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니...그 짧은 생애
34세에 세상을 떠난 천재 작곡가
벨 칸토 오페라의 거장
시실리의 카타니아에 있는 벨리니 기념상
천재는 단명한다는 이상한 말이 있다. 음악가 중에서 천재라는 호칭이 붙은 사람은 몇명 안된다. 모차르트는 신동의 시절을 거쳤으므로 당연히 천재의 반열에 들어가기에 제외하고 나머지는 독일의 멘델스존, 프랑스의 조르즈 비제와 카미유 생 상스, 그리고 오페라에서는 벨리니, 도니체티, 로시니를 꼽는다. 베르디는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위대한 오페라를 작곡하여 '오페라의 황제'라는 호칭을 갖고 있지만 굳이 천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가곡의 왕'인 슈베르트도 나중에 천재 소리를 들었다.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요컨대 위대한 작곡가 중에서 요절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얘기의 초점이다. 가장 일찍 세상을 떠난 작곡가는 슈베르트(1797-1828)일 것이다. 31세에 세상을 떠났다. 멘델스존(1809-1847)은 37세에 세상을 떠났고 비제(1838-1875)는 36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모차르트(1756-1791)는 35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시실리의 카타니아 출신인 빈센초 벨리니(1801-1835)는 34세에 세상을 떠났다. 빈센초 벨리니의 짧은 삶과 작품 세계를 다시 한번 조명해 본다. 만일 벨리니가 하다못해 도니체티처럼 5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더라면 최소한 10여편이 넘는 주옥과 같은 오페라를 남겼을 것이다.
벨리니는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작곡가이다. 행복하다는 것은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내놓은 오페라마다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벨리니를 오페라의 황금시대에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의 하나로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페라의 황금시대에 활동했다는 것은 그 시기에 위대한 성악가, 위대한 대본가, 위대한 연출가들과 함께 일할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실로 행복이 아닐수 없다. 불행하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벨리니는 시실리 카타니아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벨리니에게 음악적으로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할아버지인 빈센초 토비아 벨리니(1744-1829)는 실은 이탈리아 중부의 토리첼라(Torricella: 오늘날의 Torricella Peliga) 출신이다. 토리첼라는 로마의 동쪽, 아드리아 바다를 바라보는 고지대의 도시이다. 페스카라의 남쪽이다. 그러므로 벨리니를 반드시 카타니아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벨리니의 아버지인 로사리오 벨리니(1779-1842)는 어찌어찌 하다가 카타니아까지 와서 카타니아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이렇듯 할아버지도 음악가이고 아버지도 음악가인데 벨리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벨리니를 변호사로 만들기 위해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했다. 하지만 소년 벨리니는 음악 이외에는 어느 것도 공부하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눈총을 받으면서 손자 벨리니에게 음악의 기초와 작곡기법을 거의 10년 동안이나 가르쳐 주었다. 벨리니의 할아버지는 나폴리에서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이었다.
