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모하츠 전투

치게트바르 공성(The Siege of Szigetvar)

정준극 2016. 5. 6. 18:04

치게트바르 공성(The Siege of Szigetvár) - Battle of Szigeth

Szigetvar ostroma(헝가리어), Bitka kod Sigeta(크로아티아어), Zigetvar Kusatmasi(터키어)

크로아티아의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 장군과 병사들의 장열한 전사


치게트바르(Szigetvár)는 헝가리의 남부에 있는 작은 도읍이다. 치게트바르는 전략적인 중요성 때문에 일찍부터 적군의 헝가리 침공을 방어하는 요새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치게트바르에는 대단히 훌륭한 요새가 마련되었다. 치게트바르 공성, 또는 치게트바르 전투는 1566년 술탄 술레이만이 직접 이끄는 오토만 터키군대가 비엔나로 진격하는 중에 치게트바르에서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병사들이 방어하고 있는 치게트바르 요새를 오토만 터키군이 포위하고 거의 한달 동안이나 처절하게 펼친 전투를 말한다. 당시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의 우산 아래에 있었다. 치게트바르 요새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명장인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가 총사령관으로서 오토만 터키군을 방어하였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연합군은 고작 3천이었으나 술레이만의 오토만 터키군은 무려 20만에 가까운 대병력이었다. 니콜라 장군은 치게트바르 요새를 사수하면서 오토만 터키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결국은 중과부적이었다. 치게트바르 요새는 한달이 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오토만 터키군에게 함락을 당하였다. 오토만 터키의 술레이만은 치게트바르 요새가 함락되기 하루 전날 뇌출혈로 사망하여 치게트바르 요새가 함락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합스부르크의 사령관인 니콜라 장군은 요새가 함락되던 날,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치게트바르 전투는 두 위대한 인물이 동시에 세상을 떠난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치게트바르 전투는 16세기 오스트리아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므로 대강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지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치게트바르 요새의 유적지. 성벽은 다시 쌓은 것이고 나무들도 새로 자란 것들이다.


오토만 터키의 술탄인 술레이만은 유럽 정벌에 대한 야심을 잃지 못하고 있었다. 술레이만은 1526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를 점령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서진하였다. 술레이만은 그 전에도 장군들을 보내서 유럽 서진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 먹고 직접 나선 것이다. 비엔나로 가려면 먼저 헝가리를 거쳐야 했다. 오토만 터키의 침공을 받은 헝가리 왕국은 그대로 가만히 있을수 만은 없다고 생각해서 루이 2세(Louis II)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모하츠 평야에서 운명을 건 일전을 치루었다. 미안하게도 헝가리군의 대패였다. 헝가리는 전투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루이 2세가 사망하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이제 잠시 루이 2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무릇 헝가리 등등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루이 2세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헝가리의 루이 2세. 헝가리어로는 라요스(Lajos)라고 부르며 보헤미아에서는 루드비크(Ludvik)라고 부른다. 1516년부터 1526년까지 10년 동안 헝가리왕, 크로아티아왕, 보헤미아왕이었다.


