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43. 미하일 글링카의 '짜르를 위한 삶'(A Life for the Tsar)

정준극 2013. 11. 18. 07:27

짜르를 위한 삶(A Life for the Tsar) - 이반 수사닌(Ivan Susanin)

한때는 '망치와 낫'이라는 제목

러시아 국민음악의 대부 미하일 글링카의 4막 애국영웅적 비극오페라

 

미하일 글링카

 

'짜르를 위한 삶'(치츤 차 짜리야)은 러시아 국민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링카(Mikhail Ivanovich Glinka: 1804-1857)가 작곡한 4막과 에필로그로 구성된 애국영웅적 비극 오페라이다. 원래의 타이틀은 '이반 수사닌'(Ivan Susanin)이었으나 당시의 짜르(제정러시아의 황제)인 니콜라스 2세가 생페터스부르크의 볼쇼이 카메니극장'(Bolshoi Kamenny Theater)에서 초연을 위한 리허설을 하는 것을 친히 보러 오자 글링카가 짜르에 대한 예의로서 '이반 수사닌'이라는 타이틀을 '짜르를 위한 삶'이라고 고쳤다. 그로부터 제정러시아 시기에는 '짜르를 위한 삶'(영어권에서는 A Life for the Tsar)으로 계속 불렸다가 제정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막을 내리자 한때 다시 '이반 수사닌'이 되었으며 1924년 소련정권일 때에는 '망치와 낫'(Hammer and Sickle: 소련 국기의 그림)이라는 엉뚱한 제목으로 바뀌었다가 1939년 부터는 글링카의 오리지널 제목대로 '이반 수사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러시아에서도 그렇지만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는 '이반 수사닌'이라는 타이틀 보다는 '짜르를 위한 삶'(A Life for the Tsar)이라는 타이틀을 더 선호하고 있다. 특히 영어 대본을 쓰는 경우에는 Ivan Susanin 보다는 A Life for the Tsar가 우선적이다. 글링카가 바꾼 제목이기 때문이다.

 

오페라 '이반 수사닌'은 17세기 제정러시아 시대에 모스크바 북쪽의 코스트로마라고 하는 마을에 살던 평범한 농부(벌목꾼)의 이름이다. 이반 수사닌은 제정러시아와 폴란드가 적대적인 관계에 있을 당시의 이야기이다. 제정러시아의 새로운 짜르로서 1613년에 미하일 로마노프가 선출되자 폴란드는 그가 코스트로마라는 작은 마을에 숨어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가 짜르로서 대관식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일단의 병사들을 파견하여 처치하도록 했다. 이반 수사닌은 폴란드 병사들에게 미하일이 숨어 있는 곳을 가르켜 주겠다고 하고서는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였고 숲속에서 헤매도록 하여 미하일 로마노프를 안전하게 지켰다. 그후 미하일 로마노프는 모스크바에서 무사히 대관식을 가질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제정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될수 있었지만 폴란드 군은 이반 수사닌에게 속은 것을 알고 이반 수사닌을 살해했다. 그로부터 이반 수사닌의 애국적인 삶은 러시아의 전설이 되어서 모든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숲속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나라와 짜르를 위해 기도하는 이반 수사닌.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

 

'이반 수사닌'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19세기 당시에 제정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네 명의 이름난 시인, 극작가들이 합동으로 글링카를 위한 오페라 대본을 썼다. 네스토르 쿠콜니크(Nestor Kukolnik: 1809-1868)를 비롯해서 에고르 표도로비치 폰 로젠 남작(Baron Egor Fyodorovich von Rozen: 1800-1860), 블라디미르 솔로구브(Vladimir Sollogub: 1813-1882), 바실리 추코프스키(Vasily Zhukovsky: 1783-1852)이다. '이반 수사닌'의 음악은 글링카가 유럽에서 음악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적인 스타일이 담겨 있지만 그보다도 러시아의 민요와 민요풍의 멜로디를 충분히 사용했기 때문에 진정으로 러시아적인 오페라라고 말한다. '이반 수사닌'은 1836년 12월 9일 생페터스부르크의 볼쇼이 카메니 극장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보통 생페터스부르크의 볼쇼이극장이라고 부르는 이 극장에서는 글링카의 '루슬란과 루드밀라'(1842), 베르디의 '운명의 힘'(1862)이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사족이지만 1783년 볼쇼이극장의 오픈 기념 공연은 이탈리아 작곡가인 조반니 파이시엘로의 '달 세계'(Il mondo della luna)였다. 또 다른 사족이지만 볼쇼이극장은 1886년 안전문제로 철거되어 역할을 종료했으며 그 자리에 현재의 생페터스부르크음악원이 들어섰다.

