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모하츠 전투

운명의 모하츠 전투(The Battle of Mohács)

정준극 2014. 3. 17. 12:13

운명의 모하츠 전투(The Battle of Mohács)

헝가리 분할의 시초

 

모하츠 전투(Mohácsi csata 또는 Mohácsi véz)는 1526년 8월 29일 헝가리의 모하츠 인근에서 벌어진 헝가리군과 오토만 제국군의 전투를 말한다. 전투에서 루이스 2세 헝거리-보헤미아 왕이 이끄는 헝가리 왕국군은 술탄 술레이만이 이끄는 오토만 터키군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헝가리는 수세기 동안 오토만 제국, 합스부르크 왕실,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분할하여 통치하는 비운의 역사를 맞게 되었다. 루이스 2세 왕은 전투에서 패하여 도피하다가 강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통치하던 야기엘론(Jagiellon) 왕조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야기엘론 왕조는 루이스 2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루이스의 누이인 안나가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재위: 1558-1564)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페르디난트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합스부르크에 흡수되었다.

 

1526년 모하츠 전투 기념관과 기념조형물

 

모하츠 전투에서 헝가리가 대패하게 된 배경으로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하나가 블라디슬라우스 2세의 나약한 정치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헝가리의 절대군주라는 별명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는 1490년에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서 헝가리에 또 다른 압제적인 절대군주가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일단 후계자로 지정된 블라디슬라우스 2세(재위: 1490-1516)는 이미 후임 왕으로 결정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지만 그 이후의 후계자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누가 상속해야하는지를 결정해 놓지 않았다. 그나저나 블라디슬라우스 2세는 나약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블라디슬라우스는 헝가리어로 도브체(Dobz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도브체는 '좋다'는 뜻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오케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는 말이다. 블라디슬라우스는 자기가 무슨 조선 시대의 황희 정승이라고 누가 이렇게 말해도 '도브체', 저렇게 말해도 '도브체'였고 자기 앞에 놓인 중요한 문서들을 보지도 않고 그저 '도브체'라고 말하며 건성 처리하였다. 또 한가지, 블라디슬라우스는 왕으로 취임한 후에 왕이 누릴수 있는 특권들, 예를 들면 징세에 대한 특권, 사냥이나 수렵에 대한 특권, 광물의 채광에 대한 특권 등을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밥먹듯이 했다. 블라디슬라우스가 그렇게 한 이유는 제딴에는 귀족들의 인심을 사서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귀족들을 잠잠케 해야 왕권이 안정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예상했던 대로 이러한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정책 때문에 재정이 미약해져서 중앙권력이 허약해 질수 밖에 없었다. 블라디슬라우스는 글자그대로 허수아비 및 감옥에 갇힌 포로와 같은 왕이었고 무슨 일을 하나 하더라도 귀족 대표들과 의논하여 이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가장 문제는 국방이었다.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 병사들은 급료를 받지 못해서 초소를 마음대로 이탈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 귀족들은 강력한 군주였던 마티아스 코르비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이 참에 절대군주의 세력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우선 그가 특별히 운영하던 '흑군'(Black Army)을 즉시 해산한 일이 있었다. 돈만 잡아 먹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후 말 안해도 뻔한 일이지만 군대는 사기가 떨어졌고 국경의 요새들은 수리조차 하지 않아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중앙행정부의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로 무위로 돌아갔다. 귀족들은 중앙정부가 세금을 더 걷으면 자기들이 걷어야 할 몫이 줄어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증세를 반대하였다. 그러다보니 국제사회에서 헝가리의 입장은 몰락해지기 시작했고 국내의 정치는 불안하기만 했다. 왕권이 강력하지 못하므로 사회개혁을 위한 어떠한 정책도 추진되지 못하였다. 급기야 1514년에 농민들이 참지 못하고 블라디슬라우스에 대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농민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귀족들의 군대에 의해 그만 분쇄되고 말았다. 그후 농민들에 대한 귀족들의 탄압은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백성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고 무기력한 왕권은 귀족들의 손아귀에 놀아났다. 세월은 흘러 허약왕 블라디슬라우스가 1516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 후임으로 루이스 2세가 헝가리-보헤미아 왕이 되었다. 루이스 왕도 무얼 좀 해보려고 했지만 오래전부터 상황이 그러하여서 도무지 힘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루이스는 합스부르크의 후원을 받기 위해 자기 누이동생을 합스부르크의 샤를르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헝가리가 합스부르크에 먹히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헝가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오토만 터키로서는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나라가 허약해지고 백성들이 나라에 대하여 등을 돌린 마당에 오토만 터키의 헝가리 침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토만 터키로서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를 함락시키기 전에 우선 헝가리부터 무릎을 꿇도록 해야 했다.  

