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유네스코 세계유산

젬머링 철도(Semmeringbahn)

정준극 2013. 9. 21. 18:29

젬머링 철도(Semmeringbahn)

Semmering Railway

뮈르쭈슐라그에서 젬머링 협곡을 거쳐 글로그니츠까지 41km 구간

 

젬머링 철도. 경치가 끝내 준다.

                       

유네스코는 1998년에 오스트리아의 젬머링 철도(젬머링선: Semmeringbahn)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어느 특정구간의 철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는 아마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공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에 사람의 힘으로 그런 대단한 철도를 산간벽지에 건설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인간승리의 쾌거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젬머링 철도는 세계의 철도 중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것으로도 충분히 상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젬머링 철도가 유네스크의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재되었다는 것은 누가 보던지 당연한 일이었다. 젬머링 철도는 오스트리아의 뮈르쭈슐라그(Murzzuschlag)에서 젬머링 협곡을 거쳐 글로그니츠(Gloggnitz)까지 41km 구간의 철도를 말한다. 사실 41km의 구간이라면 얼마 길지도 않은 거리이다. 하지만 기차를 타고 고산준령과 심심산곡을 지나갈 때에는 마치 유원지에서 기차를 타고 유령동굴을 지나가는 것과 같아서 오씩하고 아찔한 순간이 많다. 그러나 '이러다가 곧장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도 있겠지만 스릴이 만점이어서 기차표를 산 것이 억울하지 않다. 특히 젊은이들이 스릴을 느끼기 위해 일부러 젬머링 기차를 타는 경우도 많다. 물론 나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마음만은 젊은 사람들도 많이 찾아온다. 돌이켜보건대 오스트리아에 철도가 도입된 이래 비엔나에서 사방으로 철도가 깔리게 되었지만 젬머링 대협곡을 통과하는 철도는 알프스 산록이 너무 험해서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다. 중세로부터 비엔나에서 이탈리아의 아드리아해까지 가는 길은 중요한 무역통로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마소에 짐을 싣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알프스 준령을 넘어 강행군을 하는 것 뿐이었다. 비엔나는 특별히 저 남쪽의 트리에스트, 그리고 베니스까지 철도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원래 우중충하고 으스스한 날씨에서 사는 사람들은 '오 솔레 미오'라는 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저 남쪽 나라 이탈리아를 흠모하기 마련이었다. 

 

젬머링 철도의 한쪽 끝인 뮈르쭈슐라그

                          

그리하여 프란츠 요셉 황제 때인 1848년에 드디어 젬머링 철도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젬머링 대협곡을 지나는 철도를 놓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모두 '당치도 않은 소리'라면서 혀를 홰홰 내둘렀다. 각계에서의 반대가 폭풍처럼 몰려왔다. 전문가들과 언론의 반대가 특히 강했다. 너무나 엄청난 공사였으며 위험한 공사였고 경험도 없는 공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사는 강행되었다. 1848년 8월에 공사가 스타트되었다. 전 구간은 14개의 소구간으로 분류하였고 각 소구간은 각각의 건설회사에게 공사를 맡겼다. 처음에는 남자 인부 약 1천명과 여자 인부 약 410명이 투입되었으나 공사가 본궤도에 오르자 오스트리아의 각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에서 노동인력을 차출하여 무려 2만 명으로 공사를 진행하였다. 워낙 세계 초유의 공사였기 때문에 공사가 진척될수록 사람들의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신문들은 연일 공사현황을 대서특필하였다.  

 

글로니그니츠 마을

                                              

오스트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지극한 관심을 보였다. 공사현장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지자 각 도시의 여행사들이 '젬머링 특별 관광'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이곳저곳의 마을에 호텔이 들어서고 식당들이 들어섰다. 오지 산간마을에 때 아닌 경제붐이 일어났다. 젬머링 철도 공사는 온 국민의 축제가 되다시피했다. 생각해보면 평지도 아니고 고산준령을 통과하는 철도공사였으므로 어렵기는 어렵지 않을수 없었다. 1 미터를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이나마이트를 떠트려야 하는 공사였다. 공사책임자는 베니스 출신의 공학자인 카를로 게가(Carlo Ghega)에게 맡겨졌다. 카를로 게가는 아직도 해외여행이 어려운 그 시절에 미국을 방문하여 약 40개에 이르는 철도 로선을 조사하였다. 거리로는 2천 4백여 km에 이르는 철도였다. 카를로 게가는 이같은 조사경험을 토대로 고지대인 젬머링을 통과하는 노선을 기획하였다. 그는 새로운 철도 부설 공법도 개발하였다.

 

젬머링 철도를 설계하고 건축책임을 맡았던 카를 리터 폰 게가(1802-1860)

 

사람들은 카를로 게가의 계획이 과연 실현성이 있을까라면서 걱정들을 태산같이 했다. 카를로 게가는 공공사업장관인 안데레아스 바움가르트너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사업을 밀고 나갔다. 1848년에 착수한 대공사는 6년 후인 1854년에 일단은 완공되었다. 전체 41km의 구간에 14개의 터널이 건설되었다. 가장 긴 터널을 길이가 1천 4백 50여 미터에 달했다. 고가철도는 16개가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몇개는 2층 고가철도였다. 커브가 있는 석조 교량은 100개가 넘었다. 규모는 작지만 철조 교량도 11개나 되었다. 젬머링 철도의 평균 고도는 해발 460 미터였다. 말하자면 구름을 안고서 수행한 공사였다. 그만큼 고지대에서 이루어진 공사였다. 사족이지만, 카를로 게가는 젬머링 철도를 완성한 공로로 황제로부터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 그래서 명칭도 제국의 스타일로 Carl Ritter von Ghega가 되었다. 하지만 사업이 끝난 후에는 정부 재무성의 말단 직원으로 채용되어서 '내가 누군데 이런 자리에나 앉아 있어야 되나?'라는 절망감으로 향년 58세에 세상을 떠났다.

