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비엔나 오페라극장

비엔나의 오페라극장 총정리 1

정준극 2013. 12. 7. 16:22

19세기 비엔나의 오페라극장 총정리 1

이들 극장에서는 어떤 음악작품들이 세계 초연되었나?

 

비너 슈타츠오퍼(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 오디토리엄

 

- 뷔르거테아터(Bürgertheater)

- 칼테아터(Carltheater)

- 요한 슈트라우스 극장(Johann Strauss-Theater)

- 캐른트너토르테아터(Kärntnertortheater)

- 레오폴드슈태터 테아터(Leopoldstädter Theater)

- 라이문트 테아터(Raimund Theater)

- 링테아터(Ringtheater)

- 로나허 테아터(Ronacher Theater)

-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 테아터 아우프 데어 뷔덴(Theater auf der Wieden)

- 테아터 인 데어 요제프슈타트(Theater in der Josefstadt )

- 비너 캄머오퍼(Wiener Kammeroper)

- 비너 슈타츠오퍼(Wiener Staatsoper)

- 비너 폭스오퍼(Wiener Volksoper)

 

뷔르거테아터(Bürgertheater) - 시민극장

1905년에 3구 란트슈트라쎄의 포아데레 촐암츠슈트라쎄(Vordere Zollamtsstrasse) 13번지에 설립되었다. 1905년 12월 7일 개관기념 공연은 베아트리스 드보르스키(Beatrice Dvorsky)의 Der Alte Herr(노인)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관객들이 몰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1910년에 오페레타 전용극장으로 탈바꿈했다. 에드문트 아이슬러(Edmund Eysler)가 전속작곡가로 부임했다. 1926년부터는 레뷰-오페레타(Revue-Operetta)가 유행이었다. 뷔르거테아터는 2차 대전의 초기에 문을 닫았다가 1942년 전쟁 중에 다시 문을 열었다. 1945년에는 테아터 인 데아 요제프슈타트의 부속극장이 되었다. 1953년에는 극장이름을 브로드웨이뷔네(Broadwaybühne: 브로드웨이 스테이지)로 바꾸었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실패였고 막대한 빚만 지게 되었다. 그후에는 미군점령군의 사무소로 사용되거나 상품전시장으로 사용되었다. 상품전시장은 그 전까지 뵈르제에 있었다. 1959-61년은 비엔나 극장의 대수난 시기였다. 뷔르거테아터는 1960년에 철거되었다. 이 기간에 라우돈가쎄(Laudongasse)에 있던 비너 슈타트테아터(Wiener Stadttheater)와 요한 슈트라우스 테아터라고 했다가 나중에 스칼라(Scala)로 이름을 바꾼 극장들이 모두 영향을 받았다. 뷔르거테아터가 있던 자리에는 Zentralsparkasse der Geminde Wien(비엔나중앙저축은행)의 건물이 들어섰다.

 

뷔르거테아터가 있던 거리. 현재는 첸트랄슈파르카쎄 은행이 들어서 있다.

                  

뷔르거테아터에서 초연된 오페레타들은 다음과 같다.

 

- Der unsterbliche Lump(불사조 허수아비)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작곡, 1910

- Der gute Kamerad(좋은 전우) - 오페레타, 엠멜리히 칼만, 1911

- Der Frauenfresser(여자대식가)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11

- Der lachende Ehemann(웃는 남편)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13

- Ein Tag im Paradies(낙원의 하루)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13

- Frühling am Rhein(라인강의 봄)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14

- Die -- oder keine(아니면 말고)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15

- Der berühmte Gabriel(유명인사 가브리엘)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16

- Der dunkle Schatz(검은 보물)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18

- Der fidele Geiger(유쾌한 바이올리니스트)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19

- Der ledige Schwiegersohn(천방지축 사위)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23

- Clo-Clo(클로 클로) - 오페레타, 프란츠 레하르, 1924

- Das Land der Liebe(사랑의 나라)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26

