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독일-오스트리아

베르너 에그크(Werner Egk)

정준극 2013. 8. 18. 20:01

베르너 에그크(Werner Egk)

오페라 '페르 긴트' 등 7편 작곡

 

작곡가 겸 지휘자인 베르너 에그크

 

나치 시대에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베르너 에그크(Werner Egk: 1901-1983)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나치 시대에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지휘자로 활동했고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발레곡을 작곡하여 히틀러로부터 찬사를 받은 사람이었다. 베르너 에그크는 '카르미나 부라나'로 유명한 칼 오르프(Carl Orff: 1895-1982)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면서 서로 라이발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칼 오르프는 나치에 별로 협조적이지 않았지만 에그크는 나치를 위해 작곡을 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다만, 에그크는 나치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난후 나치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들에 대한 비나치화(denazification) 재판이 벌어졌을 때 에그크가 과연 친나치였는지 아닌지를 두고 대단한 논란이 있었다. 결국 그렇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는 중간적인 평가를 받았다. 나치에 협조적이었던 것은 음악을 위해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에그크는 나치와 관련하여 별다른 비난을 받지 않고 살아남았으며 실은 전쟁이 끝난후 더욱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에그크는 1950년부터는 독일에서 음악공연에 따른 음악인들의 권익 옹호와 특히 방송이나 영화에 사용되는 음악에 대한 저작권을 보호하는 협회(GEMA: Gesellschaft für musikalische Aufführungs- und mechanische Vervielfältigunsrechte)의 주도적인 인물로 활동했고 이어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작가 및 작곡가협회 연맹(CISAC: Confederation Internationale des Societes d'Auteurs et Compositeurs)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1950-52년에는 베를린음악대학(Berlin Musikhochschule)의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 에그크는 과연 어떤 배경의 사람이며 어떤 생애를 살아왔는가?

 

베르너 에그크의 고향 아우흐제스하임에 있는 기념상

 

에그크는 독일 남부 바바리아 슈봐비아 지방의 아우흐제스하임(Auchsesheim)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작곡가이다. 아우흐제스하임의 거리에는 에그크를 기념하는 흉상이 세워져 있다. 아우흐제스하임은 오늘날 독일의 도나우뵈르트(Donauwörth)에 속한 지역이다. 에그크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신교가 아니라 가톨릭이었다. 에그크는 농사를 그만 두고 다른 사업을 하려는 아버지를 따라 여섯 살 때에 아우그스부르크로 이사를 갔다. 에그크는 어려서부터 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아우그수브르크의 베네딕트파 김나지움(고등학교)에 들어갈수 있었다. 에그크는 사실상 어릴 때부터 예술적인 재능이 남달랐다. 에그크의 아버지는 그런 에그크의 예술적인 재능을 살려주기 위해 무던히도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 비록 넉넉치 못한 생활이었지만 에그크를 아우그스부르크 시립예술원에 보냈다. 에그크는 시립예술원에서 작곡가, 그래픽 아티스트, 작가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갔고 이어 1921년에는 20세의 젊은이로서 뮌헨으로 가서 극장 작곡가로 일을 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극장오케스트라 멤버로서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에그크는 이때 만난 바이올리니스트인 엘리자베트 칼(Elizabeth Karl)과 결혼했다. 베르너 에그크의 원래 이름은 베르너 요셉 마이어이었다. 에그크(Egk)라는 것은 펜 네임이었다. 에그크는 부인인 '엘리자베트 게보르네 칼'(Elizabeth, geborne Karl: 결혼전 이름 엘리자베트 칼)의 명칭에서 이니셜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베르너 에그크는 1928년 베를린으로 가서 작곡가인 아놀드 쇤베르크와 한스 아이들러(Hans Eisler) 등을 만나 감동을 받아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베르너 에그크 탄생 100 주년 기념 우표. 2001년 발행

 