 

젬머링 철도 노선의 공중지도. 왼쪽에 뮈르츠추슐라그가 보이고 오른쪽 끝에 글로그니츠가 보인다.

 

젬머링 철도가 완성되므로서 사실상 비엔나에서 트리에스테까지 기차로 갈수 있게 되었다. 말해야 잔소리 밖에 되지 않지만 공사는 너무나 힘들었다. 게다가 철도 역사의 초기여서 공법도 취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대공사를 완성하여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젬머링 철도를 완공했다. 젬머링 철도는 지나가면서 보는 자연경관이 너무나 뛰어나서 아드리아해로 휴가를 떠나던 사람들이 중간에 내려서 알프스 산간지대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오스트리아에서 지내면서 시간이 있으면, 아니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정한 젬머링 기차를 한번 타보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비엔나에서 비너 노이슈타트까지 기차로 와서 뮈르쭈슐라그에서 과감하게 젬머링 기차로 갈아타고 태산험곡의 젬머링 지대를 거처 글로그니츠까지 갔다가 오는 코스이다. 하기야 트리에스테까지 가도 된다. 그러나 젬머링 철도를 타고 가다가 아무곳이나  내리면 스키장이었다. 더구나 1차 대전이 끝나자 사람들은 레크리에이션에 관심을 두게 되어 젬머링 철도는 더 부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젬머링 철도는 오픈한지 약 1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끄떡없이 사용되고 있다.

 

젬머링 철도 주변의 경관

 

서두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고산지대인 뮈르츠에서 저지대의 비엔나까지 가는 통로는 선사시대로부터 있었다. 중세에는 이 통로가 알프스를 넘는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중세에는 이 지대를 넘으려면 나귀나 말에 짐을 싣고 가야 했다. 12세기까지만 해도 비엔나에서 베니스까지 가는 육상루트는 이 길이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좀 돌아가기는 하더라도 더 쉬운 노선이 개발되었다. 기존의 길에서 상당히 남쪽에 있는 브렌너(Brenner)와 라드슈태터 트라우엠(Radstatter Trauem)을 연결하는 루트였다. 그래서 15세기에 젬머링은 무역통로가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손실이 많았다. 그러는 중에 샤를르 6세(마리에 테레지아 여제의 아버지)는 1728년에 비엔나에서 베니스로 가는 루트보다는 트리에스트로 빠지는 루트를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루트를 트리에스테 루트라고 부른다. 한편, 유럽에서 첫 기차는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현재 체코공화국의 부드봐이스로 연결된 로선이었다. 당시에 기차는 승객들을 실은 칸만 기차처럼 생겼고 기관차가 나오지 않아서 말들이 객차를 끌고 다녔다. 유럽에서 기관차가 객차를 처음으로 끈것은 1837년 비엔나의 플로리스도르프와 도이치 바그람 로선이었다. 그리고 남쪽 로선으로는 1841년에 비엔나에서 글로그니츠까지 가는 로선이 생긴 것이었고 1844년에는 뮈르쭈슐라그에서 그라츠까지 가는 철도가 추가되었다. 하지만 젬머링을 통과하는 철도는 너무나 난지대이기 때문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프란츠 요셉 황제 시대에 드디어 젬머링 철도가 완성된 것이다. 이로써 비엔나에서 트리에스테까지 기차를 타고 갈수 있게 되었다.

 

젬머링 대협곡 구간의 젬머링 철도. 2층 고가철도로 유명하다.

 

1959년에는 젬머링 철도도 일대 변화를 맞이하였다. 디젤 기관차가 아니라 전철로서 운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운행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런생각 저런생각이 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고민은 현재의 철도가 너무 고지대에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젬머링의 저지대에 새로운 터널을 만들어서 로선을 보다 편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연방철도 당국의 계획에 오스트리아 연방정부, 그리고 슈티리아 지방정부와 카린티아 지방정부가 흔쾌히 지원하기로 했다. 다만, 니더 외스터라이히가 열심히 반대하였다.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터널 공사로 인하여 그 지역의 지하수가 영향을 받을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업이 한때 주춤했으나 최신첨단공법을 사용하며 또한 원래 계획의 로선을 일부 변경을 한다는 조건을 내걸어서 진행될수 있었다. 길이가 무려 27.3 km 에 달하는 새로운 터널의 공사는 2012년 4월에 시작되었으며 2024년에 완성할 계획이다. 소요 예산은 무려 30억 유로로 추산되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4조원이나 되는 대형 프로젝트이다.

  

자세히 보면 산중턱에 2층 고가철도와 터널 등이 보인다. 이렇게 험난한 로선이기 때문에 산 아랫쪽에 긴 터널을 뚫을 계획이다. 슈티리아의 봐인체텔봔트(Weinzettelwand)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