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역사적 인물

헝가리의 레오폴드 콜로니츄 백작

정준극 2013. 7. 27. 18:15

레오폴드 콜로니츄(Leopold Kollonitsch) 백작

 

라트하우스파르크(시청공원)에 자리잡고 있는 레오폴드 콜로니츄 백작(Graf Leopold Kollonitsch: 1806-1876)은 오토만 터키가 점령하였던 헝가리 지역이 신성로마제국에 속하게 되자 그 지역의 10만명 정교회 교도들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토록 한 반종교개혁의 지도자였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각료직을 맡기도 했다. 헝가리에서는 Kollonich Lipot 라고 부른다. 라트하우스파르크의 기념상은 1867년에 조각가 빈첸츠 필츠(Vinzenz Pilz)가 제작한 것이다.

 

레오폴드 카를 콜로니츄 백작 기념상. 오스트리아에서 군사병원을 시작하였다.

레오폴드 콜로니츄 백작 겸 추기경


레오폴드 콜로니츄 백작의 풀 네임은 레오폴드 칼 폰 콜로니츄이다. 콜로니츄는 Collonicz, Colonitz, Kollonitz, Kolonits, Kolonić 라고도 표기하며 헝가리어로서는 Kollonich Lipót 라고 표기한다. 그는 신성로마교회의 추기경이며 칼로차(Kalocsa)의 대주교였고 후에는 헝가리의 수석대주교였다. 헝가리에서는 Gran 또는 Esztergom 이라고 부르는 직위였다. 그는 성직자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백작으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헝가리에서의 반종교개혁 운동을 이끈 인물이었다. 그는 헝가리에서의 반종교개혁 운동으로 10만명의 정교회 기독교인들을 로마 가톨릭으로 재개종시켰다고 한다. 그는 제국의 각료로서 헝가리 영토의 재편을 책임맡았다. 헝가리 영토는 오토민 제국에 정복되었으나 훗날 칼로비츠 조약(Treaty of Karlowitz)에 의해서 제국으로 반환되었다. 레오폴드 칼 폰 콜로니츄는 헝가리의 코마롬(Komárom 현재는 Komárno) 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른스트 폰 콜로니츄 백작은 그 지역의 영주였다. 콜로니츄 백작은 말타종단(Sovereign Military Order of Malta)의 장교 후보생이 되었다. 그가 처음 전투에 참가한 것은 말타 기사들이 터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베니스를 지원하기 위해 크레타 전쟁에 나갔을 때였다. 그러한 공적으로 그는 1650년에 비엔나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후 몇번의 전투에 참가하였고 그때마다 전공을 세워서 1658년에는 마일버그(Mailberg)성에 있는 마일버그 성주 겸 마일버그 종단의 수도원장에 임명되어서 성직자로서의 길에 들어섰다. 그후 그는 또한 보헤미아의 에거에 주둔하고 있는 제국 군대의 사령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마일버그 성. 콜로니츄는 이 성의 성주였다.


1659년에는 레오폴드 1세 황제가 콜로니츄를 황실 의전장관에 임명하였고 아울러 니트라(Nitra)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니트라는 슬로바키아 서부의 로마 가톨릭 교구였다. 그러나 콜로니츄는 성직자의 직함으로 임명되었으나 실제로 사제로서 서품을 받은 일은 없었다. 그래서 신학공부를 한 후에 1668년에 정식으로 사제에 서품되었다. 이에 따라 1669년에는 니트라의 주교로서 즉위식을 가졌고 1670년에는 비너 노이슈타트의 주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1672년부터 1681년까지 헝가리 궁정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콜로니츄는 1673-74년에 프레스부르크에서 열린 특별 법정에 헝가리 교회를 대표하여 참석했다. 이 법정에서는 278명의 개신교도에 대한 재판이 열려서 그들을 파문하는 결정을 내리는데 동참한 일도 있었다. 그는 1683년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 때에 경비를 가지고 비엔나로 들어가서 군대에게 급료를 지불하게 도왔고 또한 비엔나의 수도원들에 야전병원을 차려서 부상자들을 돌보아 주는 일을 했다. 그리고 얀 조비에스키 폴란드 왕이 주도한 1683년 9월 11일과 12일의 칼렌버그 전투가 끝난 후에는 약 5백명이나 되는 전쟁고아들을 마일버그 성에 수용하여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후 그는 정식으로 여러 군사병원을 설립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그로 인하여 비엔나에서 대단한 칭송을 받았다. 692년에 샤를르 6세 황제는 그를 국무장관에 임명하였다. 콜로니츄는 장관의 권한으로 오토만 터키에 점복 당했던 헝가리의 영토를 재편하는 책임을 맡았다. 1695년에는 마침내 헝가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 10만명의 정교회 기독교인들을 로마 가톨릭 교인으로 재개종토록 했다. 콜로니츄는 1707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예수회의 안나키르헤에 안치되었다가 매장을 우위해 프레스부르크(현재의 브라티슬라바)로 이전되었다. 1862년에 3구 란트슈트라쎄의 한 거리를 콜로니츠가쎄(Kolonitzgasse)로 명명하였다. 1873년에는 콜로니츠플라츠가 연계되었다. 콜로니츄가 대주교에 있을 때에 브라티슬라바에 카푸친 수도회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08년에는 브라티슬라바의 카푸친 수도원이 착공되었다.


비엔나의 1구에 있는 안나키르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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