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프랑스의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의 탄생 - 륄리로부터 라모까지

정준극 2013. 7. 15. 14:07

프랑스 오페라의 탄생 - 륄리로부터 라모까지

 

[륄리의 업적]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작곡가들에 의한 오페라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오페라가 공연되기는 했다. 프랑스에서 공연된 첫 오페라는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645년으로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사크라티(Francesco Sacrati: 1605-1650)가 작곡한 '가짜 미친 여자'(La finta pazza)가 파리에서 공연되어있다. 문제는 프랑스의 관객들이 이 오페라에 대하여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음악적으로 감동을 주지 못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 이 오페라의 수입과 공연을 주도한 사람이 당시 루이 14세 섭정정부의 제1장관이던 이탈리아 출신의 마차린(Mazarin) 추기경이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마차린 추기경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는 발레 드 쿠르(ballet de cour: 궁정발레)라는 별도 장르의 무대음악이 널리 유행되고 있었다. 발레 드 쿠르는 노래도 나오지만 춤을 위한 음악이 더욱 강조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단 무대에서 공연되면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무대장치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짜 미친 사람'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수입이탈리아 오페라는 한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가 10여년 후인 1660년에 프란체스코 카발리(Francesco Cavalli: 1602-1676)의 '세르세'(Xerse)가 겨우 수입되어 공연되었고 이어 2년 후인 1662년에는 역시 그의 '사랑에 빠진 헤라클레스'(Ercole amante)가 공연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반응은 예나 지금이나 시큰둥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탈리아산 오페라는 프랑스 사람들의 취향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비록 수입 오페라이지만 프랑스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이러다가는 프랑스에서는 제대로 된 오페라를 구경도 못하고 지내는 것이 아니냐면서 걱정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오페라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프랑스 오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견해였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프랑스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서 앞장 선 사람은 다름 아닌 플로렌스 출신의 장 바티스트 륄리였다. 륄리가 프랑스 오페라의 전통을 수립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프란체스코 사크라티의 '가짜 미친 여자'(La finta pazza). 프랑스에서 처음 공연된 오페라이다.

                                                 

피에르 프랭(Pierre Perrin)이라는 사람이 작곡가인 로베르 깡베르(Robert Cambert)와 협동하여 1669년에 '오페라아카데미'(Académie d'Opéra)를 설립했다. 프랑스어로 된 프랑스의 오페라를 발전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두 사람의 첫번째 성과물은 '포몽'(Pomone)이라는 것이었다. 1671년 3월에 공연되었다. 1년후에는 '사랑의 고통과 기쁨'(Les peines et plaisirs de l'amour)을 내놓았다. 피에르 프랭이 이렇듯 남모르는 수고를 하는 중에 루이 14세는 피에르 프랭의 오페라 관할권을 이탈리아 출신의 장 바티스트 륄리에게 넘겨주었다. 륄리는 이미 1661년부터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는 음악인이었다. 그렇더라도 오페라아카데미를 위해 헌신했고 어떻게 하면 프랑스 오페라를 발전시킬지만을 생각하던 프랭을 밀어내고 륄리의 손에 모든 권한을 쥐어 준것은 당황스런 일이었다. 어쨋든 프랑스 궁정의 음악을 책임 맡은 륄리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지극한 후원으로 프랑스 음악문화를 새로운 패션으로 이끌어나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륄리는 어떻게 해야 루이 14세의 기호를 충족시키며 나아가 프랑스 사람들의 관심을 만족시킬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륄리는 마치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이라도 하듯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의 코메디 발레(comédies-ballets) 작품을 몰리에르 연극의 중간 프로그램으로 넣었다. 대단한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몰리에르는 자기 연극의 순수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해서 연극 중간에 발레를 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몰리에르는 그 때문에 륄리와 대판 싸우기도 했다. 결국 륄리는 보다 융통성있고 나긋나긋한 필립 퀴노(Philippe Quinault)를 파트너로 삼았다. 퀴노는 륄리를 위해 영원토록 대본을 쓸 생각이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하여 겨우 2편의 대본을 썼을 뿐이었다. 그때에 나온 것이 '카드뮈와 에르미옹'(Cadmus et Hermione)이었다. 1673년 4월 27일에 파리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최초의 프랑스 오페라로 간주되고 있는 작품이다.