루이(또는 루이스)는 헝가리 야길론(Jagiellon) 왕조의 라디슬라우스 2세의 아들이다. 라디슬라우스의 세번째 부인인 프랑스 푸아 깡달(Foix-Candale)가문의 안느와의 사이에서 1506년에 태어났다. 라디슬라우스는 늦둥이 루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또한 왕비인 안느의 성화에 못이겨서 세살짜리 어린애가 무얼 알겠느냐마는 1509년에 루이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앉혔다. 당시 헝가리는 권세가 강해서 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라디슬라우스는 헝가리왕, 보헤미아왕, 크로아티아왕이라는 세 왕국의 왕을 겸했었는데 아들 루이에게 그 중 하나인 보헤미아왕의 자리를 일단 넘겨준 것이다. 하기야 그렇게 했다고 해서 세살 짜리 루이가 보헤미아를 다스린다는 것은 아니고 아무래도 결국은 라디슬라우스 왕이 관리하는 것이므로 왕국이 분할될리는 없었다. 신임 보헤미아 왕으로서 어린 루이의 대관식은 프라하의 성비투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런데 루이가 10살 때에 아버지인 라디슬라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루이는 비록 어린이에 불과했지만 보헤미아왕 겸 헝가리왕으로 즉위하였다. 이웃인 합스부르크는 루이가 장차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의 왕이 될 것으로 보아서 무슨 조치를 취해야 했다. 오스트리아로서는 항상 위협이 되고 있는 오토만 터키로부터 비엔나를 지키려면 헝가리가 방패막이가 되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헝가리가 중요했던 것이다. 합스부르크는 그렇다고 강제로 헝가리와 보헤미아와 크로아티아를 점령할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혈연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세상에 결혼 등등으로 혈연을 맺는것만큼 좋은 동맹은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대공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는 헝가리의 루이가 어리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루이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므로 헝가리로서는 오스트리아가 아버지의 나라가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양자를 삼고 난 다음해, 즉 1516년에 라디슬라우스가 세상을 떠났고 예상한 대로 루이가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즉위하였던 것이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루이가 어리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워서 신성로마제국의 멤버이며 측근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Brandenburg-Ansbach)의 변경백 게오르게를 루이의 법적인 후견인으로 삼아서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토록 했다. 믹시밀리안 황제는 그래도 나중에 무슨 딴 소리가 나올 것이 걱정되어서 자기의 손녀인 메리와 루이를 결혼시켰다. 그런가하면 루이의 여동생인 안느는 샤를르 5세의 동생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드와 결혼하였다. 얼키고 설킨 결혼작전이었다. 페르디난드는 나중에 페르디난드 1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사람이니 루이로서도 누이동생을 잘 결혼시킨 셈이다. 이렇게 되자 루이의 야겔론 왕조는 차츰 빛을 잃어갔고 반대로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에서 어깨에 힘을 주게 되었다. 그런데 헝가리는 루이 2세의 치하에서 국정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귀족들의 권세가 커지자 루이의 위상은 허약해졌다. 농민들의 봉기도 일어났다. 그것을 귀족들이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했다. 귀족들의 권세가 더욱 커졌다. 루이 2세는 거의 하수아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무엇보다 왕실의 재정이 말이 아니었다. 귀족들이 중간에서 농민들을 착취하는 바람에 왕실로 들어올 세금은 줄어들었다. 반면에 루이의 일족들의 씀씀이는 커져만 갔다. 할수 없이 다른 부유한 가문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써야 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빚이 전체 국가 재정의 3분의 1이나 되었다. 나라의 재정이 궁핍하다보니 국경 수비대에 대한 급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자 병사들이 줄줄이 이탈하였다. 국경 수비가 허약해졌다. 이런 모든 상황을 오토만 터키의 술레이만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술레이만은 헝가리처럼 허약해진 나라를 처들어가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상 누워서 떡 먹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떡이 목에 걸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치게트바르에 있는 헝가리-터키 친선공원. 서로 죽어라고 싸운 사이이지만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와 술레이만의 모습이 나란하 세워져 있다. 헝가리의 치게트바르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가보아야 할 것이다.


술레이만은 헝가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계획대로 당장 헝가리를 정복하지는 못했다. 술레이만은 우선 그리스의 로도스섬(Rhodes)을 포위하려던 계획을 연기해고 대신 베오그라드부터 치기로 했다. 베오그라드를 비롯해서 세르비아의 여러 전략적 요충지들이 술레이만의 손에 떨어졌다. 루이는 술레이만이 헝가리와의 전쟁을 선포했으므로 세르비아를 정복한 후에는 곧장 헝가리로 달려 올 것으로 짐작했다. 루이는 이웃 나라들에게 원조를 요청했으나 이웃 나라들도 오토만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정신이 없으므로 루이의 지원요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베오그라드와 주변의 요새들이 함락된 것은 말하지만 부다를 비룻한 헝가리를 맨발로 들판에 서 있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방패막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술레이만은 로도스를 함락하고 나서 이어 헝가리로 기수를 돌렸다. 루이는 술레이만의 진격을 방어함에 있어서 돌이킬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술레이만의 대군을 모하츠의 평원에서 부딪치기로 한 것이다. 1526년 8월 29일, 드디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모하츠 전투가 시작되었다. 술레이만의 오토만 기병들은 헝가리군을 협공작전으로 포위하여 헝가리군의 중앙에 위치한 기사들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헝가리의 기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중무장을 했기 때문에 오토만 기병들의 번개같은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오토만의 기병대는 유명한 야니사리 소총부대였다. 용감하기로 두번째 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사람들이었다. 또한 오토만은 신기술의 포병으로 헝가리군의 중심부에 맹렬하게 포탄을 퍼부었다. 헝가리군은 넓은 들판에서 그야말로 썩은 무처럼 쓰러져갔다. 


