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쇤브룬 궁전과 정원(Palace and Gardens of Schönbrunn)

정준극 2013. 9. 14. 22:07

쇤브룬 궁전과 정원(Palace and Gardens of Schönbrunn)

 

쇤브룬 궁전과 정원의 일부

 

쇤브룬 궁전(Schloss Schönbrunn)에 대하여는 이미 본 블로그의 '비엔나의 궁전' 항목의 '쇤브룬궁전 탐구'편에서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굳이 재탕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쇤브룬에 대한 이해를 강화하는 의미에서 재차 설명을 개진코자 한다. 쇤브룬 궁전은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 정확히 말하자면 1918년, 합스부르크 제국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오스트리아공화국이 선포될 때까지 합스부르크 역대 황제들과 가족들의 거처였다. 쇤브룬 궁전은 처음에는 황실사냥숙사였다. 그러다가 뒤를 이은 주인들이 계속 확장하고 개축하여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에는 제국의 어엿한 궁전으로서 손색이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후의 군주들은 철을 따라서 여름에는 쇤브룬에서, 겨울에는 시내에 있는 호프부르크에서 지내자  쇤브룬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여름궁전으로서 명색을 유지하게 되었다. 쇤브룬 궁전은 정원까지 합하여 규모가 상당한 편이다. 파리의 베르사이유 보다는 전체 면적면에서 적고 건물의 규모도 적다고 할수 있지만 그래도 유럽에서는 알아주는 궁전으로 떠받들여지고 있다. 물론 약간 얕잡아서 하는 소리이겠지만 주로 프랑스 사람들은 쇤브룬을 '리틀 베르사이유'라고 부른다.

 

쇤브룬 궁전과 분수


쇤브룬 궁전은 당대의 거장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Johann Fischer Bernhard Fischer von Erlach)와 니콜라우스 파카시(Nicolaus Pacassi)가 설계한 건축물로서 대표적인 장식예술의 건물이다. 쇤브룬 궁전은 건축적으로 로코코 양식에 속한다. 쇤브룬 궁전에는 방이 정확히 1천 4백 41개가 있다. 그러므로 어디서 누가 자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쇤브룬 궁전은 바로크 건축의 정수이며 게잠트쿤스트베르크(Gesamtkunstwerk: 종합예술작품)의 대표적인 예이다. 쇤브룬 궁전에서 게잠트쿤스트베르크의 개념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대표적인 예는 정원이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은 여러 예술 형태를 융합한 마스터 작품이다. 이쯤해서 쇤브룬 궁전에 대한 서론은 마무리하고 이제부터는 쇤브룬 궁전의 연혁과 현황에 대하여 설명코자 한다. 쇤브룬 궁전과 정원은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한마디만 더 하자면 쇤브룬 궁전에는 드넓고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1752년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동물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대규모의 온실(팔멘하우스), 식물원(오랑제리), 마리오트 극장, 황실마차박물관(Wagenburg) 등이 있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에서는 여름 밤에 비엔나필의 연주회가 열리며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궁전 앞 광장에서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린다. 쇤브룬 궁전이 일반에게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호프부르크와 함께 비엔나의 관광 1번지가 되어 있다. 합스부르크 왕실의 분위기를 느낄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름밤 콘서트. 이만하면 과연 유럽 최고의 궁전 중의 하나라고 볼수 있다.

                       

오늘날의 쇤브룬 궁전이 합스부르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569년부터였다. 1569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왕조의 선조 초기였다. 당시 이 자리에는 카터부르크(Katterburg)라는 장원 스타일의 건물이 있었다. 그것을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이 소유하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는 카터부르크를 사들여서 사냥숙사로 만들면 좋겠다는 훌륭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1569년에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으로부터 현재의 쇤브룬 궁전 일대에 있는 카터부르크 건물과 주변의 넓은 땅을 매입했다. 땅은 비옥했지만 빈강(Wien Fluss)에 홍수가 나면 주변 지대가 모두 침수되는 곳이어서 찜찜했지만 워낙 숲도 좋고 들도 좋아서 사냥터로는 안성맞춤이어서 사들였던 것이다. 막시밀리안 2세 황제는 우선 빈강부터 수로를 정리하여 더 이상 침수되지 않게 했다. 그리고 넓은 땅에는 황실의 소유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울타리를 설치했다. 울타리를 치니까 그곳의 야생 동물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어 사냥에 도움이 되었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꿩, 오리, 사슴, 멧돼지 등을 사냥했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들판의 한쪽을 정리해서 별도의 울타리를 만들고 칠면조, 공작과 같은 이국적인 조류들을 길렀다. 이와 함께 물고기를 낚시할수 있는 연못도 만들었다. 이런 시설들은 나중에 세계적인 쇤브룬 동물원으로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다.

