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유네스코 세계유산

그라츠(Graz)시와 에겐버그 성(Schloss Eggenberg)

정준극 2013. 9. 22. 19:29

그라츠(Graz)시의 역사적 중심지 및 에겐버그 성(Schloss Eggenberg)

 

그라츠 라트하우스(시청)

그라츠의 에겐버그성

 

그라츠는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이다. 오스트리아의 동남부, 슬로베니아와 헝가리 경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도이다. 그라츠가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라고 해도 인구는 약 25만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목포시 인구와 같다.  오스트리아의 전체 인구는 2013년 현재 약 850만 명이다. 그중에서 비엔나에 약 2백만 명이 살고 있다.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라는 그라츠의 인구가 25만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도시들은 비엔나를 제외하고 보면 인구들이 몇 만명이면 큰 도시이고 보통은 그저 몇 천명이다. 아무튼 그런 그라츠가 2010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그렇게 선정한 이유는 그라츠의 중심지역, 즉 구시가지가 독일문화, 발칸문화, 지중해문화의 합성지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터키문화의 힌트도 있다. 그라츠는 실로 수세기동안 이들 이질적인 문화의 교류지였다. 그라츠는 지역적인 중요성 때문에 상업이 융성했다. 그리고 전에는 인너 외스터라이히의 수도였고 지금은 슈타이어마르크의 주도이다. 15세기 이후 인너 외스터라이히의 수도였고 군주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이 많이 살았다. 그라츠는 이국적인 문화와 귀족들의 문화가 조화롭게 합성된 지역이다.

 

그라츠 구시가지(인네레 슈타트)의 중심지역

                                    

그러한 합성문화는 그라츠 중심지역(1구 인네레 슈타트)의 건축물들을 보면 알수 있다. 인네레 슈타트(시내 중심지역)의 건축양식들은 각 시대의 특성을 조화롭게 반영하고 있다. 교외에 있는 에겐버그성(Schloss Eggenberg)는 그라츠 건축하모니의 전형이다. 그래서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오스트리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우선 비엔나를 보고 그 다음으로 시간이 있으면 잘츠부르크와 인스부르크를 찾아가지만 그라츠는 이상하게도 잘 가지를 않는다. 의외로 그라츠가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찾아가기가 어렵다는 얘기는 말도 되지 않는다. 비엔나에서 자동차로 가면 그다지 멀지 않아서 잘하면 하루 코스이다. 기차로도 언제든지 갈수 있다. 하기야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사운도 오브 뮤직'으로 유명해서 누구든지 한 번 가보고 싶어하며 인스부르크는 동계올림픽이 열린 일이 있는 알프스 계속의 유서깊은 도시이므로 가보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라츠는 비록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이지만 내걸만한 간판이 별로 없다. 에겐버그성이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에겐버그성을 잘 알고서 일부러 찾아가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일단 비엔나에서 호프부르크, 쇤브룬, 락센부르크, 헤르메스빌라 등과 같은 궁전들을 자세히 본 사람들에게는 그라츠의 궁전들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그런데 뭘 좀 아는 사람들은 잘츠부르크는 가지 않더라도 그라츠는 찾아간다. 아무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도시가 아니던가?

 

그라츠 구시가지와 슐로스버그 공원과 시계탑

                                    

그라츠 시내를 자세히 설명할수는 없는 일이고 대신 그라츠의 역사에 대하여만 간단히 소개코자 한다. 어디를 가던지 역사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라츠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라고 한다. 무르(Mur)강이 흐르고 있는 비옥한 지역이라서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로마제국이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는 도나우강의 서쪽에 처음에는 수비대의 병영을 세우고 이어 정착촌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라츠는 비엔나와는 달리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데려다가 정착촌을 만들지도 않았다. 다만, 로마군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자주 거쳐간 곳이기는 해서 그러한 흔적은 남아 있다. 그라츠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아바르족과 헝가리인들의 침범을 받아 곤경을 겪기도 했다. 그 후에는 중세 초기에 이르기까지 주로 독일 쪽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건너와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라츠가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 지역이 카린티아변경지가 되고부터였다. 변경지역은 마르크라고 불렀는데 그라츠는 카린티아마르크에 속한 지역이었다. 지금의 오스트리아도 그 옛날에는 오스트마르크라고 불렀다.