 

'카드뮈와 에르미옹'의 무대. 2008 오페라 코미크

                           

륄리와 퀴노는 이 새로운 작품을 '음악이 있는 비극'(tragédie en musique: 음악비극)이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굳이 비극이 아니더라도 코미크한 내용이 아니면 일률적으로 비극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였다. '음악이 있는 비극'은 프랑스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륄리는 16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년에 최소한 한편의 '음악이 있는 비극'을 작곡했다. 그리하여 륄리의 새로운 오페라 스타일은 향후 거의 1세기 동안 프랑스 오페라의 전통이 되었다. 명칭에서 볼수 있듯이 '음악이 있는 비극'은 프랑스의 클래시컬한 비극인 코르네이유(Corneille)와 라시느(Racine)의 비극을 모델로 삼았다. 륄리와 퀴노는 이탈리아인들이 즐겨 인용하였던 바로크 스토리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5막으로 확장하여 만들었다. 사실상 이탈리아의 바로크 오페라들은 그 내용이 너무 복잡하여 2막이나 3막으로서는 혼돈을 가져오기가 십상이었다. 전 5막으로 구성된 프랑스의 오페라는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였다. 주인공이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내용을 레시타티브와 혼합하여 짧은 아리아(Petits airs)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각 막은 디베르티멘트(디베르티스망: divertissement)로 마무리 되도록 했다. 디베르티멘트는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다. 디베르티멘트는 프랑스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댄스와 대합창과 시각적으로 놀랄만한 스펙타클로서 구성되어 대중들을 만족시켰다. 레시타티브는 프랑스어의 특성을 충분히 살리는 독특한 리듬으로 구성되도록 했다. 그래서 레시타티브 자체만으로도 찬사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는 륄리의 '아르미드'(Armide) 2막을 보면 알수 있다. 5막의 본 오페라는 비유적인 서막으로 시작되도록 했다. 서막을 둔 것은 륄리가 이탈리아의 관습을 본 딴 것이다. 그런데 서막에서는 본 오페라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주로 루이 14세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예를 들어서 본 오페라의 내용은 그리스 신화에서 가져온 '아르미드'이지만 서막에서는 루이 14세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본 오페라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내용이 프랑스 군주인 루이 14세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포장되어 있음을 느낄수 있다. 고전적인 신화의 주인공, 또는 중세의 로맨스를 루이 14세의 행적으로 비유하여 꾸민 것이다.

 

륄리의 '아르미드'의 무대. 베리사이유극장

                                   

[륄리에서 라모로: 새로운 장르]

륄리의 노력으로 프랑스 오페라는 별도의 장르로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프랑스 특유의 '음악이 있는 비극'은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프랑스의 '음악이 있는 비극'은 이탈리아가 압도하고 있는 '오페라 세리아'의 형식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새로운 장르로서 출범한 것이다. 한편, 프랑스의 관중들은 카스트라토 가수들을 싫어했다. 카스트라토 가수들은 당시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프랑스에서만은 그렇지 못했다. 프랑스에서는 남자 주인공을 카스트라토가 부르는 대신에 특별한 하이 테너 음성을 가진 오트 콩트르(haute-contre)가 부르도록 했다. 오트르 콩트르는 일종의 하이 테너를 말한다. 그렇다고 가성을 주로 사용하는 콘트라 테너는 아니다. 륄리 오페라의 핵심은 드라마틱한 레시타티브에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레시타티브가 콘티누오(화성은 변하지만 저음은 일정한 것. 통주저음)의 반주로 부르는 형식적인 것으로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댄스나 합창은 프랑스 오페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처리되었다. 프랑스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의 차이점과 특징을 설명하자면 한이 없고 게다가 필자로서는 잘 알지도 못하므로 이만 줄이기로 한다. 다만, 두 차이점에 대하여 프랑스 오페라 팬들과 이탈리아 오페라 팬들은 별로 할일들도 없었던지 향후 거의 1세기에 걸쳐서 '우리가 옳다. 당신들이 틀렸다'라는 논쟁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했다는 점을 지적코자 한다. 그런 논쟁이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독일의 글룩이 프랑스에 와서 두 형식을 하나의 새로운 형식으로 합성하고서였다. 그래서 글룩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글룩 때문에 또 대단한 논쟁이 벌어진 일이 있다.

