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볼프 페라리의 '슬라이' - 28

정준극 2013. 6. 7. 09:38

슬라이(Sly)

또는 La legenda del dormiente risvergliato(The Legend of the Sleeper Awoken)

일명: 잠에서 깨어난 사람의 전설

에르마노 볼프 페라리(Ermano Wolf-Ferrari)의 3막 오페라 - 이탈리아 베리스모 오페라의 마지막 작품

 

슬라이(호세 카레라스)와 돌리.

 

음악학자들은 이탈리아의 에마누엘 볼프 페라리(Emanuel Wolf-Ferrari: 1876-1948)가 단 한편의 베리스모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1911년 베를린에서 초연된 '성모의 보석'(I gioielli della Madonna)를 말한다. 그 이후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베리스모 시대를 떠나서 현대주의 시대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모의 보석'이 이탈리아 베리스모 오페라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 동의할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음악학자들의 입장이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1927년에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슬라이'야말로 이탈리아 베리스모 오페라를 마지막으로 장식한 작품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돌이켜 보건대 음악학자들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조반니 파이시엘로(Giovanni Paisiello: 1740-1816)으로부터, 그렇지 않으면 도메니코 치마로사(Domenico Cimarosa: 1749-1801)로부터 시작되어, 아니 그보다 더 일찍 시작되어 벨칸토 시대를 지나고 주세페 베르디의 시대를 거쳐 마침내 베리스모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고 보고 있으며 그 대단원을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이 바로 볼프 페라리의 '슬라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슬라이'는 이탈리아 오페라 연혁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수 있다. 에마누엘 볼프 페라리는 볼프(Wolf)라는 이름에서 볼수 있듯이 독일계통이다. 베니스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독일인이었다.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래서 독일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성악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이지만 독일 오페라에서는 작곡을 한 사람과 오케스트라가 중요하다. '슬라이'에서도 성악가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도록 했다.

 

'슬라이'의 대본은 20세기 이탈리아의 극작가이며 극장감독이고 영화감독인 조바키노 포르차노(Giovacchino Forzano: 1884-1970)가 와성했다. 윌렴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의 서막에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독일어 버전은 발터 담스(Walter Dahms)가 Die Legende vom wiederweckten Schläfer(잠에서 깨어난 사람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슬라이'는 볼프 페라리의 다른 오페라들과는 달리 '성모의 보석'과 함께 비극이다. 비극이면서도 가벼운 코미디가 간간히 배어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베리스모 스타일것만은 분명하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이탈리아에서는 베리스모 오페라가 이미 자취를 감추었는데 '슬라이'가 나타난 것은 특별하다고 볼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볼프 페라리의 과거 오페라들은 로시니나 도니체티와 같은 스타일이라고 볼수는 없지만 거의 모두 코미디였다. 그래서인지 '슬라이'에도 과거 코미디 작품들의 영향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슬라이'를 보면 첫 부분은 별로 신통치도 않은 코미디이지만 코미디는 코미디이다. 그래서 실제적인 베리스모적인 내용은 2막의 후반과 3막에서 나타난다.

 

슬라이와 돌리

 

'슬라이'는 1927년도 저물어 가는 12월 29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여기서 잠시 당시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오페라 시즌에 대하여 참고가 되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19세기 당시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극장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즌으로 구분하여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 가을과 겨울 시즌을 합하고 봄과 여름 시즌을 합하여 두 개의 시즌으로 통합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라 스칼라가 그렇게 하였다. 그래서 1927-28년도 시즌은 11월 중순에 시작하여 5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런 중에도 12월 26일의 Sera di San Stefano(성스테판 이브닝)는 카니발이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대단히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라 스칼라는 그런 특별한 날을 맞이하여 세계초연의 공연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볼프 페라리의 '슬라이'를 선정하였다. 그리고 출연진도 최정상으로 선정했다. 소프라노는 아일랜드 출신의 마가렛 셰리단(Margaret Sheridan)이 캐스팅되었고 테너는 이탈리아의 정상인 아우렐리아노 페르틸레(Aureliano Pertile)가 맡도록 했다. 그런데 소프라노 마가렛 셰리단은 얼마전부터 병으로 앓고 있다가 최근에야 겨우 회복되어 '슬라이'에서 돌리를 맡을수 있다고 생각되었으나 또 갑자기 병이 도지는 바람에 도저히 맡을 수가 없어서 급히 공연날짜를 연기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야 했다. 메르세데스 로파트(Mercedes Llopart)라는 소프라노가 캐스팅 되었다. 초연 날짜는 최대로 빨리하여 12월 27일로 잡혔다. 라 스칼라에서의 '슬라이'는 성공이었다. 거의 이틀에 한번씩 다시 공연되어야 했다. 그 이후에도 라 스칼라에서 간헐적으로 공연되었으며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에서도 공연되었다. 독일에서는 드레스덴과 하노버가 '슬라이'를 처음 공연한 도시였다.

