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비엔나 오페라극장

비엔나의 오페라극장 총정리 2

정준극 2013. 12. 9. 06:00

비엔나의 오페라극장 총정리 2

이들 극장에서는 어떤 오페라/오페레타들이 세계 최초로 공연되었나?

현재에도 운영 중인 극장을 중심으로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빈강변극장)

6구 마리아힐르프의 링케 빈차일레(Linke Wienzeile) 6번지에 있는 유서 깊은 극장이다. 1801년에 완성되었다. 역사에 기록되는 여러 오페라, 교향곡, 연극 등이 초연되었다.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빈은 비엔나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근에 흐르고 있는 빈강(Wienfluss)를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빈강은 복개가 되어 일부 물줄기 만이 조그맣게 흐르고 있고 복개된 곳에는 비엔나의 아침 청과시장으로 유명한 나슈마르크트가 들어섰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은 비엔나의 오페레타 황금시기에 높은 명성을 구가했다. 수많은 걸작 오페레타들이 이곳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은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부터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으로 선포된 1955년까지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임시 본부였다. 슈타츠오퍼가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서 상당히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테아터 안 데어 빈은 1955년부터 건물의 안전문제로 몇 년 동안 문을 닫고 있어야 했다. 비엔나 시당국은 도시계획에 의해 테아터 안 데어 빈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주차시설을 두려고 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유서 깊은 테아터 안 데어 빈은 이름만 남게 되었을 것이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은 생존의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현대적 뮤지컬 극장으로 탈바꿈하기로 결정했다. 영어로 된 뮤지컬들이 독일어로 번역되어서 이곳에서 공연되었다. 그러다가 1992년에는 뮤지컬 '엘리자베트'(씨씨)가 초연되었다. 그후로부터 테아터 안 데어 빈은 비엔나 뮤지컬의 센터가 되었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의 파파게노토르 옆 벽면에 부착되어 있는 베토벤 기념 명판. 베토벤이 1803년부터 1804년까지 이 극장에서 살았으며 그의 오페라인 '휘델리오', 교향곡 제3번, 크로이처 소나타를 이곳에서 작곡했다고 적혀 있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은 오페레타와 뮤지컬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오페라도 자주 공연하고 있다. 특히 비엔나 페스티발 기간 중에는 마치 오페라 전용극장처럼 이용되고 있다. 어떤 때는 오페라를 슈타츠오퍼와 공동으로 제작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대체로 스탠다드 레퍼토리가 아닌 오페라들을 공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알반 베르크의 '룰루'(Lulu: 1962), 하이든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 1967),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스의 조국 귀환'(Il ritorno d'Ulisse in partia: 1971), 모차르트의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 1976), 슈베르트의 '휘에라브라스'(Fierrabras: 1988), 그리고 아드리아나 횔츠키(Adriana Hölszky)의 '밴데'(Wände): 1995)가 초연되었다. 1996-2002년 기간에는 리카르도 무티가 모차르트의 다 폰테에 의한 세 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여자는 다 그래' 돈 조반니'를 지휘했다. 1963년의 '룰루'는 소프라노 에벌린 리어가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이었다. 1967년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테너 니콜라이 겟다와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가 주역을 맡았으며 리챠드 보닝이 지휘를 맡은 것이었다. 1976년의 '티토의 자비'는 테레사 베르간사, 아를렌 아우저, 에다 모저 등이 출연한 것이었다.

 

테아터 안 데어 빈 파사드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된 오페라/오페레타는 다음과 같다.

 

- Die Neger(검둥이) - 오페라.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마지막 작품. 1804(작곡은 1802)

- Fidelio(휘델리오) - 오페라(징슈필). 루드비히 반 베토벤. 1805. 베토벤은 에마누엘 쉬카네더의 호의로 테아터 안 데어 빈의 방에서 살았다. 그때 '휘델리오'의 일부도 작곡했다.

- Die Fledermaus(박쥐) - 오페레타. 요한 슈트라우스. 1874.

- Der Bettelstudent(거지학생) - 오페레타. 칼 밀뢰커. 1882.

- Der Zigeunerbaron(집시남작) - 오페레타. 요한 슈트라우스. 1885.

- Der Vogelhändler(새잡이) - 오페레타. 칼 첼러. 1891.

- Der Opernball(오페라무도회) - 오페레타. 리하르트 호이버거. 1898.

- Die lustige Witwe(메리 위도우: The Merry Widow) - 오페레타. 프란츠 레하르. 1905.

- Der tapfere Soldat(초콜릿 병사: The Chocolate Soldier) - 오페레타. 오스카 슈트라우스. 1908.

- Der Graf von Luxemburg(룩셈부르크 백작) - 오페레타. 프란츠 레하르. 1909.