헝가리군은 모하츠 전투에서 거의 전멸하였다. 루이는 퇴각하면서 늪지대에 빠졌다. 루이는 늪에서 무거운 갑옷 때문에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그만 숨지고 말았다. 당시 루이는 19세였다. 루이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신임 왕으로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드를 선출하였다. 하기야 페르디난드는 루이의 매부가 되고 또한 처조부 뻘이 되므로 헝가리와 무관하다고 할수 없었다. 그런데 오토만이 점령한 지역을 대신 통치하고 있던 트란실바니아의 존 자폴랴(John Zapolya)가 자기가 헝가리의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나섰다. 그래서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드와 오토만의 후원을 받고 있는 자폴랴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한판 붙을수 밖에 없었다. 페르디난드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자폴랴를 가만히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1527년에 군대를 이끌로 자폴랴가 점령하고 있던 부다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그러나 자폴랴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오토만이 반격을 하는 바람에 부다를 빼앗겼음은 물론이고 1527년부터 1528년까지 수중에 넣었던 헝가리의 영토들을 모두 오토만에게 넘겨 주어야 했다. 부다를 제압한 오토만의 술레이만은 내친 김에 평소의 희망사항이었던 비엔나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것이 1529년의 일이었다. 오토만의 비엔나 공성은 오토만의 세력이 절정에 있음을 보여주는 거사였다. 실제로 오토만은 세력은 중부 유럽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다. 


모하츠 전투에 참여한 라요스(루이) 국왕


오토만이 비엔나를 공격하기 위해  비엔나를 포위한 1529년으로부터 1552년까지의 20여년을 '작은 전쟁'(Little War)의 시기라고 한다. 합스부르크와 오토만이 밀고 당기는 전투를 수없이 반복하였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었다. 술레이만의 비엔나 공성이 1529년에 실패로 돌아가고 퇴각하자 페르디난드는 당연히 설욕을 위해 반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페르디난드는 1530년에 우선 자폴랴가 차지하고 있는 부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저항이 보통이 아니어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페르디난드가 성공을 거두었다. 예를 들면 도나우 강안의 중요 요새인 그란(Gran: Esztergrom) 등을 잇달아 점령한 것이다. 비록 부다를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요새들을 점령한 것은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성공이었다. 그러자 술레이만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술레이만은 1532년에 12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비엔나를 재차 공격하였다. 그러자 페르디난드는 헝가리의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급히 몰아서 비엔나로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몇몇 요새에는 수비군을 남겨두었다. 그 중에서도 귄스(Guns: Koszeg)요새는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었다. 페르디난드는 어쩔수 없이 귄스에 7백명의 병사를 남겨 놓았다. 대포는 하나도 없었고 총만 몇자루 있는 허술한 수비였다. 다만, 페르디난드의 병사들 이외에 크로아티아에서 올라온 병사들 8백명이 더 있었을 뿐이다. 12만 대군의 오토만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 아침에 점령할수 있는 요새였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하게도 오토만의 장군인 이브라힘 파샤는 귄스를 공격하면서 설마 1천도 안되는 병사가 지키고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귄스에 대한 오토만의 공성이 시작되자 오토만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술레이만 자신이 귄스를 찾아왔다. 귄스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니콜라 주리시츠 장군이 지키고 있었다. 오토만은 25일 동안 대포를 퍼부으며19차례의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때마다 요새의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싸워서 오토만의 군사들을 번번히 물리쳤다. 처절한 전투였다. 오토만으로서는 어서 속히 귄스를 점령해야 했다. 오토만은 귄스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세우고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니콜라 주리시츠 장군은 '내 사전에 항복이란 단어는 없다'면서 거절했다. 오토만은 어쩔수 없이 퇴각할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오토만의 12만 대군이 '우린 더 이상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지 않겠소'라면서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귄스를 그대로 두고 기수를 비엔나로 돌렸던 것이다. 페르디난드로서는 술레이만과 평화협정을 맺어서 오토만을 돌아가게 만들어야 했다. 오토만은 페르디난드에게 자폴랴를 헝가리 왕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다만, 왕이기는 왕이지만 오토만 제국의 총독이나 마찬가지의 신분으로 약화하겠다는 조건이었다. 페르디난드로서는 술레이만의 조건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페르디난드와 자폴랴는 모두 이 협정에 대하여 만족할수 없었다. 두 진영의 군사들은 국경을 가운데 두고 대치하기 시작했다. 얼마후인 1537년 페르디난드는 자폴랴가 점령하고 있는 오시예크(Osijek)를 공격하였다. 평화협정을 위반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오시예크에 대한 공격은 얼마전 모하츠 전투에서 헝가리군이 대패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말로 재앙이었다. 오토만의 지원군이 난데 없이 나타나서 페르디난드의 군대를 여지없이 격퇴한 것이다. 모두들 술레이만이 내친 김에 비엔나를 공격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술레이만은 살짝 진로를 변경해서 이탈리아 남부의 오트란토(Otranto)를 공격한 것이다. 술레이만의 오토만은 1538년에 이탈리아의 프레베자(Preveza) 해전에서 합스부르크 연합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승리를 거두었다. 



