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 - 1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의 유일한 완성 오페라
러시아 국민오페라의 대표작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초상화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러시아 오페라는 어떤 것인가?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음반으로 취입된 러시아 오페라는 어떤 것인가? 역시 무소르그스크의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오페라의 장르에 대하역사 오페라가 있다면 '보리스 고두노프'는 베르디의 '돈 카를로스'와 함께 대하역사 오페라의 정상을 차지할 것이다. 많은 오페라들이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작곡되었지만 그런중에도 작곡자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가장 훌륭하게 반영된 작품은 '보리스 고두노프'와 '돈 카를로스' 뿐일 것이다. 이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비록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기는 했지만 작곡자가 대본가와 상의하여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먼 에피소드들을 오페라의 내용으로 첨가하여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재미를 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돈 카를로스'와 '보리스 고두노프'는 비슷한 시기에 세상에 선을 보였다. '돈 카를로스'는 1867년에 초연되었고 '보리스 고두노프'는 1869년에 첫 선을 보였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 국민오페라의 대표작이다. 러시아의 국민오페라는 미하일 글링카가 '루슬란과 루드밀라'로 시작하여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와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이고르 공'으로 본궤도에 올랐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 사실주의 오페라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사실주의는 19세기 말에 이탈리아에서 유행하였던 베리스모 오페라와는 다르다. 이탈리아의 베리스모 오페라는 사회적인 상황을 오페라에 표현하는 것을 중점으로 삼았지만 러시아의 사실주의 오페라는 스토리보다는 음악적인 사실주의에 중점을 둔 것이다. 러시아의 작곡가들은 오페라라는 것은 가사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므로 노래를 지나치게 장식적이거나 가식적으로 부르면 내용의 전달이 어렵게 되어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오페라들을 보면 대체로 자연발성을 중시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특별한 발성을 통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민족시인 알렉산더 푸슈킨. '보리스 고두노프'의 원작자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는 러시아의 민족시인인 알렉산더 푸슈킨 원작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생페터스부르크에서 1868년부터 1873년의 기간에 오페라로 작곡했다. 무소르그스키는 여러 오페라를 시도했지만 그중에서 '보리스 고두노프'만이 유일하게 완성한 작품이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주제는 러시아의 짜르로서 1598년부터 1605년까지 러시아의 혼란시기에 러시아를 통치한 보리스 고두노프와 그의 원수인 거짓 드미트리에 대한 것이다. 거짓 드미트리(실은 수도승인 그리고리)는 보리스 고두노프를 물리치고 1년 동안 러시아를 통치했다. 러시아의 혼란시기(Time of Troubles)란 1598년 보리스 고두노프에 의해 류리크 왕조가 몰락한 후 뒤따른 러시아의 정치적 혼란기를 말한다. 혼란시기는 1613년 모스크바에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선 후에야 끝이 났다. 이 시기에 외국의 침략, 농민 봉기가 극심했으며 왕위를 노리는 자들이 왕위를 겨루며 국가 존립 자체를 위협했고 이로 인해 러시아 남부와 중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사회적·경제적 파탄을 겪기도 했다. 이 시기에 외국의 침략, 농민 봉기가 극심했으며 짜르를 노리는 자들이 왕위를 노리는 바람에 국가 존립 자체를 위협했었고 이로 인해 러시아 남부와 중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사회경제적 파탄을 겪기도 했다. 러시아어 대본은 작곡자 자신이 썼다. 무소르그스키는 1872년에 '보리스 고두노프'의 수정본을 완성했다. 이번에는 니콜라이 카람친(Nikolay Karamzin)의 '러시아 국가의 역사'(History of the Russian State)를 참고로 하여 대본을 고쳐 썼다. 푸슈킨은 '보리스 고두노프'를 카람친 교수에서 헌정한바 있다.
