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유네스코 세계유산

잘츠부르크의 역사적 센터

정준극 2013. 9. 13. 21:37

잘츠부르크의 역사적 센터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잘츠부르크의 바로크 건물들

                               

잘츠부르크에 대하여는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처지여서 굳이 설명이 필요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을 진작시키는 의미에서 설명코자 한다. 유럽의 도시 중에서 잘츠부르크처럼 중세로부터의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도 찾아 보기 힘들다. 구시가지에 들어서면 어느덧 중세에 와서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는 중세로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독립적인 도시국가 형태로 운영되었다. 주로 왕족 출신의 대주교(Prince Archbishop)가 통치했다. 잘츠부르크는 특별 종교도시국가라고 할수 있다. 규모는 작지만 마치 하나의 나라처럼 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는 종교적인 특성이 도시의 곳곳에 잘 표현되어 있다.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잘츠부르크를 통치하던 대주교의 궁전 등이 그같은 현상을 반영한다. 잘츠부르크의 중심지역인 구시가지는 화려하고 장엄한 고틱식 건물로 넘쳐 있다. 마치 유럽의 각지에서 온 건축가, 조각가, 미술가들이 명예를 걸고 경쟁이나 하듯 아름다운 건물들을 만들어 낸 곳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의 빈센초 스카모찌(Vincenzo Scamozzi)와 산티티 솔라리(Santini Solari)의 이름은 잊을수 없다. 잘츠부르크가 바로크 도시로서 이름을 떨치게 만든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의 겨울


그러나 모든 저명 인사 중에서 잘츠부르크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모차르트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를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잘츠부르크라는 말만 나오면 어딘가 음악적이어서 정겹다.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위대한 음악가가 있다. 마에스트로 허버트 폰 카라얀이다. 그는 실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잘츠루브크 페스티발을 주도하여 탄생시킨 주역이다. 잘츠부르크는 지리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이탈리아 문화와 독일 문화가 만나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잘츠부르크 문화라는 독특한 성격의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시내 중심지에 있는 모차르트 생가. 현재는 기념관이다.


잘츠부르크의 도시는 지형적으로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눈덮힌 높은 산이 무대배경처럼 둘처쳐 있다. 잘츠부르크는 호엔 잘츠부르크 요새가 잘츠부르크 시가지를 압도하듯 내려보고 있는 특별한 경광의 도시이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수많은 돔과 첨탑이 혼재되어 있어서 불현듯 동화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다. 잘츠부르크의 건물들은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뚜렷이 구별이 된다. 잘츠부르크 지도를 보면 그런 구분을 쉽게 알아차릴수 있다. 대성당, 대주교 공관, 프란체스코 수도원, 논버그 수녀원, 성페터 수도원, 돔 광장 등은 종교적인 위상을 대표한다. 세속적인 것은 구시가지의 좁은 길에 늘어서 있는 건물들로 대표된다. 구시가지에 있는 서너 곳의 시장(마르크트)도 이에 속한다. 잘츠부르크의 역사적 중심지역은 종교적이면서도 세속적인 건물들, 중세로부터 20세기에 이르는 건물들, 예술, 특히 음악과 연관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의 등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늦었지만 1996년의 일이었다.

 

구시가지 게트라이데의 간판들

 

잘츠부르크를 대표하는 몇개의 건축물을 소개코자 한다. 우선 대성당이다. 대성당(돔)은 성루퍼트와 성비르길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대주교가 통치하는 종교의 도시 잘츠부르크의 센터에 위치한 뛰어난 건축물이다. 대성당은 2차 대전 때에 폭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복구작업을 하는 중에 지하에서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발굴이 있었다. 현재의 건물 이전에 있었던 건축에 대한 내막을 알수 있는 증거들이 발굴되었던 것이다. 이에 의하면 8세기경에 이미 바실리카 타입의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사항은 1181년에 초기 교회를 확장했던 자취도 발견되었다. 증축된 교회는 1598년에 화재로 파괴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대성당이 세워진 것이다. 현재의 대성당 건물은 당시 궁정 건축가였던 산티니 솔라리(Santini Solari)의 작품이다. 아무튼 잘츠부르크 대성당은 건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는 건축물로서 잘츠부르크의 랜드마크이다. 대성당을 무대배경으로 삼아서 해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연극이 공연되고 있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연극은 변함 없이 '예더만'(Jedermann)이라는 제목의 것이다.  오페라 대본가로도 유명한 휴고 폰 호프만슈탈이 극본을 쓴 작품이다.