 

글룩의 '아르미드'. 현대적 연출. 파리 샹젤리제극장

                                

륄리가 루이 14세의 비호를 받아 프랑스 오페라 작곡가들의 리더로서 권세를 누렸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 오페라를 공연하려면 우선 륄리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만큼 륄리의 권세는 막강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재능을 존경하여서 받들어 모신 것은 아니었다. 륄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들은 그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로 유명한 마르크 안투안 샤펠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1643-1704)일 것이다. 그의 유일한 '음악비극'(tragédie en musique)인 '메데'(Médée)는 1693년에 파리에서 초연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하지만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륄리의 지지자들은 샤펜티에의 오페라가 지나치게 이탈리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면서 실망을 표현했다. 특히 하모니가 지나치게 화려하고 어떤 경우에는 불협화음을 사용했다고 하면서 비난했다. 실제로 샤펜티에는 그런 하모니를 이탈리아에 있을 때에 그의 스승인 자코모 카리시미(Giacomo Carissimi: 1605-1674)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펜티에의 '메데'는 17세기 프랑스 오페라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마르크 안투안 샤펜티에의 '메데'. 로열오페라하우스

 

륄리의 사후, '비극음악'을 추진한 작곡가들로서는 '알시옹'(Alcyone: 1703)의 마랭 마레(Marin Marais: 1656-1728), '텔레마크'(Télémaque: 1714)의 앙드레 데투셰(André Detouches: 1672-1749) 추기경, '탄크레디'(Tancréde: 1702)와 '이도메네'(Idomenée: 1712)의 앙드레 캉프라(André Campra: 1660-1744) 등이 있다. 앙드레 캉프라는 오페라 발레(opéra-ballet)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 주로 코믹한 내용을 주제로 삼은 작품으로 명칭이 보여주듯 트라제디 앙 무지크(비극음악)에 비하여 댄스의 비중을 더욱 많이 들어간 것이었다. 이들은 오페라의 주제도 과거의 신화적이거나 영웅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일반적인 내용을 택하였고 더구나 코믹한 내용을 포함하였다. 륄리는 '테세'(Thésée: 1675) 이후 음악비극에서 코믹한 내용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었다. 오페라 발레는 서막에 이어 앙트레(entrée)라고 불리는 거의 독립적인 스토리의 막들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각 막을 떼어내서 별도로 공연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경우에 각 막은 악테 드 발레(actes de ballet)라고 불렀다. 캉프라가 이러한 형식으로 처음 시도한 대표적인 작품이 1697년의 '사랑에 빠진 유럽'(L'Europe galante)이었다. 이 오페라는 전 4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막은 각각 유럽의 다른 나라들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터키이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중류층의 보통 사람들이었다.

 

앙드레 캉프라의 '사랑에 빠진 유럽'의 한 장면

 