실존인물이었던 제정러시아의 짜르 보리스 고두노프 초상화
이렇게 하여 '보리스 고두노프'는 두개의 버전이 있게 되었다. 하나는 1869년의 오리지널 버전으로 제국극장(현재의 마리인스키극장)이 거절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1872년에 완성한 수정본으로 1874년에 생페터스부르크에서 초연을 가진 것이다. 두 버전은 스토리에도 차이가 있고 이데올로기에 있어서도 서로 상이하여서 다른 하나를 수정본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리지널 버전을 생페터스부르크의 제국극장이 거절한 것은 주인공이 테너가 아니라 베이스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며 또한 여주인공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발레 장면도 등장하지 않으므로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오리지널 버전이 되었든지, 또는 수정 버전이 되었든지, 오늘날에는 두가지가 모두 공연되고 있지만 물론 1872년의 수정본이 더 자주 공연되고 있다. 그런데 '보리스 고두노프'를 공연함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어느 버전이 되었든지 실제로 무대공연에서는 상당부분을 삭제하고 공연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아울러 노래 부분을 새롭게 고치거나 오케스트라 파트를 수정하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각 장면들을 서로 순서를 바꾸어 공연할수도 있고 어떤 공연에서는 두개의 장면을 하나로 통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말하지만 오리지널 버전과 수정 버전의 장면들을 교환하거나 통합하여 공연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새로운 버전을 만든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
그런데 몇 명의 작곡가들은 무소르그스키의 오리지널 스코어에 무슨 얘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술적인 취약점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들을 수정하기 위해 새로운 버전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람은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이다. 이 버전들은 과거 수십년 동안 무대를 장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무소르그스키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더욱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에서 다른 어느 오페라보다도 가장 많이 공연되는 러시아의 작품이다. 차이코브스키의 '유진 오네긴'이 겨우 '보리스 고두노프'의 뒤를 추격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보리스 고두노프'를 생각하기 전에 실은 다른 작품들의 작곡을 시작했다. 알렉산더 세로프의 '유디트'(Judith)라는 소설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살람보'(Salammbo)라는 제목의 오페라와 러시아 현대 반낭만주의 익살극인 '결혼'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다. '결혼'은 알렉산더 다르고미츠스키의 오페라 '석상 손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무소르그스키는 '살람보'를 낭만적이며 서정적인 스타일로 만들고자 했으며 '결혼'은 사실주의 스타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상반되는 두 작품을 아이디어를 합성한 또 다른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는 중에 1868년 가을, 러시아어와 러시아역사 교수이며 푸슈킨 전문가인 블라디미르 니콜스키(Vladimir Nikolsky) 교수가 무소르그스키에게 푸슈킨의 드라마인 '보리스 고두노프'를 주제로 삼아서 오페라를 작곡하면 어떻겠냐고 타진하여 왔다.
생페터스부르크의 마리인스키극장(구제국극장). '보리스 고두노프'가 초연된 장소.