 

쇤브룬 궁전과 분수

                          

16세기 황실의 사냥터와 사냥숙사가 21세기까지 어떻게 변천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별로 중요한 사항도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알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막시밀리안 2세가 카터부르크 장원(莊園)을 손에 넣은 후로 이곳은 거의 100년 이상이나 황실의 사냥터로서 제구실을 했다. 특히 페르디난트 2세와 결혼한 엘레오노라 곤차가(Eleonora Gonzaga)왕비가 사냥을 죽어라고 좋아해서 비엔나의 궁전은 그대로 놓아두고 이곳에 와서 노상 사냥을 즐기며 지냈다. 얼마후 남편인 페르디난트 2세(1578-1637)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페르디난트 3세가 황제가 되었고 모후인 곤차가는 이곳을 아예 거처로 삼기로 하고 보따리를 싸서 이사를 왔다. 하지만 곤차가 모후는 원래의 카터부르크 장원이 너무 비좁다고 생각해서  1638년부터 1643년까지 기존의 카터부르크 장원에 추가하여 마치 궁전과 같은 새건물을 세웠다. 곤차가 왕비에 의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주변이 정리될 때에 마당의 한쪽에서 샘물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그 샘물이 보기에 좋았기에 쇤브룬, 즉 '아름다운 샘물'이라고 불렀다. 1642년의 일이었다. 쇤브룬이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태어난 명칭이다. 쇤브룬의 오랑게리(Orangery: 오렌지 온실)도 엘레오노라 곤차가 시대에 시작되었다.

 

쇤브룬의 오랑게리

                           

쇤브룬 정원(Schlosspark)는 곤차가 모후의 손자, 즉 페르디난트 3세 황제의 아들인 레오폴드 1세(1640-1705)시대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곤차가 모후가 새로 건축한 궁전과 궁전 뒤편의 넓직한 대지에 마련된 공원이다. 그 지역을 그로센 파르테레스(Grossen Parterres)라고 한다. '넓은 바닥'이라는 뜻이다. 정원은 프랑스식으로 조성되었다. 1695년에 베르사이유의 정원을 설계했던 앙드레 르 노트르라는 사람의 제자인 장 트레에(Jean Trehet)가 책임 맡아서 조성했다. 쇤브룬의 정원은 여러 화단과 분수 등으로 조성되었으며 그 중에는 미로와 같은 구역도 마련되었다. 아마 숨바꼭질을 하고 싶어서였던 모양이다. 쇤브룬 정원은 정원 안에 정원이 있는 스타일로 만들어 놓았다. 동물원과 오랑게리와는 별도로 거대한 온실을 만들어 놓았다. 정원의 서쪽 끝에는 별도의 수목원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정원의 서쪽에 영국식 정원을 별도로 만들었다. 2009년에는 오랑우탄 우리를 현대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식당과 사무실 건물도 들어섰다.

 

쇤브룬 정원의 나무들

                     

쇤브룬 궁전의 곳곳에는 조각작품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궁전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광장의 양쪽에 넵튠의 분수가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밖에도 많은 조형물, 조각작품 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백미는 글로리에트 앞의 넵튠 분수일 것이다. 아마 오스트리아 전역에 있는 역사적 분수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큰 분수일 것이다. 글로리에트(Gloriette)는 마치 개선문처럼 생긴 구조물이다. 쇤브룬 정원의 저쪽 끝에 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는 천상의 개선문과 같은 느낌을 준다. 제국을 상징하는 쌍두의 독수리가 상단의 중앙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글로리에트는 평지로부터 60미터나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더 웅장하다. 글로리에트가 만들어진 것은 1777년이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거장 피셔 폰 에얼라흐가 쇤브룬 궁전의 메인 빌딩을 지으려고 앴으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계획을 바꾸어서 합스부르크 권세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그리고 '정의의 전쟁'(Bellum iustum)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글로리에트를 짓도록 했다. 다 아는 사항이지만 글로리에트는 영광이라는 뜻이다. '정의의 전쟁'은 '폭력을 수반하는 전쟁이나 분규는 철학적, 종교적, 정치적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전쟁은 필요에 의해서만이 치루어져야 하며 전쟁은 평화를 이끄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쇤브룬 정원의 글로리에트가 그런 철학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건축하였다. 이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글로리에트의 건축자재를 사용하지 않는 불필요한 석재로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11구 짐머링의 노이게보이데 궁전(Schloss Neugebaude)의 잔여 석재를 가져다가 글로리에트를 만들었다. 노이게보이데성의 폐허에서 가져온 석재는 정원의 한 쪽에 있는 로마의 유적지 재건에도 활용되었다. 오늘날 글로리에트에는 카페가 들어서서 일부러 그곳까지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아무튼 글로리에트에 올라가면 비엔나 시내가 펼쳐 보인다.