 

뮌헨 슈타츠오퍼의 무대. 현대적 연출

                           

'이반 수사닌'에 대한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든 것은 글링카가 처음이 아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생페터스부르크에 정착하여 활동하고 있던 카테리노 카보스(Catterino Cavos: 1775-1840)가 1815년에 오리지널 제목대로 '이반 수사닌'이라는 징슈필 스타일의 2막 오페라를 만들었다. 하지만 비록 그로부터 20년 후의 일이지만 글링카의 '짜르를 위한 삶'이 나오는 바람에 카테리노 카보스의 '이반 수사닌'은 슬며서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카테리노 카보스는 글링카의 '짜르를 위한 삶'의 역사적인 초연을 지휘했다. '짜르를 위한 삶'은 애국적인 오페라이기 때문에 제정러시아 시대에 크게 사랑을 받았다. 제정러시아 시대에는 오페라 시즌을 장식하는 첫 공연은 언제나 '짜르를 위한 삶'이었다. 그러나 짜르의 시대가 지나고 공산주의 정권이 되자 짜르를 내용으로 삼은 예술작품들은 은연중에 또는 공공연히 금지품목에 포함되었다. 소련 공산당은 1918년에 '제정러시아의 왕(짜르)이나 그들의 신하들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상은 모두 철거한다'는 법령을 공포한바 있었고 글링카의 '짜르를 위한 삶'도 그 범주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대로 그런 훌륭한 오페라를 둘수 없다는 여론이 있어서 1차 대전이 끝난지 한참 후인 1924년에 리바이발 되었으나 예상했던 대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후 '망치와 낫'은 책상 설합에 들어가 있다가 1939년 2월에 '이반 수사닌'으로 다시 등장했다. '이반 수사닌'은 러시아 오페라가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 알려진 케이스이다. '짜르를 위한 삶'은 러시아의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불러 넣어준 오페라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도 실은 그 이후에 등장하는 러시아 국민주의 역사오페라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는 의미가 더 크다. 예를 들면, 알렉산더 세로프(Alexander Serov: 1820-1871)의 '로그네다'(Rogneda),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프스코프의 처녀', 표트르 차이코브스키의 '오프리츠니크'(The Oprichnik 또는 마제파), 보로딘의 '이고르 공'(Prince Igor) 등이다. 아무튼 글링카는 러시아 국민주의 5인조에게 막강한 영향을 준 사람이다. 글링카가 만들어낸 러시아 특유의 음악을 후배들이 크게 참고했기 때문이다.

 

현대적 연출의 '짜르를 위한 삶'. 안토니다에 올가 트리포노바, 수사닌에 아브구스트 아모노프. 집에서 머리를 감다.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반 수사닌은 돔니노 마을의 벌목꾼(또는 농부)이다. 베이스가 맡는다. 러시아의 국민오페라에서는 대체로 바리톤 또는 베이스가 주역을 맡는다. 역사적인 초연에서 이반 수사닌의 이미지는 베이스-바리톤 오시프 페트로프가 창조했다. 안토니다(Antonida: S)는 이반 수사닌의 딸이다. 민병대원인 보그단 소비닌(Bogdan Sobinin: T)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다. 보그단 소비닌은 이반 수사닌이 죽임을 당한 후에 수사닌의 가정을 이끌어 나간다. 이반 수사닌에게는 양녀가 한 사람 있다. 반야(Vanya: Cont)이다. 1836년 생페터스부르크에서의 초연에서는 반야의 역할을 당대의 위대한 콘트랄토인 안나 페트로바 보로비오바(Anna Petrova-Vorobyova)가 맡았다. 반야는 주로 남자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폴란드군 파견대장은 베이스이며 러시아군 파견대장도 베이스이다. 이밖에 농부들과 아낙네들, 러시아 민병대원들, 폴란드 귀족들과 귀부인들, 러시아의 기사들이 등장한다. 오리지널 대본은 공산주의 정권인 1939년에 시인 S. M. 고로데츠키(Gorodetsky)가 다시 썼다. 오리지널 대본에서 짜르의 대사 등이 공산사회와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별것을 다 고친다.

