로폴리탄
[2막] 1장은 정원이다. 오펠리아가 책을 읽고 있다. 오펠리아는 햄릿이 자기에게 갑자기 무관심해 진 것 같아서 걱정이다. 햄릿이 저 멀리에 나타난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진다. 왕비가 정원에 나타난다. 오펠리아는 왕비에게 이제 궁정에 머물고 싶지 않으니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왕비는 오펠리아에게 더 머물러 있으라고 주장한다. 오펠리아가 정원에서 나가자 클라우디우스 왕이 들어온다. 게르트루드는 햄릿 왕자가 아무래도 선왕을 살해한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면서 걱정하자 클라우디우스 왕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햄릿이 들어와서 일부러 미친 척한다. 햄릿 왕자는 클라우디우스가 친절하게 접근하자 그를 거부하며 그날 저녁에 극단이 와서 연극을 공연하겠으니 참석해달라는 말만 한다. 클라우디우스와 게르트루드가 퇴장하자 배우들이 들어선다. 햄릿 왕자는 그들에게 The Murder of Gonzaga(곤자가의 살해)를 무언극으로 공연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는 배우들에게 건배를 하고 O vin, dissipe la tristesse(술로 근심을 풀고)라는 축배의 노래를 부르며 어릿광대들과 즐겁게 어울린다. 유명한 햄릿의 아리아이다. 사람들에게 일부러 미친듯이 보여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이다. 2장은 연극의 장면이다. 왕과 왕비와 궁신들이 연극을 보기 위해 궁성의 홀에 마련된 무대 앞으로 모인다. 연극이 시작된다. 배우들은 무언극으로 연기를 한다. 햄릿이 대사를 읽어서 연극의 내용을 설명한다. 햄릿 왕자의 아버지를 살해한 스토리와 비슷한 내용의 연극이다. '암살자'는 왕을 독살한후 왕관을 자기의 머리에 쓴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클라우디우스가 창백해지면 돌연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당장 연극을 중지하라고 명령한다. 배우들이 무대에서 퇴장한다. 햄릿 왕자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선왕을 살해한 장본인이라며 비난한다. 그리고는 클라우디우스의 머리에서 왕관을 낚아 챈다.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두려운 심정으로 합창을 한다.
2막 2장의 연극장면. 미네소타오페라 공연. 선왕의 귀에 독약을 부어 독살하는 장면이다.
[3막] 왕비의 거실이다. 햄릿이 저 유명한 To be or not to be를 독백한다. 그러다가 누가 들어오는 기척이 나자 타페스트리 뒤로 몸을 숨긴다. 클라우디우스가 들어와서 큰 소리로 참회의 기도를 한다. 햄릿은 만일 기도 중에 그를 죽이면 그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서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그때 폴로니우스가 들어와서 클라우디우스와 얘기를 나누며 자기의 심정이 심히 혼란하고 복잡하다고 말한다. 햄릿은 폴로니우스도 부왕의 살해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햄릿이 뛰쳐 나오려는데 두 사람은 급히 나간다. 잠시후 이번에는 게르트루드 왕비가 오펠리아와 함께 들어온다. 왕비는 햄릿을 보자 어서 오펠리아와 결혼하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햄릿은 원수인 폴로니우스의 딸과는 결혼할수 없다고 생각하여 결혼을 거부한다. 절망한 오펠리아가 손가락에 끼고 있던 약혼 반지를 빼내어 햄릿에게 주고 떠난다. 햄릿은 어머니인 게르트루드에게 부왕의 죽음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고 다그치지만 게르트루드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햄릿이 게르트루드로부터 부왕 독살에 대한 자백을 받아 내려고 하는데 부왕의 혼령이 눈 앞에 보인다. 부왕의 혼령은 햄릿에게 게르트루드를 보호하고 살려주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한번 상기시킨다.
현대적 연출의 미네소타오페라 무대. 햄릿이 오펠리아에게 자기의 마음을 아해하여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4막] 오펠리아의 광란의 장면이다. 햄릿으로부터 거절을 당한 오펠리아는 정신이상이 생겨 호수에 몸을 던진다.
[5막] 무덤의 장면이다. 두 명의 무덤파는 사람들이 새 무덤을 파고 있다. 햄릿은 그들에게 누가 죽었느냐고 묻지만 두 사람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햄릿은 오펠리아에게 너무 심하게 대한 것을 후회하는 아리아를 부른다. 노르웨이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오펠리아의 오빠 래르테는 오펠리아가 죽은 것을 알고 크게 놀란다. 그리고 오펠리아의 죽음이 햄릿 때문이라는 것을 믿는다. 래르테는 햄릿을 보고 결투를 신청한다. 햄릿이 부상을 당한다. 두 사람의 결투는 오펠리아의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바람에 중단된다. 햄릿은 비로소 오펠리아가 죽은 것을 알게 된다. 선왕의 혼령이 다시 나타나서 햄릿에게 어서 클라우디우스를 죽이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며 꾸짖는다. 햄릿이 래르테와의 결투를 잠시 보류하고 클라우디우스를 찾아 칼로 찔러 죽인다. 부왕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혼령이 나타나서 클라우디우스의 죄를 확인하고 그를 죽인 햄릿은 결백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햄릿 왕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햄릿 왕자를 새로운 왕으로 선포하지만 햄릿은 아직도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코벤트 가든의 공연에서는 공연이 더 단축되었다. 마지막 장면에 혼령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햄릿은 클라우디우스를 죽이고 나서 오펠리아의 시신을 붙잡고 죽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코벤트 가든 버전은 지금까지 다시 사용도지는 않았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 제작하고 햄릿 왕자역을 맡은 1948년도 영화. 게르트루드 역은 아일린 헐리. 오펠리아는 진 시몬스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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