 

오토만 터키는 우선 테스트용으로 헝가리의 남쪽에 있는 요새를 건드려 보기로 했다. 헝가리의 남부 국경지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요새인 난도르페헤르바르(Nándorfehérvár)를 공략하였다. 이 요새는 오늘날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이다. 공산치하에서는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다. 1521년에 오토만 터키군은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이 요새를 함락했다. 오토만 터키군이 헝가리를 침략하자 루이스 2세 왕은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를 소집하여 무슨 대책을 세워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귀족들은 농민들을 탄압하기에 정신이 없었고 더구나 의회 내에서 계파간의 분쟁으로 바뻤기 때문에 대책이고 무어고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돌이켜 보면 서유럽으로서는 헝가리가 오토만 제국의 서진을 저지하는 요새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던차에 오토만 제국이 난도르페헤르바르와 이어 차바츠(Szabács)까지 함락한 것은 헝가리가 국경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었다. 루이스 2세 왕은 합스부르크와의 결속이 필요하다고 믿어서 얼마전 부터 얘기가 되어온 합스부르크의 메리와의 결혼을 당장 진행키로 하여 오토만 터키가 침략해 들어온 와중인 1522년에 메리와의 결혼식을 올렸다. 오스트리아의 메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의 손녀였다. 오토만 터키는 헝가리-보헤미아가 합스부르크와 결속을 이룬 것을 발칸 지역에서 오토만 터키의 세력 확장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헝가리-보헤미아와 합스부르크의 결속을 깨트리려고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모하츠 전투에서의 헝가리군 진격

 

오토만 제국의 술레이만이 술레이만 1세로서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술레이만은 헝가리-보헤미아와의 평화를 위해 한두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루이스 왕이 이같은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루이스 왕은 1525년에 폴란드와 오토만이 평화협상을 맺었지만 효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보헤미아와 오토만의 평화협정을 거절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될 뿐이다. 실제로 루이스 왕은 평화보다는 전쟁이 더 유리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오토만 무법자들은 평화 기간 중에도 헝가리의 변방 마을들을 침략하여 약탈하고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루이스 왕은 물론이고 술레이만도 헝가리와 오토만 제국간에 언젠가는 일전을 치루어 결판을 내야 할 때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때가 1526년 6월에 다가왔다. 오토만의 대군이 마침내 다뉴브강을 건너 대규모로 진격해 왔다. 그러면 그러한 상황에서 유럽의 강호라고 하는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프랑스가 그러면 안되는데 오토만 제국과 동맹을 맺어 오랫동안 껄끄러웠던 상대인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였다. 1526년 2월 24일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합스부르크의 샤를르 5세(재위: 1519-1588)의 군대와 이탈리아 북부 파비아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크게 패배하였다. 프란시스 1세는 합스부르크에 포로로 붙잡히는 수모를 겪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프란시스 1세는 합스부르크와 굴욕적인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하고 풀려났다. 와신상담이라는 사자성어가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프란시스 1세는 와신상담하며 재도전의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프란시스 1세는 유럽의 정세를 판단해 볼때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에 맞설 세력으로서는 오토만 제국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프랑스와 오토만 제국의 동맹이 이루어졌다. 프란시스 1세의 목표는 간단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5세에 맞서기 위해 술레이만의 힘을 빌리고 싶었던 것이다. 프랑스와 오토만의 동맹은 거의 3세기 동안 지속되었지만 이로 인하여 유럽의 기독교 세계에서는 프랑스가 이슬람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하여 비난의 말들이 많았다. 그건 그렇고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는 사람이 그래면 안되는데 오토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에게 제발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을 벌여 무너트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면 오토만이 헝가리를 거쳐 와야 했다. 그래서 오토만이 1526년 여름에 대규모 병력으로 헝가리 침공을 시작한 것이다. 그 침공으로 인한 가장 결정적인 전투가 바로 모하츠 전투였다.

 

루이스 2세의 죽음. 오토만 군대와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퇴각하던 중에 강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었다.