빈센초 벨리니
1819년, 벨리니가 18세의 청년일 때에 카타니아의 어떤 귀족이 벨리니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학비를 대주겠다고 했다. 벨리니는 할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나폴리음악원에 들어갔다. 나폴리음악원에서 벨리니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교수들은 모두 '아니, 이런 학생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라며 칭찬하기에 바빴다. 더구나 벨리니는 용모가 사랑스럽고 준수하여서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나폴리음악원은 벨리니의 졸업에 즈음해서 그가 1825년에 작곡한 세미 세라(Semi-sera) 작품인 '아델손과 살비니'(Adelson e Salvini)의 공연을 주선해 주었다. '아델손과 살비니'는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다. 그러는 중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이 나폴리음악원에게 새로운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한 일이 있었다. 나폴리음악원은 벨리니에게 음악원을 대표하여 산 카를로 극장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토록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비안카와 제르난도'(Bianca e Gernando: 1826)였다. 이 오페라의 제목은 원래 '비안카와 페르난도'였으나 당시에 페르난도가 나폴리왕국 왕위 계승자의 이름이므로 제르난도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다가 근자에 이르러 음악출판사와 음반제작자들이 합심하여 제목을 원위치하였다. 산 카를로에서 '비안카와 제르난도'가 공연될 때에 출연자는 그야말로 당대의 성악가들이 대거 망라되었다. 소프라노 앙리에트 메릭 라랑드(Henriette Meric-Lalande: 1799-1867), 테너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Giovanni Battista Rubini: 1794-1854), 베이스 루이지 라블라셰(Luigi Lablache: 1794-1858)이었다. 출연진이 이러하니 '비안카와 제르난도'가 박수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세사람은 그로부터 벨리니의 신작 오페라에 자주 출연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카타니아 대성당. 산타가타 교회. 벨리니의 아버지는 이 대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산 카를로에서의 '비안카와 제르난도'가 대성공을 거두자 산 카를로의 임프레사리오인 바르바자는 벨리니에게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면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공연되도록 주선해 주겠다고 말했다. 벨리니는 산 카를로의 추천장으로 무장하고 라 스칼라를 찾아갔다. 라 스칼라는 벨리니의 '비안카와 제르난도'의 음악을 들어보고 상당히 감동하였다. 라 스칼라는 벨리니를 당시 라 스칼라의 전속작곡가나 마찬가지인 사베리오 메르카단테(Saverio Mercadante: 1795-1870)의 산하에 두어 함께 일하도록 했다. 메르카단테는 벨리니에게 밀라노의 한다하는 음악관련 인사들을 소개해 주었다. 벨리니가 위대한 시인이며 대본가인 펠리체 로마니(Felice Romani: 1788-1865)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이때였다. 펠리체 로마니는 나중에 벨리니와 콤비가 되어 여러 오페라의 대본을 제공했다. 두 사람이 합작한 첫 오페라는 '해적'(Il pirata)으로서 1827년에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해적'은 대성공이었고 이후 이탈리아의 여러 극장에서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서둘러 공연하는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다. 그때 벨리니는 26세의 청년이었다.
'비안카와 페르난도' CD 커버. 초연 당시의 제목은 '비안카와 제르난도'였다.
벨리니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자 밀라노의 임프레사리오로 유명한 바르톨로메오 메렐리(Bartolomeo Merelli: 1794-1879)가 벨리니를 찾아왔다. 메렐리는 제노아에 카를로 펠리체 극장의 개관공연을 준비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메렐리는 벨리니에게 새로운 오페라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벨리니는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고 생각하여 '비안카와 제르난도'의 수정본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벨리니는 이미 '비안카와 제르난도'의 음악을 일부 수정하였으며 펠리체 로마니도 대본의 이곳저곳을 수정한바 있다. 제목도 '비안카와 페르난도'로 바꾸었다. '비안카와 페르난도'의 수정본은 1828년 제노아의 카를로 펠리체 극장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대 최고의 테너인 조반니 다비드(Giovanni David: 1790-1864)가 페르난도를 맡았기 때문에 더 인기를 끌었다. 한편, 벨리와 펠리체 로마니는 그때 이미 '이상한 여인'(La straniera)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상한 여인'은 1829년 라 스칼라에서 공연되어 역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상한 여인' 음반. 소프라노 루치아 알리베르티(Lucia Aliberti)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이번에는 파르마의 공작극장(Ducale Teatro: 현재의 Teatro Regio)이 유명세가 붙은 벨리니에세 작품을 의뢰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벨리니는 너무 자신만만했던 것 같았고 로마니는 정신없이 바뻤다. 벨리니는 아직 그렇지 않았지만 로마니는 너무 유명해서 대본 주문이 쇄도했기 때문에 밥먹고 양치질 할 겨를도 없을 지경이었다. 어쨋든 두 사람은 파르마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볼테르의 '자이르'(Zaire: Zaira)를 주제로 선택했다. 파르마는 벨리니와 로마니가 제 기간 내에 오페라를 완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볼테르의 유명한 '자이르'를 그저 쉽게 쉽게 작곡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파르마 사람들이라고 하면 오페라에 있어서 까다롭기로 한가닥 하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나중에 베르디와 토스카니니도 파르마에서 고된 시어머니들을 만나 고생했던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자이르'는 1829년에 파르마에서 초연을 가졌다. 예상대로 파르마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일이 더 나빠지려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로마니는 파르마의 어떤 특별법을 공공연히 조롱하였고 그 때문에 체포될 지경에 까지 이르른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파르마에는 누구든지 콧수염을 기르지 못하며 외지에서 파르마를 방문하는 사람은 사흘간 얼굴에 있는 모든 수염을 깍아야 한다는 법이었다. 파르마 당국은 콧수염 등등을 기르는 것이 남에게 혐오감을 주며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로마니는 '나 원 참, 도대체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있나?'라면서 비난을 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로마니는 당국에 의해 체포될 뻔 했는데 마침 음악이라면 밥먹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파르마 공작부인인 마리 루이스(Marie Louise: 1791-1847)가 영향력을 행사하여 로마니의 감옥행을 구원해 주었다.