- Ihr erster Ball(첫 무도회)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29

- Donauliebchen(도나우 애인)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32

- Wiener Musik(비엔나 음악) - 오페레타, 에드문트 아이슬러, 1947

 

뷔르거테아터

 

칼테아터(Carltheater) - 칼극장

2구 레오폴드슈타트의 프라터슈트라쎄(Praterstrasse) 31번지에 있었다. 당시에는 얘거차일레(Jägerzeile)라고 부르는 거리였다. 그 자리에는 레오폴드슈태터 테아터(Leopoldstädter Theater)가 있었다. 레오폴드슈태터테아터는 1776년 요셉 2세 황제의 공연자유화(Schauspielfreiheit) 정책에 따라 민간극장으로서 처음으로 발족되었다. 말하자면 공연예술을 궁정극장만이 독점하였던 것이 민간도 공연할수 있게 된 것이다. 19세기 여름무대인 탈리아테아터(Thalistheater)도 레오폴드슈태터테아터가 주관하였다. 그러나 레오폴드슈태터 테아터는 연속되는 재정문제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1838년에 극장감독인 칼 칼(Carl Carl)에게 팔렸다. 칼 칼은 테아터 안 데버 빈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1845년까지 두 극장을 동시에 경영했다. 레오폴드슈태터테아터는 주로 징슈필과 노래가 곁들인 포센(Possen mit Gesang)을 공연했다. 특히 극장 지휘자인 벤첼 뮐러와 조수인 페르디난트 카우어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위대한 극작가인 페르디난트 라이문트는 이 극장에서 1820년대에 활동했다. 레오폴드슈태터 테아터는 1847년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에두아르드 반 데어 뉠과 아우구스트 지카르드 폰 지카르드스부르크 두 사람의 설계로 새로운 극장이 들어섰다. 두 건축가는 나중에 비너 슈타츠오퍼(Wiener Staatsoper)를 공동설계한 사람들이다.


비엔나의 2구 프라터슈트라쎄에 있었던 칼극장(가운데 높은 건물)

 

얘거차일레의 신축 극장에는 칼테아터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였다. 그리고 주로 요한 네포무크 네스트로이(Johann Nepomuk Nestroy)의 연극들을 초연했다. 알트 비너 폭스테아터(Allt Wiener Volkstheater) 스타일의 연극이어서 인기를 끌었다. 요한 네포무크 네스트로이는 1854년부터 1860년까지 칼테아터의 감독을 지냈다. 요한 네스트로이 휘하의 칼테아터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극장의 명성이 높아지자 수많은 유명 극작가들이 너도나도 칼테아터를 위해 극본을 썼다. 요한 네스트로이는 한발 더 나아가서 인기있는 오페레타들을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주로 전통적인 비엔나풍의 오페레타였다. 오페레타의 공연은 칼테아터의 명성을 더욱 높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였고 20세기에 들어서서 극장들이 곤경을 겪을 때 칼테아터도 같은 운명에 휩싸이게 되었다. 칼테아터는 결국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1929년에 영구히 문을 닫았다. 그후 극장건물은 상가와 사무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 건물은 2차 대전 중에 심한 폭격을 받아 거의 파괴되었다. 다행하게도 예술적으로 귀중한 가치가 있는 현관 부분은 피해를 입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51년에 칼테아터 건물과 그 옆 건물들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갈락시'(Galaxy) 건물이다. 비엔나의 마천루였다. 아마 필자의 기억으로는 1980년대 초반에 갈락시 건물에 주오지리한국대사관이 세들어 살았던 것 같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 건물에 칼테아터가 있었다는 명판이 붙어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칼테아터가 있던 위치에 요한 네스트로이의 기념상이 있다.

 

네스트로이플라츠의 요한 네포무크 네스트로이 기념상. 칼극장이 있던 인근이다.