오토만 터키의 술탄인 술레이만


헝가리 왕으로 인정을 받은 자폴랴는 그로부터 몇년 후인154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린 아들인 지기스문드 자폴랴 2세가 뒤를 이었다. 헝가리 왕국은 자폴랴 2세가 어리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인 이사벨라가 섭정으로서 다스렸다. 이사벨라도 쟈길론 왕조의 사람이었다. 술레이만은 이사벨라를 계속 지원하였다. 지기스문드는 30년 후인 1570년에 퇴위할 때까지 명목상의 왕으로 남아 있었다. 그후에는 헝가리가 합스부르크의 통치를 받았다. 그건 그렇고, 지기스문드가 퇴위할 때까지 헝가리는 이사벨라의 수완으로 계속 술레이만의 지원을 받아서 페르디난드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들을 하나하나 수복하였고 그러다보니 헝가리의 거의 전부가 오토만의 콘트롤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1566년에 또 하나의 커다란 전투가 벌어졌다. 바로 치게트바르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오토만이 승리하여 결국은 치게트바르를 함락시키고 헝가리 일대에 대한 오토만의 세력을 재확인하였다. 치게트바르 전투는 본 블로그의 다른 항목에서도 다루었지만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복습코자 한다. 술레이만은 1566년으로 오토만 제국을 무려 46년이나 통치하는 기룩을 세웠다. 그때 술레이만의 나이는 72세였다. 그런 그가 평생 소원인 비엔나 점령을 이루고자 이번에는 처음으로 직접 전쟁에 참여하였다. 술레이만은 나이가 나이인지라 들것처럼 생긴 것에 실려서 전선을 다녔다. 그가 참전하면서 모두 13번에 걸친 전투가 있었다. 술레이만은 명목상의 총사령관이었고 실제 전투는 다른 사령관을 두어서 치루게 했다. 술레이만은 1566년 5월 1일에 대군과 함게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떠났다. 그가 치룬 전쟁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원정이었다. 술레이만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49일간 강행군을 한 후에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술레이만은 이곳에서 지기스문드 자폴랴 2세를 만났다. 하기야 지기스문드 자폴랴 2세는 일찍이 술레이만이 헝가리의 세습 왕으로 만들어준 처지이므로 당연히 성문 앞까지 나가서 마중을 해야 했다. 


술레이만은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 백작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니콜라 백작은 명문 즈린스키 가문의 사람으로서 크로아티아의 이름난 영주였다. 니콜라는 오토만의 제1차 비엔나 공성 때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일이 있다. 그 니콜라가 얼마전에는 오토만의 진지인 시클로스(Siklos)를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둔 일이 있다. 때문에 더구나 기억하고 있었다. 술레이만은 니콜라가 치게트바르 요새를 수비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에거(Eger: Erlau)를 공격하려던 원래의 계획을 변경하여 치게트바르를 공략키로 했다. 술레이만은 니콜라를 오토만 원정에 있어서 목의 가시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오토만의 선봉부대가 1566년 8월 2일에 치게트바르에 도착했다. 니콜라가 지휘하는 치게트바르의 군대는 오토만의 선봉부대를 여지없이 무찔렀다. 며칠후에 술레이만이 이끄는 본대의 대군이 치게트바르에 도착했다. 술레이만의 천막은 시밀레호프 언덕 위에 크게 세워졌다. 술레이만은 천막 안에서 쉬면서전투 상황을 실질적인 사령관인 소콜루 메메드 파샤로부터 수시로 보고 받았다. 한편, 치게트바르 요새의 니콜라가 상대방의 병력을 살펴보니 어마어마하게도 15만의 대군이었다. 여기에 오토만군의 특기인 포병이 잔뜩 진을 치고 있었다. 니콜라가 요새에 있는 모든 병력을 집합시켰더니 헝가리군과 크로아티아군을 합쳐서 2천 3백명이었다. 그것도 정규군은 얼마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니콜라의 사병이거나 친구들의 병사들이었다. 아무튼 15만대 2천 3백은 말도 안되는 차이였다. 치게트바르 요새는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요새는 모두 물이 있는 해자(외호)로 둘러싸여 있었다. 세 파트라는 것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그리고 성이었다.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해자가 있고 다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직접적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 요새 내의 다른 마을 들은 모두 점령당했지만 성만은 끝까지 버틸수가 있었다. 