 

'슬라이'는 1950년대에 독일에서 다시 등장할 때까지 잠수하고 있었다. 그후 간혹 공연되다가 1982년에 하노버에서의 공연을 깃점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뜨거운 환영을 받기 시작했다. 스위스의 취리히 오페라하우스는 현대적인 연출로서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다. '슬라이'가 취리히의 무대에 새로운 현대적 감각으로 올려진 것은 '슬라이'의 연혁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취리히에서의 타이틀 롤은 테너 호세 카레라스가 맡아서 놀라운 감동을 주었다. '슬라이'의 미국 초연은 1999년 봄 워싱턴내셔널오페라(WNO에서였다. 역시 호세 카레라스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2002년에는 메트로폴리탄과 바르셀로나의 그란 테아트레 델 리체우에서 공연되었다.

 

음악적으로 보면 '슬라이'는 동화적인 요소를 안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아직 비극이 시작되지 않은 1막에서 그러했다. 전반적으로 '슬라이'의 음악은 경쾌한 것이다. 특히 런던의 주점에서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술을 마시는 장면의 음악이 그러했다. 슬라이의 노래인 '춤추는 곰'은 이 오페라의 전편을 통해서 마치 주제곡처럼 자주 등자안다. 나중에 쿠르트 봐일(Kurt Weil)은 '슬라이'의 1막의 음악은 물론이고 레온카발로의 음악도 상당부분 인용하였다. 그러나 2막에 들어와서는 베리스모의 분위기가 폭넓게 펼쳐진다. 특히 첫 부분에 나오는 슬라이와 돌리의 듀엣이 그러하다. 2막의 마지막 파트에서 슬라이가 지금까지의 일이 한낱 게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음악은 순전히 베리스모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그러다가 3막 마지막에서 슬라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칼로 팔뚝을 그며 부르는 노래인 No, io non sono un buffone에서는 베리스모의 진면목을 볼수 있다. 슬라이는 너무 일찍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돌리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비로소 알게된 때에는 이미 늦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장면이다. 대본에는 분명하게 적혀 있지 않지만 슬라이가 죽음으로서 돌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백작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기의 애인을 잃었다.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슬라이(시인: T), 돌리(S), 웨스트모어랜드 백작(Bar), 존 플레이크(B), 사환(S), 로살리나(S), 하숙집 여주인(MS ), 소년하인(T), 귀족1/무어인(T), 귀족 2/인디안(T), 귀족 3/늙은 하인(T), 귀족 4/중국인(B-Bar)), 귀족 5/의사(Bar), 귀족 6(B), 귀족 7(B), 귀족 8(B), 하녀 1(MS), 하녀 2(MS), 하녀 3(MS), 경찰관 스네어/하인 1(B), 군인/하인 2(B), 쿡/하인 3(B). 기타 마을사람들.

 