 

칼테아터에서 초연을 가진 음악적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별)

 

- Die schlimmen Buben in der Schule(말라깽이 학생) - 벌레스크, 요한 네스트로이, 1847

- Freiheit in Krähwinkel(까마귀 자유) - 노래가 있는 익살극(farce), 요한 네스트로이, 1848

- Judith und Holofernes(유딧과 홀로페르네스) - 노래가 있는 트라베스티(원작을 익살스럽게 고친 연극), 요한 네스트로이, 1849

- Tannhäuser(탄호이저) - 오페라 파스티셰(다른 사람들의 음악을 빌려와서 짜집기 한 작품), 요한 네스트로이, 1857

- Das Corps der Reche(조사단)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64

- Dinorah(디노라) - 오페라 파로디, 프란츠 폰 주페, 1865

- Die schöne Galathee(아름다운 갈라테)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65

- Leichte Kavalierie(경기병)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66

- Die Freigeister(순회전도사)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66

- Banditenstreiche(강도잡이)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67

- Die Frau Meisterin(여선생)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68

- Tantalusqualen(탄탈루스의 샘)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68

- Isabella(이사벨라)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69

- Lohengelb(로엔겔프) 또는 Die Jungfrau von Dragant(드라간트에서 온 처녀)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70

- Cannebas(칸네바스)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72

- Fatinitza(화티니차)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76

- Prinz Methusalem(메투살렘 왕자) - 오페레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1877

- Der Teufel aud Erden(세상의 악마)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78

- Boccaccio(보카치오) - 오페라, 프란츠 폰 주페, 1879

- Donna Juanita(돈나 화니타)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80

- Die Carbonari(카르보나리) - 오페레타, 칼 첼러, 1880

- Wiener Kinder(비엔나 소년) - 코믹 오페레타, 칼 미하엘 치러, 1881

- Der Gascogner(가스콘 사람)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81

- Das Herzblättchen(새싹)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82

- Der Vagabund(방랑자) - 오페레타, 칼 첼러, 1886

- Die Jagd nach dem Glück(행복 사냥)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88

- Ein Deutschemeister(독일어 선생님) - 오페레타, 칼 미하엘 치러, 1888

- Das Modell(모델) - 오페레타, 프란츠 폰 주페, 1895

- Wiener Blut(비엔나 기질) - 오페레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1899

- Die drei Wünsche(세가지 소원) - 오페레타, 칼 미하엘 치러, 1901

- Die süsse Mädel(사랑스런 아가씨) - 오페레타, 하인리히 라인하르트, 1901

- Der Rastelbinder(땜장이) - 오페레타, 프란츠 레하르, 1902

- Der Göttergatte(신의 아내) - 오페레타, 프란츠 레하르, 1904

- Die lustige Nibelungen(유쾌한 니벨룽의 난장이) - 벌레스크 오페레타, 오스카 슈트라우스, 1904

- Der Schätzmeister(재산관리인) - 오페레타, 칼 미하일 치러, 1904

- Krieg im Frieden(자유 투쟁) - 오페레타, 하인리히 라인하르트, 1906

- Ein Walzertraum(왈츠의 꿈) - 오페레타, 오스카 슈트라우스, 1907

- Die Dollarprinzessin(달러공주) - 오페레타, 레오 팔, 1907

- Dei geschiedene Frau(이혼녀) - 오페레타, 레오 팔, 1908

- Zigeunerliebe(집시의 사랑) - 오페레타, 프란츠 레하르, 1910

- Alt-Wien(그리운 옛 비엔나) - 오페레타, 요제프 란너, 1911

- Fürst Casimir(카시미르 대공) - 오페레타, 칼 미하엘 치러, 1913

- Polenblut(폴란드인의 기질) - 오페레타, 오스카 네드발, 1913

- Die erste Frau(첫 부인) - 오페레타, 하인리히 라인하르트, 1915

- Prinzessin Ti-Ti-Pa(티티파 공주) - 오페레타, 로베르트 슈톨프, 1928

 

칼테아터에서 초연된 요한 슈트라우스의 '비너 블루트'(비엔나 기질)

                                 

칼테아터 이전의 레오폴드슈태터테아터일 때에 초연된 음악작품들

 

