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유네스코 세계유산

봐하우 문화경관(Wachau Cultural Landscape)

정준극 2013. 9. 24. 16:15

봐하우 문화경관(Wachau Cultural Landscape)

도나우 계곡의 멜크, 크렘스, 뒤른슈타인, 마우테른

황금의 봐하우...수도원과 포도밭의 중세문화지대

 

봐하우 계곡과 도나우가 펼치는 아름다운 전원교향곡. 유유히 지나가는 유랍선.

 

봐하우는 니더 외스터라이히주에 있는 계곡이다. 그 계곡을 도나우가 감돌고 있어서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은 곳이다. 봐하우에는 곳곳에 중세의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게다가 봐하우는 오스트리아에서도 이름난 포도주 산지이다. 그래서인지 세계의 심미가들과 미식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봐하우 계곡은 거리로서는 약 40 km 에 이른다. 하지만 역사의 발자취는 기원전의 선사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구하다. 봐하우 구간의 도나우를 유람선을 타고 미끄러지듯 흘러가면서 양안의 경치를 감상하고 봐하우 포도주를 천천히 음미하는 일은 마치 '여기가 혹시 낙원이 아닐까?'라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일이다. 봐하우 노선에는 크렘스, 멜크, 슈타인, 뒤른슈타인과 같은 중세의 마을들이 점철되어 있다. 너무 심한 표현 같지만 관광여행으로서는 세계에서도 이만한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봐하우의 특급 명소로는 아무래도 멜크 대사원(Stift Melk)과 괴트봐이히 수도원(Stift (Göttweig)을 들수 밖에 없다. 이들 수도원과 교회의 내부를 둘러보고 나면 '과연!'이라는 감탄사와 함께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유네스코는 뜻한바 있어서 봐하우 지역을 Wachau Cultural Landscape(봐하우 문화 경관)라고 지칭하고 이곳의 고고학적 및 농업적 연혁을 높이 평가하여 2000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멜크의 높은 지대에 위치한 대사원(수도원과 교회)의 위용. 세계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는 아니지만 그렇게 말해도 손색이 없을 건축물이며 내부의 장식과 소장품은 가히 훌륭한 박물관이다.

              

봐하우 지역에서 상당히 재미난 곳이 한 군데 있다. 뒤른슈타인이다. 12세기에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Richard of Lion Heart)가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가 영국으로 돌아가던 중에 오스트리아를 지나갈 때에 당국에 의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잡혀 있던 곳이다. 사자왕 리챠드는 나중에 막대한 몸값을 치루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사자왕 리챠드가 잡혀 있던 곳은 정확히 말해서 뒤른슈타인(Dürnstein)의 퀸링거부르크(Künringerburg)성이다. 높은 산 꼭대기에 있는 성이다. 지금은 일부 잔해만 남아 있는 고성이다. 사자왕 리챠드를 간첩으로 몰아 구속한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바벤버그 공작인 레오폴드 5세였다. 사자왕 리챠드는 비엔나 근교의 에르드버그라는 곳에 있는 어떤 주막에 묵는 중에 오스트리아 국기를 보고 경의를 표하기는 커녕 오스트리아 국기를 하수도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여관집 주인이 아무래도 수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경찰에게 신고를 했다. 경찰은 사자왕 리챠드를 간첩이라고 생각해서 체포했다. 나중에 사자왕 리챠드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사자왕 리챠드는 자기의 신분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 수염을 상당히 길렀기 때문에 처음에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도나우강변의 뒤른슈타인. 오른쪽 산 위에 있는 고성이 리챠드 왕이 갇혀 있었던 퀸링거부르크 성의 폐허이다.

