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모하츠 전투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동구의 공산 와해까지

정준극 2014. 3. 20. 09:09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동구의 공산 와해까지

 

합스부르크의 샤를르 3세(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는 샤를르 6세)는 슬하에 두 딸 밖에 없자 여자도 황제의 계승권을 가질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른바 '국사조치'(Pragmatic Sanction: Pragmatica Sanctio)이다. 이로 인하여 신성로마제국에 속하여 있는 열국 간에 대단한 분쟁이 있었지만 결국 샤를르 6세는 다른 제후들과의 바터제로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기의 뒤를 계승한다는 양해를 받아냈다. 샤를르 6세의 당시에 헝가리는 오래전에 있었던 모하츠 전투의 결과로 국토의 일부가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샤를르 6세는 '국사조치'가 인정을 받은 것에 부응하여 오스트리아의 통치위원회(Governing Council)를 비엔나에서 헝가리 지역의 포초니(Pozsony)로 옮겼다. 통치위원회는 오스트리아의 최고정책 기구로서 헝가리의 정치까지도 관장하고 있었다. 샤를르 6세는 또한 헝가리의 정부형태를 부활시켰으며 개신교 때문에 힘들어 하는 헝가리의 가톨릭 교회에 많은 힘을 실어 주었다. 헝가리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보헤미아 등과 마찬가지로 개신교가 많이 유입되었으나 오스트리아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타이틀이 보여주는 것 처럼 로마 가톨릭의 기치를 내걸고 있으므로 어쩔수 없이 로마 가톨릭의 깃발 아래에 다시 들어올수 밖에 없었다.

 

헝가리 왕으로 대관식을 갖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1740년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실권은 없고 명예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아무래도 여자가 맡는 것이 이상해서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한 로트링겐의 프란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으로 일단 방향을 바꾸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로트링겐(로레인)의 프란시스 1세와 결혼하므로서 오리지널 합스부르크 가문은 더 이상 대를 잊지 못하고 대신 합스부르크-로레인 가문이 문을 열게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러가지 개혁정치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의무교육을 시행토록 했다. 이어 농노제도를 혁파했다. 더 이상 농부들을 노예처럼 부리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국가의 행정을 현대화했다. 또한 군인들에게 연금제를 적용하여 군대의 지지를 받아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대단한 여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40년 동안 합스부르크의 사실상 군주로서 행세하다가 1780년 세상을 떠났다. 큰 아들인 요제프가 요제프 2세로서 새로운 황제에 올랐다.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였다. 우선 헝가리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거절했다. 헝가리에 별도의 군주가 있어야 한다는 갸륵한 생각에서였다. 이어 종교의 자유를 주장했다. 아무리 신성로마제국이며 로마 기톨릭이 주도적인 입장이지만 개신교를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개신교를 억압하면 돌아오는 것은 결국 반발 밖에 없으므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똑똑한 생각이었다. 요제프 2세는 독일어를 공공행정의 공식어로 선포하였다. 당시에는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가 공식언어였다. 요제프 2세 때에 헝가리에서 교육의 열기가 높이 치솟았다. 괴오르기 페스테틱스가 케츠텔리에 경제아카데미를, 세메크바냐에 광산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나지촘바트에 대학교를 세웠는데 이 대학교는 나중에 페스트로 이전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초반의 후반은 이른바 개혁시대로 알려졌다. 1825년에는 정치가이며 경제학자인 이스트반 체체니 백작이 헝가리과학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의 아버지인 페렌크 체체니는 헝가리 국립박물관을 설립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헝가리 국가의 가사를 쓴 시인 페렌크 쾰체이와 '헝가리의 현자'라고 불리는 자유주의 정치가 페렌크 데아크가 헝가리의 개혁의회에 모습을 보인 것도 이 시기였다. 1848년에 온 유럽을 휩쓸고 있던 혁명의 불길이 헝가리에도 도착했다. 헝가리에서 새로운 헌법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한편 비엔나에서는 3월 13일에 혁명주의자들이 도시를 장악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후에는 헝가리에서도 무혈혁명이 성공하여 정부를 장악했다. 4월 11일에는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5세가 헝가리 봉건 의회로서는 마지막 법안을 어쩔수 없이 재가하였다. 이로써 헝가리 신헌법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왕정 대신에 민간정부로의 이양이 가능하게 되었다. 즉, 헝가리는 독립적인 민간 주도의 입헌 군주국으로 변화되었다.  