- Der Streit zwischen dem Zauberer Scionco und der Fee Galantina(마법사 스키온코와 요정 갈란티나의 다툼: 또는 Kasperl bleibt Kasperl) - 기계장치와 음악이 있는 코미디. 페르디난트 카우어. 1784

- Das Sonnenfest der Braminen(브라만교도들이 태양축제) - 코믹 징슈필. 벤첼 뮐러. 1790

- Das Sonnenfest der Braminen(브라만의 태양축제) - 역사코미디 징슈필. 1790

- Kaspar der Fagottist(파곳주자 카스파르) 또는 Die Zauberzither(마술치터) - 징슈필, 1791

- Das neue Sonntagkind(새로운 행운아) - 징슈필, 벤첼 뮐러. 1793

- Das Schwestern von Prag(프라하의 자매) - 징슈필, 벤첼 뮐러. 1794

- Das lustige Beylager(유쾌한 수행자) - 징슈필, 벤첼 뮐러. 1797

- Die Teufels Muhle am Wienerberg(빈 언덕의 악마의 암소) - 노래가 있는 연극, 벤첼 뮐러. 1799

- Dei Belagerung von Ypsilon(입실론 공성) - 캐리캐추어 오페레타,  벤첼 뮐러. 1804

- Javima(야비마) - 오페라, 벤첼 뮐러. 1807

- Samson(삼손) - 멜로드라마. 벤첼 뮐러. 1808

- Simon Plattkopf, der Unsichtbare(보이지 않는 바보 시몬) -  징슈필, 벤첼 뮐러. 1809

- Der Fiaker al Marquis(알 마르키스의 피아커) - 코믹 오페라, 벤첼 뮐러. 1816

- Aline(알리네). 또는 Wien in einem andern Welttheil(또다른 세계의 비엔나) -  마법오페라, 벤첼 뮐러. 1822

- Der Baromentermacher auf der Zauberinsel(마술섬의 기압계장이) - 마술오페라, 벤첼 뮐러. 페르디난트 라이문트 극본. 1823

- Herr Josef und Frau Baberl(요셉씨와 바베를 부인) - 음악이 있는 익살극, 벤첼 뮐러. 1826


 Der Barometermacher auf der Zauberinsel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마법섬의 기압계장이'의 한 장면

 

○ 요한 슈트라우스 극장(Johann Strauss-Theater)

4구 뷔덴의 화보리텐슈트라쎄(Faboritenstrasse) 8번지에 있었던 오페레타 및 연극 공연의 극장이었다. 비엔나 오페레타가 전성기에 있을 때인 1908년에 오페레타 극장으로 문을 열었다. 개관기념 공연은 1908년 10월 31일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인디고와 40인의 도적'(Indigo und die 40 Rauber)을 초연한 것이었다. 당시에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차제에 극장 이름을 요한 슈트라우스 극장이라고 지었던 것 같다. 이후 요한 슈트라우스 극장에서 세계 초연된 오페레타 작품들이 줄을 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엠메리히 칼만의 '차르다스 공주'(Die Csardasfurstin: 1915)는 무려 500회 연속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유명한 오페레타 가수이며 배우인 그라츠 출신의 알렉산더 지라르디(Alexander Girardi: 1850-1918)가 엠메리히 칼만의 또 다른 히트작인 '집시악단 지휘자'(Der Zigeunerprimas: 1912)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도 이 극장에서였다. 1925년에는 프란츠 레하르의 '파가니니'가 세계초연되었다. 그리고 1928년 3월에는 프랑스계 미국의 무용수이며 가수 겸 배우인 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 1906-1975)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대인기를 끌었던 곳도 이 극장에서였다. 그로부터 요한 슈트라우스 극장은 오페레타 뿐만 아니라 레뷰(Revue: 춤과 노래를 부르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도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요한 슈트라우스 극장에서 더 이상 레뷰를 공연하지 않게 되자 그 전통을 로나허극장이 이어 받았다.

