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링슈트라쎄 기념상

소련 기념물(적군 영웅 기념물)

정준극 2013. 7. 27. 18:23

소련 기념물(Russendenkmal) -  적군(레드 아미) 영웅 기념물

해방기념물 - 전승기념물 -  콩 기념물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소련 적군 기념물과 그 앞의 호스슈트랄브렌넨(높이 내뿜는 분수)

 

누구든지 비엔나의 링 슈트라쎄를 한바퀴 둘러보는 사람들은 캐른트너 링과 슈베르트 링의 사이에 있는 슈봐르첸버그 플라츠에서 높은 기둥 위에 세워진 어떤 군인의 동상을 볼수 있다. 소련 군인으로 보이는 그 군인은 한 손에 커다란 깃발을 부여잡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황금 방패 같은 것을 쥐고 있다. 군인 동상 뒷편에는 마치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처럼 기둥들이 늘어서 있는 콜로네이드를 볼수 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아닌 계절이라면 날씨가 좋은 날에 군인상 앞에서 하늘 높은줄 모르고 솟아오르며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의 장관을 볼수 있다. 분수가 솟아오르면 물줄기 때문에 군인상이 가로 막혀서 잘 보이지 않는다. 2차 대전으로 인한 유물이다. 공식적으로는 '소련기념물'(Russendenkmal) 또는 '적군 영웅 기념물'(Heldendenkmal der Roten Armee)이라고 불리는 기념물이지만 '해방 기념물'(Befreiungsdenkmal) 또는 전승기념물(Siegesdenkmal)이라는 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비엔나 사람들은 풍자하여서 '약탈자의 기념물'(Looter's Memorial) 또는 무명의 강간범 기념물(Memorial of the Unknown Rapist)이라고도 불리며 심지어는 '콩 기념물'(Erbsendenkmal)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하고 있다. 그리고 기둥 위에 높이 서 있는 소련 적군 병사를 '콩 왕자'(Erbsenprinz)라고 불렀다. '콩 기념물'이라고 한 것은 소련군이 비엔나를 정복 또는 해방을 한 후에 살펴보니 비엔나의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영양실조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탈린은 그같은 보고를 받고 나서 즉각적으로 콩 1천 톤을 비엔나에 보내어 우선 굶주림에 허덕이는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비엔나 시민들은 어쨋든 소련으로부터 콩을 받아 먹었으므로 적군 기념상을 세우는 일에 반대할수도 없는 처지였다. 다만, 시민들은 콩을 댓가로 해서 소련 기념물을 세운다는 생각에 조소하는 의미에서 '콩 기념물'이라고 불렀다.

 

소련 적군 기념물에는 깃발을 잡고 있는 적군 병사 한 명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그 아래에 두명이 더 있다.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 같은 모습들의 소련 적군 병사들이다. 한 병사는 손에 탄약통을 들고 있다.

 

'콩 기념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이 끝나자 소련의 스탈린이 마치 선심이나 베푸는 듯이 오스트리아의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1천 톤의 콩을 구호품으로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같은 선심은 나중에 연합국들간의 이권 분쟁이 일어날 경우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기 위한 계책의 하나였다. 아무튼 그로부터 비엔나 사람들은 콩을 먹으라고 보낸 소련이 오스트리아 사람들과 독일군 포로들을 동원해서 밤을 낮삼아 완성한 '소련 기념물'을 '콩 기념물'이라고 부르며 쳐다보기도 싫어했다. 더구나 소련군이 비엔나에 진주한 후에 저지를 온갖 만행을 생각해보면 '소련 기념물'이 악마 보다도 싫었을 것이다. 소련군은 비엔나에 들어오자 우선 박물관이나 궁전, 그리고 유서깊은 교회들을 다니면서 온갖 예술품들과 재물들을 약탈하기에 바뻤다. 그리고 비엔나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강간하느라고 정신들이 없었다. 참으로 한심한 현상이었다. 그런 소련군인데 전승기념물을 하늘 높이 세우고 모두들 쳐다 보도록 했으니 기가 막히자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패전국으로서는 입이 열개가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더구나 '소련 기념물'은 오스트리아의 기술자들과 독일군 포로들을 동원해서 지은 것이 아니던가! '소련 기념물'은 비엔나의 모든 기념물 중에서 아마도 가장 단기간 내에 완성된 것일 것이다. 처음 착수키로 결정한 것이 1945년 4월 말이었다. 그리고 기념물이 완성되어 제막식을 요란하게 가진 것은 1945년 8월 19일이었다. 그러므로 전체 공사기간은 4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그만큼 소련으로서는 전쟁이 끝나자 마자 다른 것은 몰라도 우선 전승기념탑을 세워서 만방에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친 소련!