 

돔광장에서의 연극 '예더만' 공연

 

성페터교회의 베네딕트 수도원은 일찍이 7세기 말엽에 설립된 오래된 수도원이다. 잘츠부르크의 다른 건축물들은 대체로 12세기로 부터 비롯하였는데 성페터교회의 수도원은 그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수도원 교회는 잘츠부르크에서 유일하게 하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어서 눈길을 끈다. 교회의 중심 부분은 몇 차례에 걸친 보수와 구조 변경을 겪었다. 교회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면 12세기의 흔적도 찾아볼수 있다. 성페터교회의 묘지와 카타콤은 특별하다. 논버그(Nonnberg) 베네딕트 수녀원은 아마 알프스 북쪽에서는 가장 오래된 수녀원일 것이다. 성페터 수도원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건축되었다. 논버그 수녀원은 묀흐버그(Mönchberg) 언덕의 꼭대기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잘츠부르크는 논버그 수녀원과 호엔잘츠부르크 성 때문에 멀리서도 더욱 웅장하게 보인다. 논버그 수녀원은 특히 바로크 돔이 아름답다. 그리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였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고 정겨운 곳이다. 호엔잘츠부르크(Hohensalzburg)성(요새)을 빼놓을 수는 없다. 잘츠부르크 시가지를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로마시대의 구조이다. 중세에는 목재로 된 요새였으나 12세기 초에 석재로 교체하였다. 그후 15세기에는 탑이 세워졌고 망루와 외벽도 마련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대규모 개축공사가 시작되어 17세기까지 계속되었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은 잘츠부르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잘츠부르크 시가지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대주교궁전은 12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현재의 규모는 17세기에 당시 대주교인 볼프 디트리히 폰 라이테나우(Wolf Dietrich von Raitenau)가 주도한 것이다. 대주교궁은 두개의 건물이 복합된 것이다. 따라서 내정(호프)도 두개가 있다.

 

논버그수녀원

 

잘츠부르크는 잘차흐(Salzach) 계곡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이다. 그래서 주위는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잘츠부르크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이 있다. 그후 로마의 병사들이 제국의 서쪽 요새로서 주둔하게 되었고 이어 주민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만 로마시대의 정착지를 무니치피움 클라우디움 주바붐(Municipium Claudium Juvavum)이라고 불렀다. 로마 시대에 잘츠부르크는 동서를 잇는 세개의 주요 도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있어서 동서의 문물 교류가 다른 어느 곳보다도 활발하였다. 5세기 경에 야만인들이라고 불리는 족속들의 침입이 있었고 그후 바바리아의 테오도 공작이 프랑코니아의 선교사 주교인 흐로드베트에게 잘츠부르크를 관리하라고 위임하였다. 그 때에 성페터 수도원과 논버그 수녀원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에는 성페터 수도원의 원장이 잘츠부르크의 주교도 겸하고 있었다. 대주교궁과는 별도로 잘츠부르크 강과 일반인들의 주거지역 사이에 공작궁이 세워졌다. 이와 함께 중세에는 마을이 주로 공작궁과 강 사이에 발전되었다. 교회는 계속 늘어났고 각지에서 내노라 하는 학자들이 잘츠부르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잘츠부르크 대성당과 그 앞의 대성당광장(돔플라츠)

 

