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42. 알렉산더 보로딘의 '이고르 공'(Prince Igor) - 1

정준극 2013. 11. 15. 17:31

이고르 공(Prince Igor) - Knyaz' Igor

알렉산더 보로딘의 위대한 러시아 클래식

 

러시아 국민음악파 '막강한 5인조'의 한 사람인 알렉산더 보로딘

 

알렉산더 보로딘(Alexander Borodin: 1833-1887)의 '이고르 공'(Prince Ogor: 크냐즈 이고르)은 러시아 오페라의 위대한 고전이다. 러시아의 유명 극장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중의 하나이다. '이고르 공'은 러시아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이다. 이고르 공은 역사 속의 실존인물이다. 이고르 공은 12세기 러시아의 국가적 영웅이다. 러시아를 침공한 폴로브치 군대에 대항하여 싸운 전설적인 지도자이다. 비록 폴로브치 군대에게 패배하였고 포로로 잡혀 갔지만 돌아와서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싸우러나간 애국적인 인물이다. 조국 러시아에 외적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엿볼수 있는 장면이다. 이고르 공의 원래 이름은 이고르 스비야토슬라비치(Igor Svyatoslavich)이다. 그렇지만 보통 이고르 공이라고 부른다. 또는 '용맹스런 이고르 스비야토슬라비치 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고르 스비야토슬라비치에게 공(Prince)이라는 칭호를 붙인 것은 그가 왕족이기 때문이다. 이고르 공은 루리크(Rurik) 왕조의 일원이었다. 루리크 왕조는 17세기로부터 시작한 로마노프 왕조의 이전에 러시아를 통치했던 왕조이다. 우리가 전부터의 관례에 따라 이 오페라의 제목을 '이고르 공'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은 '이고르 왕자'라고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이다. 

 

이고르 공 기념상. 우크라이나 루한스크(Lugansk) 소재의 Regional Universal Scientific Library 앞에 있다.

 

이고르 공은 1151년에 태어나서 1164년부터 1180년까지 푸티블(Putivl)의 군주였고 1180-1198년에는 노브고로드 세베르스크(Novgorod-Seversk)의 군주였으며 1190년부터 1201(또는 1202)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는 체르니고프(Chernigov)의 군주였다. 이고르 공은 말하자면 러시아의 지방총독이라고 볼수 있다. 이고르 공의 사랑 이야기와 폴로브치와의 전투 이야기는 12세기로부터 인구에 회자하여서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진 것이다. 민화 또는 전설로서 전해 내려온 이고르 공의 이야기는 특히 동부 슬라브 지역에서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대서사시로 정리한 사람은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일각에서는 12세기의 위대한 시인인 보얀(Boyan)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일각에서는 이고르 공의 아들인 블라디미르가 정리했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저자로서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사실상 저자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대서사시인 '이고르 공'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러시아 국민들과 공자들이 일치단결하여 외적, 특히 동유럽 투르크족으로부터의 침범에 대항하여 나라를 굳건히 지키자는 메시지이다. 당시에 투르크족은 돈 강의 남쪽에 살면서 러시아를 빈번히 침공하였다.

 

폴로브치 침략자들을 무찌르기 위해 출전하는 이고르 공과 아들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

 

이고르 공에 대한 이야기를 집대성한 시집은 '이고르의 전투 이야기'(The Tale of Igor's Campaign)라는 제목으로 전해 내려왔다. 동부 슬라브어로 써진 것이다. '이고르의 전투 이야기'는 또 다른 제목으로 '이고르 전투의 노래'(The Song of Igor's Campaign)라고도 하며 혹자들은 '이고르 군대의 상황'(The Lasy of Igor's Host), 또는 '이고르에 의한 전투 수행의 상황'(The Lay of the Warfare Waged by Igor)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전투는 1185년에 러시아의 돈(Don) 강 지역에서 폴로브치 군대와 벌인 전투를 말한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폴로브치가 어떤 부족인지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들은 터키계의 유목민으로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와서 주로 흑해 북부에 정착하여 살았던 부족이다. 터키에서는 이들을 쿠만(Kuman)이라고 부른다. 폴로브치 병사들은 타타르의 전통을 이어 받아서인지 말을 잘 타며 용감하기가 이를데 없어서 주변국들, 특히 러시아를 빈번히 침공하여 괴롭히기가 일수였다. 러시아 전래 서사시인 '이고르의 전투 이야기'에는 기독교적인 요소와 고대 슬라브족의 민간신앙이 복합되어 있다. 이고르 공의 부인인 야로슬라브나는 물론 정교회 신자이지만 남편 이고르의 무사귀환을 위해 푸티블의 성벽에서 자연신에게 간구한 것은 좋은 예이다. 실제로 이 서사집에는 자연이 인간들의 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지가 자주 등장한다.

