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모하츠 전투

트리아농 조약(Treaty of Trianon)

정준극 2014. 3. 26. 16:42

트리아농 조약(Treaty of Trianon)

헝가리 비극의 시작

 

트리아농 조약은 1920년 6월 4일 1차 대전이 끝남과 아울러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의 한 건물인 그랑 트리아농에서 연합국과 헝가리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그래서 트리아농 조약이라고 부른다. 트리아농 조약의 내용에 대하여는 법률 용어를 잘 모르기도 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헝가리도 1차 대전에 대한 책임이 있음으로 연합국에게 배상을 해야 하고 국토를 분할하여 각각 연고국으로 귀속한다는 것이다. 1차 대전이 터졌을 때에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우산 아래에 있었다. 두 나라가 프란츠 요셉 황제 때에 대타협(아우스글라이히)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의 제국이 된 것은 잘 아는 일이다. 새로운 제국은  외교, 국방 등 대외적인 중요 사항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맡고 헝가리 왕국은 국내 통치를 맡도록 2원화하였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에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1차 대전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이므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오스트리아가 져야 하지만 그는 전쟁 중인 1916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직접적으로 책임을 물을 상대가 없게 된 것이다. 그 후임으로 카를이 새로운 황제가 되었지만 전쟁에 진 마당에 아무런 권력도 없었다. 그런데 연합국은 헝가리를 별개의 국가로 간주하여 종전(終戰)에 따른 평화조약을 오스트리아와 체결하고 또한 헝가리와도 별도로 체결하였다. 오스트리아와 체결한 조약이 생 제르망 조약이며 헝가리와 체결한 조약이 트리아농 조약이다. 결과적으로 헝가리만 따져 볼때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으로 국토의 상당부분을 잃었고 경제에 극심한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국민들도 이산가족이 되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물론 군대도 제약을 받았다. 1920년 6월 4일은 헝가리 최대의 국치일이었다.

 

트리아농 건물에서의 회의 장면

 

트리아농 조약 이전의 헝가리와 조약 이후를 헝가리를 비교해보면 헝가리는 무려 국토의 75%를 잃었다.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었다. 헝가리의 땅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가 나누어 가졌고 서쪽의 작은 지역도 오스트리아가 가져갔다. 헝가리 민족은 마쟈르족이다. 트리아농 조약으로 인하여 마쟈르족의 3분의 1이 새로운 헝가리에 살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 속해서 살아야 했다. 약 90만명은 새로운 체코슬로바키아에 살아야 했고 그보다 많은 1백 60만명은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살아야 했다. 그리고 약 42만명은 세르비아에 살아야 했다. 트리아농 조약을 체결하는 회담에 참가한 헝가리 대표들은 같은 민족인데 서로 헤어져서 다른 나라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면서 항의하고 우드로우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서 국민투표를 통해 주민들이 어느 나라에서 살지를 결정하자고 호소했지만 연합국들은 윌슨인지 무언지는 그건 그거고 우리는 모르는 일이므로 국민투표를 하자느니 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윽박을 질렀다. 헝가리로서는 전쟁에서 졌으니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다만,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나중에 소프론(Sopron)의 주민들은 주민투표를 통해서 헝가리에 속하여 있기로 결정했다. 소프론은 독일어로 외덴부르크라고 하는 곳으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지대의 노이지들러제 인근에 걸쳐 있는 도시이다. 트리아농 회담에 참석한 연합국 대표들은 새로운 헝가리의 국민수가 헝가리인 70만, 독일계 55만, 슬로박계 14만으로 구성하면 된다고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결정해 버렸다. 그리고 당시 새로운 헝가리 이외의 지역에 살고 있는 헝가리인들은 1년 내에 자동적으로 헝가리 국적을 상실한다고 정해버렸다.

 

키스쿤할라스에 있는 트리아농 조약 기념비. 국치의 기념비이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내지국가로서 지중해의 어떤 항구와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국가 경제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이었다. 자기 소유의 항구가 없으니 물건 하나라도 수출입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나라 항구를 이용해야 하고 이 경우에 막대한 항구 시용료를 내야한다. 그러니 수출이고 뭐고 속만 상할 지경이다. 철도로 운송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철도도 당장은 문제가 많았다. 전쟁 전에 비하여 전체 철도의 38% 정도만이 사용될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쟁 전에 헝가리는 주요 농산국으로서 곡물의 상당량을 수출했다. 전쟁 후에 헝가리는 전쟁 전에 비하여 30% 정도의 수확밖에 거두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수출을 한다고 해도 운송비와 관세가 막대해서 엄두를 낼 형편이 안되었다. 광물자원만해도 그렇다. 전쟁 전의 헝가리는 철광석을 상당히 생산하여 수출했다. 그러나 새로운 영토를 받아 나라가 작아졌고 과거의 철광석 광산들은 이리저리 분할되어 대개 새로운 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얼마나 억울한지 모를 일이다. 과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재정을 위해 상당히 운영되던 산업체들도 대개 다른 나라로 떨어져 나갔다. 통탄할 노릇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사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비엔나의 은행이나 투자금융회사들은 부다페스트까지 걱정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트리아농 조약이 체결된 이후 비엔나의 은행들은 헝가리에 전쟁 전에 비하여 5%밖에 투자하지 않았다.

 

트리아농 조약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군중들

 

경제가 어렵게 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트리아농 조약은 아주 의도적으로 헝가리의 경제발전을 더디게 만드는데 더 신경을 썼다. 패전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해서 힘이 세어지면 곤란하다는 간단한 이론 때문이었다. 그 이론 때문에 헝가리의 백성들을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헝가리가 2차 대전에서 나치의 편에 설수 밖에 없었던 것도 고용 때문이었다. 일자리를 주겠다고 하니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급하므로 나치를 지지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트리아농 조약 이후 헝가리의 군대도 대 변혁을 겪어야 했다. 전국의 군대는 3만 5천명을 넘으면 안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었다. 북한만 해도 100만 대군을 가지고 있느니 어쩌니 하는데 일국의 군대가 3만 5천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 찬란한 역사의 용맹한 마쟈르국가를 생각해 볼때 기가막힌 일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새로운 헝가리는 내륙국이므로 해군이 필요없다고 규제했고 마찬가지로 공군도 갖지 못하도록 했다. 헝가리 국민들은 트리아농 조약에 대하여 분을 터트리지 않을수 없었다. 조약에 의해 새로운 헝가리 영토에 살아야 하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과거에는 헝가리 백성이었으나 조약에 따라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헝가리인들이 대거 불만을 제기했다. 왜 헝가리만 이처럼 괴로움을 당해야 하느냐는 분노였다. 그리하여 헝가리 내에서는 모든 공공기관이 헝가리 국기를 조기처럼 반기로 게양하여 비통함을 표현했다. 이러한 반기 게양은 무려 1938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던중 다행하게도 뮌헨 조약에 의해 남부 슬로바키아를 헝가리에 돌려주게 되었다. 이 지역에 사는 주민 중에서 85%가 헝가리인이었다.

 

헝가리의 베케스차바(Bekescsaba)에 있는 트리아농 기념비. 길로틴으로 헝가리를 내리찍는 모습이다.

 

1920년의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는 갈래갈래 찟김을 당했다.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가 각각 연고권을 주장하며 영토와 주민들을 나누어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