10세기 말에 두가지 중요한 사건이 생겼다. 하나는 수도원과 대주교의 역할이 분리 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과거에는 성페터 수도원장이 주교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은 1077년에 대주교로 임명된 게르하르트가 권위의 상징으로서 건설한 것이다. 마을은 계속 발전해 갔고 이에 따라 종전의 목재 방어벽을 석재로 교체하는 대공사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아니하게 1167년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마을의 집들이 거의 모두 목재였기 때문에 한 번 불이 나자 것잡을수 없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후 잘츠부르크 주민들은 거리의 모든 집을 석재로 짓기 시작했다. 이를 인 잘차흐(Inn-Salzach) 형식의 가옥이라고 부른다. 잘츠부르크에 고틱 양식의 건물이 들어서게 된 것은 1300년 경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후기 고틱 양식이었다. 그후 15세기와 16세기에는 사방 각지에서 유명한 예술가들이 잘츠부르크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와서 살기 시작했다. 1587년에 잘츠부르크 대주교로 임명된 볼프 디트리히 폰 라이테나우는 도시의 구조를 전면 개편하는 대대적인 작업을 추진하였다. 유명한 잘츠부르크의 대주교궁도 그때 세워진 것이다. 얼마후 유럽에서는 저 유명한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간의 전쟁이었다. 당시의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파리스 로드론(Paris Lodron) 공자였다. 그는 잘츠부르크가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민들을 총동원하여 방어벽을 굳건히 했다. 그래서 전화를 비켜갈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는 대단히 뛰어난 정치적인 전략으로서 중립을 유지하여 개신교나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았다. 파리스 로드론 대주교는 1622년에 잘츠부르크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래서 잘츠부르크대학교를 파리스 로드론 대학교라고 부른다.

 

잘츠부르크대학교와 호엔잘츠부르크 성

 

17세기에 이르러서 잘츠부르크에는 바로크 양식이 찾아왔다. 그로부터 도시의 여러 기념비적인 건물들이나 분수 또는 조각상들이 만들어졌다. 이와 함께 잘츠부르크는 계몽사상의 센터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잘츠부르크의 명예를 또 다시 빛내 주었던 것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난 것은 1756년이었다. 모차르트는 당시 잘츠부르크 대주교인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백작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에라 여기 아니면 내가 밥먹고 살데가 없는줄 아나?'라는 생각으로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로 갔다. 만일 대주교와의 관계가 원만했다면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계속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세계음악의 역사는 다른 길로 접어 들었을지도 모른다. 잘츠부르크를 대주교가 지배하는 시기는 1803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잘츠부르크는 베르흐테스가덴(Berchtesgaden), 파사우(Passau), 아이히슈타트(Eichstatt)를 커버하는 선제후의 영역이 되었다. 첫 통치자는 투스카니의 페르디난트 3세였다. 어찌하다보니 투스카니 공국에서 쫓겨나서 잘츠부르크로 온 인물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잘츠부르크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그러했다. 대혼란의 시기였다. 회복되기까지 수십년이 걸렸다. 잘츠부르크의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잘츠부르크와 린츠를 연결하는 철도가 설치되고서 부터였다. 얼마후 철도는 뮌헨까지 연장되었다. 교통이 좋아지자 바바리아의 투자가들이 잘츠부르크에 쉽게 올수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다른 지역에 있는 투자가들도 잘츠부르크를 구경도 할 겸 많이들 찾아 왔다.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게 되었다. 도시가 확장되고 공장들도 들어섰다. 이 기간 중에 가장 두드러진 건축물은 아마도 페스트슈필하우스(Festspielhaus)일 것이다. 세월히 흘러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이 이루어지고 2차 대전의 막이 올랐다. 잘츠부르크는 2차 대전 중에 공습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나자 복구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현대적 건축물들이 이곳저곳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잘츠부르크는 신구의 조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잘츠부르크 페스트슈필하우스. 멀리 호엔잘츠부르크 성이 보인다.



 

 

ü 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