 

이고르 공의 러시아 군대와 콘챠크가 이끄는 폴로비치 군대와의 전투장면

                                                  

'이고르 전투의 노래'는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서사시이다.  마치 프랑스에 '롤랑의 노래'가 있고 독일에 '니벨룽의 노래'가 있듯이 러시아에는 '이고르 전투의 노래'가 있다.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 The Song of Roland)는 778년, 샬레마뉴 대제의 치하에서 치루어진 롱스보전투(Battle of Roncevaux)에 대한 대서사시이다. '롤랑의 노래'는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프랑스에서는 12세기로부터 14세기에 특히 대단한 인기를 끈 작품이다. '롤랑의 노래'는 스페인의 민족 영웅인 엘 시드(El Cid)가 무어족과 벌인 전투를 그린 '시드 서사시'(The Poem of the Cid)와 함께 중세에서 가장 뛰어난 샹송 드 제스트(chanson de geste: 영웅시, 무훈시)이다.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 The Song of the Nibeluns)는 중세 고지 독일어로 쓰여진 서사시이다. 부르군디 궁전에서 용을 죽인 지그프리트가 어떻게 살해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부인 크림힐트가 어떻게 복수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니벨룽의 노래'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독일 영웅 모티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보로딘은 '이고르 공'을 완성하지 못한채 1887년에 향년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미완성의 스코어는 동료인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알렉산더 글라추노프(Alexander Glazunov: 1865-1936)가 재편집하고 보완해서 완성했다. 그렇게 완성된 '이고르 공'은 보로딘이 세상을 떠난지 3년 후인 1890년 생페터스부르크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보로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스타소브가 보로딘의 집에 가서 장례 준비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이고르 공'의 스코어를 찾아서 집으로 가져왔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폴로브치 진영에 포로로 잡힌 이고르 공을 환대하기 위해 폴로브치 댄스가 펼쳐진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보로딘의 집에 있던 '이고르 공' 스코어를 가져와서 글라주노프와 함께 살펴보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로디은 이미 첫번째 합창, 폴로비치 댄스, 야로슬라브나의 탄식, 블라디미르 갈리츠키의 레시타티브와 노래, 콘챠코브나와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 공의 아리아들, 피날레 합창 등 상당 부분을 완성해 놓았다. 다른 파트들은 피아노 스케치로 만들어 놓은 것이 많았으며 어떤 파트는 초안만 잡아 놓은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물론 전체적으로 보아서 손도 대지 않은 부분도 많았다. 그리고 2막과 3막(폴로비치 진영 장면)은 대본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이곳 저곳에 가사들이 흩어져서 있었다. 이 장면과 저 장면의 내용이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어째서 연결되지 않은 것을 알수 있느냐하면 러시아 사람이라면 이고르 공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보로딘이 '이고르 공'의 작곡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서로 스토리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나누었던 터였다. 문제는 3막이었다. 보로딘은 3막의 음악을 아주 조금만 스케치 해놓았다. 글라주노프와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서로 작업을 분담키로 했다. 글라주노프는 3막을 채우고 이어 서곡을 완성키로 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전체적인 오케스트레이션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글라주노프가 서곡을 완성할 때에는 전에 보로딘의 피아노로 들여주었던 것을 기억을 되살려서 만들었다.

 

백성들과 함게 출전을 다짐하고 있는 이고르 공

 

