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역사적 인물

슈투벤링 정부청사 앞의 라데츠키 장군 기마상

정준극 2008. 12. 16. 19:28

슈투벤링의 정부청사(Regierungsgebüude) 앞의 라데츠키(Radetzky) 장군 기마상

노바라 전투의 영웅 요셉 라데츠키(Joseph Radetzky) 백작

 

 슈투벤 링의 정부종합청사(레기룽스게보이데) 앞에 있는 라데츠키 장군 기마상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유명한 라데츠키 장군은 보헤미아(현재의 체코공화국)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위해 빛나는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당시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여 있었다. 1766년 보헤미아의 트레브니츠(Trebnitz)에서 태어난 라데츠키는 1858년,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70년 이상을 제국의 군대를 위해 봉사하였다. 라데츠키 장군은 특히 1849년 3월 23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이탈리아와의 노바라(Novara)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노바라 전투의 시초는 1848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때에 라데츠키 장군이 열세의 오스트리아군으로 밀라노의 이탈리아군을 격퇴함으로서 결국 노바라 전투의 승기를 잡았던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의 ‘라데츠키 행진곡’은 라데츠키 장군에 의한 1848년의 첫 승전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작곡된 것이다.

 

요셉 라데츠키 백작


라데츠키 장군의 풀 네임은 요한 요세프 벤첼 라데츠키 백작(Johann Josef Wenzel Graf Radetzky)으로서 보헤미아(현재의 체코공화국)의 라데츠(Radetz) 지방에 연고를 둔 가문 출신이므로 라데츠키 백작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시절에 부모을 여윈 라데츠키는 비엔나의 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그는 19세에 오스트리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2년후에 장교로 임관됨으로서 멀고 먼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터키와의 전쟁에 참가하였고 북부 저지대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도 주둔하여 군사업무를 보았다. 그는 1798년, 좀 늦었지만 32세 때에 보헤미아의 프란치스카 폰 스트라쏠도(Francisca von Strassoldo)백작부인과 결혼하여 5남 3녀를 두었다.


라데츠키는 귀족이기도 했지만 타고난 군사적 능력 때문에 빠른 승진을 하였으며 중요한 전투에 여러번 참가하여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1796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의 군대와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라데츠키의 용명함은 때로 무모하기까지 하여 화제가 되곤 했다.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군대와 전투를 벌일 때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인 볼류(Beaulieu)장군이 적에게 포로가 된 일이 있다. 볼류장군의 휘하에 있었던 라데츠키는 몇 명의 경기병을 데리고 적진의 코앞에서 파티를 하며 여유를 부리는 척하다가 돌연 적진을 기습하여 볼류장군을 구출하였다. 소령으로 승진한 라데츠키는 이어 만투아(Mantua) 전투에 참가하여 또다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대령으로 진급한 그는 용맹함과 치밀한 전략을 함께 구사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1799년 마렝코(Marengo)전투에서는 몸에 다섯발의 총탄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선봉에 서서 적군을 무찌르는데 앞장을 섰다. 이 일로 인하여 라데츠키는 ‘마리아 테리자’ 훈장을 받았다.


1805년, 그는 소장으로 진급하고 이탈리아에 있는 칼(샤를르) 대공의 부대에 합류토록 명령을 받았다. 라데츠키는 칼디에로(Caldiero)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 이탈리아군을 격퇴하였다. 1809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나폴레옹 군대와의 바그람(Wagram)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듬해에 라데츠키 장군은 그의 이름을 딴 별도의 부대를 창설토록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하여 생겨난 것이 제5 라데츠키 기병대였다. 1813년에는 슈봐르첸버그 장군의 휘하에서 참모로 활동하였다. 라데츠키는 제국의 군대를 개혁코자 노력하였으나 예산이 많이 투입되어야 하므로 재무성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낙담한 라데츠키는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이탈리아 전선이 심상치 않게 되자 황제는 다시 라데츠키를 불러 이탈리아에서의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얼마후 라데츠키는 육군 원수로 승진하였으나 이미 70의 고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데츠키는 직접 훈련에 참가하는 등 노익장의 면모를 과시하여 휘하의 장병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노바라 전투의 라데츠키 장군


