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프랑스의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의 성장

정준극 2013. 7. 17. 22:56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의 성장

파리의 글룩 - 혁명으로부터 로시니까지 - 그랜드 오페라 - 그리고 베를리오즈

 

[오페라 코미크의 성장]

오페라 코미크는 파리에 있는 유명한 오페라 극장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18세기 프랑스에서 성장한 오페라의 한 장르로서 프랑스 특유의 대중적인 오페라를 말한다. 오페라 코미크는 화려한 오페라 하우스 또는 귀족들의 살롱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매년 열리는 파리의 박람회에서 비롯하였다. 당시 박람회에서는 별도의 극장을 세우고 보드빌 스타일의 공연을 했다. 그것이 발전해서 오페라 코미크라는 장르를 이룩한 것이다. 파리 박람회에는 두개의 극장이 있었다. 그것을 1715년에 테아트르 드 로페라 코미크(Théâtre de l'Opéra-Comique)라는 하나의 기구로 통합하였다. 작곡가들은 독일의 징슈필 스타일의 작품을 썼다. 아리아도 나오고 대화체의 대사도 나오는 작품이었다. '부퐁 전쟁'(Querelle des Bouffons: 1752-1754)는 오페라 코미크의 터닝 포인트였다. 1752년에 이탈리아 오페라의 리더격 지지자인 장 자크 루소는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라는 간단한 오페라를 만들어서 발표했다. 그가 항상 주장하던 오페라의 단순성과 자연성을 프랑스에 전파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루소의 이 오페라에는 대화체의 대사는 나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는 그 후에 등장하는 오페라 코미크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다. 1757년에는 에기디오 뒤니(Egidio Duni: 1708-1775)가 '모델을 사랑한 화가'(Le peintre amoureux de son modéle)를 내놓았고 1765년에는 프랑수아 앙드레 필리도르(Francois-André Philidor: 1726-1795)의 '톰 존스'(Tom Jones)가 나왔다. 이어 1769년에는 피에르 알렉산드르 몽시니(Pierre-Alexandre Monsigny: 1729-1817)가 '탈영병'(Le déserteur)을 내놓아 오페라 코미크의 발판을 다져 놓았다. 이 작품들은 고전적인 영웅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평범한 시민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었다.

 

 

장 자크 루소의 '마을의 점장이' 현대적 연출

 

18세기 후반에 오페라 코미크의 대표적인 작곡가로서는 앙드레 그레트리(André Grétry: 1741-1813)를 꼽지 않을수 없다. 그레트리는 이탈리아의 유려한 멜로디에 프랑스어를 우아하게 접목하였다. 주제는 '제미르와 아조르'(Zémire et Azor: 1772)에서 볼수 있듯이 동양적인 동화로부터 '미다스의 심판'(Le jugement de Midas: 1778)과 같은 풍자적인 내용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질투심 많은 연인'(L'amant jaloux: 1778)은 프랑스의 전래 익살극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레트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구원 오페라'의 장르에 속하는 '사자왕 리챠드'(Richard Coeur-de-lion: 1784)였다. '사자왕 리챠드(리샤르)'는 다른 나라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예를 들어 1786년에는 런던에서 성황리에 공연되었고 1797년에는 미국의 보스턴에서 공연되었다.

 

그레트리의 '제미르와 아조르'

 

[파리의 글룩]