 

1929년에 세계적인 경제공황은 비엔나에도 들이닥쳤다. 오페레타 극장들도 타격을 입었다. 그보다도 무성영화 시대가 지나고 토키가 나오기 시작하자 오페레타 극장들은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극장은 1931년에 1천 4백석 규모의 영화관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름도 스칼라(Scala)라고 바꾸었다. 스칼라 극장은 영화도 상영했지만 버라이어티 쇼도 공연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48년부터 1956년까지 소련이 비엔나를 통치하던 시기에는 영화 대신에 연극을 공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극장 이름도 노이에 테아터 인 데어 스칼라(Das Neue Theater in der Scala)라고 바꾸었다. 그로부터 이 극장에서 이름난 연극들이 줄줄이 공연되었다. 소련군이 퇴각하고 난후 이 극장은 얼마동안 연극 공연을 계속했다. 마지막 공연은 1956년 6월이었다. 그후 1959년부터 철거를 시작하여 1960년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 즈음에 비엔나의 연극 극장들은 모두 힘든 상황 때문에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비너 뷔르거테아터, 비너 슈타트테아터가 대표적으로 사라진 극장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극장에서 초연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Bub oder Mädel(소년 또는 소녀). 오페레타. 비엔나 출신으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난 브루노 그라니히슈태텐(Bruno Granichstädten) 작곡. 1908년 11월 초연

- Das Fürstenkind(왕자). 오페레타. 프란츠 레하르 작곡. 1909년 10월 초연

- Das Zigeunerprimas(집시악단 지휘자). 오페레타. 엠메리히 칼만. 1912년 10월 초연

- Der Nachtschnellzug(야간급행열차). 코믹오페레타(Operettenschwank). 레오 팔(Leo Fall). 1913년 초연

- Das dumme Herz(미련한 마음). 오페레타. 칼 미하엘 치러. 1914년 2월 초연

- Rund um die Liebe(언제나 사랑). 오레레타. 오스카 슈트라우스. 1914년 11월 초연

- Die Csardasfürstin(차르다스 공주). 오페레타. 엠메리히 칼만. 1915년 11월 초연

- Die Faschingsfee(사육제 요정). 오페레타. 엠메리히 칼만. 1917년 9월 초연

- Das Hollandweibchen(홀란드아가씨). 오페레타. 엠메리히 칼만. 1920년 1월 초연

- Eine Sommernacht(한 여름밤). 로베르트 슈톨츠. 1921년 12월 초연

- Bajazzos Abenteuer(바자쪼의 모험). 오페레타. 미하엘 크라츠나이 크라우츠(Michael Krasznay-Krausz). 1923년 초연

- Ein Märchen aus Florenz(플로렌스 동화). 오페레타. 랄프 베나츠키. 1923년 9월 초연

- Paganini(파가니니). 오페레타. 프란츠 레하르. 1925년 10월 초연

- Das Veilchen von Montmartre(몽마르트의 오랑캐꽃). 오페레타. 엠메리히 칼만. 1930년 3월 초연

- Der süsseste Schwindel der Welt(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속임수). 오페레타. 로베르트 슈톨츠. 1937년 12월 초연

 

1908년의 요한 슈트라우스 극장. 지금은 아파트(보눙)가 들어서 있다.

 