푸슈킨은 '보리스 고두노프'를 셰익스피어의 '헨리 시리즈' 또는 '리챠드 시리즈'와 같은 역사희곡을 모델로 삼아서 썼다. 무소르그스키는 '보리스'를 1825년에 썼고 1831년에 출판했다. 그러나 당국의 검열로 첫 공연은 1866년에야 가능했다. 푸슈킨이 세상을 떠난지 거의 30년 후나 되어서였다. 연극 공연은 일부 장면을 삭제한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무소르그스키는 블라디미르 니콜스키 교수로부터 '보리스 고두노프'를 오페라로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1837년에 공포된 정부의 칙령이 문제였다. 러시아의 짜르나 종교지도자에 대한 연극이나 기타 비판적인 예술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이었다. 이 칙령에 의하면 보리스 고두노프도 짜르는 짜르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하는 내용의 오페라는 만들기가 어려웠다. (이 칙령은 1872년에 로마노프 짜르에 한정된다는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소르그스키는 '보리스 고두노프'라는 오리지널 제목을 타이틀로 하는 오페라를 필생의 사업으로 작곡키로 결심했다. 무소르그스키가 '보리스 고두노프'를 오페라로 작곡키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미하일 글링카의 여동생인 류드밀라 셰스타코바는 무소르그스키에게 푸슈킨의 희곡 작품집을 선물로 주었다. 이에 감동한 무소르그스키는 1868년 10월부터 '보리스 고두노프'의 작곡에 들어갔다. 푸슈킨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전부 2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소르그스키는 그중에서 극적인 효과가 큰 부분만을 발췌해서 대본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주로 타이틀 롤인 보리스 고두노프와 직결된 내용의 장면들이었다. 여기에 일부 다른 장면들, 예를 들면 노보데비치(Novodevichy) 수도원 장면, 감옥 장면, 여관 장면 등을 포함하였다. 대본을 씀에 있어서는 푸슈킨의 운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스크바 근교의 노보데비치 수도원 전경
무소르그스키는 작곡에 열중하여서 보컬 스코어를 9개월만에 완성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869년 12월에는 풀 스코어를 완성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부의 체신부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그는 1870년에 대본을 정부의 검열당국에 제출했다. 당시에는 오페라 대본을 검열 받아야 했다. 그리고 스코어는 제국극장의 음악위원회에 제출했다. 역시 검열을 받기 위해서였다. 위원회는 '보리스 고두노프'를 6대 1로 거부했다. 여성 주역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글링카의 여동생인 류드밀라 셰스타코바는 검열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제국극장(현재의 마리인스키극장)의 무대감독인 제나디 콘드라티예프와 지휘자인 에두아르드 나프라브니크에게 물어보았다. 이들은 '어떻게 오페라에 여자 주역이 없을수 있단 말인가? 무소르그스키는 재능있는 사람이지만 그러면 곤란하다.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장면 하나만 넣으면 공연허가가 나올텐데...'라고 대답했다. 다른 코멘트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대표적이었다. 참신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나를 비롯한 무소르그스키의 친구들은 그가 새로 완성한 오페라가 극적으로 뛰어난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음악적으로도 러시아의 민족적인 요소가 풍부하여서 무척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오페라로서 여러 요소가 부족하여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지적해 주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기만의 창의성이 부족했다. 극장측은 합창과 앙상블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주역을 맡은 사람들의 역할이 아주 미약하다는 의견이었다. 극장측이 거절한 것은 오페라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크렘린 궁전의 테렘 홀이 있는 건물
1871년에 무소르그스키는 극장측의 의견을 참고하여 수정을 했다. 전체 24개 장면을 18 장면으로 압축했었으나 그것을 다시 16 장면으로 압축했다. 주역들을 재배치했다. 극장측은 여자 주역이 나오는 장면 하나만 추가하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으나 무소르그스키는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을 셋이나 추가했다. 두 장면은 산도미에르츠(Sandomierz) 장면이며 다른 하나는 크로미(Kromi)장면이다. 이와 함께 '복자 바실리 대성당의 장면'은 삭제했다. 또한 '테렘(Terem)장면'은 새로 작곡을 해서 넣었다. 이러한 수정으로 인하여 프리마 돈나의 역할이 크게 부각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폴란드 공주(총독의 딸)인 마리나였다. 또한 기존에 단역이었던 여자들의 역할도 확대되었다. 예를 들면 여관집 여주인과 간호사에게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짜르 계승자인 테너의 역할을 강화하였다. 무소르그스키의 친구들은 1874년에 제국마리인스키극장에서 초연을 가지기 전에 1873년에 단 세 장면을 가지고 일단 시범공연을 가지도록 주선했다. 여관장면과 두번에 걸친 산도미에르츠 장면만을 공연했다. 세자르 쿠이는 1873년의 시범공연에 대하여 "대성공이었다. 완전한 성공이었다. 마리인스키에서 그만한 박수가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74년 1월 27일 제국마리인스키극장에서 전체 초연이 있었다. 티켓은 오래전에 매진되었다. 소프라노 율리야 플라토노바(Yuliya Platonova)가 프리마 돈나로서 데뷔하는 공연이었다. 무소르그스키는 20 번이 넘는 커튼 콜을 받았다. 학생들은 오페라에 나오는 합창을 거리에서 부르며 다녔다.