헝가리에서의 행정집행권은 헝가리의 정부라고 할수 있는 독립책임부가 맡게 되었다. 그러한 때에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독립성을 가지고 있는 헝가리는 국토방어를 위해 크로아티아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 비엔나가 크로아티아를 도와주었다. 헝가리 의회는 화가나서 합스부르크 왕조가 왕관을 벗고 물러날 것을 요구했으며 아울러 헝가리의 완전 독립을 선포했다. 1849년 4월 14일이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 국운을 건 일전을 불사하지 않을 태세였다. 그런데 그때 제정러시아의 니콜라스 1세 짜르가 간섭하고 나섰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후원해 주어야 제정러시아도 어깨를 치켜 들고 지낼수 있다고 생각했다. 헝가리로서는 독립전쟁을 치루지도 못하고 봉쇄당했다. 헝가리군 최고사령광인 아르투르 괴르게이는 8월 13일에 발리고스에서 제정러시아에 항복했다.

 

젊은 프란츠 요제프는 황제가 되자 신전체주의(Neoabsolutism)을 추구했다. 특히 취임한지 첫 10년간인 1849-1859년간에 그러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로부터 그동안 반기를 든데 대하여 보복을 당해야 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장군인 율리우스 야콥 폰 하이나우가 앞장서서 헝가리를 짓밟기 시작했다. 헝가리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괸 라요스 바티아니(Lajos Batthyany)가 다른 13명의 헝가리 장군들과 함께 1849년에 처형되었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에 대한 합법적인 통치자임을 강조했다. 헝가리가 자주 반란을 획책하는 것은 권력이 분산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의 수상인 펠릭스 추 슈봐르첸버그는 대규모의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비엔나는 헌병대를 개편하였고 경찰은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감찰과 탄압이 시작되었다. 헝가리의 망명 정치가인 코스투가 헝가리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동정을 받고자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헝가리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저 오스트리아에 당할수 밖에 없다면서 순응하였다. 하지만 억울한 불만의 심정은 사그러지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에 헝가리의 일부 주도적인 세력들은 합스부르크의 황태자인 루돌프에게 헝가리의 군주가 되어 줄것을 요청했으며 루돌프도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겹쳐서 내락했다고 한다. 그때문인지 아버지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미움을 샀고 결국 마이엘링에서 죽음을 마지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기원후 830년경 헝가리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부족 중에서 영향력이 큰 7개 부족의 장이 에텔쾨츠에 모여서 헝가리 발전을 위해 피의 서약을 했다. 헝가리 왕국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어느 민족이던지 약속을 중하게 여기지만 헝가리인들은 약속을 더 중하게 여긴다.


사태가 자꾸 바라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자 합스부르크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마침내 단안을 내려서 1867년에 헝가리와 이른바 대타협(Ausgleich: Compromise)이라는 것을 타결했다. 외교와 국방등 중요한 사안은 비엔나가 맡지만 헝가리에 대한 일반적인 행정은 독립적으로 집행한다는 내용이었다. 하나의 군주 밑에 두개의 정부가 들어선 셈이었다. 이어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가 다시 연합했다.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국적, 언어, 중교에 상관없이 똑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내용의 법도 마련되었다. 대타협 이후 1차 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까지 헝가리의 산업은 두드러진 발전을 이룩하였다. 헝가리는 아마 세계에서는 처음으로 전기를 사용한 산업을 도입했으며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깃발 아래 농사를 적극 장려하였다. 헝가리에는 이미 세계적인 과학아카데미가 설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전기엔진의 아뇨스 예들리크(Anyos Jedlik), 방사성동위원소 처리의 기요르기 헤베시(Gyorgy Hevesy), 전화교환기의 티바다르 푸스카스(Tivadar Puskas) 등 불멸의 과학자들이 이 시대에 활동했으며 이밖에 문인, 예술가 들이 줄을 지었고 특히 음악에서는 졸탄 코다이(Zoltan Kodaly)와 벨라 바르토크(Bela Bartok)가 헝가리 민족음악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등장하였다.

 

헝가리는 1차 대전에서 말할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인명피해도 극심했고 재산피해도 막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졌다. 1918년 10월 말에 귀족 출신의 좌익인 마히이 카롤리(Mihaly Karolyi)가 이끄는 헝가리국가위원회가 정부를 인수해야 한다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마침내 혁명은 10월 31일 아침 평화스럽게 성공했다. 그리고 헝가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순탄치는 않았다. 소련이 헝가리 동부지역을 문제로 삼고 나왔다. 이렇듯 영토문제가 복잡해지자 정부는 사임하고 대신 프롤레타리아 독재자인 벨라 쿤의 인민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했다. 소련의 비호를 받은 헝가리의 레드 아미는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에게 패배하였다. 소련을 등에 업었던 헝가리공화국은 1919년 8월일에 133일간의 정권 후에 전복되었다. 1차 대전후에 영, 프, 소가 맺은 일종의 우호조약(Entente)에 따라 루마니아 군대가 헝가리를 떠나자 마자 1919년 11월 16일에 해군장교인 미클로스 호르티(Miklos Horty)가 국방군을 이끌고 부다페스트로 진입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처음 열린 국회는 헝가리가 입헌군주국으로 가되 당장은 왕을 두지 않기로 하고 대신 호르티로 하여금 그해 3월 1일부터 섭정을 맡도록 했다.