'오페라 발레'는 대중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리하여 나머지 바로크 시기동안 프랑스의 주종목 오페라가 되었다. 그런데 '오페라 발레'와는 달리 또 하나의 인기 장르가 있었다. '전원신화'(Pastorale Héroique)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오페라 발레'와 사촌간인 장르이다. 역시 발레가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원신화'를 '발레신화'(Ballet héroique)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원신화'라는 용어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륄리의 마지막 오페라인 '아치스와 갈라테'(Acis et Galatée: 1686)부터이다. 물론 전원을 주제로 삼은 음악작품은 이미 오래전부터 프랑스 무대에 등장했었다. '전원신화'는 통상적으로 주제를 고전적인 내용으로부터 가져왔다. 신화가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전원신화'는 '음악비극'과 마찬가지로 비유적인 서막에 이어 각 막이 뒤따른다. 다만 다른 점이 있디면 '음악비극'은 주로 5막으로 구성되지만 '전원신화'는 3막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장 필립 라모의 작품 중에서 '자이스'(Zais: 1748)와 나이스(Nais: 1749)가 이에 속한다. 이때 쯤해서 프랑스의 몇몇 작곡가들은 코믹 오페라를 쓰기 시작했다. 장 조셉 무레(Jean-Joseph Mouret: 1682-1738)의 '라공드의 사랑'(Les amours de Ragone: 1714: 원제는 Le mariage de Ragonde et de Colin 또는 La Veillée de Village)이다.

 

장 바티스트 륄리의 '아치스와 갈레테'

 

[장 필립 라모]

장 필립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는 바로크 시기의 프랑스 오페라에서 륄리 이후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라모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다. 라모는 당시 프랑스 오페라의 전통을 지키자는 이른바 륄리파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오페라를 옹호하는 측으로부터 똑같이 공격을 받았다. 륄리파와 이탈리아파는 라모를 공격하는데에는 한 통속이 되었다. 라모는 뛰어난 음악이론가였다. 작곡가로서 라모는 첫 오페라인 '이폴리트와 아리시'(Hyppolyte et Aricie)를 거의 50세의 연령인 1733년에 내놓았다. '이폴리트와 아리시'를 본 사람들의 대부분은 놀랍도록 새로운 스타일에 대하여 충격을 받았다. 캉프라와 같은 작곡가는 '놀라운 발명'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히 륄리파는 라모가 비정상적인 하모니, 그리고 불협화음까지 사용했기 때문에 당황했다고 말하고 심지어는 두렵다고까지 반응했다. '라모파'(Ramistes)와 '륄리파'(Lullistes)의 뜨거운 논쟁은 그후 10여년간이나 계속되었으니 라모의 영향이 크긴 컸었다.

 

라모의 '이폴리트와 아시스'의 무대. 파리 갸르니에극장

 

사실상 라모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는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기존의 형태에서 필요한 파트만을 빌려왔다. 그리고 음악적인 언어도 유별나게 새로운 것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오리지날리티가 있는 것을 선호하였다. 라모는 다작의 작곡가였다. 5편의 음악비극, 6편의 오페라 발레, 수많은 전원신화와 악트 드 발레(actes de ballets), 그리고 두편의 코믹 오페라를 남겼다. 그리고 평생을 자기 작품에 수정에 수정을 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너무 수정을 많이 해서 처음에 만들었던 작품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되기도 했다. 라모는 1745년부터 궁정작곡가가 되어 활동했다. 그러다가 1750년대에 들어와서 저 유명한 '부퐁의 전쟁'(Querelle des Bouffons)이라는 것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라모에게는 평생을 논쟁이 따라다닌 셈이다. '부퐁의 전쟁'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오페라 5백년의 발자취>에서 [프랑스의 오페라]편을 보면 그나마 자세히 알수 있다. 참고로 첨언한다면 나중에 글룩과 피치니의 싸움은 '부퐁의 전쟁'의 본편이었다. 라모와 관련한 '부퐁의 전쟁'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지자들, 특히 철학자이며 음악가인 장 자크 루소(Jean-Jacuqes Rousseau)가 라모를 구태의연한 인물이라고 비난한 것으로 중심을 이루었다. 반국민주의파들은 라모의 스타일이 감정 표현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단순함과 자연성을 찬양하였다. 이들은 그러한 스타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La serva padrona)을 내세웠다. 아무튼 이들의 주장은 18세기 후반에 프랑스 오페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나중에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라고 알려진 장르의 대두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파리 갸르니에극장(파리 오페라)의 회랑. 그림. 1875년경

 

é   ä    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