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프랑스의 오페라

바그너리즘과 드빗시

정준극 2013. 7. 18. 12:42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오페라 - 바그너리즘과 드빗시 - 20세기와 그 이후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오페라]

 

1850년대 말, 파리의 오페라 활동은 파리 오페라극장과 오페라 코미크 극장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다른 극장들이 그러한 파리의 오페라 모노폴리를 타파해 보려고 했다. 테아트르 리리크(Théatre Lyrique)와 부프 파리지앙(Bouffes-Parisens)극장이었다. 테아트르 리리크는 1851년에 문을 열어 거의 20년 동안 활동하다가 1870년에 문을 닫았다. 베를리오즈는 이 극장에서 1863년에 그의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의 일부분만이 공연되는 것을 보았다. 베를리오즈는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트로이 사람들'의 전편(全篇)이 공연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테아트르 리리크는 신예 작곡가들의 작품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샤를르 구노와 조르즈 비제의 작품들이 테아트르 리리크의 무대를 빌려 초연되었다. 구노와 비제의 오페라들은 비록 베를리오즈의 작품에 비하여 혁신적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전통적인 순수오페라 또는 오페라 코미크에 비하여 새로운 음악적 추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구노와 비제는 소재를 세계 명작에서 찾아서 오페라를 만드는 노력도 기울였다. 구노의 '파우스트'(Faust: 1859)는 잘 아는대로 괴테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파우스트'는 전세계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구노의 다음 작품은 프레데릭 미스트랄이라는 사람이 프로방스 지방의 민화를 바탕으로 하여 쓴 '미레이유'(Mireille: 1864)였다. 그리고 1867년에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비제는 테아트르 리리크를 위해 '진주잡이'(Les pecheurs de perles: 1863)와 '퍼스의 어여쁜 아가씨'(La jolie fille de Perth)를 작곡하였다. 비제의 대성공작은 무어라해도 1875년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을 가진 '카르멘'이었다. 오늘날 '카르멘'은 전체 프랑스 오페라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카르멘'은 초기에 지나치게 노골적인 에로틱한 내용과 사실주의적인 표현으로 충격을 주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구노의 '파우스트'. 현대적 연출.

 

독일 출신인 자크 오펜바흐도 당시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는 파리의 오페라 극장들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오펜바흐는 프랑스 특유의 오페라 장르인 오페라 코미크가 더 이상 코믹한 오페라를 공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오펜바흐는 자기 작품의 공연을 위해 별도의 극장을 운영키로 했다. 1855년에 문을 연 부프 파리지앙이었다. 주로 단막의 완전 익살 및 풍자 작품을 공연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나폴레옹 정부는 별로 할 일도 없었던지 프랑스의 코믹 오페라는 단막이어야 하며 출연자도 5명을 넘으면 안된다는 규정을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후 그런 규제가 철폐되자 오펜바흐는 1858년에 '지하세계의 오르페'(Orphee aux enfers)를 보란 듯이 만들어서 무대에 올렸다. 대히트였다. 오펜바흐는 이 새로운 스타일의 코믹한 오페라를 오페레타라고  불렀다. '지하세계의 오르페'는 당시 고전적인 비극이 넘쳐 흐르도록 공연되고 있음을 풍자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겉과 속이 다른 사회상을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오펜바흐는 '지하세계의 오르페'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크게 고무되어 계속 유사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엘렌'(La belle Hélene: 1864), '파리인의 생활'(La vie parisienne: 1866) 등이었다. 오펜바흐는 말년에 그동안 코믹한 오페레타만을 만들었던 것을 떠나서 보다 심각한 오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일념으로 '호프만의 이야기'(Les contes d'Hoffmann: 1881)을 만들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곡가로서의 대미를 장식했다.