'이고르 공'은 1890년 11월 4일(구력 10월 23일) 생페터스부르크의 마리인스키 극장에서 초연을 가졌다. 마리인스키의 상임지휘자인 나프라브니크가 초연의 지휘를 거절하는 바람에 연습지휘자였던 K. A. 쿠체라가 지휘를 맡았다. 바리톤 이반 멜니코프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이고르 공의 부인인 야로슬바브나는 소프라노 올가 올지나(Olga Olgina)가 맡았고 이고르 공의 아들인 블라디미프 이고레비치는 테너 미하일 드미트리에비치 바실리에프가 맡았다. 모스크바 초연은 2년 후인 1892년이었다. 러시아 오페라 협회가 공연했다.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처음 공연된 것은 1898년이었다. 거장 울리크 아브라네크(Ulrikh Avranek)가 지휘했다.  프라하에서는 1899년에 초연되었고 파리는 1909년이었다. 파리 공연에서는 러시아의 위대한 베이스인 페오도르 샬리아핀이 갈리츠키 공을 맡았으며 러시아의 유명한 소프라노인 마리아 쿠즈네초바가 야로슬라브나를 맡았다. 런던에서의 초연은 1914년으로 토마스 비첨 경이 지휘를 맡았으며 샬리아핀이 갈리츠키 공을 다시 맡은 것이었다. 런던 공연은 파리의 공연을 그대로 제작한 것이었다. 미국 초연은 1915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였다. 그런데 미국 공연은 이탈리아어 대본으로 바꾼 것이었다. 영어로 번역한 '이고르 공'이 처음 공연된 것은 1919년 코벤트 가든에서였다. 영국의 유명한 소프라노인 미리암 리세트(Miriam Licette)가 야로슬라브나를 맡은 공연이었다. 2009년 2월에 독일 에센의 아알토(Aalto)극장에서 '이고르 공'이 공연된 일이 있다. 이때에 3막에 나오는 폴로브치 댄스를 피날레로 옮겼다. 사람들은 그것도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폴로브치 댄스 장면

               

오페라 '이고르 공'은 러시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별로 공연되지 않고 있다. '이고르 공'은 컬러풀한 세팅, 놀랄만한 극적인 순간들, 그리고 다양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그 진가를 잘 알아주지 못하는 것 같다. 이유 중의 하나는 러시아어 대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때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공연된 일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결책은 아니었다. 영어로 번역된 대본은 러시아적인 전통과 분위기를 살리지 못하는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것을 억지로 완성시킨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가 노력하여서 완성을 해 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고르 공'은 일시적인 에피소드라는 인상을 주고 있으며 드라마틱한 면에 있어서도 정적(靜的)이라는 평이었다. 음악학자들은 그렇게 된 사연으로 보로딘이 대본을 완성하지 않고 음악부터 작곡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무소르그스키가 '코반슈치나'를 작곡할 때에 대본부터 완성한 것이 아니라 음악부터 만들기 시작함으로서 일관성과 통합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은 경우와 같다. 보로딘과 무소르그스키는 우선 음악을 만들고 나서 그 파트의 대본을 썼다. 그럼으로 전반적인 스토리 진행의 연결고리가 부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가지, 보로딘과 무소르그스키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 오페라를 공교롭게도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고르 공'의 런던 코벤트 가든 무대

 

'이고르 공'을 공연할 때에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사항은 3막을 포함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3막의 대부분은 글라주노프가 작곡한 것이기 때문이다. 3막을 삭제하고 공연한 경우로서 기록에 남아 있는 첫번째는 1909년이다. 이후로 대부분의 극장들은 '이고르 공'을 공연할 때에 3막을 삭제하고 공연하는 것을 관례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3막을 넣으면 음악적으로나 극적으로 설득력이 없다는 설명을 했다. 하지만 1900년대 중반부터는 3막을 그대로 넣고 공연하는 일이 많아졌다. 왜냐하면 우선 훌륭한 음악이 들어있기 때문에 놓치기 싫어서이다. 예를 들면 '폴로브치 행진곡'(Polovtsian March)이다. 그리고 물론 3막이 있기 때문에 4막에서의 상황이 제대로 연계되고 설명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고르가 적진에서 탈출하는 것, 블라디미르의 운명에 대한 사항등은 3막이 있어야 제대로 설명이 될수 있다. 3막에서는 서곡에서 들을수 있는 몇가지 테마음악이 다시 등장한다. 예를 들면 트리오, 브라스 팡파레 등이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서곡도 실은 글라주노프가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공연에서는 3막과 4막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보로딘이 이 오페라를 작곡할 때에 대본부터 확정하지 않고 음악부터 작곡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만일 대본부터 확정했다면 3막과 4막을 바꾸어서 공연할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 1막과 2막을 바꾸어 공연하는 경우도 있다. 스토리가 그렇게 전개되어도 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고르 공'의 순서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의견들이 나오자 러시아의 음악학자인 파벨 람(Pavel Lamm)과 아르놀드 소코르(Arnold Sokhor)는 보로딘이 직접 각 장면의 시퀜스(순서)를 적어 놓은 것이 있다고 밝혔다. 현재 그 자료는 모스크바의 글링카음악문화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보로딘은 전체를 여섯 시퀜스로 나누었다.