돌리와 웨스트모어랜드 경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마을에 있는 활콘(Falcon)이라고 하는 술집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흥겹게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서민들의 소박한 삶이 넘쳐흐른다. 왕족과 다름없는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웨스트모어랜드(Sir Westmoreland 또는 백작)경에게는 앞으로 결혼할 돌리(Dolly)라고 하는 인형처럼 귀엽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돌리는 웨스트모어랜드의 궁전에서 화려하고도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돌리는 오히려 그런 지나치게 화려한 생활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한다. 돌리는 서민들과 어울리고 싶은 생각에 몰래 궁전을 빠져나와 마을의 활콘 주점에 들어선다. 술집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돌리의 아름다움과 은연중 기품있는 행동에 감명을 받는다. 궁전에 있던 웨스트모어랜드경은 돌리가 마을로 나들이 나건 것을 알고 시종들과 함께 찾으러 나간다. 웨스트모어랜드경은 돌리가 활콘 주점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한참 유쾌한 분위기에 젖어 있던 돌리는 웨스트모어랜드가 어서 돌아가자고 하자 잠시만 더 있다가 가자고 조른다. 이 때 시인인 슬라이(Sly)가 술집에 들어선다. 빚 때문에 자기를 체포하러 쫓아다니는 스네어(Snare: 함정이라는 뜻)라는 경찰관을 가까스로 따돌리고 온 것이다. 이 술집의 단골인 슬라이는 경찰을 성공적으로 피해 도망온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노래를 부른다. 마을 사람들을 미인 돌리와 시인 슬라이가 있기에 더욱 즐거워한다. 슬라이는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술을 얻어 마신다. 돌리를 본 슬라이는 이 여인이야 말로 자기가 꿈속에서 그리던 여인이라고 생각하여 흥분되고 기쁜 나머지 계속 포도주를 마신다. 정작 돌리에게는 말한마디 건네지 못한 슬라이는 그만 만취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웨스트모어랜드는 이 술 취한 시인이 돌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처음에는 혼을 내줄까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가난하지만 시와 노래로 유쾌하고 살고 있는 슬라이에게 은근히 부러움을 느껴 상관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슬라이를 한번 멋있게 골탕먹이고 싶은 생각을 한다. 단 하루만이라도 꿈속에서처럼 화려하게 살도록 해주고 그 후에 현실로 되돌아오게 하여 더 이상 돌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종들에게 슬라이를 궁전으로 데려가 자기의 화려한 옷을 입히고 침대에 누워 자도록 한다. 웨스트모어랜드는 슬라이가 잠에서 깨어나면 자기 집처럼 생각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도 시종처럼 연기를 하라고 지시한다.

 

제2막. 궁전의 침실에서 웨스트모어랜드와 시종들이 슬라이가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이 되어 슬라이가 눈을 뜬다. 그러나 화려한 분위기와 자기가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꿈을 꾸고 있는 줄로 착각한다. 슬라이의 충실한 시종으로 가장한 웨스트모어랜드는 슬라이가 열흘 동안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고 설명해 준다. 웨스트모어랜드는 슬라이의 부인이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침식을 잊을 정도로 계속 기도만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준다. 바로 옆방에서는 슬라이의 부인 역할을 맡은 돌리가 기도하는 소리가 들린다. 슬라이는 부인이 있었나라고 생각하며 한번 만나겠다고 나선다. 얼굴에 베일을 쓴 돌리가 들어오자 슬라이는 이 귀부인이 진짜 자기 부인인 것으로 생각하고 부인과 단 둘이 있고 싶다고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가달라고 부탁한다. 돌리를 본 슬라이는 바로 이 여자야 말로 자기가 꿈속에 그리던 그 여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시로 돌리에게 자기의 마음을 전한다. 궁전 생활이 따분해서 견딜수 없었던 돌리는 시인 슬라이가 부르는 감미로운 사랑의 노래를 듣자 마음이 크게 동요된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의 얘기를 주고받을 때에 이제 더 이상 진전되면 곤란하겠다고 생각한 웨스트모어랜드가 경찰관 스네어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슬라이를 놀라게 한다. 모두들 한바탕 웃는 중에 슬라이는 현실로 돌아온다.

 

제3막. 슬라이는 궁전의 지하실에 던져진다. 하인들이 모여들어 그를 놀린다. 슬라이는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돌리와 나누었던 사랑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기를 믿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현실인것을 깨달은 슬라이는 사랑하는 돌리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괴로워한다. 결국 슬라이는 괴로움을 참을수 없어서 깨어진 유리병으로 자기 팔목을 그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한다. 이 때 돌리가 나타나 죽어가는 슬라이에게 용서를 구하며 자기가 했던 얘기들은 진심이었다고 말한다. 슬라이는 돌리에게 마지막으로 키스해 달라고 한후 숨을 거둔다. 돌리는 배부른 사람들의 무모한 장난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것을 저주한다.

 

주점에서의 슬라이(호세 카레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