 

오펜바흐의 '지하세계의 오르페'. 뉴욕시티오페라

                                

오펜바흐의 오페레타가 대인기를 끌었지만 그에 대한 반대작용으로 순수 오페라를 발전시키려는 노력도 대단했다. 19세기 말에 파리에서 오페라가 흥성하게 된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암브루아즈 토마(Ambroise Thomas)의 '미뇽'(Mignon: 1866)과 '햄릿'(Hamlet: 1868), 카미유 생 생스(Camille Saint-Saens)의 '삼손과 델릴라'(Samson et Dalila: 1877), 레오 들리브(Léo Delibes)의 '라크메'(Lakmé: 1883), 에두아르 랄로(Edouard Lalo)의 '이 왕'(Le roi d'Ys: 1888) 등이 대표적이다. 19세기 말엽의 프랑스 작곡가 중에서 변함없는 성공을 거둔 작곡가는 아무래도 쥘르 마스네(Jules Massenet)일 것이다. 마스네는 무려 25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의 오페라는 우아한 스타일이었고 기분좋게 만드는 음악이었다. 마스네의 '마농'(Manon: 1884)과 '베르테르'(Werther: 1892)는 파리의 음악적 패션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마스네의 오페라는 대부분 파리에서 초연되었지만 브뤼셀의 라모네 극장(Théatre de la Monnaie)와 몬테칼로 오페라극장(Opéra de Monte-Carlo)에서도 초연되었다.

 

마스네의 '마농'

                                        

[프랑스 바그너리즘과 드빗시]

19세기 후반에 파리에서는 또 다른 논란이 있었다. 바그너에 대한 기피성 논란이었다. 베를리오즈를 거부했던 파리의 보수적인 음악계는 리하르트 바그너라는 인물이 프랑스 오페라에 새로운 위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바그너는 가히 혁명적이라고까지 말할수 있는 새로운 형태로서 이미 유럽 전역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바그너가 1861년에 파리에서 '탄호이저'(수정버전)를 공연하였을 때 파리의 관중들은 적대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결과, 바그너는 '탄호이저'를 단 3회 공연한후 취소해야 했다. 프랑스는 그 후로도 바그너를 경계하고 배척하는 운동을 계속하였다. 더구나 1870년에는 보-불전쟁까지 일어나서 독일을 싫어하는 여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프랑스의 몇몇 작곡가들은 바그너의 새로운 작곡방식인 하모니의 혁신을 인용하였다. 구노와 비제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리고 진취적이고 발전적인 성향의 지성인들도 상당수가 바그너를 찬양하였다. 예를 들면 보들레르(Baudelaire)였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미래의 음악'이라고 찬양했다. 몇몇 작곡가들은 바그너의 심미적인 판매를 채택하였다. 엠마뉘엘 샤브리에(Emmanuel Chabrier)의 '그웬돌린'(Gwendoline: 1886), 어네스트 쇼송(Ernest Chausson)의 '아서왕'(Le roi Arthus: 1903)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그다지 폭넓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지나치게 모방적이라는 등등의 이유에서였다.

 

바그너의 '탄호이저'. 바이로이트

                                

클로드 드빗시는 바그너의 영향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은근히 거부하기도 했다. 그래서 드빗시 자신만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드빗시는 처음에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보고 무척이나 감동했다. 특히 '파르치팔'을 보고서는 세상에 이런 음악이 어떻게 나올수 있느냐면서 감동했다. 그러던 그가 나중에는 바이로이트의 늙은 마법사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어쨋든 드빗시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플레아와 멜리상드'(Pelléas et Mélisande: 1902)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도처에서 발견할수 있다. 오케스트라의 활용이 그러하며 아리아와 레시타티브의 차이를 완전히 없앤 것이 그것이다. 실제로 드빗시는 그때까지의 일반 오페라에서 노래가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면서 불만을 표현한 일이 있다. 그래서 드빗시는 그 노래들을 물이 흐르는 듯한 프랑스어의 리듬에 어울리는 대사로 바꾼 경우가 많았다. '플레아와 멜리상드'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상통하는 면이 많다. 하지만 드빗시는 두 남녀의 사랑에 있어서 지나친 열정을 피하였다. 그리고는 감정을 간접적으로 표현케 하므로서 상징주의적인 뉘앙스로 대체하였다. 드빗시는 '플레아와 멜리상드'에서 신비한 분위기를 오케스트레이션으로 표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이 더욱 강력한 어필이라고 믿었다.