- The Harlot's Progress(창녀의 행로) - 오페라. 이에인 벨(Iain Bell). 2013.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는 1874년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되었다.

 

- 1823년에는 헬미나 폰 헤치(Helmina von Chezy)의 극본으로 연극 '사이프러스의 여왕 로자문데'(Rosamunde, Fürstin von Zypern)가 초연되었으나 혹평을 받았다. 다만, 슈베르트가 작곡한 극음악(인시덴탈 뮤직)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베토벤의 작품 중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된 것은, 교향곡 제2번(1803), 교향곡 제3번(1805), 바이올린 협주곡(1806), 교향곡 제5번과 제6번, 합창 환상곡, 피아노 협주곡 제4번(1808) 등이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은 최근 다음과 같은 오페라들을 공연했다. 대부분 스탠다드 레퍼토리에는 들어가지 않는 작품들이다.

 

- 드빗시의 '플레아와 멜리상드'(Pelleas et Melisande)

-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

- 헨델의 '아리오단테'(Ariodante), '세멜레'(Semele), '파르테노페'(Partenope)

- 하이든의 '올란도 팔라디노'(Orlando Paladino)

- 제이크 히기의 '사형수 입장'(Dead Man Walking)

- 레오스 야나체크의 '카타 카바노바'(Kata Kabanova)

- 페데리코 모레노 토로바의 '루이사 페르난다'(Luisa Fernanda)

- 모차르트의 '가짜 바보'(La finta semplice), '폰토의 왕 미트라데'(Mitrade, Re di Ponto)

- 프란시스 뿔랑크의 '갈멜파 수녀의 대화'(Dialogues des Carmelites)

- 앙드레 프레빈의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인터메쪼'(Intermezzo)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난봉꾼의 행로'(The Rake's Progress)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난봉꾼의 행로'(The Rake's Progress)에서 주점의 장면

                                             

라이문트극장(Raimund Theater)

비엔나의 6구 마리아힐르프의 봘가쎄(Wallgasse) 18-20번지에 있다.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극작가인 페르디난트 라이문트(Ferdinand Raimund: 1790-1836)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1893년 11월 28일 오픈할 때에는 라이문트의 연극인 Dei gefesselte Phantasie(속박된 환상)이 무대에 올려졌다. 라이문트극장은 주로 독일 민속 드라마와 연극을 공연하지만 음악회도 자주 열었으며 최근에는 뮤지컬 극장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라이문트극장은 1908년에 오페레타 전문극장으로서 방향을 전환하였다. 처음 공연한 작품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집시남작'(Der Zigeunerbaron)이었다. '집시남작'은 1885년에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되었지만 1908년의 라이문트극장 공연은 새로운 연출에 의한 것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1900년대 초반에 라이문트극장에서 초연된 오페라/오페레타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은 로베르트 슈톨츠(Robert Stolz)의 오페레타 Das Glücksmädel(행운의 아가씨: 1910)과 헝가리의 하인리히 베르테(Heinrich Berte)가 만든 Dreimäderlhaus(세아가씨의 집)이다. '세아가씨의 집'은 슈베르트의 음악들을 사용한 작품으로 1916년부터 1927년까지 1,200회 이상이나 공연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라이문트극장

                            

라이문트극장은 2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이 끝날 즈음인 1945년 4월에 재빨리 다시 문을 열수 있었다. 재개관 기념공연은 역시 '세아가씨의 집'이었다. 1948년부터는 루돌프 마리크(Rudolf Marik)라는 사람이 극장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거의 30년 동안 라이문트극장에 있으면서 이 극장을 국제적 명성의 공연장소로 만들었다. 주로 오페레타를 공연하였는데 요한네스 헤스터스(Johannes Heesters), 마리카 뢰크(Marika Rökk) 등 당대의 오페레타 가수들이 출연하여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가 1976년부터는 뮤지컬에도 도전하였다. 쿠르트 봐일의 Lady in the Dark(어둠 속의 레이디)는 라이문트극장이 처음 시도한 뮤지컬이었다. 라이문트극장은 1985년에 대대적인 보수를 하고 Seinerzeit(그 때 그 당시)라는 타이틀의 갈라 연주회로 재오픈하였다. 라이문트극장은 1987년 3월부터 VBW(Vereinigte Bühnen Wien: 비엔나무대연맹)의 한 파트가 되어 본격적으로 뮤지컬을 공연하기 시작했다. 1988년에 A Chorus Line(코러스 라인)과 Les Miserables(레 미제라블)을 공연했고 1900년에는 Phantom of the Opera(오페라의 유령)를 대대적으로 공연하였다. 1993년, 설립 1백주년 기념으로는 독일어 버전인 Kiss of the Spider Woman(스파이더 우먼의 키스)가 초연되었다. 그리고 1994년에는 Grease(그리스)의 초연이 있었고 1995년에는 디즈니의 Beauty and the Beast(미녀와 야수)가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이로써 비엔나의 라이문트극장은 오스트리아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도 뮤지컬 극장으로서 높은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 Dance of the Vampires, Joseph and the Amazing Technicolor Dreamcoat, Hair, Wake Up, Barbarella, Romeo & Julia 등이 라이문트의 무대를 장식했다.