 

1920년부터 1944년까지 헝가리의 섭정으로 있었던 미클로스 호르티

 

악몽과 같았던 1차 대전은 1920년 6월 4일 베르사이유에 속해 있는 트리아농 건물의 회의실에서 이른바 트리아농 조약이 체결되므로서 전후 헝가리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헝가리 왕국은 영토가 28만 2천 평방 Km에서 9만 3천 평방 Km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인구도 1천 8백만에서 7백 60만으로 줄어들었다. 3백 20만 이상의 헝가리 백성들이 새로 그어진 국경선에 따라 다른 나라에 속하여 살아야 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겠는가? 국가가 이리저리 잘라져 나가고 백성들이 딴 나라 국민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비극 이상이었다. 이때 또 하나의 귀찮은 문제가 생겼다.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왕인 카를 4세가 헝가리의 왕권을 요구하면서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수상인 이스트반 베틀렌(Istvan Bethlen)이 이문제를 잘 처리했다. 그리하여 합스부르크 왕조는 사실상 1921년에 모든 왕권을 포기함으로서 더 이상 헝가리를 괴롭히지 않았다. 1920년대 말에 들어가서 세계는 유례가 없는 경제침체에 빠졌다. 헝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9년에 합병은 깨졌다. 그후 헝가리는 차츰 정치직으로 우익으로 선회하였다. 수상인 기울라 굄뵈스는 차라리 히틀러가 헝가리를 인수하여 헝가리인들의 비탄을 맡아 주기를 바랬다. 그후 칼만 다라니와 벨라 임레디의 정부도 나치제국의 그늘에서 행동하였다.

 

헝가리는 2차 대전 중에 비록 군사적으로 중립을 내세웠지만 일이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헝가리는 독, 이탈리아, 일본의 3국 조약에 따라 2차 대전에 관여해야 했다. 헝가리가 2차 대전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것은 1943년에 돈 벤드(Don Bend)에서 소련의 적군(赤軍)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헝가리는 1944년 3월에 나치 독일에 완전 점령되었다. 그리고 4월부터 유태인들일 게토에 모아놓거나 추방했다. 헝가리는 이제 독일 연맹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섭정인 호로티가 사퇴하고 우익인 장교 페렌크 찰라시(Ferenc Szalasi)가 수상이 되었다. 소련이 개입하여 헝가리를 나치로부터 해방하였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헝가리는 수십년 동안 소련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헝가리는 1945년 1월 20일에 종전협정에 서명했다. 그리고 트리아농 조약을 생각하여 국경을 당시 그대로 유지하기로 확인했다. 또한 전쟁 배상금으로 3억 달라를 지불키로 약정했다. 1946년 1월 31일 국회는 헝가리가 공화국이 된다는 법안을 채택했다. 긔로 2월 1일에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졸탄 틸디(Zoltan Tildy)를 선출했다. 공산단이 소련 군대를 등에 업고 절대권력자로 부상했다. 공산당은 정치적 라이발들을 하나하나 제거했다. 그리고 1947년에 이른바 '푸른 투표'(Blue-ballot) 선거를 통해 완전히 정국을 장악했다. 완전히 사기선거였다.

 

1948년에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함께 등장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시작하였다. 그후 1949년에 사회민주당을 흡수하여 그야말로 일당 독재가 되었다. 종교계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다. 선거는 형식적이었고 소련 형식의 헌법을 만들어 채택하였다. 1956년 10월 23일에 수천명의 군중이 자유선거와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였다. 부다페스트의 거리에서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혁명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반소련 세력은 헝가리가 바르샤바 조약에서 탈퇴하고 소련군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는 선언을 했다. 그때 프랑스와 영국은 수에즈 운하 사건으로 정신이 없었고 미국은 헝가리 사태에 대하여 관여하기를 주저했다. 결국 소련이 탱크를 앞세워서 진입했다. 헝가리 독립전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소련의 보복은 1957년까지 계속되었다.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처형되었다. 헝가리는 그러한 뼈아픈 고통을 겪은후 공산국가로 존재하다가 1989년에 자유의 물결에 따라 헝가리 사회주의노동당은 헤게모니를 포기하였고 동독에서의 공산정권의 붕괴와 함께 헝가리도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1956년, 12살의 헝가리 소년과 그 또래의 소년이 헝가리의 자유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분연히 총을 잡았다. 라이프(LIFE)지를 통해 전세계에 보도되었던 사진. 수많은 백성들이 소련의 무자비한 탱크와 총탄에 희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