1874년 1월 생페터스부르크의 제국마리인스키극장에서 초연된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마리나의 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율리야 플라토노바
제국마리인스키극장의 상임 지휘자인 에두아르드 나프라브니크(Eduard Napravnik)가 초연의 지휘를 맡았다. 나프라브니크는 체코 출신이지만 제국마리인스키극장에서 무려 40년 이상이나 러시아 음악의 지휘자로서 활동한 사람이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그의 비망록 Chronicle of My Musical Life(나의 음악생활의 연대기)에서 나프라브니크에 대하여 '음악적인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에러를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전반적으로 훌륭한 테크닉을 가진 지휘자이다. 다만 성격 때문인지 템포를 빠르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두말하지 않고 커트를 하는 것도 좀 지나치다'라고 썼다. 실제로 나프라브니크는 감옥 장면을 커트했다. 전체 공연시간이 너무 길면 안된다고 생각해서라고 했다. 그 이후의 공연에서는 더 많은 부분을 커트했다. 특히 크로미 장면은 정치적인 이유로 1876년 13번째 공연부터 삭제되었다. 무소르그스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불평도 해보았고 사정도 해보았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무소르그스키의 생전에 21회 공연을 가졌다. 그가 1881년에 세상을 떠난 후에는 5회의 공연이 있었다. 무소르그스키는 후속 오페라로서 '코반쉬치나'(Khovanshchina: 1872-1880)를 남겼다. 그러나 미완성이기 때문에 1883년에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완성했다. 무소르그스키의 친구들이 1883년에 '코반쉬치나'를 공연하겠다고 하자 제국오페라위원회는 이를 거절했다. 위원회는 '무소르그스키의 극단적인 오페라는 하나로서 충분하다'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후 마리인스키극장에서 1904년 11월에 리바이발되기까지 더 이상 공연되지 않았다. 그것도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버전이었다. 이때 타이틀 롤은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Fyodor Shalyapin)이 맡았다. 이후로 샬리아핀은 보리스 고두노프의 대명사였다.
보리스 고두노프역의 전설적인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
'보리스 고두노프'가 대성공을 장식했지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황실의 인척이 되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짜르의 친척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서는 '보리스 고두노프'는 전체 러시아의 수치이다. 그건 오페라도 아니다'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불만은 소프라노 주역을 맡았던 율리야 플라토노바가 유명한 문학평론가인 블라디미르 스타소브(Vladimir Stasov: 1824-1906)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플라토노바는 편지에서 '대공은 군중들의 장면에서 크게 분노하였어요. 경찰이 군중들을 몽둥이로 두들기는 장면이지요. 군중들은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보리스가 어서 왕관을 써야 한다고 소리쳤지요. 이 장면이 몇몇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나 봅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오페라 공연에서 이 장면이 끝난 후에는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커튼 콜도 없었다. 블라디미르 스타소브가 그의 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제국극장에서 겨울 시즌에 공연할 오페라의 리스트를 짜르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묻자 짜르는 다른 것은 모두 좋다고 하면서 '보리스 고두노프'의 제목은 연필을 집어서 지웠다'고 썼다. 블라디미르 스타소브는 '보리스 고두노프'에 대하여 상당한 후원을 하였다.