위대한 대본가인 펠리체 로마니. 그는 콧수염 뿐만 아니라 구렛나루까지 잘 기르고 있었다. 파르마에서는 법에 의해서 누구든지 콧수염을 기를수 없으며 방문자들은 얼굴에 있는 모든 수염을 사흘동안 깍아야 했다. 그러나 벨리니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벨리니는 '자이르'의 남자 주인공인 네레스타노(Nerestano)를 바지역할이 하도록 음악을 만들었다. 즉, 여자가 남자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자이르'의 스코어를 보면 남자 주인공의 음역이 대단히 높게 되어 있어서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19세기 초에는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남자 주인공의 역할을 일부러 여자(주로 메조소프라노)가 맡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관중들의 만족을 모르는 기호에 응답하기 위해서였다. 관중들은 여자가, 그것도 남장을 하고 오페라에 출연하면 그렇게들 좋아했다. 돌이켜 보면 여자들은 거의 수백년 이상이나 사람들 앞에서 무대에 올라와 공연하는 것이 금지되었었다. 주로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오페라에서도 여자 역할을 남자가 맡아했다. 거세된 남자인 카스트라토가 활개를 쳤는가 하면 변성이 안된 소년 소프라노도 한 몫을 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초에 그런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여자들이 남자역할까지 해도 좋게 되었다. 주로 남자들인 관중들은 여자가 바지를 입고 나와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였다. 그러므로 작곡가들로서는 관중들의 기호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여자들을 많이 등장시켜야 했다. 또 하나의 다른 이유가 있다. 오페라의 생명은 아리아이다. 아리아의 가사는 높은 음일수록 분명하게 들린다. 박수를 많이 받으려면 높은 음이 많이 나오는 아리아를 작곡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남자 역할이라고 해도 여자가 불러야 높은 음이 잘 나기 때문에 여자들을 기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자이르'의 남자 주인공 역할은 여자가 맡았으며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파르마에서는 그 관례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
'자이르(자이라)'의 한 장면
그 다음번의 벨리니-로마니 합작은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I Capuleti e i Montecchi: 1830)였다. 여기에도 바지역할이 등장한다. 로메오를 남자가 아닌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도록 음악을 만든 것이다. 베니스의 라 페니체에서 초연되었다. '자이르'에 사용했던 음악을 많이 가져다가 사용했다. 당시에는 성공하지 못한 오페라의 음악을 다른 새로운 오페라의 음악으로 사용하는 것이 관례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는 의례 그러려니했다. 그러므로 만일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가 파르마에서 공연되었다면 또 다시 쓴 잔을 마셔야했겠지만 베니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사람들도 달랐다.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는 대성공이었다. 첫날 공연이 끝나자 벨리니의 열렬 팬들은 벨리니는 어깨에 메고 수많은 횃불을 밝히면서 호텔까지 행진하였다. 베니스에서의 대성공은 또 다른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1831년 밀라노에서의 '몽유병자'(La sonnambula)였다. 밀라노의 카르카노 극장에서였다. 당대의 최고 소프라노인 주디타 파스카(Giuditta Pasta)가 아미나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더구나 열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몽유병자'와 같은 해에 이번에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노르마'(Norma)가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노르마'의 첫날 공연은 실패였다. 