 

라이문트극장에서의 '모차르트. 다스 무지칼' 공연. 2015년

 

2006년에는 미하엘 쿤츠와 질베스터 르베이(Sylvester Levay)의 신작 뮤지컬인 Rebecca(레베카)가 초연되었다. 2008년 1월에 공연된 We Will Rock You은 너무나 인기가 많아서 9만 장의 티켓이 예매되었다. 락 그룹인 Queen의 음악이 주로 나오는 뮤지컬로서 이 그룹의 라저 테일러와 브라이언 메이가 직접 무대에 등장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뮤지컬 '엘리자베트'가 라이문트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엘리자베트'는 비엔나에서 벌써 여러번째 공연인데 그 전에는 주로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공연되었다. 참고로 VBW는 '엘리자베트'뿐만 아니라 '루돌프'도 제작했으며 '모차르트'로 제작했다.

 

라이문트극장의 오디토리엄

 

폭스오퍼(Volksoper Wien) - Vienna People's Opera

폭스오퍼는 1898년 프란츠 요셉 황제 즉위 50 주년 기념으로 건설된 극장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Kaiser-Jubilaums-Stadttheater(카이저 유빌로임스 슈타트테아터)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연극만 공연했다. 카이저 유빌로임스 슈타트테아터는 비엔나의 여러 극장 중에서도 가장 단기간 내에 건설된 극장이다. 불과 10개월만에 완공했다. 게다가 연극 공연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빚만 지고 시작했다. 결국 개관 5년 만에 파산을 선언했다. 1903년에 라이너 시몬스라는 사람이 카이저 유빌로임스 슈타트테아터를 매입하여 이름도 카이저 유빌로임스 슈타트테아터 폭스오퍼라고 바꾸었다. 시몬스는 연극도 공연하지만 오페라/오페레타를 공연하여 관객을 유치코자 했다. 1907년에는 '토스카'의 비엔나 초연이 있었다. 대성황이었다. 1910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가 비엔나 초연을 가졌다. 시몬스는 세계적인 유명 성악가들을 과감하게 초청했다. 마리아 예리차와 리하르트 타우버는 그 일환으로 오페라/오페레타에 출연하였다. 1906년에는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Alexander Zemlinsky)가 초대 밴드마스터로 기용되었다. 1차 대전을 전후해 폭스오퍼는 비엔나 제2의 오페라극장으로서 자리매김을 했다. 그리고 1929년부터는 가벼운 오페라에 치중하였다. 폭스오퍼는 2차 대전 직후 폭격으로 파손된 슈타츠오퍼의 대용으로 오페라를 공연하였다. 그러다가 1955년부터는 원래대로 오페라, 오페레타, 뮤지컬, 발레를 공연하는 극장으로서 되돌아갔다.

 

폭스오퍼

 

슈타츠오퍼(Wiener Staatsoper)

밀라노의 라 스칼라, 파리의 팔레 갸르니에와 함께 세계 3대 오페라극장 중의 하나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이다. 비너 슈타츠오퍼는 1896년 5월 25일에 개관되었다. 개관기념 공연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였다. 슈타츠오퍼는 2차 대전의 막바지에 연합군의 포격으로 상당부분이 파손되었다가 온 국민들의 염원을 담아 복구되어 1955년 11월 5일 재개관되었다. 재개관기념 공연은 베토벤의 '휘델리오'였다.

 

비엔나 슈타츠오퍼

 

비너 캄머오퍼(Wiener Kammeroper) - 비엔나 실내오페라극장

비엔나 캄머오퍼(실내오페라극장)이 정확히 언제부터 공식적으로 문을 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1953년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때부터 캄머오퍼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캄머오페라는 새로운 용어는 캄머무직(실내악)을 생각해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 같다. 교향곡 연주처럼 규모가 있는 오페라 공연이 아니라 실내악 연주와 같은 소규모의 공연이라는 점에서 그런 용어가 비롯되었다고 본다. 비엔나 캄머오퍼는 현재 1구 플라이슈마르크트(Fleischmarkt) 24 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전에 무도회장으로 사용하던 것이었으며 비엔나 캄머오퍼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간혹 연극도 공연되던 건물이다. 비엔나 캄머오퍼가 이 건물을 본부로 삼게 된 데에는 비엔나 시당국의 배려가 컸었다. 집을 주선해 주고 운영자금도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1구 플라이슈마르크트에 있는 비엔나 캄머오퍼 입구