 

레오폴드 5세는 사자왕 리챠드가 오스트리아의 국기를 하수도에 버린 것은 곧 자기에게 무시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사자왕 리챠드를 구금했다. 레오폴드 5세는 사자왕 리챠드를 비엔나에서 멀리 떨어진 봐하우의 뒤른슈타인으로 이송하여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산위의 성탑에 갇아 두었다. 그후 레오폴드 5세는 사자왕 몸값 은 3만 5천 kg을 받고 사자왕 리챠드를 석방하였다. 그 중간에서 몸값을 조달하고 레오폴드 5세에게 전달한 사람은 사자왕 리챠드의 프랑스인 보좌관인 블론델(Blondel)이었다. 레오폴드 5세는 막대한 액수의 몸값을 받아서 그것으로 비너 노이슈타트를 건살하는데 사용했다. 1952년도 할리우드 영화인 Ivanhoe(아이반호. 우리나라에서는 흑기사라고 번역함)에는 영국 색슨의 기사인 아이반호가 음유시인으로 가장하고 사자왕 리챠드를 찾으러 오스트리아의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뒤른슈타인의 퀸링거부르크 성에  갇혀 있는 그를 찾아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자왕 리챠드를 석방하기 위한 몸값은 주로 영국에 있는 유태인들이 재산을 털어내어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아무튼 사자왕 리챠드와 관련된 에피소드의 본고장이 바로 봐하우의 뒤른슈타인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우정 지금은 폐허가 된 고성을 찾아간다.

 

뒤른슈타인의 산중 고성에 설치되어 있는 사자왕 리챠드와 음유시인 블론델을 그린 석조 조각.

 

13세기 초에 쓰여진 독일의 대서사시인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의 무대가 봐하우라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이 대서사시의 일부 오리지널 원고가 멜크 대사원의 도서실에서 발견되어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 그 원고는 멜크의 도서실에 전시되어 있다. 잘 아는대로 '니벨룽의 노래'를 바탕으로 하여 리하르트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라는 역사상 위대한 오페라를 작곡했다. 또한 '니벨룽의 노래'는 영화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니벨룽의 노래'의 내용은 봐하우 일대의 정치적인 상황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러한 '니벨룽의 노래'의 탄생지가 봐하우라는 것은 뜻깊은 일이 아닐수 없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중에서 '발키리'의 한 장면. 브륀힐데.

                  

봐하우 지역의 마을들은 오스트리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사람들이 약 3만 2천년 전부터 살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갈겐버그(Galgenberg)와 빌렌도르프(Willendorf)에서 출토된 도기로 만든 사람모양의 상을 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살았으니까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다. 기원전 4천 5백년부터 1천 8백년 사이의 신석시 시대에 멜크와 크렘스에서 사람들이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다는 증거도 나왔다. 그러나 봐하우 또는 크렘스라는 명칭이 기록으로 등장한 것은 서기 900년대 중반이라고 한다. 하기야 아주 옛날에는 기록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수가 없었을 것이다. 바벤버그 왕조의 레오폴드 1세가 봐하우 일대를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976년이었다. 1156년에는 그때까지 오스트마르크라는 명칭의 변경지가 공국으로 격상되었고 바벤버그의 하인리히 2세(야소미어고트)가 새로운 군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때 물론 바벤버그는 오스트리아가 공국이 되는 조건으로 바바리아를 포기하였다. 한편, 봐하우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퀸링스라는 기사 가문이 11세기에 바벤버그의 변경지로 와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으나 얼마후 가문이 흐지부지 종말을 고하게 되자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토지의 대부분을 알브레헤트 5세(왕으로서는 알브레헤트 2세)가 수중에 넣게 되었다. 그것이 1430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비록 봐하우 지역에 있지만 장크트 미하엘(St Michael), 뵈젠도르프(Wösendorf), 요힝(Joching), 봐이센키르헨(Weissenkirchen)의 네 도시는 일찍이 1150년 경부터 비교적 근자인 1839년까지 마치 독립국처럼 행세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인 1972년에 봐하우라는 이름 아래에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

 

도나우 강을 안고 있는 마을과 뒷산의 포도밭

 

봐하우 일대는 도나우가 흐르고 있고 옛날부터 포도 농사를 많이 짓기 때문에 외세의 공략이 빈번하였다. 정치적으로는 합스부르크가 모든 영토를 통합하게 되어 안정이 이루어졌으나 봐하우 지역은 외세의 침범으로 수난을 겪기가 일수였다. 우선 헝가리인들이 15세기에 침범하였고 헝가리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는 1477년에 크렘스와 슈타인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종교개혁도 아니나 다를까 이 지역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략 1530년부터 1620년까지 종교적인 분쟁이 빈번하였다. 물론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분쟁이었다. 그러다가 1631년 괴트봐이히의 게오르그 수도원장이 이끄는 가톨릭 군대가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개신교 군대를 무찌르고 항복을 받아내어 분쟁을 마무리했다. 그러한 여파로 그후에 봐하우 계속에는 교회와 예배처, 기타 종교적인 기념물들이 다수 건설되었다. 다음으로 이 지역에서의 포도 농사에 대하여 이것저것 설명을 할 요량이었지만 생각해 보니까 별로 중요한 사항이 아닌 것 같아서 생략한다. 그 대신에 18세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봐하우 일대가 어떠한 변천을 겪었는지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코자 한다.

