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프랑스의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의 연혁

정준극 2013. 7. 15. 11:09

프랑스 오페라의 연혁

륄리에서 메시앙까지

 

프랑스 오페라의 문을 연 륄리의 '캬드뮈와 에르미온'(카드무스와 헤르미오네)

 

오페라라고 하면 원조가 이탈리아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오페라만 있으며 다른 나라의 오페라들은 거의 모두 이탈리아에서 수입하여 공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오페라도 이탈리아의 오페라에 못지 않게 전통이 있고 내실이 있다. 오페라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문화에서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다시 말하여 가장 매력적인 예술분야의 하나였다. 프랑스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 독일-오스트리아의 오페라와 함께 유럽 오페라의 3대 기둥의 하나이다. 륄리, 라모, 베를리오즈, 구노, 생 생스, 비제, 드빗시, 풀랑크, 메시앙...우리의 귀에 생생한 이들 이름은 프랑스 오페라를 이끌어간 주역들이었다. 프랑스 사람이 아니면서 프랑스에 와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름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기야 프랑스 오페라의 대부라고 할수 있는 륄리부터 이탈리아 출신이니 더 말해야 무엇하겠느냐 마는 아무튼 외국 출신의 오페라 작곡가로서는 글룩을 위시하여 케루비니, 로시니, 마이에르베르, 오펜바흐, 그리고 베르디까지 거론하지 않을수 없다. 

 

프랑스 오페라는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시작되었다.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의 '캬드뮈와 에르미온'(카드무스와 헤르미오네: Cadmus et Hermione)이 아마 프랑스에 만들어진 첫 오페라일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로베르 깡베르(Robert Cambert)의 '포몽'(포모네: Pomone)과 같은 테스트용 오페라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프랑스 오페라의 시작은 륄리로부터 출발점을 삼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이탈리아의 륄리가 어떻게 루이 14세의 궁정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심심풀이 삼아 소개코자 한다. 륄리는 지금으로부터 180여년 전 투스카니 공국의 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Giovanni Battista Lulli)였다. 그것을 나중에 프랑스 식으로 장 바티스트 륄리라고 고친 것이다. 룰리는 별로 부유하지 않은 방앗간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면서도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서 10세가 지나서부터 바이올린을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기 시작할 정도였다. 룰리는 14세가 되던 해의 마르디 그라스(사육제의 마지막 날)에 돈푼이라 벌어보려고 광대(할레퀸)의 옷을 입고 플로렌스의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춤도 추었다. 그런 그를 마침 지나가던 프랑스의 귀족인 로저(Roger)라는 사람이 보고 '거참 재주가 많네'라고 감탄하였다. 로저라는 사람은 왕족인 귀즈 공작의 아들로서 보통 로렝의 로저라고 불리던 행세깨나 하던 사람이었다. 로저는 파리에 돌아와서 사촌인 '마드무아젤 몽팡시에'(Madmoiselle Montpensier)에게 '플로렌스에 갔었는데 아주 재주가 많은 소년을 보았는데 데려다가 심부름이라도 시키면서 음악공부도 하라고 하면 나중에 여러모로 유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드무아젤 몽팡시에'는 라 그랑 마드무아젤(la Grand Madmoiselle)이라고 불리는 왕족으로 파리의 사교계에서는 무시못할 존재였다.

 

장 바티스트 륄리. 프랑스 오페라의 아버지이다.

 