프랑스에서 1760년대에 오페라 코미크가 인기를 끌었던 것과는 달리 순수 프랑스 오페라는 침체상태였다. 프랑스 순수 오페라의 리더였던 라모가 1764년에 세상을 떠난 것도 큰 영향을 주었다. 라모의 마지막 '음악비극'인 '보레아데'(Les Boréades: 북풍의 신의 후손들)은 무슨 연유인지 1763년에 리허설이 중단되었고 라모의 생전에 공연되지 못한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라모 이후에 프랑스에서는 그의 자리를 대신할만한 작곡가가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다른 나라에서 라모에 버금하는 뛰어난 작곡가를 수입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은 이미 프랑스에서 그의 개혁오페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글룩의 개혁오페라는 진부하기만 한 과거의 오페라 세리아(순수오페라)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글룩의 개혁오페라는 무대작품인 오페라의 드라마틱한 면을 보다 강조한 것이었다. 글룩은 이미 1762년에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로서 그의 의도하는 바를 보여주었다. 그러한 글룩은 프랑스 오페라를 높이 평가하고 라모와 루소 양편의 주장과 교훈을 모두 흡수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파리에 온 글룩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1770년에 프랑스 왕세자(훗날 루이 16세)와 결혼한 비엔나 출신의 마리 앙뚜아네트였다. 글룩은 비엔나에서 마리 앙뚜아네트의 음악 교사였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후광을 입은 글룩은 파리 오페라극장과 6편의 오페라를 작곡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첫 작품은 1774년의 '얼리드의 이피제니'(Iphigénie en Aulide)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의 초연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되었다. 총칼만 들지 않았지 마치 전쟁과 같은 것이었다. 글룩의 상대방은 니콜로 피치니(Niccolo Piccinni)였다. 나폴리 오페라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파리에 온 이탈리아의 작곡가였다. 라모와 관련한 '부퐁 전쟁' 이후에 온 파리가 하나의 오페라를 두고 글룩파(Gluckists)와 피치니파(Pccinnists)로 갈라져서 치열한 전쟁을 벌인 일은 처음이었다. 논쟁의 촛점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훌륭하냐,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 오페라가 훌륭하냐에 대한 것이었다. 파리 오페라 측은 글룩과 피치니에게 똑같이 '이피제니'에 대한 대본을 주고 각각 오페라를 만들도록 했다. 자세한 얘기는 시간이 없어서 나중으로 미루고 결론만 말한다면 글룩-피치니 전쟁에서 글룩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글룩의 '얼리드의 이피제니' 무대. 파리 초연에서 대단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프랑스어 버전은 1774년 8월 2일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타이틀 롤은 카스트라토에서 오트 테너(하이 테너)로 바뀌었다. 카스트라토 대신에 오트 테너의 출연은 륄리 이후부터 프랑스에서는 관례처럼 되어온 것이었다. 파리 사람들은 그런 글룩의 작품에 대하여 상당히 호의적이었고 환영했다. 글룩은 이어 '알체스테'(Alceste)의 프랑스어 버전도 만들었다. 이어 새로운 작품으로서 1777년에 '아르미드'(Armide)를 작곡했고 계속하여 '터리드의 이피제니'(Iphigénie en Taudide: 1779), '에코와 나르시스'(Echo et Narcisse)를 마들었다. 하지만 '에코와 나르시스'는 실패였다. 글룩은 파리를 떠나 비엔나에 가서 은퇴생활을 했다. 그러나 글룩은 프랑스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 다른 나라의 작곡가들이 글룩 스타일의 오페라를 작곡하기 위해 파리로 왔다. 그중에서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의 '다나에'(Les Danaides: 1784)와 안토니오 사키니(Antonio Sacchini: 1730-1786)의 '콜론의 외디프'(Oedipe a Colone: 1786)은 대표적인 글룩 스타일의 작품이다.

 

글룩의 '알체스트' 앙상블 

 