평론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
이제 다시 반복되는 설명이지만 1869년의 오리지널 버전과 1872년의 수정본은 어떻게 다른지 소개코자 한다. 오리지널 버전은 푸슈킨의 원작에 전적으로 충실한 작품이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거의 모두 남성들이다. 또한 '석상손님'이나 '결혼'에서 볼수 있는 레시타티브 스타일(opera dialogue)을 인용하였다. 그래서 어떤 장면에서는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하다. 대사는 음악적인 발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인 음성에 의한 것으로 하도록 했다. 1869년의 오리지널 버전이 다른 버전들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장면(파트 1의 장면 1)은 삭제하지 않았다. 군중들의 장면으로 마무리 되도록 했다.
- 짜레비치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의 살해 장면에서 은둔자인 피멘의 대사를 파트 2의 장면 1에 추가했다.
- 파트 3의 테렘 장면에서는 푸슈킨의 원본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했다. 수정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 복자 바실리 대성당의 장면(성 바실의 장면, 파트 4의 장면 1)이 마련되었다.
- 파트 4의 장면 2에 슈첼칼로브의 연설 장면이 추가되었다.
1872년의 수정버전은 사실주의의 아이디어를 들어내지 않는 것이다. 러시아적인 사실주의는 러시아국민음악파 5인조(이들을 kuchkist 라고 불렀다)가 주장한 이상이었다. 그래서 수정버전에는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오페라처럼 코믹한 내용도 나오고 과장되게 비극적인 음성도 나온다. 이같은 성향은 무소르그스키의 다음 오페라인 '코반슈치나'에서도 상당히 반영되어 있다. 수정 버전은 오리지널보다 공연시간이 길다. 그리고 음악적으로나 극장적으로 보다 풍성하다. 대사를 말하는 것도 자연적인 대사만을 주장하지 않고 마치 이탈리아 오페라에서처럼 서정적인 레시타티브를 혼합하는 형식이다. 수정 버전의 특이한 부분들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무대에서 주로 공연되는 버전은 1872년도 수정버전이다.
베이스 바리톤 이반 멜니코프(Ivan Melnikov). '보리스 고두노프'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 1막 장면 1의 추도프 수도원 장면에서 수도승들이 오프 스테이지(무대 밖)에서 부르는 합창 두 곡을 추가했다.
- 1막 장면 2에 여관주인의 노래인 '용의 노래'(Song of the Drake)를 추가했다.
- 2막에서 테렘 장면의 전체 음악을 다시 썼다. 대본도 고쳐 썼다. 주인공인 보리스가 보다 비극적이고 감성적인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그리고 '살람보'에서 빌려온 새로운 노래와 음악적 테마들을 포함하였다. 스토리에 있어서도 앵무새와 시계를 추가하여 극적인 분위기를 더 했다.
- 3막의 폴란드 장면은 전형적인 이탈리아 스타일로 구성했다.
- 4막 장면 2의 크로미 장면에서 무질서한 장면을 피날레에 추가하였다.
각 장면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 노보데비치 장면(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안마당)
- 대관식 장면(모스크바 크렘린 광장)
- 수도원 방 장면(피멘이 작업하고 있는 추도프 수도원의 방)
- 여관 장면(리투아니아 국경지대의 어느 여관)
- 크렘린 장면(모스크바 크렘린의 짜르의 접견실)
- 폴란드 산도미에르츠의 마리나 공주의 침실
- 분수 장면(산도미에르츠의 므니체크성의 정원)
- 성바실 대성당 장면(복자 바실리 대성당)
- 죽음의 장면(모스크바 크렘린 궁전의 방)
- 혁명의 장면(크로미 부근의 숲속의 공터)
성바실대성당의 장면
무소르그스키는 1872년에 오리지널 버전을 수정하면서 성바실 대성당의 장면을 크로미 장면으로 대체하였다. 그런데 푸슈킨 전문가인 블라디미르 니콜스키 교수의 제안에 따라서 마지막 두 장면을 서로 바꾸었다. 그래서 '보리스 고두노프'의 피날레를 크렘린의 어느 방에서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크로미 홀에서 끝나는 것으로 만들었다. 1908년의 림스키 코르사코프 버전은 지난 세기에 가장 전통적인 버전으로 인정을 받아왔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무소르그스키의 1872년도 수정 버전이 더 자주 공연되는 바람에 1908년의 림스키 코르사코프 버전은 그늘에 가려지게 되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버전은 무소르그스키의 1874년도 보컬 버전과 비슷하다. 다만, 마지막 두 장면이 서로 자리를 바꾼 점이 다르다.