헝가리는 1521년에 오토만이 난도르페헤르바르(베오그라드)를 함락하자 큰 충격에 빠졌다. 헝가리는 급히 군대를 소집하여 탈환코자 했다. 그러나 군대를 모으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간도 걸렸다. 아무튼 그래서 겨우 6만명의 병력을 모을수 있었다.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향해 떠났다. 하지만 식량을 챙겨가는 것을 잊었다. 하기야 그많은 병사들을 먹일 식량을 확보하는 일은 쉬은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식량이 없자 배고픈 병사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질병도 돌았다. 헝가리 군대는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탈환하기는 커녕 변변한 전투한번 펼치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그동안 오토만은 난도르페헤르바르에 새로운 요새를 구축하고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오토만은 헝가리가 별것 아니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526년에 오토만은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헝가리로 진격케 했다. 이번에는 술레이만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헝가리의 한다하는 귀족들은 오토만 병력의 규모와 위세를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루이스 2세가 귀족들에게 제발 군대를 일으켜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이들은 들은둥 마는둥했다. 루이스 왕은 귀족들에게 7월 2일까지 병영에 집합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날까지 병사들을 이끌고 도착한 귀족들은 하나도 없었다. 하기야 루이스 왕 자신도 그날 병영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할 말이 없다. 그나마 하루 이틀 지나서 루이스 왕이 화려한 복장으로 병영에 나타나자 그제서야 무엇이 움직이는 듯했다. 나라가 망하려니까 지도층들의 한심한 정책 결정이 문제가 되는 법이다. 헝가리 전쟁위원회는 오토만과의 전쟁터로 모하츠 인근 지역을 선정했다. 대단히 중대한 실수였다. 모하츠 인근 지역은 평야도 아니었고 구릉지대가 많은 곳이었다. 구릉이 많다보니 늪지대도 많았다. 전투장소로서 적당한 곳이 절대 아니었다.

 

모하츠 전투에서의 헝가리 연합군

 

헝가리의 대항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트란실바니아군으로 트란실바니아 알프스 협곡을 방어토록 되어 있다. 병력은 8천에서 1만 3천 정도였다. 헝가리군의 주력부대는 루이스 자신이 인솔하는 군대로서 스페인, 독일, 체코, 세르비아 용병들이 포함된 잡탕이었다. 마지막은 크로아티아의 5천 병력이었다. 오토만 군대는 발칸 산맥을 건너 진격해 왔다. 오토만 군대는 부다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런데도 헝가리 군대는 부다를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모하츠 평원에서 오토만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란실바니아와 크로아티아 군대는 부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토만 군대가 부다에 더 먼저 도달할수 있었다. 루이스의 전략도 문제가 있었다. 루이스는 오토만 군대에게 도시를 그냥 내주고 이들이 평원으로 나오면 한바탕 싸워보자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부다로부터 일부러 나와서 모하츠에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오토만의 병력은 거의 10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루이스의 병력은 5만에도 미치지 못했고 그나마도 잡다한 인종들이 섞여 있는 군율이 없는 장개석 군대였다. 오토만은 대포가 많아서 화력에서도 헝가리 부대에 비하여 훨씬 압세였다. 다행한 것은 모하츠에 집결해 있는 헝가리 부대가 그동안 며칠 동안 충분히 쉬어서 사기가 높았다는 것이다. 대신에 오토만 군대는 8월의 더운 여름에 강행군을 해서 지쳐 있었다. 오토만 군대가 이윽고 모하츠에 도착하자 이들은 늪지대를 통과하느라고 허우적거렸다. 헝가리 군대가 이때를 이용해서 공격하면 상당한 전과를 올릴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생하며 늪지대를 건너고 있는 준비되지 않은 병사들을 공격하는 것은 신사답지 않은 행위이기 때문에 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웃겨도 한참 웃기는 헝가리의 지휘관들이었다. 전투에서 신사도가 밥먹여 주나?

 