 

그라츠의 레이크 페스티발

 

그라츠가 기록에 등장한 것은 1128년이었다. 이 시기에 마을 한 가운데에 시장이 생겨서 상업이 활발하게 되었고 아울러 사람들이 더 몰려 와서 살게 되어 도시가 형성되었다. 주로 바바리아에서 사람들이 요새말로 말하면 이민을 왔다. 세월이 흘러 그라츠는 바벤버그에 이어 합스부르크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1379년에 노이버그조약이 맺어지자 그라츠는 인너외스타라이히로서 레오폴드 3세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노이버그조약이란 오스트리아 전역을 통치하던 루돌프 4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들인 알브레헤트 3세와 레오폴드 3세에게 오스트리아를 분할하여 통치토록 한 조약이다. 그리하여 형인 알브레헤트 3세는 당시 오스트리아 공국을 차지하였고 동생인 레오폴드 3세는 슈티리아 공국을 포함하여 카린티아, 카르니올라(현재의 슬로베니아 일대), 빈디츠 변경지(현재의 슬로베니아 일대), 고리치아(트리에스테를 포함한 현재의 북부 이탈리아 지대), 프리울리, 티롤, 포르데어외스터라이히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라츠가 슈티리아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공국으로 발전하자 레오폴드 3세를 따르는 귀족들이 몰려와서 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상인들과 예술가들도 몰려들기 시작했고 유태인들도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 유태인 공동거주지역은 15세기까지 무난하게 유지되었다. 레오폴드 3세의 뒤를 이은 프레데릭 3세(1453-1493)는 그라츠의 귀족들에게 여러 특권을 주었고 도시에 새로운 건물들을 세우도록 했다. 이때에 세워진 것이 그라츠돔이라고 하는 성이기디우스 교회이다.

 

그라츠대성당(돔: Grazer Dom)의 회중석과 중앙제단

 

그라츠는 16세기에 들어와서 오스트리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터키로부터의 위협을 자주 받았다. 터키는 그라츠로부터 먼 곳에 있었지만 무슨 욕심이 그렇게도 많은지 슈티리아 인근의 슬로베니아 일대까지 진출해서 틈만 나면 경계를 넘어 침입했다. 그런가하면 헝가리의 마쟈르족들도 심심하면 그라츠 일대를 침범하였다. 그라츠는 터키와 헝가리 때문에 막심한 고통을 당했다. 1480년에는 터키 군대가 심지어 그라츠 성문 앞에까지 처들어왔다. 이같은 에피소드는 그라츠 대성당의 프레스코화에도 표현되어 있다. 거장 토마스 폰 빌라흐(Thomas von Villach)가 완성한 '하나님의 징벌'(The Scourge of God)이라는 제목의 프레스코화에는 하나님이 이교도인 터키 군대를 징벌하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16세기에는 설상가상으로 내부적으로도 종교문제 때문에 소요가 빈번했다. 종교문제란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일어난 개신교와 기존의 로마 가톨릭간의 분규를 말한다. 그라츠는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중세의 요새를 크게 보강하였다. 오늘날 공원이 되어 있는 슐로스버그이다. 슐로스버그의 정상에는 그라츠의 심볼인 시계탑이 세워졌다. 1559년에 세운 것이다. 슐로스버그가 프랑스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지만 시계탑만은 남았다.