 

초연에서 이반 수사닌 역을 맡은 베이스-바리톤 오시프 페트로프

                     

'짜르를 위한 삶'의 시기적 배경은 1612년 가을부터 1613년 겨울까지이다. 1막은 돔니노(Domnino) 마을이 무대이다. 마을 사람들은 패배만하던 러시아군이 폴란드 군대를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하며 축제를 벌인다. 마을의 원로인 이반 수사닌은 러시아를 사랑하는 애국자이다. 그의 딸 안토니다(Antonida)는 폴란드와의 전쟁에 나갔던 약혼자 소비닌(Sobinin)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다. 소비닌은 정규군이 아니라 민병대로서 전쟁에 나갔다. 안토니다가 소비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늘이 바로 소비닌과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소비닌이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안토니다의 마음은 한 없이 기쁘다. 집에 돌아온 소비닌은 결혼식 준비를 서두른다. 수사닌은 소비닌과 안토니다의 결혼식을 예정대로 올리는 일을 승낙한다. 그런중에 수사닌의 양녀인 반야(Vanya)가 뛰어 들어오며 폴란드군이 다른 길을 통해 진격하여 모스크바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얘기를 들은 수사닌의 마음은 비분에 넘친다. 수사닌은 러시아가 폴란드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새로운 짜르(황제)가 즉위하는 날까지 안토니다와 소비닌의 결혼을 미루도록 한다. 소비닌이 급히 찾아온다. 그는 미하일 로마노프가 새로운 짜르로 선택되어 앞으로 러시아를 이끌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실은 새로 짜르(황제)로 선출된 사람은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미하일 로마노프(Mikhail Romanov)이다. 미하일은 얼마전부터 이 마을에 와서 마을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자기의 신분이 누구인지는 감추고 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웃인 미하일이 새로운 짜르로 선출된것에 대하여 무척 놀랐지만 한편 너무나 기뻐서 밤새도록 축제를 계속한다. 안토니다는 아버지 수사닌의 말대로 새로운 황제가 선출되었으므로 소비닌과의 결혼식이 치루어 질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수사닌은 러시아 땅을 침략하여 모스크바까지 점령한 폴란드군을 조국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전에는 결혼식을 올릴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토니다의 마음은 우울하다. 소비닌이 다시 전쟁터로 나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마을 사람들.

 

제2막. 모스크바가 무대이다. 폴란드군 사령관이 모스크바 점령을 축하하는 화려한 무도회를 개최한다. 폴로네즈와 마주르카가 무대를 수놓는다. 이때 전령이 들어와 러시아 원로들이 새로운 짜르로 돔니노 마을에 살고 있는 미하일 로마노프를 선출했다고 전한다. 폴란드군의 장군들과 이들에게 동조하는 러시아 귀족들은 러시아의 황제 자리는 당시 폴란드의 왕인 시기스문드가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용맹을 과시하는 폴란드 장군들은 새로 선출되었다는 짜르(로마노프)를 잡아서 감옥에 가둔후 적당한 기회에 죽여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혼란해질 것이므로 폴란드에게는 대단히 유익하다는 설명이다.