2010-11 시즌 테아트로 레지오 토리노.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의 장면
'보리스 고두노프'의 처음 공연 일정을 살펴보는 것은 이 오페라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정리해 본다.
- 1872년 2월 5일 생페터스부르크에서 러시아음악협회가 주관하여 발췌곡이 연주되었다. 제국극장의 상임지휘자인 에두아르드 나프라브니크가 지휘했다. 4월 3일에는 3막의 폴로네이스만이 자유음악학교에서 합창 없이 연주되었다.
- 1873년 역시 2월 5일에 생페터스부르크의 제국극장에서 세 장면이 공연되었다. 여관 장면, 마리나의 침실 장면, 분수 장면이었다. 에두아르드 나프라브니크가 지휘했다. 마리나는 소프라노 율리야 플라토노바가 맡았고 여관주인, 그리고리, 발람, 경찰관, 랑고니, 폴란드 귀족 등이 출연했다.
- 1874년 1월 27일 제국극장에서 수정 버전이 세계 초연되었다. 다만, 감옥 장면은 삭제하고 공연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장면과 대관식 장면은 하나로 연결하여 '보리스를 짜르로 추대하는 장면'으로 공연되었다. 초연에서는 각 장면들은 다음과 같은 5막으로 묶었다.
→ 1막. 보리스를 짜르로 추대함과 여관
→ 2막. 짜르 보리스와 함께
→ 3막. 마리나의 침실과 분수에서
→ 4막. 보리스의 죽음
→ 5막. 크로미 부근의 짜르 요구자(거짓 드미트리)
초연에서는 보리스의 이미지를 베이스 이반 멜니코프가 맡았고 소프라노 율리야 플라토노바가 마리나를 맡았다. 초연의 제작은 그후 9년 동안 26회 같은 내용으로 공연되었다. 초연의 제작은 러시아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 제작되는 무대의 관례가 되었다. 즉, 1) 너무 길다고 생각되는 장면은 임의로 삭제한다. 2) 피날레에서 주인공인 보리스가 히스테리처럼 말하는 독백과 같은 대사는 음악에 맞추지 않고 마치 고함을 치는 것처럼 말해도 상관없다. 이같은 스타일은 초연에 출연했던 이반 멜니코프가 그렇게 했고 나중에 표도르 샬리아핀도 그렇게 했다. 3) 무대 세트는 최대한으로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사실적으로 제작한다. 무대 배경 뿐만 아니라 의상도 그러하다.
- 1879년 1월 16일 생페터스부르크 자유음악학교의 코노노프 홀 공연에서는 수정 버전에 포함되어 있는 감옥 장면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무소르스그스키가 참석했고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지휘했다.
- 1888년 12월 16일 수정 버전이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의 무대에 처음으로 올려졌다. 감옥 장면과 크로미 장면은 삭제되었다. 보리스는 베이스 보고미르 코르소프(Bogomir Korsov)가 맡았고 마리나는 마리야 클리멘토바(Mariya Klimentova)가 맡았다. 볼쇼이에서는 10회 공연이 있었다.
- 1896년 11월 28일 림스키 코르사코프 버전이 생페터스부르크음악원의 대강당에서 초연되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지휘했다. 보리스는 미하일 루나차르스키(Mikhail Lunacharsky)가 맡았다. 4회 공연되었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대명사라고 하는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이 처음으로 보리스의 역할을 맡은 것은 1898년 12월 7일 솔로도브니코프극장에서였다. 러시아의 어떤 개인 오페라단이 공연한 무대였다. 이때에는 1896년도 림스키 코르사코프 버전을 공연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주세페 트루피(Giuseppe Gruffi)가 지휘했다. 이 극장에서 샬리아핀이 출연한 공연이 14회 있었다.