캐른트너토르테아터(Kärntnertortheater) - Theater am Kärntnertor - Carinthian Gate Theater

18세기와 19세기에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했던 오페라극장이다. 이 극장의 공식명칭은 Kaiserliches und Königliches Hoftheater zu Wien(비엔나 제국 황실 궁정극장)이었다. 캐른트너토르극장은 옛 캐른트너토르 근처에 1709년 비엔나시의 재정지원으로 완공되었다. 오늘날 슈타츠오퍼의 뒤편 자허(Sacher) 호텔 자리이다. 처음에는 비엔나 시민들을 위한 공연장으로 오픈하였으나 당시 요셉 1세 황제의 지시로 귀족들을 위한 이탈리아 오페라를 공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실의 특권을 포기하고 케른트너토르극장을 일반 시민들을 위한 극장으로 개편하였다. 그래서 운영되 황실로부터 비엔나시로 이관되었다. 처음에 지은 극장은 1761년에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2년후에 그자리에 다시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캐른트너토르테아터라는 명칭 대신에 Kaiserliches und Königliches Hoftheater zu Wien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공연되는 레퍼토리도 이탈리아 오페라뿐만 아니라 독일 오페라도 포함하였으며 나중에는 발레도 공연하였다. 그러던 중에 1861년 인근에 호프오퍼(현재의 슈타츠오퍼)를 새로 건설하는 바람에 캐른트너토르테아터는 1870년에 전면 개조하여 아파트로 만들었고 그것이 현재의 자허호텔로 탈바꿈을 하였다. 그 즈음에 종전의 캐른트너토르테아터에서부터 멀지 않은 곳인 봘피슈가쎄(Walfischgasse) 4번지에 캬바레 스타일의 공연장이 문을 열었다. 그것을 신캐른트터토르테아터(Neues Theater am Kärntnertor)라고 불렀다. 1959년부터 1973년까지 운영되다가 문을 닫았다.

 

 

비엔나 성벽의 캐른트터 문(토르)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케른트너토르테아터라고 불렀다. 현재의 자허호텔 자리이다.

                                                     

캐른트너토르테아터에서 초연된 오페라/오페레타는 다음과 같다. 한창 전성기에는 유명 지휘자들이 이곳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여러 작곡가들이 자기들의 작품이 공연되기를 요망하였다. (연도별)

 

- Der krumme Teufel(절름발이 악마) - 코믹 오페라. 요제프 하이든. 1753. 스코어 분실.

- Thamos, King of Egypt(이집트 왕 타모스) - 토비아스 필립, 바론 폰 게블러의 연극, 모차르트의 음악. 1774. 4. 4

- Palmira, regina di Persia(페르시아 여왕 팔미라) - 오페라. 안토니오 살리에리. 1795

- Falstaff(활슈타프) - 오페라. 안토니오 살리에리. 1799

- Camilla(카밀라) - 오페라. 페르디난도 파에르. 1799

- Il morto vivo(일 모르토 비보) - 오페라. 페르디난도 파에르. 1799 

- Cesare in Farmacusa(화르마쿠사의 시저) - 오페라. 안토니오 살리에리. 1800

- Ginevra degli Almieri(알리에리와 함께한 지네브라) - 오페라. 페르디난도 파에르. 1800

- L'Angiolina(안졸리나) - 오페라. 안토니오 살리에리. 1800

- Poche ma buona(귀여운 여자) - 오페라. 페르디난도 파에르. 1800

- Achille(아킬레) - 오페라. 페르디난도 파에르. 1801

- Fidelio(휘델리오) - 오페라(징슈필). 베토벤의 최종 버전(오늘날 공연되는 버전). 1814. 5. 23

- Libussa(리부사) - 오페라. 콘라딘 크로이처. 1822

- Euryanthe(오이리안테) - 오페라. 칼 마리아 폰 베버. 1823. 10. 25

- Das Nachtigal in Granada(그라나다의 나이팅게일) - 오페라. 콘라딘 크로이처. 1837

- Linda di Chamounix(샤무니의 린다) - 오페라. 게타노 도니체티. 1842. 5. 19 

- Maria di Rohan(로한의 마리아) - 오페라. 게타노 도니체티. 1843. 6. 5

- Die Heimkehr des Verbannten(추방자의 귀향) - 오페라. 오토 니톨라이. 1844

- Dom Sebastien(돈 세바스티안) - 수정본. 오페라. 게타노 도니체티. 1845

- Der Tempelritter(성전기사) - 오페라. 오토 니콜라이. 1845

- Martha(마르타) - 오페라. 프리드리히 폰 플로토우. 1847. 11. 25

- Die Rheinnixen(라인의 요정: Les Fees du Rhin) - 오페레타. 자크 오펜바흐. 1864

 

캐른트너토르테아터에서 초연된 플로토우의 '마르타'(리치몬드 시장)

 

이외에도 캐른트너토르테아터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 초연. 1824. 5. 7