[혁명에서 로시니까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프랑스의 문화예술에도 일대 분수령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잔존해 있던 륄리와 라모의 고답스런 전통은 물에 씻겨 내려가듯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들의 작품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와서야 재조명되었을 뿐이었다. 글룩주의 학파와 오페라 코미크는 살아 남았다. 하지만 이들은 시대와 상황에 부응해야 했다. 이미 높은 명성을 얻고 있는 앙드레 그레트리(André Grétry: 1741-1813)와 니콜라스 달라이라크(Nicolas Dalayrac: 1753-1809), 프랑수아 조셉 고세크(Francois Joseph Gossec: 1734-1829) 등은 혁명정부에 차출되어 애국적인 작품을 써야 했다. 예를 들면 고세크의 '공화국의 승리'(Le triomphe de la République: 1793)이다. 이 작품은 그 전해에 공화파와 왕당파가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인 발미 전투(Battle of Valmy)에서 공화군이 승리를 거둔 것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후 구작곡가들은 물러나고 새로운 세대의 작곡가들이 등장했다. 에티안느 메울(Etienne Méhul: 1763-1817)이 리더격이었고 여기에 이탈리아 출신의 루이지 케루비니(Luigi Cherubini: 1760-1842)가 합세한 세대였다. 이들은 글룩의 오페라 코미크에 대한 원칙을 적용하여 드라마틱한 신중함을 새로운 각도에서 표현하였으며 음악적으로는 정교하고 세련된 면을 강조하였다. '스트라토니스'(Stratonice), '아리오당'(Ariodant)과 같은 메울의 1790년대 오페라들은 마치 폭풍노도와 같은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울에게 '최초의 낭만주의자'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케루비니의 작품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케루비니는 구원오페라에 중점을 두었다. 케루비니의 '로도이스카'(Lodoiska)는 비록 폴란드를 무대로 삼았지만 프랑스의 혁명정신을 표현한 것이었다. 정치적인 탄압을 받아 감옥에 갇힌 로도이스카를 구출하고 압정을 일삼던 사람들을 몰아낸다는 내용이다. 1797년의 '메데'(Médée)는 그야말로 프랑스 혁명을 반영한 작품이다. 그런데 케루비니의 '메데'는 프랑스에서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더 인기를 끌었다. 케루비니가 1800년에 내놓은 '이틀간의 사건'(Les deux jourées)는 프랑스에서 일고 있는 새로운 화해무드를 표현한 것이다.

 

케루비니의 '이틀간의 사건' 무대

 

1790년대에는 파리에 극장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여러 곳이 생겼다. 그후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자 파리의 오페라 극장들을 효과적으로 축소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세 곳만을 남겼다. 파리 오페라극장 또는 갸르니에 극장이라고도 불리는 오페라(Opéra: l'Opéra), 프랑스어 대화체 대사가 나오는 오페라를 공연하는 오페라 코미크, 그리고 이탈리아 수입 오페라를 공연하는 테아트르 이탈리앙(Théatre-Italien)이다. 파리 오페라극장에서는 주로 대화체의 대사가 아니라 레시타티브를 사용하는 순수 오페라를 공연했다. 이 세 극장들이 혁명 후 거의 반세기 동안 프랑스의 오페라를 이끌어간 주역들이었다. 파리 오페라극장에서는 가스파레 스폰티니(Gaspare Spontini: 1774-1851)가 글룩의 순수 오페라 전통을 이어나갔다. 스폰티니의 '베스타 여사제'(La Vestale: 1807), '페르난드 코르테즈'(Fernand Cortez: 1809) 등이었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은 프랑수아 아드리앙 부엘듀(Francois-Adrien Boieldieu: 1775-1834) 또는 니콜라스 이수아르(Nicolas Isouard: 1773-1818)의 경쾌하고 명랑한 오페라 코미크에 더 열광하였다. 그리고 테아트르 이탈리앙에서 공연되는 로시니 등의 벨칸토 오페라에 대하여도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

 

파리 오페라극장

                                       

당시 로시니는 전유럽을 휩쓰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로시니의 영향은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에 폭넓게 번졌다. 로시니의 영향이 담겨 있는 작품들을 보면 부엘듀의 대성공작인 '하얀 옷의 여인'(La dame blanche: 1825), 다니엘 오버(Daniel Auber: 1782-1871)의 '프라 디아볼로'(Fra Diavolo: 1830), '검은 도미노'(Le domino noir: 1837), 페르디낭 에롤드(Ferdinand Hérold: 1791-1833)의 '창파'(Zampa: 1831), 발레작품으로 유명한 아돌프 아당(Adolphe Adam: 1803-1856)의 '롱주모 요새'(Le postillon de Longjumeau: 1836) 등이다. 한편, 테아트르 이탈리앙은 1823년에 로시니를 설득하여 테아트르 이탈리아의 매니저로 오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프랑스 오페라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참으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로시니는 1급 주요인사로서 파리에 도착하였다. 그후로부터 테아트르 이탈리앙은 로시니의 작품으로 연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로시니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순수 오페라에 관심을 돌렸다. 그래서 1829년에 '귀욤 텔'(Guillaume Tell)을 완성했다. '귀욤 텔'은 로시니의 마지막 무대작품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인 '귀욤 텔'은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실패로 끝났다. 로시니는 극장 매니저로서의 업무가 과중하고 또한 '귀욤 텔'의 실패로 낙심한 나머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하였다.