 

괴트봐이히 수도원은 저 멀리 산 위에 보인다.

 

오스트리아의 역사에 있어서 현대(모던)시기라고 하면 대략 1700년대 이후를 말한다. 여라가지 개혁과 혁신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702년에는 멜크 대사언이 재건되었다. 1715년에는 뒤른슈타인의 수도원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1733년에는 괴트봐이히 수도원이 재건축 사업이 마무리 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말과 19세기 초에 수도원을 정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서 상당수의 수도원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바람직한 이벤트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멜크와 크렘스가 봐하우 일대의 경제발전을 위해 서로 노력하자고 합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1904년부터는 역사적인 전통에 바탕을 두고 현대화를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었다. 가장 중요한 사업이 관광사업이었다. 이와 함께 포도주 사업도 정부의 보호를 받아 흥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황금의 봐하우'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멜크대사원의 위용. 멜크라는 말은 강물이 천천히 흐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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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하우는 비엔나에 속한 지역이 아니라 니더외스터라이히주에 속한 지역이기 때문에 비엔나의 명소와 공원을 소개하는 본 블로그에는 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으나 비엔나에서 과히 멀리 않은 곳에 있는 세계적인 문화경관 지역이므로 기왕에 간략하게 소개코자 한다. 봐하우는 비엔나로부터 서쪽으로 약 75km 떨어진 곳의 도나우에 면해 있는 지역이다. 강의 양편으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봐하우 계곡이라고 부른다. 봐하우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탐방지는 멜크 대사원(Stift Melk)이다. 명칭은 대사원이지만 실은 수도원(Stift)이고 교회는 수도원에 속한 교회이다. 멜크 대사원에 대한 소개는 이미 본 블로그의 다른 항목에서 했으므로 여기서는 봐하우 지역에 대하여 보다 집중적으로 소개코자 한다. 비엔나에서 멜크까지 가는 방법은 크게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봐하우 계곡까지 가는 도나우 유람선을 타는 것이다. 약 두시간이 걸린다. 비엔나의 누스도르프(Nussdorf)에서 출발하여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코르노이부르크(Koneuburg)-툴린 안 데어 도나우(Tullin an der Donau)-츠벤텐도르프(Zwentendorf)-크렘스 안 데어 도나우(Krems an der Donau)-뒤른슈타인(Dürnstein)을 거쳐 여객선 터미날(Fähranlegestelle)이 있는 장크트 로렌츠/봐하우(St Lorenz/Wachau)에서 잠시 하선하여 멜크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는 것이다. 두번째는 차로 가는 방법이다. 비엔나의 나슈마르크트(Naschmarkt)와 마리아힐르퍼 슈트라쎄(Mariahilfer Strasse)를 거쳐 A1 고속도로를 타고 펜칭(Penzing)-아우호프(Auhof)-프레스바움(Pressbaum)-알트렝바흐(Altlengbach)-장크트 크리스토펜(St Christophen)-장크트 푈텐(St Pölten)-장크트 마르가레텐 안 데어 지어닝(St Margareten an der Sierning)-로스도르프(Loosdorf)를 거쳐 멜크에 도착하는 것이다. 세번째 방법은 비엔나의 베스트반호프(서부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다. 매시간마다 가는 편이 있다. 가장 편한 방법이지만 멜크에서 내려서 다시 차를 이용해야 대사원에 갈수 있으므로 그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죽어라고 가는 방법도 있고 버스를 두어번 갈아타면서 가는 방법도 있으며 돈이 한푼도 없으면 걸어서 가는 방법도 있는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이다.


봐하우 계곡의 도나우 유람선. 카이저린 엘리자베트 호이다. 도나우를 이런 유람선을 타고 시원하게 항해하는 것도 잊을수 없는 낭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