 

1. 하늘로부터의 징조(서막)

2. 투옥(2막)

3. 갈리츠키의 궁전(1막 1장)

4. 야로슬라브의 궁전(1막 2장)

5. 탈출(3막)

6. 귀환(4막)

 

보로딘의 '이고르 공'은 1890년에 초연되었다. 음악학자들은 위에 있는 순서가 1883년에 써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보로딘은 정말로 '이고르 공'을 위에 있는 순서대로 구성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현재 공연되고 있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런데 1993년에 키로프 오페라가 '이고르 공'을 음반으로 취입했을 때는 보로딘의 정해 놓았다는 순서대로 녹음을 했다.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지휘한 녹음이었다. 이 녹음이 음반으로 나왔을 때 해설가는 '이런 순서가 음악적 구조로 볼때 더 균형이 잡혀 있다'고 적었다. 특히 러시아 장면과 폴로브치 장면을 서로 바꾼 것은 전체 음악적인 분위기로 볼때 더 바람직한 것이라는 견해였다. 이런 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극장들은 전통적인 순서를 유지하기를 더 선호하고 있다. '이고르 공'에서 가장 중심되는 장면은 2막에서 이고르가 적진에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부르는 아리아인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이다. 이고르는 이어 '나의 고통받은 영혼은 잠을 잘수 없고 쉴수도 없다'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2막에서는 폴로브치 처녀들의 춤도 나오지만 그것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뿐이므로 아리아가 아니다. 오페라에서 가장 중심되는 장면을 비교적 처음에 둠으로서 전체적으로 이 오페라의 드라마틱한 면은 더욱 강조되었다고 볼수 있다.

 

오페라 '이고르 공'의 여러 장면

 

[명음반] 이고르, 야로슬라브나, 블라디미르, 갈리츠키, 콘챠크, 콘챠코브나 - 지휘자, 오케스트라

 

- 1952: 안드레이 이바노프(Andrey Ivanov), 옐레나 스몰렌스카야(Yelena Smolenskaya), 세르게이 레메셰프(Sergey Lemeshev), 알렉산드를르 피로고프(Alexandr Pirogov), 마리크 레이첸(Mark Reyzen), 베라 보리센코(Vera Borisenko) - 알렉산드르 멜리크 파샤예프, 볼쇼이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 1955: 두샨 포포비치(Dushan Popovich), 벨레리아 헤이발로바(Valeria Heybalova), 노니 추네크(Noni Zunec), 차르코 츠베이크(Zarko Cvejic), 멜라니 부가리노비치(Melanie Bugarinovic) - 오스카르 다논, 베오그라드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 1966: 콘스탄틴 쳬커릴리스키(Constantin Chekerlilski), 율리아 비너(Julia Wiener), 토도르 토도로브(Todor Todorov), 보리스 크리스토프(Boris Christoff: 갈리츠키와 콘챠크 1인 2역), 레니 펜코바 - 예르치 셈코브(Reni Penkova) - 예르치 셈코브, 소피아 국립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 1969: 이반 페트로프(Ivan Petrov), 타티야나 투가리노바(Tatyana Tugarinova), 블라디미르 아틀란토프(Vladimir Atlantov), 아르투르 아이젠(Artur Eisen), 알렉산드르 베데르니코프(Alexandr Vedernikov), 옐레나 오브라초바(Yelena Obraztsova) - 마르크 에름러, 볼쇼이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 1981: 에브게니 네스테렌코(Evgeny Nesterenko), 엘레나 쿠로브스카야(Elena Kurovskaya), 블라디미르 셰르바코프(Vladimir Sherbakov), 알렉산더 베데르니코프, 보리스 모로초프(Boris Morozov), 타마라 신니야브스카야(Tamara Sinyavskaya) - 마르크 에름러, 볼쇼이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 1990: 보리스 마르티노비치(Boris Martinovich), 스테프카 에브스타티에바(Stefla Evstatieva), 칼루디 칼루도프(Kaludi Kaludov), 니콜라 기우셀레프(Nicola Ghiuselev), 니콜라이 기아우로프(Nicolai Ghiaurov), 알렉산드리나 밀체바 노노바(Alexandrina Milcheva-Nonova) - 에밀 차카로프, 소피아 페스티발 오케스트라 및 국립오페라합창단

- 1993: 미하일 키트(Mikhail Kit), 갈리나 고르차코바(Galina Gorchakova), 게감 그리고리안(Gegam Grigorian), 블라디미르 오그노비엔코(Vladimir Ognovienko), 불라트 민옐키에프(Bulat Minjelkiev), 올가 보로디나(Olga Borodina) - 발레리 게르기에프, 키로프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발레리 게르기에프 지휘의 1993년도 '이고르 공' 음반. 키로프오페라와 오케스트라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