 

폴란드인들의 축하 잔치

 

제3막. 소비닌은 새로운 짜르인 로마노프가 대관식을 가지기 전까지 짜르에게 충성을 다할 사람들을 찾으러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 그때까지는 충성스런 수사닌과 반야가 로마노프 황제를 보호하기로 한다. 반야는 수사닌 집에 양녀로 들어와 살고 있는 고아이다. 하지만 보통 남장을 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반야가 양자인줄 안다. 반야는 여자이면서도 남자처럼 활달하고 열심이며 적극적이다. 수사닌은 혹시 폴란드군이 미하일 로마노프 황제를 잡으러 이 마을로 몰려 올지도 모르므로 반야에게 새로운 황제를 모시고 산속에 있는 수도원으로 피해있도록 한다. 잠시후 과연 폴란드군이 마을로 쳐들어온다. 폴란드군은 수사닌에게 로마노프의 행방을 대라고 하면서 새로운 짜르가 도망간 곳으로 안내해주지 않으면 딸 안토니다를 대신 잡아가겠다고 위협한다. 수사닌은 어쩔수 없이 폴란드군을 안내하여 산속으로 떠난다. 이와 함께 수사닌의 딸 안토니다는 폴란드군의 손에서 풀려난다.

 

딸 안토니다를 위로하는 이반 수사닌

 

4막. 수사닌은 폴란드군을 눈덮힌 산을 넘어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속으로 안내한다. 아무리 헤매어도 사람이 살고 있을 듯한 집은 나타나지 않는다. 폴란드군은 그제서야 수사닌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한다. 만일 숲에 불이 번지면 폴란드군은 오도가도 못하고 몰살 당할 처지인 것을 그제서야 알아 차렸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숲에 불이 번지면서 폴란드군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한다. 수사닌이 불을 지른 것이다. 그러는 중에 어떤 폴란드 장교가 수사닌을 무참하게 죽인다. 그러나 숲속에서 전멸을 당한 폴란드 군은 더 이상 러시아를 괴롭히지 못하게 된다. 에필로그: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목숨을 유지한 로마노프황제는 백성들이 환호를 받으며 모스크바에 들어온다. 무대의 한 쪽에서는 안토니다, 소비닌, 반야가 수사닌을 애도하면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그때 한 무리의 러시아 병사들이 행군을 하다가 슬픔 속에 걸어가고 있는 이들을 만난다. 러시아 병사들은 이들이 수사닌의 가족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며 이들을 위로한다. 한편,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는 백성들이 모여  짜르의 영광을 높이 찬양한다. 로마노프황제는 새로운 왕조의 개시와 함께 자기를 미하일1세로 선포한다. 미하일황제가 이반 수사닌의 영웅적인 행동을 높이 기리도록 한다. 백성들은 수사닌영광을 위해 찬양한다. 

 

이반 수사닌에게 속을 것을 알아차린 폴란드 군 장교가 단검을 들어 죽이는 장면. 그림.

 

[이반 수사닌은 누구인가?]

글링카의 오페라 '짜르를 위한 삶' 또는 '이반 수사닌'에 등장하는 이반 수사닌은 실제 인물인가? 아니면 가공인물인가? 역사학자들은 이반 수사닌이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제정러시아의 황실문서에 이반 수사닌에 대한 짜르의 칙령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짜르 미하일은 1619년에 칙령을 내려서 러시아의 애국적인 영웅인 이반 수사닌을 기리도록 하고 유가족들을 위해 이반 수사닌의 고향인 돔니노에 있는 상당량의 토지를 이반 수사닌의 사위인 보그단 소비닌에게 하사한다고 발표한 일이 있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짜르로 선출되자 폴란드 군의 위협을 받지만 이반 수사닌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무사히 모스크바로 가서 짜르로서 대관식을 가질수 있었다. 미하일로서는 이반 수사닌이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반 수사닌은 현재의 모스크바 북쪽으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코스트로마 인근의 돔니노 마을에서 살았다. 그는 농부라고 하지만 어떤 자료에는 벌목꾼이라고 되어 있다. 이반 수사닌은 벌목꾼이기 때문에 주변의 숲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새로 짜르로 선출된 미하일을 잡으러 온 폴란드 병사들을 숲 속에서 일부러 거짓 길로 인도하여 짜르 미하일을 찾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폴란드 병사들은 이반 수사닌에게 속은 것을 알고 분노해서 이반 수사닌을 몹시 고문하였으나 결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이반 수사닌은 어떤 폴란드 장교의 단검에 찔려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1613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보리스 크리스토프가 이반 수사닌을 부른 음반 커버

 