에그크는 영화음악 작곡가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우선 극장에서 무성영화의 피아노 반주를 맡아서 했다. 에그크는 라디오 방송이 발달하자 이것이야 말로 새 시대에서 매스 미디어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라디오를 위한 연극과 오페라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작곡가 쿠르트 봐일(Kurt Weil)을 통해 만난 사람이 베를린의 라디오 방송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한스 플라이슈(Hans Fleisch)였다. 한스 플라이슈는 작곡가인 파울 힌데미트의 처남으로서 유태인이었다. 에그크는 한스 플라이슈로부터 라디오 방송을 위한 연극과 오페라의 작곡을 위촉받았다. 이듬해인 1928년에 에그크는 뮌헨으로 돌아가서 그곳 라디오 방송국에 일자리를 구했다. 그때 음악가 프릿츠 뷔흐트거, 칼 막스, 그리고 특히 칼 오르프(Carl Orff)등을 만나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당시 에그크의 작곡 스타일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스타일을 많이 닮았었다. 에그크가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1933년에 방송된 라디오 오페라 '콜룸부스'(Columbus)로부터였다. '콜룸부스'는 1934년에 뮌헨에서 무대 공연되었다.

 

오페라 '페르 긴트'의 한 장면

                                  

당시의 독일 작곡가들은 1933년에 정권을 잡은 나치와 타협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핍박을 받거나 추방을 당해야 할 입장이었다. 영국 요크대학교의 독일학 교수인 마이클 케이트는 그의 저서 '나치 시대의 여덟 명의 독일 작곡가'라는 저서에서 에그크에 대하여 '수수께끼와 같은 기회주의자'(The Enigmatic Opportunist)라고 평가했다. 에그크는 가톨릭 계통의 독일인이기 때문에 나치 정권으로부터 인종차별을 받을 위험이 없었다. 역설적으로 에그크로서는 유태인들이 핍박을 받는 것이 오히려 그의 기회가 될수도 있었다. 뮌헨의 나치 문화당국은 에그크의 스트라빈스키 스타일의 음악이 나치 청중들에게 별로 호감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결과 베르너는 알프레드 로젠버그의 독일문화투쟁연맹(Kampfbund für deutsche Kultur)과 좋지 않은 관계에 있게 되었다. 에그크는 또한 나치 작곡가인 한스 피츠너(Hans Pfitzner)의 지지자이며 알프레드 로젠버그의 또 다른 행동대원인 루드비히 슈로트의 비판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에그크는 나치 시대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나치가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지 않을수 없었다.

 

베르너 에그크

 

에그크는 1935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그의 첫 본격 오페라인 '마술 바이올린'(Die Zaubergeige)의 초연을 가졌다. 이 작품은 바바리아의 민속음악과 온음계적 스타일의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는 일반적인 작품이었다. 종전에 스트라빈스키 스타일로서 실험적으로 내놓았던 '콜럼부스'와는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나치의 가이드라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치는 민속음악적 요소를 사용하는 음악이 대중과의 거리를 가깝게 할수 있다고 주장하고 권장했기 때문이었다. 스위스의 작곡가인 하인리히 주터마이스터는 에그크의 이같은 스타일 변경을 '기회주의적' 변화라고 보았다. 아무튼 에그크는 '마술 바이올린'의 성공으로 1936년 하계 올림픽과 관련한 발레음악의 작곡을 위촉받았다. 이때 작곡한 발레곡은 나치 정권으로부터 예술경연대회 금메달을 받았다. 이어 에그크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1941년까지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베를린에서 에그크의 보호자는 프러시아 국립극장 예술감독 연맹 위원장 겸 바이로이트 페스트발 예술감독인 하인티 티트예이었다. 에그크는 나치와 유대가 많았다.

 

'마술 바이올린'(디 차우버가이게) 음반

 