그리하여 룰리는 '아버지 어머니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소자는 떠나옵니다'라고 인사를 한 후에 파리로 가게 되었다. 그때 룰리는 15세의 소년이었다. 파리에 온 룰리는 우선 이름부터 프랑스식으로 륄리라고 바꾸었다. 륄리는 15세때부터 20세가 되던 1652년까지 마므무아젤 몽팡시에의 저택(궁전)에서 갸르송 드 샹브르(Garcon de chambre)로서 지냈다. 좋게 말해서 챔버 보이(chamber boy)이며 일반적으로 말하면 라 그랑 마드무아젤의 몸종이었다. 륄리는 라 그랑 마드무아젤의 저택에 있으면서 그 집안에 속해 있는 여러 음악가들과 친하게 지내며 부지런히 음악공부를 했다. 그러던중 1652년에 르 그랑 마드무아젤이 이른바 프롱드(fronde)라는 반란사건으로 추방당하여 멀리 시골에 가서 살게 되자 륄리는 함께 시골까지 가서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파리에 남았다. 마침 파리에서는 왕실이 주관하는 발레공연이 있었다. Ballet royal de la nuit 라는 이벤트였다. 륄리는 라 그랑 마드무아젤의 저택에서 지낼때 친하게 지냈던 음악가들의 추천으로 발레 공연에 참가할수 있었다. 발레 또는 댄스라고 하면 륄리를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춤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그 공연에 발레를 좋아하는 젊은 루이 14세가 무대에 올라와서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춤을 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륄리는 루이 14세의 눈에 들어 급거 스카웃되어 왕궁의 전속 작곡가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왕궁의 음악감독으로 출세하였다. 륄리는 그후로부터 루이 14세의 신임을 단단히 얻어서 프랑스의 음악계를 좌지우지하다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중에 지휘봉인 지팡이를 잘못 내려쳐서 자기 발을 찍었고 그것이 도져서 결국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오페라에서 발레(댄스)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한다. '캬드뮈와 에르몽)에서.

              

륄리가 훌륭한 대본가인 필립 퀴노(Philippe Quinault: 1635-1688)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륄리와 퀴노는 Tragédie en musique(음악을 수반한 비극)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 댄스 음악이 나오며 합창이 장엄하고 화려하게 펼쳐지는 것이 특징이다. 륄리의 가장 중요한 후계자는 장 필립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이다. 라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독일 출신의 글룩이 뒤를 이었다. 글룩은 1770년대에 파리에서 여섯 편의 오페라를 발표하여 인기를 끌었다. 글룩의 오페라는 라모의 영향을 받았으나 드라마적인 요소에 더욱 중점을 둔 것이 특징이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에서는 18세기 중반까지 오페라 코미크라는 새로운 장르가 인기를 얻었다. 오페라 코미크의 특징 중의 하나는 아리아가 대화체의 대사로 교체된 것이다. 그러다가 1820년 경에는 파리인들의 글룩에 대한 취향이 로시니로 바뀌었다. 로시니의 '귀욤 텔'(Guillaume Tell: 윌렴 텔)은 그랜드 오페라의 설립에 크게 기여한 것이었다. 그랜드 오페라는 마이에르베르가 발전시킨 프랑스 오페라의 또 다른 새로운 장르이다. 그랜드 오페라가 프랑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을 때에 가벼운 오페라 코미크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가벼운 오페라 코미크의 선구자들은 부엘듀, 오버 등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프랑스 출신의 베를리오즈의 오페라는 또 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그의 걸작인 '트로이 사람들'(Les Troyens)는 그 장대함으로 관심을 끌었지만 작곡한지 1백여년이 되도록 완전 공연을 보지 못했다. '트로이 사람들'은 글룩의 전통을 이어 받은 대서사시적 작품이다.

 

프랑스 그랜도 오페라에 영향을 준 로시니의 '귀욤 텔' 무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그후 19세기 후반에 독일에서 온 자크 오펜바흐가 오페레타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파리는 물론 유럽 여러 지역을 압도하였다. 그의 오페레타는 경쾌하고 위트에 넘쳐 있으며 풍자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지하세계에 간 오르페오'(Orphée aux enfers)이다. 샤를르 구노는 '파우스트'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비제가 '카르멘'을 작곡했다. '카르멘'은 프랑스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그러는 한편, 바그너의 영향이 프랑스의 전통적인 오페라에 마치 도전이라도 하듯 등장하였다. 아마 바그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생각되는 오페라는 드빗시의 '플레아와 멜리상드'(Pelléas et Mélisande: 1902)일 것이다. 이밖에 20세기의 특출한 작고가로서는 라벨, 풀랑크, 메시앙 등을 들수 있다.

 

프랑스 오페라의 대표작인 '카르멘'. 현대적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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