- 슈베르트의 연가곡 '마왕'(Der Erlkönig) 초연. 1821. 3. 7

-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5번 C 장조, K 503 초연

- 쇼팽의 비엔나 데뷔 피아노 독주회. 1829. 8. 11

 

캐른트너토르테아터에서 교향곡 제9번 '합창'(환희의 송가)이 처음 연주되었을 때 지휘를 하는 베토벤의 모습. 벽화

                         

링테아터(Ringtheater) - 링극장

링(Ring)이라는 것은 잘 알다시피 비엔나의 시내 중심지를 링(반지)처럼 둥글게 감싸고 있는 대로이다. 링거리(링슈트라쎄)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지며 그 중의 하나가 쇼텐링(Schottenring)이다. 쇼텐링 7번지는 지금은 연방경찰국(Bundespolizeidirektion Wien) 건물이지만 19세기에는 링극장이 있었다. 링극장은 그다지 규모가 큰 극장은 아니었다. 1,700명을 수용할수 있는 극장이었다. 건축부지는 한정되어 있으나 객석은 많이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천상 높이 지을수 밖에 없었다. 링극장은 1874년에 완공되었다. 에밀 리터(Emil Ritter)의 설계에 의해 배우 겸 성악가인 알빈 스보보다(Albin Swoboda)가 주도하여 건설했다. 오페른링에 있는 호프오퍼(Hofoper: 현재의 슈타츠오퍼)가 순수오페라를 주로 공연하는 것에 반하여 링극장은 가벼운 오페라를 주로 공연했다. 그래서인지 비엔나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는 극장이었다. 원래 이 극장의 명칭은 링테아터가 아니었다. 오페라 코미크였다. 아마 파리에 있는 오페라 코미크를 견주어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러다가 1878년부터는 코믹 오페라만 공연하는 것 보다는 다른 공연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독일이나 이탈리아 오페라와 함께 연극도 공연하였고 버라이어티도 공연하였다. 그러던 중에 1881년 12월 8일, 운명의 날이 되었다.

 

쇼텐링 7번지에 있었던 화려한 링테아터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를 공연하기 직전에 무대 쪽에서 불이 났다. 불은 삽시간에 객석으로 번졌으며 불길은 위로 치솟았다. 결론만 말한다면 최소한 384명이 죽임을 당했다. 대화재였다. 이를 링테아터브란트(Ringtheaterbrand)라고 부른다. '링극장 화재'라는 뜻이다. 아무튼 오늘날에도 링테아터브란트라고 하면 비엔나 사람들 중에서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이듬해부터 극장의 개정 안전법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우선 안전 커튼을 설치토록 했다. 그리고 문은 모두 밖으로 향해서 열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내화재질들을 사용토록 했다. 링테아터는 완전 잿더미가 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링테아터의 자리에 이른바 쥔하우스(Sühnhaus)라는 주거건물을 건축토록 했다. 화재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하여 속죄하는 '속죄의 집'이라는 뜻이다. 쥔하우스는 1945년 폭격으로 크게 파손되었다. 그 자리에 1969년부터 1974년 기간에 사무실 건물이 들어섰다. 비엔나의 연방경찰본부가 되었다. 연방안전보장 총감독의 사무실도 함께 들어갔다. 신설된 경찰특공대도 이 건물에 자리 잡았다. 경찰본부 건물의 벽에 당시의 대화재를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다.

 

링테아터브란트의 장면. 그림

                     