'보리스 고두노프' 무대의 한 장면이 되었던 모스크바의 성바실대성당. 1927년 모스크바 공연때에 성바실대성당의 장면이 추가되었다.
- 1908년 5월 19일 파리 오페라극장에서의 공연은 '보리스 고두노프'의 첫 외국 공연이었다. 감옥 장면이 대관식 장면보다 앞에 나오도록 했으며 여관 장면과 마리나의 침실 장면은 삭제되는 제작이었다. 한편 분수 장면을 테렘 장면의 앞에 두었으며 코르미 장면을 죽음의 장면의 앞에 두었다. 펠릭스 불루멘펠트(Felix Blumenfeld)가 지휘했다. 보리스는 표도르 샬리아핀이 맡았으며 나탈리야 예르몰렌코 유치나가 마리나를 맡았다. 마리나를 맡은 나탈리야 예르몰렌코 유치나(Nataliya Yermolenk-Yuzhina)는 프랑스정부로부터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 미국 초연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1913년 3월 19일 림스키 코르사코프 버전이었다. 파리 공연을 모델로 삼은 무대였다. 그렇지만 3막으로 공연되었다. 감옥 장면이 대관식 장면의 앞에 오도록 했고 마리나의 침실 장면은 삭제되었다. 그리고 파리와 마찬가지로 크로미 장면이 죽음의 장면보다 앞에 오도록 했다. 파리 공연에서는 삭제되었던 여관 장면은 부활시켰다. 지휘는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맡았고 보리스는 베이스 아다모 디두르(Adamo Didur)가 맡았고 마리나는 미국의 메조소프라노 루이스 호머(Louise Homer)가 맡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보리스 고두노프를 맡은 폴란드 출신 베이스 아다모 디두르
영국 초연은 1913년 6월 24일 런던 드러리 레인의 로열극장에서였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버전이 무대에 올려졌다. 에밀 쿠퍼(Emil Cooper)가 지휘했으며 표도르 샬리아핀이 타이틀 롤을 맡았고 옐레나 니콜라예바(Yelena Nikolayeva)가 마리나를 맡았다.
- 1927년 1월 18일에는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에서 성바실대성당 장면을 추가한 공연이 있었다. 볼쇼이극장이 미하일 이폴리토브 이바노프(Mikhail Ippolitov-Ivanov)에게 림스키 코르사코프 버전을 바탕으로 성바실대성당의 장면을 추가한 스코어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보리스는 레오니드 사브란스키(Leonid Savransky)가 맡았다. 이 제작은 대단한 인기를 끌어서 볼쇼이에서만 144회의 공연을 기록했다.
- 1869년의 오리지날 버전은 1869년 처음 모습을 보인 이래 잠잠히 지내다가 그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1928년 2월 16일에 생페터스부르크의 국립오페라발레극장아카데미(현재의 마리인스키극장)에서 리바이발되었다. 베이스 마르크 라이첸(Mark Reyzen)이 보리스 역할을 맡았다. 1869년의 오리지날 버전이 런던에서 처음 공연된 것은 1935년 9월 30일 새들러스 웰스 극장에서였다. 1869년의 오리지날 버전이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공연된 것으로는 처음이다. 보리스 역할은 베이스 로날드 스티어(Ronald Stear)가 맡았다.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1940년에 파벨 람(Pavel Lamm)의 보컬 스코어를 바탕으로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한 버전이 있다. 1959년 11월 4일 키로프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세르게이 옐친(Sergey Yeltsin)이 지휘했고 보리스는 보리스 슈토콜로프(Boris Shtokolov)가 맡았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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