 

그라츠 대성당(성이기디우스교회)

                                               

그라츠가 1564년에 합스부르크 영토의 분할에 따라 인너 오스트리아(Inner Austria: Innerösterreich)에 속하게 되었고 이어 인너 외스터라이히의 수도가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한바와 같다. 그런데 개신교의 확산으로 인하여 그라츠 시민의 거의 4분의 3이 개신교도가 되었다. 시민단체인 개신교재단의 멤버 중에는 유명한 천문학자이며 수학자인 요한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494-1600)도 있었다. 그는 개신교도들에게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그라츠였는데 곧이어 그라츠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겪어야 하는 시대를 마지하게 되었다. 예수회가 도착한 것이다. 예수회는 슈티리아의 군주인 샤를르 2세 대공의 비호를 받아 반종교개혁 작전을 펼치기 위해 개신교가 판세를 잡고 있는 그라츠에 왔다. 1572년이었다. 예수회는 그라츠에 오자마자 대학교부터 세웠다. 예수회대학교였다. 교육을 통한 반종교개혁운동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이와 함께 예수회는 개신교재단(Protestant Foundation)에 침투하여 이 재단을 와해시키려는 훼방공작을 서슴치 않았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모차르트가 '마술피리'에서 음흉하고 못된 모노스타토스를 예수회 사람들에 비유한 것은 예수회의 온당치 못한 반종교개혁 운동을 비난하는 배경에서였다. 아무튼 샤를르 2세의 비호를 받은 예수회의 운동으로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운동을 주도하였던 개신교재단은 1600년에 문을 닫았다.

 

슐로스버그 공원과 정상의 시계탑

 

1618년에 샤를르 2세 대공의 아들인 페르디난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자 그는 그라츠에 있는 궁전을 그대로 놓아두고 비엔나의 궁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라츠는 그라츠에 있던 수많은 귀족들도 페르디난트 황제를 따라 비엔나로 가자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행하게도 오스트리아 측이 1664년에 장크트 고타르트(St Gothard)에서, 그리고 1683년에 비엔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터키의 위협이 마침내 사라지게 되자 그라츠의 경제도 부흥하기 시작했다. 귀족들과 부유상인들이 다시 몰려와서 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라츠는 남과 북, 동과 서를 잇는 지역적인 요지여서 상업이 발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라츠에 온 귀족들과 부유 상인들은 마치 경쟁이나 벌이듯이 훌륭한 저택과 건축물들을 지었다. 대체로 르네상스 또는 초기 바로크 스타일의 건축물들이었다. 오늘날 그라츠를 빛나게 하는 건물들은 대부분 그 당시에 세워진 것들이다. 예를 들면 콜로니츄 궁(Kollonitsch Palace), 에판스 폰 아베르나스 궁(Effans von Avernas Palace), 슈투벤버그 궁(Stubenberg Palace) 등이다. 이어 도시의 서쪽에 인너 외스터라이히의 총독인 한스 울리히 폰 에겐버그(Hans Ulrich von Eggenberg)가 대단히 아름답고 장엄한 바로크 양식의 에겐버그 성을 건축하였다. 그라츠 출신인 당대의 거장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의 솜씨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그라츠의 에겐버그 성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뒤를 이은 요셉 2세의 개혁정책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계몽군주인 요셉 2세는 교회와 수도원의 폐해를 실감하고 이들을 정비하는 과감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그라츠 인근에 있는 16개의 수도원 중에서 9개가 문을 닫았으며 이어 그라츠의 예수회는 1773년에 문을 닫았고 예수회대학교는 국립대학교가 되었다. 예수회대학교 도서관의 장서들은 국립대학교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이와 함께 슈티리아와 카린티아에서 문을 닫은 수도원의 장서들도 국립대학교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새로 마련한 도서실은 로코코 양식에서 고전 스타일로 변천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도서실은 현재 슈티리아주 문서보관소로서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전에 예수회대학교였던 건물은 현재 신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1572년에 예수회가 그라츠에 진입한 이래 즉시 건축을 시작한 신학교 건물은 다른 건물과는 달리 리모델링을 하지 않고 르네상스 스타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아마 독일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채택한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물일 것이다.   

