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멘델스존의 '카마초의 결혼' - 31

정준극 2013. 6. 12. 09:28

카마초의 결혼(Die Hochzeit des Camacho) - Camacho's Wedding

펠릭스 멘델스존의 2막 징슈필...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의 에피소드

 

펠릭스 멘델스존

 

애창명곡인 '노래의 날개 위에', 그리고 결혼행진곡으로 유명한 '한여름 밤의 꿈'을 작곡한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이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일이 없지만 실은 멘델스존도 여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오페라는 오페라이지만 오페라의 장르로 보면 독일적인 징슈필(Singspiel)을 작곡했다. 대부분 어찌보면 습작 수준의 징슈필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카마초의 결혼'(Die Hochzeit des Camacho)은 일반적인 오페라(징슈필)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2막의 '카마초의 결혼'은 멘델스존이 1824년과 1825년에 완성했으며 처음 일반을 위해 공연된 것은 멘델스존이 18세 때인 1827년 4월 29일 베를린의 샤우슈필하우스(Schauspielhaus: 연극극장)에서였다. 대본은 멘델스존의 친구인 프리드리히 보이그트(Friedrich Voigt)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퀴티에리아와 바실리오, 카마초와 루신다

 

멘델스존이 '카마초의 결혼'을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5세 때였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이미 그 이전에 가족들을 위해 징슈필을 작곡한바 있다. 11세 때인 1820년에는 '병사의 사랑'(Die Soldatenliebschaft)이라는 징슈필을 작곡했고 1821년에는 '두명의 선생님'(Die beiden Padagogen)을, 1822년에는 '유랑 배우'(Die wandernden Komodianten)을 작곡했다. 그러나 이 징슈필들은 어찌보면 훗날의 본격적인 작품들을 위한 준비용이나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인 징슈필을 작곡한 것은 15세가 되던 1824년에 '두명의 조카'(Die beiden Neffen)와 '외국에서의 귀환'(Die Heimkehr aus der Fremde)을 작곡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카마초의 결혼'에 도전하였다.  멘델스존은 1824년에 이미 '카마초의 결혼'의 1막을 완성하였으며 1825년 1월에는 서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멘델스존은 '카마초의 결혼'이 가족이나 친구들이 아닌 일반사람들의 앞에서 공연된다는 점을 생각하여 신중하게 추진하였다. '카마초의 결혼'에서 돈 키호테 역을 맡았던 바리톤 에두아르 드브리앙(Eduard Devrient)은 '카마초의 결혼'에 대하여 '멘델스존은 마치 자식을 무한히 사랑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이 작품을 작곡했다'고 증언했다.   

 

카라스코역의 바리톤 존 안토니오우.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카마초의 결혼'의 음악을 들어보면 멘델스존이 베버와 모차르트의 작품을 미리 자세히 공부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베버나 모차르트 스타일의 음악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멘델스존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놀랍게도 '카마초'에서 나중에 바그너가 즐겨 사용한 라이트모티프(Leitmotiv)의 요소를 찾아 볼수 있다. 돈 키호테를 표현하기 위해 관악기들을 사용하여 주제음악을 연주토록 한 것이다. 돈 키호테의 주제는 오프닝에서, 그리고 피날레의 카덴스에서 들을수 있다. 베를린 샤우슈필하우스의 음악감독인 스폰티니는 '카마초'를 무대에 올리기 전에 음악과 대본을 검토하였다. 스폰티니는 호프오퍼(궁정오페라)의 지휘자였다. 그때 스폰티니는 젊은 멘델스존을 창문으로 데려가서 밖에 보이는 유태교 회당(시나고그)을 가르키면서 Mon ami, il vous faut des idees grandes, grandes comme cette coupole(여보게 나의 친구여, 커다란 이상을 가져야 하네, 저기 보이는 저 유태회당의 돔처럼 커다란 이상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혼준비


리허설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돈키호테를 맡은 바리톤이 황달병에 걸려서 연습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초연의 밤이 다가왔다. 극장의 한쪽 박스에 앉아 있던 멘델스존은 오페라가 진행될수록 도무지 조바심이 나고 걱정이 되어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멘델스존은 2막이 시작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베를린의 신문들은 '카마초'에 대하여 혹평을 아까지 않았다. 어떤 평론은 멘델스존이 유태계라는 이유를 들어서 유태인의 음악이 그러면 그렇지라며 조롱하기까지 했다. 저명한 평론가인 루드비히 렐슈타브(Ludwig Rellstab)는 대본에도 문제가 많다고 하면서 대본이 유치하고 부담이 된다고 지적했다. 멘델스존은 다음날의 공연을 즉각 취소했다. 그이후로 '카마초'는 멘델스존의 생전에 다시 공연된 일이 없다. 다만, 1828년에 피아노 스코어가 출판되었다. 아마도 멘델스존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이 경비를 내서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현대에 들어와서 '카마초'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서 몇번 공연되었다. 그중의 하나는 1987년 2월 멘델스존의 마지막 수정본을 가지고 영국의 옥스포드 연극회관에서 공연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1995년에 잘츠부르크에서 공연한 것이다.

 

퀴티에리아와 바실리오

                              

'카마초의 결혼'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름다운 퀴티에리아(Quitieria: S)는 순박한 청년 바실리오(Basilio: T)를 사랑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퀴티에리아의 아버지 카라스코(Carrasco: B)는 퀴티에리아를 이웃에 살고 있는 카마초(Camacho: T)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퀴티에리아는 감히 아버지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다. 드디어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돈키호테(Don Quixote: Bar)와 산초 판자(Sancho Panza: B)도 결혼식에 초청을 받는다. 바실리오는 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들인 루친다(Lucinda: S)와 비발도(Vivaldo: T)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결혼식을 없던 것으로 돌리려고 애를 쓰지만 그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 때문에 헛수고만한다. 급기야 바실리오는 최후의 수단을 생각해 낸다. 퀴티에리아의 아버지인 카라스코에게 카마초 대신에 자기가 신랑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만일 들어주지 않으면 카라스코의 앞에서 단검을 꺼내어 가슴을 찔러 죽는척 한다는 아이디어이다. 그런 아이디어도 돈키호테가 눈치를 채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갈뻔 했으나 다행히 루친다가 돈키호테의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는 바람에 바실리오의 계략이 거의 성공에 이른다. 그리하여 바실리오가 단검으로 자기의 가슴을 찔러 쓰러지자 이에 놀란 카라스코가 순간적으로 퀴티에리아와 바실리오의 결혼을 승낙한다. 바실리오는 언제 죽었었느냐는 듯이 단번에 회복되어 일어난다. 카마초는 자기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고 바실리오에게 퀴티에리아를 양보한다.

 

'카마초의 결혼'의 피날레 장면을 그린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