치게트바르 요새를 끝까지 사수하기 위해 돌격을 외치는 니콜라 즈린스키 장군


술레이만이 치게트바르 요새에 도착해서 처음 시찰을 나가보니 성벽에 커다란 붉은 천이 걸려있었다. 마치 적군을 영접하는 깃발과 같았다. 그러더니 대포 한방이 크게 울려퍼졌다. 역전의 용사인 술레이만의 도착을 환영하는 듯한 포성이었다. 치게트바르에 대한 공격은 8월 6일부터 시작되었다. 첫번 공격은 니콜라의 지휘로 무난히 물리칠수 있었다. 니콜라는 비엔나에 급히 연락병을 보내서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비엔나로서도 어쩔수 없었는지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 니콜라는 있는 병력으로 오토만의 대군을 막아내야 했다. 술레이만의 오토만은 거의 한달 동안이나 치열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다. 니콜라측의 병사들도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였지만 술레이만의 손실은 더 엄청났다. 술레이만은 니콜라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면서 오토만 치하의 크로아티아의 군주로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니콜라는 아예 회신을 하지 않고 계속 전투를 독려하였다. 치게트바르의 함락은 사실상 풍전등화와 같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토만은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9월 6일에 술레이만이 진지의 천막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뇌출혈이었다고 한다. 술레이만의 갑작스런 죽음은 극비에 처해졌다. 술탄 술레이만의 최측근만이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만일 술레이만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래서 술레이만의 죽음은 그후 48일간 숨겨져 있었다. 연락병이 콘스탄티노플로 급히 파견되었다. 술레이만의 죽음을 후임 술탄이 되는 셀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연락병조차 서신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고 8일 동안이나 달려 갔다는 것이다. 그만큼 술레이만의 죽음은 철저한 비밀 속에 있어야 했다. 


술레이만이 죽은 다음날인 9월 7일에 오토만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때 쯤해서 치게트바르의 성벽은 그동안 지뢰와 포격으로 거의 모두 허물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소총을 쏘다가 나중에는 대포를 퍼붓는 공격이었다. 이와 함께 나무에 불을 붙여서 던졌다. 곧이어 치게트바르의 마지막 보루인 성이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니콜라는 오토만의 공격을 최대한으로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오토만 군이 다리를 건너서 성문을 깨트리려고 몰려오자 대기하고 있던 니콜라의 병사들이 갑자기 성문을 열고 박격포를 쏘아서 거의 6백명이나 되는 오토만 병사들을 쓰러트렸다. 그후 니콜라는 직접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나머지 병사들을 독려하여 적군에게 돌격하였다. 니콜라는 오토만 병사들이 쏜 소총 탄환을 가슴에 두방이나 맞았고 이어 화살이 머리를 관통하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지자 마자 그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오토만 병사들은 즉시 반격하여 성내로 진입하였고 퇴각하는 니콜라의 병사들을 모두 살육하였다. 나머지 병사들 중에서 몇 명은 오토만의 야니세리 병사들에게 생포되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야니세리 병사들은 니콜라의 병사들의 용맹을 감탄하여서 살려주었다. 오토만의 포위를 뚫고 성을 요행히 빠져나간 병사들은 일곱 명에 불과했다. 니콜라의 시신은 머리가 참수되었고 참수된 머리는 새로운 술탄인 셀림에게 보내졌다. 그리고 니콜라의 몸은 포로로 잡혀 있던 오토만 병사들이 정중하게 장례를 치루어주었다. 전투 중에 포로로 잡혀 온 오토만 병사들은 니콜라로부터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모두들 니콜라를 존경하였다. 