짜르 미하일이 보그단 소비닌에게 하사한 토지는 데레비스치 마을의 절반에 해당하는 땅이라고 한다. 짜르가 이반 수사닌의 유족에게 그만한 땅을 하사할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을의 땅이 원래부터 미하일의 어머니인 크세니아 셰스토바(Xenia Shestova)가 소유한 땅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하일은 식구들과 함께 '혼란의 시기'에 코스트로마 인근의 돔니노에 와서 피신하고 있었다. '혼란의 시기'(Time of Troubles)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 2' 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아무튼 당시에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연합하여 제정러시아를 침공하여 심지어는 모스크바까지 점령한바 있다. 그때 제정러시아는 루리크 왕조가 막을 내리고 새로 짜르를 선출해야할 입장에 있었다. 러시아의 국회라고 할수 있는 쳄스키 소보르는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짜르로 선출하였다. 폴란드 세력은 폴란드 왕인 시기스문드가 짜르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 지지하였으나 쳄스키 소로브(제정러이사 국회)는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짜르로 선출하는 바람에 심히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폴란드 군은 코스트로마 인근에 숨어 지낸다는 미하일 로마노프를 찾아내어 처치하면 자기들이 지지하는 폴란드 왕 시기스문드가 짜르가 될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급히 군대를 파견하여 미하일 로마노프를 잡아 오라고 했다. 여기까지가 오페라 '짜르를 위한 삶'의 배경이다.

 

폴란드 군은 돔니노로 가는 길을 잘 알지 못했다. 이들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서 돔니노로 가는 길을 묻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 없었다. 폴란드 군은 빽빽한 숲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이 많은 벌목꾼 한 사람을 만났다. 이반 수사닌이다. 이반 수사닌은 숲을 가로 지르면 히파티아 수도원이 있는 곳까지 빠르게 갈수가 있다고 말했다. 히파티아 수도원은 미하일과 그의 식구들이 숨어 있는 곳이다. 폴란드 군은 이반 수사닌에게 그렇다면 길을 안내하라고 명령했다. 폴란드 군은 이반 수사닌이 이끄는 대로 숲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짐작컨대 이반 수사닌이 폴란드 군을 숲 속 깊숙한 곳으로 이끌고 갔기 때문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2월 밤의 무서운 추위에 모두 얼어 죽은 것으로 보인다. 수사닌은 한편으로는 폴란드 군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가면서 자기의 손자에게 다른 길로 수도원에 어서 가서 미하일에게 폴란드 군이 잡으로 왔으니 급히 피하도록 하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그 소식을 들은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미하일과 식구들을 더 안전한 곳으로 숨겼다. 그후 미하일은 짜르로 선출되어 제정러시아를 32년 동안 통치했다. 미하일의 제정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를 창시한 사람이다.

 

미하일 로마노프(1596-1645)

 

이반 수사닌에 대한 에국적인 이야기 또는 그의 숭고한 모습은 제정러시아의 여러 화가, 작곡가, 작가 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시인 콘드라티 릴레예프(Kondraty Ryleyev: 1795-1826)는 이반 수사닌을 위한 시를 썼다. 잘 아는대로 미하일 글링카는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러시아 오페라인 '이반 수사닌'(또는 '짜르를 위한 삶')을 작곡했다. 군주제를 상징하는 '짜르를 위한 삶'이라는 제목은 소비에트 공산 혁명이 있은 후에 소비에트 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이반 수사닌'으로 바꾸었다. 차이코브스키의 유명한 '1812년' 서곡의 피날레는 '이반 수사닌'에 나오는 '영광, 영광을, 거룩한 러시아'(Glory, glory to you, holy Rus'!)로 대치되었다. 니콜라스 1세는 1834(어떤 자료에는 1838년)년에 코스트로마를 방문하여 이반 수사닌의 기념상을 세우도록 했다. 기념상은 코스트로마의 중심지에 1851년에 세워졌다. 기념조형물은 이반 수사닌과 함게 코스트로마의 농민들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이반 수사닌의 희생으로 안전하게 짜르에 오를수 있었던 미하일 로마노프도 기념하는 탑으로 만들었다. 기념탑은 붉은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재능있는 조각가인 블라디미르 데무트 말리노브스키(V. Demut-Malinovsky)가 제작했다. 높은 원조의 상단에는 짜르 미하일의 흉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그의 가슴에는 금빛 찬란한 십자가를 두었다. 그 아래의 원주 기단에는 이반 수사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동상이 설치되었다. 원주에는 쌍두의 독수리와 코스트로마 지방의 문장(紋章)을 붙였다. 하단에는 이반 수사닌의 죽음 장면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기념탑의 뒷면에는 '러시아의 신앙과 짜르를 구원한 이반 수사닌에게 헌정한다. 그는 짜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다. 감사하는 후손으로부터'라고 적혀 있다. 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광장은 '수사닌 광장'이라고 불렀다.