 

저녁 나절의 '소련 기념물'. 구경하러 찾아 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귀찮기도 하고...가깝게 가 보아야  사실 볼 것도 없다.

 

'소련 기념물'은 비엔나를 두고 소련군과 독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에 전사한 소련군 병사 1만 7천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소련 기념물'을 세우자는 계획은 1945년 2월에 처음 나왔다. 전쟁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때에 우선 비엔나를 점령하면 전승기념물부터 세우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소련군은 병사들을 대상으로 설계 공모를 하였다. 그리하여 건축가였다가 군인으로 들어온 세르게이 야코블레브(Sergei Yakovlev)라는 병사가 간단한 연필 그림으로 선정되었다. 그후 건축예술가인 마히일 셰인펠드(Michaol Schejnfeld)라는 사람이 야코블레브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설계도를 만들고 모델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념물에 들어가는 글들은 시인 세르게이 미하엘코브(Sergei Michaelkow)라는 사람이 썼다. 누가 무얼 했고 또 누가 무얼 했는지 이름들을 말해야 알아 두어야 할 아무런 필요가 없는데 굳이 설계를 누가 했고 하는 등의 설명을 하는 것은 그저 이런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소개하기 위해서일뿐이니 괘념치 말기 바란다. 얘기에 의하면, 설계를 맡은 셰인펠드는 자기의 설계도대로 기념물이 건축될 비엔나에 처음으로 들어와서 로사우어 카제르네의 앞에 있는 도이치마이스터 기념물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서 자기의 '소련 기념물'을 도이치마이스터 기념물에 응답하는 기념물로 만들고자 했으나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소련 적군 병사가 저 멀리 로사우어 카제르네 쪽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는 것이다.

 

20미터 높이의 기둥 위에 서 있는 12미터 높이의 적군 병사. 가슴에는 슈파긴 기관총을 메고 있고 허리에는 수류탄을 달고 있다. 한 손으로는 소련 깃발을 잡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방패처럼 생긴 소련 문장을 붙잡고 있다. 헬멧과 문장은 황금색이다.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전승기념물을 비엔나의 어느 장소에 세울지를 두고 다른 나라 대표들과 의논을 했다. 왜냐하면 4대 연합국이 비엔나를 분할하여 관리하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이 관할하는 지역에 세운다면 미국의 양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프라터가 강력한 후보지로 제기되었다. 헬덴플라츠도 후보지로 올라 왔지만 역사적인 장소라서 제외되었다. 결국 슈봐르첸버그플라츠가 선정되었다. 소련으로서는 이미 슈봐르첸버그플라츠를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연막작전으로 다른 지역들을 거론했다는 얘기가 있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는 호흐슈트랄브룬넨이 있었다. 비엔나에 슈티리아 알프스로부터 상수도를 가져오는 공사가 끝난 것을 기념해서 1873년에 만든 분수이다. 소련측은 분수의 물줄기 때문에 소련이 승전기념탑을 만들어도 거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것이므로 염려할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연합국의 다른 나라들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모두들 양해하였다. 이의도 있었다. 소련이 이 기념물을 세우는 목적이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웃고자 함이 아니냐는 이의였다. 사실 스탈린은 그런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분할 통치하면서 다른 나라들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싶어했다. 소련으로서는 비엔나에 대규모 기념물을 세우는 것을 커다란 선전 목적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만일 나중에 비엔나에 대한 무슨 정치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비엔나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여 바긴의 수단으로 삼을 생각까지 했다.

 

소련 기념물은 위치는 참으로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비엔나의 금싸라기 땅이다.