 

비엔나 캄머오퍼의 전신은 '비엔나 오페라 스튜디오'이다. 지휘자인 한스 가보르(Hans Gabor)가 설립했다. '비엔나 오페라 스튜디오'는 전용무대가 없었다. 그래서 공연을 하려면 콘체르트하우스의 모차르트 홀을 빌리거나 아르바이터캄머(Arbeiterkammer)를 빌렸다. 콘체르트하우스에서의 공연은 Theater der Jugend(청소년 극장)이라는 단체의 후원을 받은 공연이었다. 여름에는 쇤브룬 궁전극장을 이용하기도 했다. 비엔나 오페라 스튜디오는 설립 이후 현대작곡가들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는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보리스 블라허(Boris Blacher)의 The Flood(대홍수: 1956)였다. 이와 함께 오페라 부파 또는 비엔나의 전통적인 오페레타도 공연하였다. 이러한 공연을 통해서 잘 알려지지 않고 있던 희귀 오페라들도 빛을 보게 되었다. 예를 들면 알레산드로 스칼라티의 Il trionfo dell'onore(명예의 승리: 1956)이다. 비엔나 캄머오퍼는 정용극장이 생기자 단막 오페라를 시도하였다. 마르티누의 The Marriage(결혼), 오를란디니의 The Gambler(Il marito giocatore: 도박사), 칼 오르프가 편곡한 몬테베르디의 Lamento d'Arianna(아리아드네의 탄식) 등이다. 비엔나 캄머오퍼는 1983년부터 Studio K 라는 일련의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작곡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데뷔시키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톰 존슨(Tom Johnson), 피터 막스웰 데이비스(Peter Maxwell Davies), 루치아노 샤일리(Luciano Chailly), 필립 글라스(Philip Glass),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 등의 오페라들을 초연했다. 그러면서고 '라 보엠'이나 '카르멘'과 같은 클래식 오페라도 과감하게 공연하였다.

 

비엔나 캄머오퍼에서의 '라 보엠'

 

비엔나 캄머오퍼는 1992년 여름에 쇤브룬 궁전의 로마 유적지에서 Mozart in Schönbrunn(쇤브룬의 모차르트)라는 특별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그러다가 1999년부터는 중단되었다. 로마 유적지가 훼손될 위험에 처할수도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비엔나 캄머오퍼의 대부인 한스 가보르(1924-1994)는 1980년대 초에 지휘자를 그만두고 예술감독과 매니저가 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1982년에 '국제벨베데레성악경연대회'(Internationalen Hans Gabor Belvedere Gesangwettbewerb)를 설립했다. 오늘날 이 성악경연대회는 '성악의 월스트리트'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국제적 명성의 대성악경연대회가 되었다.

 

비너 캄머오퍼 오디토리엄

 

로나허극장(Ronacher Theater)

1구 자일러슈태테(Seilerstätte) 9번에 있다. 1구 힘멜포르트가쎄(Himmelpfortgasse) 25번지이기도 하다. 주로 뮤지컬을 공연한다. 나치시대에는 버라이어티 쇼를 공연했다. 1986년에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Cagliostro in Wien(비엔나의 카글리오스트로)를 공연했다. 1987년에 비엔나극장연맹(VBW)의 산하에 들어갔다. 로나허극장은 처음에 비너 슈타트테아터(Wiener Stadttheater: 비엔나 시립극장)로서 출발했다. 설립 대표자는 저널리스트인 막스 프리드랜더(Max Friedländer) 및 극작가 겸 극장관리자인 하인리히 라우베(Heinrich Laube)였다. 즉, 관영극장이 아니라 사설극장이었다. 두 사람은 사회적, 정치적 검열에 영향을 받지 않는 평민관중을 위한 극장, 그러면서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와 경쟁할수 있는 새로운 극장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현재의 로나허극장을 건설했다. 로나허극장은 1872년에 개관되었다. 그러다가 12년 후인 1884년 뜻하지 아니한 화재로 건물이 완전 잿더미가 되었다. 옛날에는 전기가 없고 촛불을 사용했으며 난방도 장작을 사용했기 때문에 정말 불조심을 해야 하는데 간혹 그렇지 못하여 화재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한 때에 안톤 로나허(Anton Ronacher)라는 신사가 잿더미의 폐허를 구입하였다.

 

로나허극장 상단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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