 

그라츠대학교의 위용

 

그라츠의 경제성장은 프랑스와 연합국간의 전쟁으로 인하여 심각한 곤란을 겪었다. 프랑스군은 그라츠를 1797년, 1805년, 1809년에 점령했었다. 그리고 그라츠에 무거운 전쟁비용을 부과했다. 프랑스군은 슐로스버그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슐로스버그의 결사항전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쇤브룬 조약에 따라 슐로스버그의 요새를 강제로 파괴하였다. 이어 1839년에는 슐로스버그가 있던 자리에 공원을 만들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48년의 혁명은 그다지 극단적인 것이 아니어서 별다른 영향을 입지 않았다. 이어 1918년 공화국이 수립되기 까지는 중류 친독일계 사람들이 그라츠를 운영했다. 그라츠는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착실한 발전을 이룩하여 왔다. 정부로부터 군부대의 부지를 인수받아 공원으로 만들어서 환경우선의 그라츠로 만들었다. 그라츠는 '공원도시'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라츠 일원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이 확장되었다. 교외에 새로 짓는 건물들은 비더마이어 양식이거나 유겐트슈틸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구시가지는 아직도 경제와 문화활동의 센터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라츠 쿤스트하우스(예술회관). 특이한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다. Friendly Alien.

                                        

1차 대전과 그라츠는 이상한 관계에 있었다. 잘 아는대로 1차 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한 후에 다음번 황위 계승자로 지정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어떤 민족주의자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촉발된 것이다. 그 프란츠 페드디난트 대공이 바로 그라츠 출신이다. 그라츠의 퀼렌부르크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라츠는 1차 대전으로 인하여 도시의 규모가 상당히 위축되었다. 먼 교외에 있는 땅들을 다른 나라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소외에 놓이게 되었다. 1938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을 하였다. 이와 함께 그라츠 주변의 17개 마을이 통합되어 그라츠광역시(Greater Graz)가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그라츠에는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해서 바야흐로 산업도시로서 탈바꿈하였다. 이로써 그라츠는 문화도시, 대학도시, 산업도시, 정원도시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라츠공과대학

                                              

그라츠의 역사적 및 건축학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수백 채의 건축물들 중에서 간과할수 없는 몇 채를 소개코자 한다. 페르디난트 3세 황제가 살던 궁전에서는 고틱 홀과 후기 고틱 양식의 카펠레(교회), 2중으로 된 나선형 계단 등이 남아 았다. 샤를르 대공이 1570년에 건축한 옆 건물은 대체로 원래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의 성이기디우스에게 봉헌된 후기 고틱 양식의 대성당은 프레데릭 3세가 1438년으로부터 1464년의 거의 30년 동안 건축한 것이다. 이 교회에는 놀랄만큼 뛰어난 프레스코가 남아 있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의 징벌'(Scourges of God)이다. 1480년에 토마스 폰 빌라흐게 제작한 것이다. 나중의 얘기이지만 성이기디우스교회는 이 지역의 주교교구가 제카우에서 그라츠로 이관되자 거의 2백년 동안이나 반종교개혁의 센터로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1786년에는 새로운 주교 관구의 대성당이 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의 영묘는 조반니 데 포니스(Giovanni de Ponis)가 완성한 것이다. 이 영묘는 1614년에 제작을 시작했으나 정작 봉헌식을 가진 것은 그로부터 꼭 1백년이 지난 1714년이었다. 거장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에 의한 내부장식이 그때서야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라츠의 페르디난트 2세 영묘(Mausoleum)

 

마지막으로 한마디. 그라츠라는 말은 작은 성이라는 뜻이다. 슬로베니아어의 gradec 라는 말에서 그라츠로 발전되었다고 하는데 gradec는 작은 성이라는 뜻이다. 슬라브 사람들이 정착해서 살 때에는 Grad 라고 했다. 그것도 같은 의미이다. 일찍이 6세기경에 알프스 슬라브 사람들이 지은 작은 성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