 

1918년 철거되기 전의 이반 수사닌과 짜르 미하일 로마노프 기념탑. 코스트로마 소재

                                             

1918년, 1차 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기념탑 상단을 장식하고 있던 미하일 로마노프의 흉상은 볼셰비키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반 수사닌의 동상도 철거되었다. '수사닌 광장'은 '혁명 광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런 조치가 있었던 것은 소련 당국이 1918년에 공포한 포고문 때문이었다. 모든 짜르는 물론이고 짜르 시대의 신하들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상은 철거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사닌 광장'이라는 역사적인 명칭이 복구된 것은 1992년이었다. 수사닌 광장의 기념탑은 1934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장엄한 원주는 해체되어 코스트로마의 교외에 방치했다. 원주는 그곳에 거의 70년이나 있었다. 1870년대에 기념탑을 설치했던 장소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코스트로마의 주민들은 기념탑에 사용되었던 석재들을 가져다가 도랑의 다리를 놓는데 사용했다. 그들은 아마도 자기들이 어떤 돌을 밟고 지나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후에 코스트로마 당국이 기념탑이 있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팻말을 세웠다. 그리고 방치해 두었던 원주를 가져다가 세웠다. 2013년은 로마노프 왕조의 4백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코스트로마 당국은 이를 기념하여 이반 수사닌의 기념상을 다시 세웠다. 이번에는 이반 수사닌의 모습만을 세웠다. 오늘날 4백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반 수사닌을 잊지 않고 있다. 거리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던졌더니 대부분 청년들이 이반 수사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더구나 1612-1613년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난 일은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수사닌'이라는 이름을 길을 일부러 잘못 가르쳐 주는 사람, 남이 잘못되게 의도적으로 방해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의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코스트로마에 새로 세워진 이반 수사닌 기념상

                           

[혼란의 시기](The Time of Troubles)

'폭군 이반'(Tsar Ivan the Terrible)이 1584년에 세상을 떠나자 제정러시아는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로 빠져 들어갔다. 짜르 이반의 아들인 표도르가 표도르 1세로서 짜르가 되었으나 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루리크 왕조에 속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투쟁하였다. 일부 세력있는 귀족들은 폴란드왕인 시기스문드 3세를 제정러시아의 짜르로 받들자고 주장했다. 시기스문드 3세는 매우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시기스문드는 1610년에 러시아를 전부 정복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시기스문드는 러시아가 혼란한 틈을 타서 러시아를 침공하여 끝내는 모스크바까지 장악하였다. 시기스문드의 아들이 러시아의 짜르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시기스문드는 자기가 짜르가 되고 싶어했다. 그러던 중인 1612년에 러시아는 황제의 군대와 민병대가 합심하여 모스크바에서 폴란드 군대를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폴란드는 다시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제정러시아의 국회는 혼란의 시기에서 어서 벗어나기 위해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짜르로 선출했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루리크 왕조의 사람 중에서 그나마 생존해 있던 가장 가까운 혈통이었다. 그런데 폴란드 군은 아직도 러시아에 남아 있으면서 시기스문드를 지지하고 있었다. 시기스문드도 제정러시아 국회의 결정을 수용할수 없다고 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폴란드 군은 새로 선출된 짜르 미하일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때 미하일은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시골에서 숨어지내고 있었다. 글링카의 오페라는 그러한 배경 아래에서 스토리가 진행된다. 그건 그렇고, 로마노프 왕조는 러시아를 거의 3백년 동안 통치했으며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왕조의 막을 내렸다.

 

짜르 미하일 로마노프의 대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