1848년, 노장군의 이름을 청사에 길이 빛내게 될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사방으로부터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과부적이었다. 라데츠키는 잠시 후퇴하였다가 4개 부대로 나뉘어진 이탈리아 연합군을 하나씩 각개 격파하는 전술을 감행하여 전선을 소강상태에 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라데츠키 장군은 지원군이 도착하기까지 전선을 유지할수 있었다. 라데츠키 장군이 이탈리아 연합군을 각개 격파하여 퇴각시켰다는 소식이 비엔나에 도착하자 비엔나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만일 라데츠키의 전선이 무너지면 이탈리아군이 오스트리아까지 진격하여 비엔나를 위협하였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라데츠키 장군은 지원군이 도착하자 군대를 재정비하여 노바라(Novara)에서 이탈리아군과 운명을 건 일대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1849년 3월 23일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라데츠키 장군의 일사분란한 전술에 따라 이탈리아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라데츠키 장군은 오스트리아의 영웅이 되었다. 병사들은 그를 ‘아버지 라데츠키’(Vater Radetzky)라고 부르며 한없는 존경을 보냈다. 나중에 역사학자들은 라데츠키 장군을 독일의 봘렌슈타인(Wallenstein) 장군, 그리고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 비견하는 훌륭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라데츠키는 군사령관으로서 만족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858년 1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라데츠키가 세상을 떠나자 이탈리아는 다시금 오스트리아에게 도전하였다. 라데츠키가 없는 오스트리아군은 전투마다 패배를 당하였다.

 

암호프에 있었던 라데츠키 장군 기마상. 사진

현재 슈투벤링의 정부종합청사 앞에 있는 라데츠키 기마상은 원래 암 호프에 있었다. (그림참조)  

                

[라데츠키 행진곡]

요한 슈트라우스는 ‘라데츠키 행진곡’을 1848년에 작곡하였다. 라데츠키 장군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라데츠키 행진곡’은 나오자마자 오스트리아 장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 곡이 처음으로 오스트리아 장교들 앞에서 연주될 때 장교들은 즉시 박수를 치고 발을 쾅쾅 구르며 즐거워했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라데츠키 행진곡’이 연주될 때마다 청중들은 박수를 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나신년음악회의 마지막 앙콜 곡은 항상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장식되고 있다. ‘라데츠키 행진곡’은 행진곡이지만 오히려 축제적인 분위기의 무도곡으로 더 많이 이용되고 있다.


덴마크의 축구팀인 AGF 아르후스(Aarhus)는 경기에서 홈 팀이 골을 넣을 때마다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다. 조셉 로스(Joseph Roth)라는 작가는 1932년에 ‘라데츠키 행진곡’이라는 책을 펴냈다.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유명한 지휘관들을 소개하는 내용이지만 책자의 제목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스라엘항공기인 엘 알(El Al)은 여객기가 이륙한 때마다 ‘라데츠키 행진곡’을 방송한다. 미스터 빈(Mr Bean)이 출연한 ‘백 투 스쿨’(Back to School)에서도 첫 장면이 시작할 때에 혼(Horn)으로 ‘라데츠키 행진곡’이 연주된다. 핀란드의 유명한 어린이 프로그램인 펠레 헤르마니(Pelle Hermanni)는 주제곡을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삼았다. 통나무 오르간으로 연주한다. TV시리즈인 ‘더 프리즈너’(The Prisoner)에서 ‘라데츠키 행진곡’은 마을 밴드가 항상 연주하는 곡으로 친밀감을 주고 있다.


링슈트라쎄의 라데츠키 장군 기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