그러나 그 후의 공연부터는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오늘날 '노르마'는 전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노르마'에 나오는 '정결한 여신'(Casta diva)은 벨리니 최고의 아리아로서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에서 로메오와 줄리엣. 로메오는 메조소프라노가 맡았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All good things must come to an end.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벨리니-로마니 콤비가 결별을 하게 된 것이다. 벨리니의 다음 오페라인 '텐다의 베아트리체'(Beatrice di Tenda: 1833)가 초연을 마친 직후에 두 사람은 결별했다. 로마니가 벨리니를 떠난 것은 '텐다의 베아트리체'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베니스에서의 '텐다의 베아트리체'는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문제는 로마니가 너무 바뻐서 벨리니를 위해 더 이상 대본을 쓸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로마니는 어찌나 재능이 뛰어나고 인기가 많았던지 심지어 너댓편의 대본을 동시에 부탁받아 써야 할 정도로 바뻤다. 사람들은 로마니에 대하여 '아무리 바쁘고 일이 많다고 해도 벨리니의 대본을 쓰면 성공은 거의 맡아놓은 당상인데...'라면서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본가들은 작곡가들이 받는 수입의 일부를 작곡가들이 떼어 주어야 받는 것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많은 일꺼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벨리니가 베니스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을 때 로마니는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밀라노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베니스의 라 페니체는 로마니가 밀라노에 가서 올 생각을 하지 않자 대본가가 라 페니체와의 계약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벨리니와 로마니는 라 페니체와 일정한 계약을 맺었었다. 밀라노의 극장들은 베니스의 라 페니체가 로마니를 어서 돌려보내라는 식으로 독촉하자 보내지 않을수 없었다. 당연히 로마니는 라 페니체의 그런 수단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텐다의 베아트리체'의 초연은 며칠 지연되었다. 초연이 지난후 로마니는 베니스의 어떤 신문에 기고하여 '벨리니 때문에 지연되었다'면서 불통을 벨리니에게 돌렸다. 그런 소리를 듣고서는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벨리니도 당연히 로마니와 결별의 수순을 밟았다.
'텐다의 베아트리체'의 무대.
벨리니의 다음번 행선지는 런던이었다. 런던에서는 벨리니의 오페라들이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영어대본의 '노르마'는 주디타 파스타가 런던까지 와서 출연했기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를 끌었다. 그후 벨리니는 선배인 로시니가 그랬던 것 처럼 파리로 자리를 옮겼다. 벨리니도 로시니처럼 파리를 정복하려는 희망을 가졌다. 벨리니는 파리에서 벨지오이오소 대공녀의 살롱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당시 파리의 문화예술계의 한다하는 인물들이 출입하는 살롱이었다. 벨리니는 이곳에서 쇼팽을 만났고 조르즈 상드를 만났으며 알렉산더 뒤마 피스도 만났다. 그리고 신랄하기로 유명한 하인리히 하이네도 만났다. 하이네는 젊은 벨리니를 보고 '춤추는 펌브의 한숨소리와 같다'고 말했다. 무슨 의도로 그런 표현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벨리니는 파리에 있는 두개의 극장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갸르니에가 설계했기 때문에 갸르니에 극장이라고도 부르는 파리 오페라(Paris Opéra)극장이며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오페라들을 주로 공연하는 이탈리아 극장(Théatre des Italiens)이었다. 오페라 극장에서는 로시니의 '고린도 공성'(Le Siége de Corinthe: 1826), '모세와 바로'(Moise et Pharon: 1827), '오르 백작'(Le Comte Ory: 1828), '귀욤 텔'(Guillaume Tell: 1829)가 초연되었다.