 

소련은 건설 공사에 오스트리아 기술자들은 물론이고 독일 전쟁포로들을 동원했다. 소련 적군 병사의 높이는 무려 12미터에 이르는 것이었다. 모두 15톤의 청동이 소요되었다. 3구 란트슈트라쎄에 주조소를 차려놓고 주물들을 주조했다. 배경의 콜로네이드를 위해서는 3백 평방미터의 잘 다듬은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그렇게하여 제막식은 1945년 8월 18일에 거행되었다. 비엔나 시장인 테오도르 쾨르너(), 국가 수상인 칼 렌너(), 국가 서기인 레오폴드 휘글()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두 참석했다. 이 세 사람은 나중에 오스트리아 제2 공화국의 설립을 마련한 국부들로서 간주되었다. 소련은 이들 오스트리아 임시정부의 요인들에게 소련과 친분이 있게 보이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라며 반강제적으로 제막식에 참석토록 했다. 사실상 4개 연합국 중에서 소련만이 극성스러울 정도로 오스트리아 임시정부에 간섭을 하였다. 그리고 소련은 오스트리아 임시정부가 다른 세 나라의 대표들고 가깝게 지내지 않도록 무언의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오리지널 소련 기념물(적군 영웅 기념물)에는 탱크가 한 대 설치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보일수가 있다고 해서 탱크는 두지 않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전사한 소련 적군 병사들을 기념물 지역에 매장하였다. 소련은 '소련 기념물'이 있는 슈봐르첸버그플라츠는 1946년 4월 12일부터 1956년 7월 18일까지 스탈린플라츠(Stalinplatz)라고 명칭을 변견했다. 그리고 '소련 기념물'에는 일반인들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했다. 전물장병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이므로 아무나 들어와서 쉬다가 갈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오스트리아가 독립하자 스탈린플라츠는 예전처럼 슈봐르첸버그플라츠가 되었다.

 

기념물 앞에 별도로 놓인 설명문. Denkmal zu Ehren der Soldaten der Sowjetarmee. Die fur die Befreiung Osterreichs vom Faschismus gefallen sind. April 1945. Schopfer des Denkmals: Bildhauer: M.A.Intersar Jan, Architekt: S.G. Jarowlew. Das Denkmal wurde am 19 August 1945 eingeweiht. (소련군 장병들을 추모하는 기념물. 오스트리아를 파치슴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전사한 장병들. 1945년 4월. 기념물 제작자: 조각: 인테르사르 얀, 아키텍트: 샤로블레브. 이 기념물은 1945년 8월 19일 봉헌되었다.

 

1955년에 4대국이 오스트리아에서 철수를 하게 되자 소련은 오스트리아 임시정부와 앞으로 '적군 영웅 기념물'을 오스트리아가 유지보수할 것을 보장하는 별도의 협정을 맺었다. 이로 인하여  오스트리아 정부는 기념물이 오염되거나 훼손되면 할수 없이 보수를 해야 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기념물에 함께 전시되어 있던 소련 탱크는 군사박물관으로 옮겨져 더 이상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그곳에 매장되어 있던 소련군 전사자들의 유해는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의 명예의 구역으로 이장되었다. 소련 전사자 묘역은 루에거 키르헤(중앙공동묘지 교회)의 옆에 있다. 입구에는 두 명의 적군 병사가 마치 묘역을 지키기나 하듯 엄숙하게 서 있다. 그러나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서 의기도 양양한듯 들고 있던 소련 깃발은 모두 땅을 향해 있다. 아마 조의를 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두 병사 모두 소련 문장방패는 들고 있지 않다. 대신 철모를 한 손에 잡고 있다. 비엔나 시민들은 보기 싫은 소련 적군 영웅 기념물이 시내 한복판에, 그것도 유서 깊은 팔레 슈봐르첸버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애초부터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오죽하면 '약탈자의 기념물'이라는 별명을 붙였던 것이겠는가? 비엔나에서 소련군대가 철수하자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소련 기념물은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우익 정치인들은 소련 기념물을 철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소련과 맺은 약속 때문에 철거할수 없었다. 폭탄으로 파괴하려는 시도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때마다 경찰이 사전에 조치를 취해서 폭파사건은 일어나지 못했다. 남모르게 훼손을 하거나 낙서를 하고 또는 소련을 비난하는 포스터가 붙기도 했다. 당국은 반달리스트들의 행동이라고 하면서 애써 외면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그러나 저러나 기념물에 훼손이 생길 때마다 보수하고 청소하느라고 무던히도 신경을 썼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소련이 몰락을 하고 동구 공산권들도 소련의 우산 아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구의 나라들에서는 소련의 잔재물들을 철거하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비엔나의 소련 기념물도 다시한번 철거의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비엔나의 역사에 있어서 고난의 시기를 회상케 해 주는 중요한 기념물'이라면서 철거를 반대했다.

 

중앙공동묘지의 소련 적군 전사자 묘역. 두 병사가 지키고 있는데 모두 소련 깃발을 내리고 있으며 소련의 문장 방패는 들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