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역사적 인물

칼렌버그의 얀 조비에스키 기념 명판

정준극 2008. 12. 26. 14:01

칼렌버그 교회의 조비에스키 기념 명판

터키의 비엔나 공성을 격퇴한 폴란드 왕

 

칼렌버그 정상의 성요셉교회


얀 조비에스키(Jan Sobieski)는 17세기의 폴란드 왕이다. 정확히는 폴란드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이다. 당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연방이었다. 조비에스키가 사망하자 연방은 와해되었다. 비엔나가 조비에스키를 잊지 못하는 것은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 때인 1683년 조비에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연합군이 터키군을 몰아내고 비엔나를 위기에서 구출했기 때문이다. 그때 조비에스키의 병력은 비엔나가 내려다 보이는 칼렌버그(Kahlenberg)에 집결한후 터키군을 축출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래서 칼렌버그 교회에 조비에스키 폴란드왕의 업적을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다. 칼렌버그 교회(장크트 요제프스키르헤: St Josefskirche)는 폴란드교회라고도 부른다.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비엔나를 방문하였을 때 슈테판성당도 방문하고 칼스키르헤(칼교회)도 방문하였으나 산꼭대기에 있는 칼렌버그 교회도 방문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도 폴란드 출신이었다. 칼렌버그의 조비에스키 기념명판은 터키의 비엔나 퇴각 3백주년을 기념하여 비교적 최근인 1983년 설치되었다. 얀 조비에스키는 어떤 인물이었나?

 

 칼렌버그교회에 부착되어 있는 얀 조비에스키 기념 명판

 

조비에스키는 22년동안 폴란드의 왕으로서 통치하였다. 신하들로부터 많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그는 탁월한 군사 지휘관이었다. 1683년 비엔나에서 터키를 몰아내고 승리한 것도 조비에스키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었다. 이후 터키인들은 조비에스키를 ‘레키스탄의 사자’라고 불렀다. 레키스탄(Lechistan)은 폴란드의 넓은 평야를 말한다. 조비에스키는 1629년 올레스코(Olesko)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우크라이나의 르비브(Lviv) 부근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아버지는 루테니아(Ruthenia)의 분봉왕 겸 크라카오(Krakow)의 성주였다. 조비에스키는 크라카오대학을 졸업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도 크라카오 출신이다. 대학을 나온 조비에스키는 동생 마렉(Marek)과 함께 서유럽 여러 나라를 2년동안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를 계기로 조비에스키는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라틴어를 구사할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그의 군사경력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비엔나 전투

1863년의 비엔나 전투에서의 얀 조비에스키


1672-1676년간 폴란드와 터키간의 전쟁이 있었다. 조비에스키는 1673년 터키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조비에스키의 군대는 터키가 강점하고 있던 호킴(Chocim)요새를 탈환하고 터키군의 전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소식은 폴란드 전역에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동시에 폴란드왕인 미하엘1세가 서거했다는 뉴스도 전파되었다. 미하엘왕은 조비에스키가 터키군이 강점하고 있던 요새를 탈환하기 하루 전에 세상을 떠났다. 조비에스키는 계속되는 전승(戰勝)으로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결국 이듬해인 1674년, 조비에스키는 폴란드 연방의 새로운 군주로 선출되었다. 물론 조비에스키를 폴란드왕으로 선출하는 일에 반대도 있었다. 조비에스키의 부인이 강력한 경쟁자로 나섰었다. 조비에스키는 1676년 2월에 얀3세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해 봄에 폴란드의 밀정들은 터키가 군사를 총동원하여 서진(西進)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조비에스키는 터키가 폴란드 도시인 르보브(Lwow)와 크라카오를 공격목표로 삼고 있다고 보았다. 조비에스키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요새를 강화하는 등 터키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폴란드왕 얀3세 조비에스키 초상화. 로마 장군의 복장을 하고 있다. 신성로마제국과 연맹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다.


잠시 조비에스키의 포부를 살펴보면, 독실한 가톨릭인 그는 유럽에서 다시 십자군을 결성하여 터키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과 연합하였으며 교황 인노센트11세가 기독교 국가들을 보존하기 위해 주도한 ‘신성연맹’(Holy League)의 멤버로 가입하였다. 폴란드를 공격한다고 생각된 터키군은 1683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를 공략하였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은 레오폴드6세였다. 레오폴드6세의 아들중 한사람이 나중에 샤를르6세가 된 인물로서 마리아 테레자의 아버지이다. 아무튼 터키가 대군을 몰아서 비엔나를 공성하자 다급해진 레오폴드6세는 신성연맹의 일원인 조비에스키에게 구원을 청하였고 한편으로는 로레인의 프란시스 대공에게도 도움을 청하였다. 비엔나를 구하는 것이 폴란드를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조비에스키는 단숨에 병력을 이끌고 비엔나 교외의 칼렌버그 정상에 와서 진을 쳤다. 다음날 새벽, 조비에스키가 이끄는 연합군은 칼렌버그 정상의 교회 앞에 모여 비장한 결심으로 기도하고 이어 되블링과 누쓰도르프에 주둔하고 있던 터키군을 급습하혔다. 터키군은 혼비백산하여 퇴각하였다. 조비에스키는 비엔나로 당당히 입성하여 레오폴드6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조비에스키는 비엔나 전투가 있은지 13년후인 1696년 향년 66세로 바르샤바 인근 빌라노브(Wilanow)라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비에스키를 기념하는 비엔나 9구의 조비에스키플라츠(광장)와 그 앞에 조비에스키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