 

드빗시의 '플레아와 멜리상드'의 환상적인 샘물장면

                          

[20세기와 그 이후]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두 작품이 등장했다. 물론 바그너의 영향을 흡수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적인 독자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는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의 고전인 '페넬로프'(Pénélope: 1913)이고 다른 하나는 폴 뒤카(Paul Dukas)의 다채로운 상징주의 드라마인 '아리앙과 푸른 수염'(Ariane et Barbe-Bleue: 1907)이다. 한편, 예전의 오펜바흐 스타일의 오페라보다는 아무래도 격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오페레타 또는 오페라 코미크도 몇 사람에 의해 명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앙드레 메사저(André Messager)와 레이날도 한(Reynaldo Hahn)이다. 순수 오페라(비극음악)가 되었든지 오페레타 또는 오페라 코미크가 되었든지 프랑스의 작곡가들은 바그너의 '독일적 무거움'(Teutonic heavines)에 반대하는 프랑스만의 전통적인 우아함과 경쾌함을 유지코자 했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이 그러한 견해의 앞에 섰다. 라벨은 두 편의 비교적 짧은 오페라를 남겼다. 하지만 대단히 독창적인 것이었다. 하나는 스페인을 무대로 한 '스페인의 시간'(L'heure espagnole: 1911)이며 다른 하나는 동화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그린 '어린이와 마법'(L'enfant et les sortiléges: 1925)이다. '어린이와 마법'에서는 각종 동물들과 가구나 식기들도 생명을 가지고 노래하고 말을 나눈다.

 

가브리엘 포레의 '페넬로페'의 한 장면. 현대적 연출

 

젊은 작곡가들로 구성된 '레직스'(Les Six)가 활동을 시작했다. 라벨의 심미적인 견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레직스'의 주요 멤버는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아서 오네거(Arthur Honegger), 그리고 프랑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였다. 미요는 재능도 뛰어났지만 다작의 작곡가였다. 어느 형태, 어느 스타일의 작품이라도 썼다. 미요는 공연시간이 10분도 채 되지 않는 이른바 '오페라 미뉴트'(Opéras-minutes)를 만들었는가하면 대서사시적인 '크리스토프 콜롬브'(Christophe Colomb: 1928)도 썼다. 스위스 출신의 오네거는 오페라에 오라토리오를 혼합한 실험적인 작품을 썼다. 예를 들면 '다윗 왕'(Le Roi David: 1921), '뷔셰의 장다크'(Jeanne d'Arc au Bucher: 1938) 등이다. '레직스'의 멤버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는 풀랑크이다. 그는 비록 오페라의 장르에 늦게 입문하였지만 1947년에 발표한 '티레지아의 유방'(Les mamelles de Tirésias)은 초자연주의적인 코미디로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풀랑크의 대표작은 '갈멜파 수녀와의 대화'(Dialogues des Carmélites: 1957)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수녀원에서 일어난 어느 수녀의 번뇌를 그린 작품이다. 풀랑크는 2차 대전 이후 몇 편의 오페라를 내놓아서 세계의 음악계에 커다란 관심을 던져주었다. 또 한 사람의 관심인물은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이다. 메시앙은 풀랑크나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메시앙의 종교적인 드라마인 '아씨시의 성프랑수아'(Saint Francois d'Assise: 1983)은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대규모 합창단이 등장하는 것이며 공연시간도 무려 4시간이나 걸리는 대작이다. '아씨시의 성 프랑수아'는 핀랜드의 카이야 사아리아호(Kaija Saariaho)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아리아호의 2000년도 작품인 '먼곳으로부터의 사랑'(L'amour de loin)은 특별히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메시앙의 '아씨시의 성프랑수아'의 현대적인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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