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유네스코 세계유산

비엔나의 역사적 중심지역

정준극 2013. 9. 28. 06:54

비엔나의 역사적 중심지역

1구 인네레 슈타트

 

슈테판스돔 남탑에서 내려다 본 비엔나 시가지. 가운데의 돔은 페터스키르헤이며 멀리 라트하우스(시청)와 보티프키르헤가 보인다.

 

비엔나의 구시가지, 즉 행정적으로 제1구 인네레 슈타트 일대가 2001년에 유네스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비엔나가 수천년 역사를 거쳐오면서 도시의 수준, 특히 건축물의 수준이 타의 모범이 되었기에 자에 표창장을 수여한다는 얘기다. 당연한 처사였다. 비엔나의 역사, 특별히 제1구의 거리와 건물들에 대하여는 이미 본 블로그의 여러 항목에서 다루었으므로 굳이 재탕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가 비엔나 구시가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정리해 봄으로서 비엔나에 대한 애정의 수준을 한 층 더 높이고자 한다. 두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선정 기준이다. 첫째는 비엔나의 중심지가 유럽의 문화적 및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대들을 거친 도시라는 것이다. 즉, 중세에 이어 바로크 시대, 그리고 그륀더차이트(Grunderzeit)라고 하는 비교적 현대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도시발전과 건축적인 유산이 잘 보전되어 있는 곳이 바로 비엔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기야 비엔나는 초기에는 독일 제국의 영향을 받는 오스트마르크(변방지대)의 수도였으나 그후에는 합스부르크가 주인이 된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수백년동안 영욕의 시기를 지켜 본 도시이므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아니할수 없다. 

 

바벤버그 왕조의 하인리히(헨리) 2세는 비엔나를 오스타리키의 수도로 삼고 암 호프에 궁전과 교회를 세웠다.

 

둘째는 비엔나가 16세기 이래 유럽, 나아가 세계 음악의 수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비엔나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구스타브 말러, 아놀드 쇤버그, 안톤 브루크너,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 휴고 볼프 등 이루 헤아릴수조차 없는 많은 위대한 음악가들이 머물러서 음악활동을 했던 곳이다. 그리고 그들의 발자취가 대부분 잘 보전되어 있다. 세계의 수많은 도시에서 이만한 자산을 가지고 있는 도시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음악은 만국공통어가 아니던가! 비엔나의 역사적 진전과정을 단계별로 짚어보자. 비엔나에 사람이 살았던 것은 신석기시대로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문화사적 측면에서는 구태여 석기시대까지 살펴볼 필요가 없다.

 

링슈트라쎄에 있는 모차르트 기념상. 전면 잔디밭의 꽃으로 만든 높은 음자리표가 아름답다.

 

-  고대로부터 중세 초까지(11세기까지). 기원후 1세기 경에 로마가 다뉴브 지역까지 통치를 연장했을 때 비엔나에는 켈트족들이 살았었다. 로마인들은 다뉴브 강변에 빈도보나 요새를 건설하고 188년까지 지배했다. 홍수로 인해 도나우의 물줄기가 변경되면 그것이 로마제국의 서방 경계선이 되었다. 비엔나(독일어로는 빈)라는 명칭은 언제 어디서부터 비롯한 것일까? 여러 주장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독일어 명칭인 베니아(Wenia)이다. 베니아라는 단어가 처음 기록에 등장한 것은 881년이었다. 게르마니아족과 마쟈르족이 전쟁을 벌이는 중에 베니아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독일에서는 베니아라는 명칭에서 훗날 빈(비엔나)가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혹자는 빈도보나에서 빈이라는 말이 비롯되었다고도 설명하지만 그것보다는 베니아라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비엔나의 외곽을 감돌아 흐르고 있는 도나우. 노이에(신) 도나우이다. 가운데는 인공의 도나우섬(도나우인젤)이다. 왼쪽 윗쪽에 보이는 높은 건물이 밀레니엄 빌딩이다.

봐하우지역을 흐르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다뉴브)

 

- 중세 중반부터 중세 말까기(12세기에서 15세기까지). 비엔나는 독일 제국에서 쾰른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되었다. 이 기간에 비엔나에는 미노리텐키르헤를 포함한 몇 개의 수도원이 생겼고 이어 바벤버그 공작궁이 건설되었다. 그때 건설된 공작궁이 오늘날의 호프부르크이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가 1276년부터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이 되었다. 비엔나는 14세기와 15세기에 무역으로 번창하였다. 1365년에는 비엔나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비엔나는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고 아울러 여러 민족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 12세기부터 있어 왔던 비엔나의 유태인 사회는 1420-21년의 유태인 배척에서 파괴되었다. 슈테판스돔은 1718년에 대주교 관할의 교구성당이 되었다.

 

호프부르크의 정문 격인 미하엘문(미하엘러토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조각들이 도처에 설치되어 있다.

