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저명 인사

건축가 피셔 폰 에얼라흐 기념상

정준극 2014. 1. 7. 09:34

건축가 피셔 폰 에얼라흐(Fischer von Erlach) 기념상

라트하우스파르크에 설립

 

라트하우스파르크의 피셔 폰 에얼라흐 기념상

 

합스부르크의 바로크 건축물들이라고 하면 우선 피셔라고 부르는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 1656-1723)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피셔는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수많은 건축물들을 완성한 위대한 건축가이다. 그는 조각가기인 동시에 건축사학자이기도 했다. 그를 기리는 기념상이 라트하우스파르크에 있다. 그냥 무심코 지나치지 말고 피셔 폰 에얼라흐의 업적을 한번쯤 음미해 보는 것도 비엔나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길일 것이다. 폰 에얼라흐는 비엔나에 어떤 조각 및 건축 작품들을 남겼는가? 그라벤에 있는 페스트조일레(페스트탑: 1687)는 대표적이다. 누구든지 페스트조일레를 지나치면서 '거 참 특이하게 잘 만들었네'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누가 만든 것인지는 알지 못한것 같아서 민망스런 심정이 든다. 피셔 폰 에얼라흐의 작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합스부르크의 영광이며 비엔나의 관광 1번지인 쇤브룬 궁전을 완성했다. 1688-92년의 일이다. 폰 에얼라흐는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는 팔레 아우가르텐(Palais Augarten)도 건축했다.

 

피셔 폰 에얼라흐

 

피셔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의 하나인 칼스키르헤(Karlskirche)를 완성했다. 그리고 로브코비츠 궁전(Palais Lobkowitz), 투라우촌 궁전(Palais Trautson), 보헤미아 수상궁(Bohemian Court Chancellery), 슈봐르첸버그 궁전(Palais Schwarzenberg), 황실 마사(Imperial Stallburg),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National Bibliotek),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 비엔나 시내 궁전, 슐리크(Schlick) 백작 여름 저택, 팔레 쇤브룬 바티야니,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시내궁전의 현관 부분 등을 완성했다. 그러고보면 비엔나에서 한다하는 아름답고 유서 깊은 건물들은 대부분 피셔 폰 에얼라흐의 작품인 셈이다. 뿐만 아니다. 폰 에얼라흐는 그라츠에 있는 마리아 슈트라쓰엥겔(Maria Strassengel) 순례교회의 중앙제단, 니더 외스터라이히의 슐로스 니더봐이덴(Schloss Niederweiden) 사냥숙사, 그라츠의 마리아첼 바실리카의 중앙제단, 프라하의 클람 갈라스(Clam-Gallas) 궁전, 류블리야나의 체킨(Cekin) 저택, 폴란드 브로크카우(Wroctaw) 대성당 등을 완성했다. 에렌하우젠의 루프레헤트 폰 에겐버그 영묘, 폰 에얼라흐와 잘츠부르크의 인연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깊다. 그는 잘츠부르크에서 궁정마사의 현관, 마르쿠스키르헤, 슐로스 클레스하임, 키르헨탈(Kirchental) 순례교회, 성상위일체 교회, 요한병원교회(Johannesspitalkirche), 우르술라 교회, 콜레기에트교회(Kollegienkirche), 프란체스코 교회 중앙제단 등을 완성했다. 아무튼 대단한 인물이다.

 

쇤브룬 궁전은 폰 에얼라흐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피셔 폰 에얼라흐는 그라츠 부근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조각이나 그림을 그리는 솜씨 좋은 장인이었다. 피셔는 16세가 될 때까지 아버지를 도와 일했다. 그때의 기본이 훗날 위대한 건축가 겸 조각가로 성장하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피셔는 16세 때에 로마로 떠났다. 로마에서는 다행하기도 당대의 거장 베르니니의 문하에 들어 갈수 있었다. 피셔는 베르니니의 문하에 있으면서 고대와 현대의 조각 및 건축에 대하여 심도 있는 교육을 받았다. 그후 그는 나폴리로 자리를 옮겼다. 피셔는 나폴리의 스페인 총독부에 봉사하면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피셔는 1687년, 31세 때에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때 이미 그의 이름은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비엔나에서 그는 높은 인기를 차지하며 지냈다. 건축에 대한 위촉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특히 1683년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으로 인하여 비엔나의 수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를 복구하기 위해 귀족들의 건축 붐이 일어났던 것이다. 수많은 건축가 중에서 피셔는 도시의 바로크 양식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이미 피셔의 명성은 중부 유럽을 뒤덮고 있었다. 그는 1687년에 명예스러운 궁정건축가로 임명을 받았다. 그로부터 폰 에얼라흐는 3대에 걸친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을 섬기며 건축에 열정을 쏟았다.

 

칼스키르헤도 폰 에얼라흐의 작품이다.

 

1690년대는 피셔의 경력이 꽃피던 시기였다. 그는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을 비엔나의 요구에 맞게 적용하는 전통을 세웠다. 비엔나를 바로크 도시로 만든 것이다. 1700년데 초반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요셉 1세의 대관식이 비엔나에서 있었다. 그때 피셔는 비록 가건축물이지만 웅장한 개선문 두개를 세웠다. 어찌나 웅장하고 아름다웠던지 대관식이 지났는데도 철거하지 말고 영구 보관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도시의 건축을 위해 철거하였다. 아무튼 그로 인하여 피셔는 요셉 1세와 가깝게 지내게 되어 요셉 1세에게 건축예술을 레슨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요셉 1세는 피셔를 귀족의 반열에 올렸고 그로부터 피셔는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폰 에얼라흐가 1695년에 완성한 오이겐 공자의 시내 겨울 궁전은 그가 발전시킨 비엔나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매우 인상적인 형식이며 구조적으로 명확하고 장식은 다이나믹한 분위기가 넘쳐 흐르는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팔레 슈봐르첸버그

 

폰 에얼라흐는 도시계획에도 적극적이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를 위해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였다. 잘츠부르크의 두 교회는 폰 에얼라흐가 성취한 대표적인 업적이다. 삼위일체교회(Dreifaltigkeitskirche)와 대학교회(Kollegienkirche)이다. 높이 솟아있는 첨탑과 돔, 그리고 아름답고 정교한 현관들은 잘츠부르크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어 놓은 것들이었다. 1711년 요셉 1세가 세상을 떠나자 폰 에얼라흐를 찾는 사람들은 눈에 띠게 줄어들었다. 대신에 라이발이었던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폰 에얼라흐는 1713년에 건축이 시작된 프라하의 클람 갈라스 궁전을 생애의 마지막 작품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1715년에 비엔나의 칼스키르헤의 건축을 맡게 되었다. 폰 에얼라흐가 가장 솜씨를 부린 건축물이다. 폰 에얼라흐는 칼스키르헤를 유럽 역사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성전의 하나로 만들 생각이었다. 과연! 칼스키르헤는 예루살렘의 솔로몬 선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로마 바티칸의 성베드로바실리카, 파리의 앵밸리드, 그리고 런던의 성바울대성당과 함께 위대한 교회건축물로서 사랑을 받게 되었다. 칼스키르헤는 폰 에얼라흐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아들인 요셉 에마누엘이 완성했다.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