 

쇤브룬 정원의 남단, 언덕위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글로리에트

                     

로마 유적은 원래 '카르타고의 폐허'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고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유적을 가져와서 설치한 것은 아니고 로마 유적지를 새로 만들면서 이름만 그렇게 붙였던 것이다. 거장 요한 페르디난트 헨체도르프 폰 호엔버그가 1778년에 깊이 궁리하여 건축한 것이다. 이 건축물은 단순히 로마시대의 폐허를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보다는 전체 정원의 구도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8세기 중반에는 낭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그림이나 조각에 유적지나 폐허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모든 권세는 언젠가는 폐허처럼 된다는 교훈을 생각해서 일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다. 로마 유적과 함께 별도로 사각형의 풀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이 천천히 흘러 내리도록 했다. 풀에는 다뉴브(도나우)강과 엔스(Enns)강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로마 유적을 만들면서 동시에 부근에 오벨리스크 분수를 만들었다. 대역사인 쇤브룬 정원의 조성을 마무리하면서 그 정원이 안정과 영원성의 상징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오벨리스크 분수를 만들었다.

 

쇤브룬 정원의 조성을 마무리하면서 안정과 번영을 위해, 그리고 영원성을 위해 오벨리스크 분수를 제작하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1918년에 막을 내리게 되자 새로 수립된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쇤브룬의 주인이 되었다. 쇤브룬 궁전은 박물관이 되었다. 쇤브룬 궁전은 2차 대전후 강대국이 비엔나를 통치하고 있었을 때(1945-1955)에는 오스트리아연맹위원회의 영국대표단, 그리고 비엔나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부대의 본부로 사용되었다. 그후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회의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1961년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 소련의 니키타 흐르스쵸프의 회담 장소로 사용되었다. 유네스코는 1966년에 쇤브룬 궁전과 정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뛰어난 바로크 앙상블이며 종합예술작품(게잠트쿤스트베르크)의 모델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쇤브룬 궁전과 정원은 해마다 150만명에서 300만명이 찾아오는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티어가르텐(동물원), 팔멘하우스(식물원), 존넨우르하우스(해시계의 집)에 연결되어 있는 뷔스텐하우스(디저트 하우스), 봐겐부르크(마차박물관), 마리오네트 극장(인형극장), 호프모빌리엔데포(궁정차고) 등을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연간 5백만명 이상이 이곳을 찾아오는 셈이다. 입장권은 인터넷으로 예매하고 있기도 하다. 모차르트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주로 한 콘서트가 오랑제리와 슐로스테아터(궁전극장)에서 열리고 있어서 쇤브룬은 더구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쇤브룬 궁전의 자개방

                

쇤브룬 정원은 조각의 보고이다. 약 50개의 조각 작품이 질서있게 자리잡고 있다. 1773년부터 1780년 사이에 독일의 조각가이며 정원설계사인 요한 빌헬름 바이어(Johann Wilhelm Beyer)의 주도로 제작되었다. 혼자 모두 할수 없으므로 요한 밥티스트 하게나우어(Johann Baptist Hagenauer)와 같은 유명한 조각가들도 작업에 동참했다. 정원의 조각상은 주로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며 이밖에 한니발, 루크레치아와 같은 전설적인 인물들도 들어 있다. 쇤브룬 정원의 조각에 대하여는 별도 항목에서 소개코자 한다.

  

쇤브룬 정원 측면의 황태자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