1930년대 말에, 나치의 권세는 모든 것을 압도하였다. 에그크는 나치로 부터 작곡 위촉을 많이 받았다. 나치를 주제로 한 대규모 오페라의 작곡도 위촉받았다. 하지만 위촉받는대로 모두 작곡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에그크는 1940년에 발레곡인 '차리싸의 요안'(Joan von Zarissa)이라는 대작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그후 상당기간 동안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와 거의 마찬가지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사실상 에그크의 음악은 베를린에서 오르프보다 인기를 끌었다. 더구나 오르프는 공모에서 번번히 에그크보다 아래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오르프는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1936년 올림픽과 관련한 공모에서 Olympische Festmusik(올림픽 축제음악)으로서 에그크가 금상을 받은 것이었다. 에그크는 당국으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아서 넉넉하게 살았지만 오르프는 위촉 작품이 거의 없어서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오르프의 지지자들은 공공연하게 에그크를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그크와 오르프는 공개석상에서는 가까운 친구로서 지냈다. 하지만 에그크는 전쟁후 전범자들에 대한 재판이 있을 때에 불리한 입장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1947년 나치 재판에서는 에그크가 나치당에 결코 가입한 일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어 그나마 나치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동정을 받았다. 재판에서 에그크를 옹호한 작곡가로서는 고트프리트 폰 아이넴(Gottfried von Einem)과 보리스 블라허(Boris Blacher) 등이 있었다. 에그크에 대한 평가는 반반이었다. 일부에서는 에그크가 나치의 공식 음악가로서 나치의 이상과 정책에 부합하는 음악을 만들어 내어 나치에 크게 동조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에그크가 나치당에 가입한 일이 없으며 그에게 주어진 나치의 직함은 다만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이고 또한 나치 정권에 대하여 거의 동조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었다. 결론은? 중간이라는 것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히틀러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는 베르너 에그크

 

베르너 에그크는 전쟁 이후에 더욱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에그크는 전후 독일에서 '재건작곡가'(Komponist des Wiederaufbaus)로 알려질 정도로 음악활동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작곡가, 지휘자로서의 활동 이외에도 음악가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음악저작권문제는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였다. 그리하여 그는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1950년대에 GEMA의 중요한 인물로서 활동했고 이어 CISAC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4년에는 바바리아 슈타츠오퍼의 지휘자로서 20년 계약을 맺었다. 그의 작품은 유럽의 주요 페스티발에서 계속적으로 초연되어 관심을 끌었다. 1955년에는 '아일랜드 전설'(Irische Legende)가 초연되었다. 게오르게 첼(George Szell)이 지휘했고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출연하였다. 1963년에는 뮌헨 국립극장에서 Die Verlobung in San Domingo(산 도밍고의 약혼)가 초연되었다. 인종차별을 하지 말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작품으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대본을 썼다. 그는 모두 7편의 오페라를 작곡하고 4편의 발레곡을 작곡했지만 말년에는 거의 관현악곡에 치중하였다. 베르너 에그크는 1983년 향년 82세로 바이에른 지방의 인닝 암 암머제(Inning am Ammersee)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도나우뵈르트의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도나우뵈르트에 있는 베르너와 엘리자베트 에그크의 묘소

 

[베르너 에그크의 오페라 수첩]

● Columbus(콜룸부스). 라디오 오페라. 1933. 1942년에 수정 ● Die Zaubergeige(마술 바이올린). 프란츠 포치 백작의 소설을 바탕으로 루드비히 슈트레커가 대본을 썼다. 1935년. 1954년에 수정 ● Peer Gynt(페르 긴트). 헨리크 입센의 원작. 1938년. ● 시르체(Circe). 스페인의 문호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가스 원작. 1945년 작곡. 1948년 초연. 1966년에 '17 Tage und 4 Minuten'(17일과 4분)이라는 제목의 오페라 세미부파로 다시 작곡함 ● Irische Legende(아일랜드 전설). Y. B. 예츠 원작. 1955년 작곡. 1975년 수정 ● Der Revisor(검찰관). 니콜라이 고골 원작. 1957년 ● Die Verlobung in San Domingo(산 도밍고의 약혼).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원작. 1963년

[징슈필] ● Die Löwe und die Maus(사자와 생쥐). 어린이를 위한 징슈필. 1931년 ● Der Fuchs und der Rabe(여우와 까마귀). 어린이를 위한 징슈필. 1932년 ● Die Historie vom Ritter Don Juan aus Barcelona(바르셀로나의 기사 돈 후안 이야기). 전래민속극. 1932년

 

[베르너 에그크의 발레곡]

● Joan von Zarissa(차리싸의 요안). 내레이터, 혼성합창, 소프라노, 바리톤,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1940년 ● Abraxas(아브락사스). 하인리히 하이네 원작의 파우스트 발레. 1948년 ● Die chinesische Nachtigall(중국의 나이팅게일). 한스 크리스챤 안델센 원작. 1953년 ● Casanova in London(런던의 카사노바). 1969년.

 

오페라 '검찰관'의 한 장면

 

 

 

 

 

 

 

 

ä   ö   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