테아터 아우프 데어 뷔덴(Theater auf der Wieden) - 뷔덴극장 - Wiednertheater

'뷔덴극장'은 프라이하우스 테아터 아우프 데어 뷔덴(Freihaus-Theater auf der Wieden)이라고도 불렀다. 또는 간단히 뷔드너테아터(Wiednertheater)라고 부르기도 했다. 18세기 후반부터 비엔나의 4구 뷔덴의 뷔드너 하우프트슈트라쎄(Wiedner Hauptstrasse)에 있었다. 현재 뷔드너 하우프트슈트라쎄 23-25번지에 있는 파파게노 호텔의 옆에 있었다. 뷔덴극장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가 초연된 것으로 유명하다. 파파게노 호텔이라는 이름은 '마술피리'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뷔덴극장을 프라이하우스 뷔덴극장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 극장을 세운 사람의 이름이 슈타렘버그 프라이하우스(Starhemberg Freihaus)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배우겸 극장인이었다. 그래서 뷔덴 극장을 한때 간단히 프라이하우스극장(Freihaus Theater)이라고도 불렀다. 뷔덴극장은 1787년에 오픈하여 14년 동안 각종 공연을 하다가 1801년에 문을 닫았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자취도 찾아볼수 없다. 다만, 뷔덴극장이 있었던 자리의 옆에 파파게노 호텔이 있으며 그 앞의 조그마한 광장에 '마술피리 분수'가 서 있어서 뷔덴극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뷔덴극장이 운영되고 있는 기간중에 극장감독은 주로 에마누엘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가 맡아 했다. 쉬카네더라고 하면 '마술피리'를 제작한 사람으로서 대본도 그가 썼고 초연에서는 직접 파파게노의 역할을 맡아 했던 다재다능한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뷔덴극장의 초대 극장감독은 크리스티안 로스바흐라는 사람이었다. 1787년 10월부터 1788년 3월까지 극장감독으로 있었다. 무슨 작품들을 어떻게 무대에 올렸는지는 모르지만 뷔덴극장은 상당한 적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누가 황제에게 얘기해서 사순절 기간 중에도 공연하도록 재정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미봉책이었다. 로스바흐는 더 이상 못해 먹겠다고 생각하고 극장에 소속된 극단원들 대부분을 데리고 순회극단을 만들어 나갔다. 주로 모라비아 지방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그 다음으로 요한 프기델(Johann Friedel)이라는 사람이 극장감독이 되었다. 1788년 3월부터 1789년 3월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년 동안을 극장감독으로 있었다. 프리델은 애인인 엘레오노레 쉬카네더와 함께 공연을 꾸려 나갔다. 엘레오노레 쉬카네더는 프리델이 전에 극장에서 함께 일했던 에마누엘 쉬카네더의 부인이지만 당시에는 별거 중이었다. 프리델도 로스바흐와 마찬가지로 뷔덴극장을 정상궤도에 올려 놓지 못하고 물러났다. 프리델과 함께 뷔덴극장을 이끌어 나갔던 엘레오노레는 레겐스부르크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편 에마누엘 쉬카네더와 화해하고 그를 새로운 극장감독으로 영입하였다. 쉬카네더는 1789년 7월부터 1801년 6월까지 12년 동안을 뷔덴극장의 극장감독으로 있었다. 쉬카네더는 극단을 새로 구성했다. 그리고 1798년 4월과 5월에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를 무대에 올려 좋은 반응을 받았다.

 

에마누엘 쉬카네더

 

쉬카네더 극단은 1789년부터 일련의 동화오페라들을 공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철학자의 돌'(Der Stein der Weisen)이다. 파스티셰 오페라인 '철학자의 돌'에는 모차르트도 한 파트를 맡아 작곡했다. 동화오페라의 공연시리즈는 1791년 9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로서 절정을 이루었다. '마술피리'는 대인기여서 첫 해에만 100회 이상의 공연을 가질 정도였다. '마술피리'가 너무나 인기여서 1798년에는 '마술피리'의 후탄이 페터 폰 빈터(Peter von Winter)의 음악과 에마누엘 쉬카네더의 대본으로 공연되기까지 했다. 쉬카네더는 현재의 나슈마르크트 지역에 새로 극장을 짓고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새로 극장을 가지게 되자 뷔덴극장은 필요없게 되었다. 뷔덴극장 건물은 즉시 철거되어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뷔덴극장의 지붕 타일은 페르흐톨드스도르프(Perchtoldsdorf) 교구교회의 지붕으로 재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페르흐톨드스도르프에나 가야 뷔덴극장의 그나마 자취라도 볼수 있다.

 

테아터 아우프 데어 뷔덴에서의 '마술피리' 공연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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