여기서 8월 29일의 모하츠 전투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고 언제 끝났으며 무슨 전략으로 치루어졌는지 등에 대하여는 자세히 논거할 필요가 없어서 생략한다. 다만, 한가지 지적하자면 헝가리의 기마병들은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해서 거동이 심히 불편했지만 오토만의 기병들은 날렵한 겉옷 차람이었다는 점이다. 아니, 더운 여름에 무거운 갑옷을 걸쳐 입을 이유가 어디있는가? 모양내느라고 그랬는가? 루이스 2세는 전투에서 도피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첼레 강에 빠졌다. 그런데 그놈의 무거운 갑옷 때문에 허우적거리지도 못하고 깊지 않은 수심임에도 불구하고 익사했다. 죽으려면 접시에 코가 빠져서도 죽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전투에서는 약 1천 명의 헝가리 귀족들과 지휘관들이 전사했다. 전체적으로는 헝가리측에서 1만 4천의 병사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술레이만은 '포로는 없다'고 명령했다. 다음날, 약 2천 명의 헝가리 포로들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과거에도 없었던 참혹한 집단처형이었다. 처형 당한 포로 중에는 헝가리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귀족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술레이만은 헝가리 병사들이 자살특공대처럼 생각되었다고 기술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공격하는 오토만 군을 바라만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오토만 군대는 한때 강력한 나라였던 헝가리가 이렇게 형편없이 무너지리라고는 생각치도 않았다. 때문에 무척 조심하면서 비엔나로 향해서 진군했다.

 

모하츠 전투에서의 오토만 터기 기병대

 

오토만 제국은 헝가리와의 건곤일척의 모하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어 아무런 방어도 되어 있지 않은 부다를 손쉽게 함락하여 왕궁을 비롯한 귀족들의 저택을 닥치는대로 약탈하였으며 수많은 헝가리 여인들을 능욕하였다. 그러나 술레이만은 무언가 걱정이 되었다. 헝가리의 뒤에 있는 신성로마제국이 들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얼마후에 바람과 같이 퇴각하였다. 오토만 제국은 그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헝가리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제멋대로 굴었으나 정작 부다를 점령하고 헝가리에 대한 통치를 시작한 것은 1541년부터였다. 그리하여 비록 부다를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오토만 제국에게 넘겨 주어 명목상의 헝가리 왕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실제로 헝가리 왕국이 사양길에 접어 든 것은 모하츠 전투에서 패배한 때로부터였다. 오토만 제국이 헝가리를 완전 장악하기 전에 헝가리의 정치 상황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헝가리의 한다하는 귀족들도 두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 잘났다고 주장하다가 결국은 서로 왕을 선출하여 1국2왕이라는 희대의 사태까지 돌입했다. 하나는 1526년에 뽑은 야노스 차폴리아이(Janos Szapoluai)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다음 해인 1527년에 뽑은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세였다. 그러므로 페르디난트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기 전에 이미 헝가 왕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보헤미아도 합스부르크에 떨어졌다. 보헤미아는 헝가리의 북쪽과 서쪽 일대, 그리고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오토만은 사실상 오늘날 헝가리의 중부 일대와 트란실바니아 자치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라가 분할 되다보니 애국적인 헝가리 사람들은 독립과 해방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모하츠 전투 이후 거의 70년 동안 특히 오토만 제국을 몰아내려는 독립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술레이만 자신도 1566년 헝가리에서의 치게트바르 전투(Battle of Szigetvár) 기간 중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오토만 터키는 헝가리의 북부와 서부에 있는 합스부르크 영향권의 영토는 건드리지 못하였다.

 

헝가리 사람들은 모하츠 전투야 말로 헝가리의 몰락을 가져오기 시작한 사태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모하츠 전투는 국가적인 트라우마(정신적 충격)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모하츠라고 하면 불운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헝가리 속담에 '퇴브 이스 베체트 모하츠날'이라는 말이 있다. '모하츠보다 더 잃을 것이 없다'는 뜻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모하츠 전투에서의 패배로 오랜 역사의 독립국이었던 헝가리가 종말을 고하고 그후로부터는 외세의 압제를 받아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다고 믿고 있다. 헝가리가 열강의 압박 속에서 지내야 하는 것과 동시에 헝가리의 초원은 수세기동안 힘겨운 전쟁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로 합스부르크와 오토만 터키의 전쟁이었다. 군인들이 물밀듯이 몰려왔다가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하는 것이 반복되는 바람에 헝가리의 비옥한 농토는 황폐해지기만 했고 이에 따라 농사를 지어야 하는 백성들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헝가리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독립국으로서 행세를 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16세기 이전의 굳건한 정치력은 다시 찾을수 없게 되었다. 모하츠 전투의 사적지는 1976년에 모하츠 전투 450주년을 기념하여 국가사적지로 지정되었고 사토르헬리(Sátorhely) 마을에 기념관을 지어 오픈했다. 기념관은 2011년에  EU의 재정지원을 받아 대폭 확장되었다.

 

헝가리 사토르헬리 마을의 모하츠 전투 기념관

 

 

 


 

á   é   ö   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