 

부엘듀의 '하얀 옷의 여인'의 초연 포스터

 

[그랜드 오페라]

로시니의 '귀욤 텔'은 비록 초연에서는 실패했지만 그 전해에 공연되어던 오버의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La muette de Portici)와 함께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서막을 장식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는 20세기가 도래하기까지 프랑스 오페라 무대를 압도했던 장르였다.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는 웅장한 스케일, 영웅적이거나 역사적인 주제, 대규모 인원의 출연, 대규모 오케스트라, 화려하고 세밀한 무대 세트, 사치스러울 정도의 의상, 스펙터클한 배경효과 등이 특징이다. 그리고 프랑스 특유의 발레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 그랜드 오페라의 서막은 '귀욤 텔'이나 '포트리치의 벙어리 소녀'라고 했지만 그보다 더 앞서서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작품들이 있다. 가스파레 스폰티니의 '베스타 여사제'와 루이지 케루비니의 '아벤세라즈 가문'(Les Abencérages: 1813: 그라나다의 무어왕국의 가문) 등이 있지만 이 모든 작곡가들의 의도는 결국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자코모 마이에르베르(Giacomo Meyerbeer: 1791-1864)의 업적으로 모아진다. 마이에르베르는 글룩과 마찬가지로 독일 출신이아. 그리고 파리에 오기전에 이탈리아에서 오페라의 테크닉을 익혔다. 마이에르베르가 파리 오페라극장을 위해 작곡한 첫 작품은 '악마 로베르'(Robert le diable; 1831)이었다. 일대 센세이션이었다. 특히 제3막에서 무덤에 들어가 있는 수녀들의 유령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춤을 추는 장면은 스릴만점의 것이었다. '악마 로베르'를 위시해서 마이에르베르가 그 후에 완성한 세 편의 그랜드 오페라, 즉 '위그노'(Les Huguenots: 1836), '예언자'(Le prohete: 1849), '아프리카 여인'(L'Africaine: 1865)는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대인기를 차지하였다. 유럽의 웬만한 극장들은 마이에르베르의 그랜드 오페라를 무대에 올릴수 있어야 스스로 위신을 세울수 있었다. 나중에 베르디도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베르디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돈 카를로스'(Don Carlos: 1867)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아니라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로 분류된다.

 

마이에르베르의 '악마 로베르' 

 

[베를리오즈]

마이에르베르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또 하나의 프랑스 작곡가가 갑자기 떠오르는 태양처럼 솟아났다.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의 오페라는 당시에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실패였다. 베를리오즈는 발전적인 현대적인 것과 과거의 보수적인 것을 특이하게 혼합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로시니와 같은 현란하고 전시적인 것을 싫어하고 반면에 글룩이 주창했던 드라마틱한 면모를 선호했다. 그는 진정한 낭만주의로서 항상 새로운 음악표현을 갈구했다. 그가 파리 오페라극장을 위해 작곡한 유일한 작품인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1838)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관중들은 이 오페라의 오리지널리티를 이해할수 없었으며 연주자들은 특이한 리듬을 어떻게 연주해야할지 몰랐다. 그로부터 20년 후, 베를리오즈는 그의 최대 걸작이라고 하는 '트로이 사람들'(Les Troyens)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의 관중들을 마음에 두고 작곡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작곡했다. 과연! '트로이 사람들'은 글룩과 스폰티니가 이룩한 프랑스 고전 전통을 완성한 작품이다. '트로이 사람들'은 베를리오즈가 예언한 대로 그의 생전에 전체가 공연되지 못하였다. 베를리오즈의 세번째이며 마지막 작품인 셰익스피어의 코미디를 원작으로 한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Béatrice et Bénédict: 1862)는 독일 바덴바덴 시립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관중들은 프랑스에서보다 매우 열렬하게 그의 작품을 환영하였다.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 영국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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