 

- 기독교의 분리와 터키의 공성(16세기부터 1683년까지). 1517년에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그 여파로 독일 지역은 대체로 개신교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로마 가톨릭을 수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비엔나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벌이는 분규의 중심에 서 있을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중에 16세기에 유럽의 상당 지역은 오토만 제국 때문에 여간 곤혹을 치룬 것이 아니었다. 오토만 터키는 헝가리를 점령하고 세력은 급격히 서쪽으로 향하였다. 도나우 강변의  비엔나는 오토만 터키군과 대치하는 최전선이었다. 터키의 첫 침공은 1529년이었다. 이 때문에 교역이 크게 위축되었고 경제난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1533년에는 그라츠에 있던 페르디난트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자 비엔나를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비엔나는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오토만 터키의 두번째 비엔나 공성에서 오토만 터키는 신성로마제국의 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그로부터 헝가리는 합스부르크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다.

 

오늘날 헝가리의 에거에 있는 터키와의 전투 기념비

 

- 바로크 수도(1683년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터키군이 물러간 1863년 이후, 비엔나의 상황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시민들이 늘었다. 그러다보니 성밖에도 주거지역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밖의 주거지들을 보호하기 위한 성벽이 하나 더 생겼다. 리니엔봘(Linienwall)이라고 불렀다. 비엔나의 중심지역에는 주로 귀족이나 왕족들이 살았다. 이들은 바로크 양식의 시내 궁전들, 즉 팔레라고 부르는 건물들을 지으며 위세를 떨쳤다. 비엔나는 거장 건축가들의 활동무대였다. 요한 바티스트 피셔 폰 에얼라흐,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등은 대표적인 건축가였다. 이들의 손에 의해 쇤브룬이 새 모습으로 등장했고 벨베데레 궁전이 세워졌고 호프부르크 궁전이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 비엔나는 유럽의 음악의 수도로서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 작곡가들이 활동한 시기였다. 비엔나는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한 후에 유럽의 지도를 새롭게 그리는 '비엔나 회의'(1814-15)의 장소였다. '비엔나 회의' 이후에는 정치적 전체주의가 더욱 굳세어졌다. 그러한 시기를 포아매르츠(Vormärz)라고 불렀다. '3월 이전'이라는 뜻이다. 1848년 3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시대를 말한다. 음악과 예술은 귀족이나 왕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중산 시민층들도 음악과 예술, 가구(비더마이어), 그림 등에 깊은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음악에 있어서는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대표적이었다.

 

바로크양식의 화려한 벨데베레 궁전. 2차 대전이후 미영불소의 4대 강대국이 통치하던 오스트리아에게 독립을 인정하는 평화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 프란츠 요셉 1세의 시대(1848-1916). 1848년 말에 젊은 프란츠 요셉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비록 1860년에 헌법에 의해 제국의회가 구성되었지만 오스트리아가 민주주의 공화국이 되어야 한다는 백성들의 꿈은 무산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1857년에 도심을 둘러싸고 있던 성벽을 철거하고 링슈트라쎄를 조성하였다. 링슈트라쎄는 19세기 도시계획의 모델이었다. 링슈트라쎄에는 신생 부호들의 저택들(팔레: 시내 궁전)이 들섰으며 이밖에도 오페라극장(슈타츠오퍼), 의사당(팔라멘트), 박물관(미술사 및 자연사), 시청(라트하우스), 비엔나대학교, 뵈르제(증권거래소), 로사우어 카제르네(궁정마사)와 같은 대규모 건축물들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 시기를 그륀데차이트(Gründezeit)라고 불렀으니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기반조성시기'이다. 그륀데차이트는 건축가들의 시기였다. 이와 함께 이 시기에는 문화예술에 있어서도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작곡가로서는 안톤 브루크너, 요한네스 브람스, 휴고 볼르, 구스타브 말러, 아놀드 쇤버그 등이 활동했다. 건축가 및 화가로서는 오토 바그너, 아돌프 로스, 구스타브 클림트, 오스카르 코코슈카 등이 있었다. 그리고 철학가로서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있었다.

 

구시가지의 번화가인 그라벤거리

                 

- 1차 대전 이후 시대(1918-). 1916년에 프란츠 요셉 1세 황제가 서거하고 1918년에 제1차 대전이 막을 내린 것과 함께 오스트리아는 민주주의공화국으로 출범하였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사이에 비엔나는 사회주의가 압도적이어서 건축에 있어서도 사회주의 주거시설들이 들어섰다. 2차 대전은 비엔나 도시의 상당부분을 폐허로 만들었다. 재건사업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와 함께 구시가지를 보존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법적으로는 1972년부터 구시가지의 모든 건물에 대한 법적인 보호조치가 실시되었다.

 

사회주의 주거시설인 칼 맑스 호프. 아마 하나의 주택건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리라.

 

 

 

 

ä   ü   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