당대의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
벨리니는 로시니처럼 그의 작품들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파리 오페라극장과 협의를 진행하였으나 협의는 지지부진하고 도무지 진척이 되지 않았다. 벨리니는 이탈리아극장과 접촉하였다.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카를로 페폴리 백작이 '의회파와 왕당파'(Tetes Rondes et Cavaliers)라는 희곡을 바탕으로 대본을 쓰기로 했다. 그렇게하여 탄생한 것이 저 유명한 '청교도'(I puritani: 1835)였다. '청교도'는 놀랍도록 찬란한 소프라노 콜로라투라의 멜로디, 마치 성층권에 있는 듯한 테너의 노래, 풍부하고 화려한 앙상블로서 벨 칸토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청교도'는 비록 '노르마'에는 미치지 못하는 사랑을 받았지만 파리 공연을 대성공으로 이끈 것은 이른바 '청교도 쿼텟'이라고 불리는 네 명의 솔리스트 주인공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소프라노 줄리아 그리시(Giulia Grisi: 1811-1869), 테너 조반니 루비니(Giovanni Rubini), 바리톤 안토니오 탐부리니(Antonio Tamburini: 1800-1876), 베이스 루이지 라블라셰(Luigi Lablache)이었다. 이들 '청교도 쿼텟'은 하도 유명해서 '청교도'를 가지고 유럽의 가는 곳마다 대인기를 끌었다. 영국에서 장차 여왕이 될 빅토리아 공주의 앞에서 공연하여 찬사를 받은 것은 하나의 예이다.
노르마역의 줄리아 그리시
그러나 벨리니는 '청교도'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별로 그 성공을 엔조이 하지 못했다. '청교도'의 1월 초연이 있은지 약 반년 후에 벨리니는 파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뜻하지 아니하게 몸이 아파서 푸토(Puteaux)에 있는 친구들의 빌라에 가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 프랑스에서는 콜레라가 유행이었다. 파리가 유행의 도시라는 말이 실감나는 일이었다. 벨리니도 처음에는 콜레라에 걸린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과 떨어져서 조용히 투병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는 중에 얼마 후에 빌라의 주인이 벨리니를 빌라에 혼자 두고 어디론가 외출을 하였다. 빌라의 주인은 벨리니가 콜레라이므로 전염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벨리니를 혼자 남겨두고 떠났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1835년 9월 23일, 누군가가 그 빌라의 어떤 방에서 벨리니가 숨을 거두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중에 의사들의 검사에 의하면 벨리니는 콜레라가 아니라 장염과 간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빌라의 주인이 벨리니가 콜레라가 아닌 것을 알고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벨리니는 더 살아서 더 훌륭한 오페라들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벨리니는 모두 10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그중에서 오늘날까지도 세계 오페라 무대의 고정 레퍼토리로 사랑받고 있는 것은 서너 편에 불과하다. '노르마' '청교도' '몽유병자' 그리고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리니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으로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벨리니가 활동할 당시에는 이탈리아에서 파치니, 메르카단테, 몰라키, 케루비니, 심지어 도니체티도 활동했지만 벨리니는 이들 모두를 훨씬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여 비록 그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일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서 영원한 걸작들이 되었다. 하이네는 벨리니를 유약하고 어찌보면 여성적인 성격이라고 한마디 했지만 그의 음악을 들으면 남성다운 장쾌함과 물이 흐르는듯한 유려함, 그리고 별이 빛나는 것과 같은 화려함이 배어 있음을 알수 있다. 벨리니의 3도 전조 화음은 훗날 베르디가 즐겨 사용하는 테크닉이다. 벨리는 진정으로 가장 영향력있는 작곡가이기도 했지만 음악사에 길이 남는 가장 성공한 작곡가였다.
'몽유병자'(라 손남불라)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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