니콜라가 성문을 갑자기 활짝 열고 돌격하여 수많은 오토만 병사들을 무찌르는 장면


니콜라는 성문을 열고 최후의 돌격을 하기 전에 부하들에게 성의 지하에 폭약을 설치해서 터트리도록 명령했다. 오토만 병사들이 수비군들을 모두 물리치고 성 안에 발을 들여 놓자 대기하고 있던 마지막 병사가 폭약에 불을 붙였다. 성이 무너지는 바람에 3천명의 오토만 병사들도 함께 묻혔다. 오토만군의 실질적인 사령관인 이브라힘은 성에 있던 어떤 사람에게 보물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성안의 지하 저장고에 있다고 대답했다. 지하 저장고에는 부비 트랩이 설치되어 있어서 들어가는 즉시 폭약이 터지도록 되어 있었다. 이브라힘은 그 사람의 말을 반대로 해석해서 폭약이 있다고 판단하여 몇몇 부하들과 함께 즉시 말을 돌려 성안으로부터 빠져 나왔다. 그러나 일반 병사들은 보물이 있다는 말에 현혹이 되어 지하 저장고로 몰려갔고 부비트랩을 건드리는 바람에 폭약이 터져서 수천명이 죽음을 당했다. 지하 저장고에 보물이 있다고 알려준 사람은 니콜라 백작의 가족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치게트바르 요새가 함락되므로서 니콜라 휘하의 2천 3백 병사들이 거의 모두 전사했다. 한편, 오토만은 세명의 파샤와 7천명의 야니세리 병사들과 2만 8천명의 일반 병사들이 전사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로 약 3만 5천의 오토만 병사들이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한달여만의 전투가 끝난후 사령관인 이브라힘은 포탄들을 모아서 녹인후에 술탄의 이름으로 승리를 선포하는 명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술탄 술레이만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서 전투를 완전히 수행할수 없었다는 얘기도 덧 붙였다. 술레이만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다. 술레이만의 신하들은 마치 술레이만이 살아 있는 듯이 천막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을 매일 연출했다. 술레이만의 시신은 열흘이 지나서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술레이만이 세상을 떠난 후 약 3주 동안 그의 사망 소식이 정식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혹시 그 기간 안에라도 사망 소식이 새어날 것 같아서 술레이만의 주치의도 입막음 하기 위해 목을 졸라 죽였다. 술레이만의 사망은 짐작컨대 장기간에 걸친 여행과 전투의 실패로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술탄 술레이만의 죽음으로 더 이상 서진하려는 작전은 취소되었다. 사령관인 이브라힘 자신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서 셀림 2세의 대관식에 참여해야 했다. 그나저나 술레이만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더 이상의 서진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겨울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니콜라 장군에 의한 치게트바르의 방어가 한달 이상이나 지속됨으로서 결국은 오토만의 비엔나 공략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는 셀림 2세의 즉위를 계기로 특사를 파견했다. 특사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셀림 2세의 환대를 받았다. 그리하여 특사가 파견된지 5개월 후인 1568년 2월에 오스트리아와 오토만 제국간에 종전을 위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를 아드리아노플 조약(The Treaty of Adrianople)이라고 부른다. 합스부르크는 25년간의 휴전을 요청했지만 셀림 2세는 8년간의 휴건을 승락했다. 또한 협정에 따라 막시밀리안은 매년 3만 두카의 금액을 제공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치게트바르(헝가리의 치게트)


치게트바르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예술에서도 여러 형태로 서술되었다. 크로아티아의 르네상스 시인이며 작가인 브르네 카르나루티츠(Brne Karnarutic)는 1573년 이전에 '치게트 정복'(The Conquest of the City of Sziget)을 썼다. 그의 이 작품은 1584년 베니스에서 출판되었다. '치게트 정복'은 크로아티아 역사에서 치게트바르 전투를 대서사시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작가인 카르나루티츠는 이 작품을 완성함에 있어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딧(Judith)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유딧에 대한 이야기는 크로아티아의 마르코 마루리츠가 '유딧'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로서 널리 알려진 것이다. 치게트바르의 영웅인 니콜라의 증손자로서 니콜라스 즈린 7세라는 사람이 있었다. 시인이었다. 그가 쓴 헝가리의 대서사시 '치게트의 멸망'(Peril of Sziget)은 치게트바르의 전투를 불멸의 사건으로 남아 있게 만든 것이었다. 니콜라스 즈린 7세는 이 서사시를 1647년에 썼으며 출판되기는 1651년이었다. 이 작품 역시 헝가리 문학에 있어서 최초의 서사시로 간주되고 있다. 이 작품 또한 마르코 마루리츠(Marko Marulic)의 '유딧'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케네스 클라크의 역사서인 '문명'(Civilisation)은 치게트바르 전투를 문학작품의 소재로 사용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문명'은 17세기 유럽 문학을 상징하는 대표작이다.  일반적으로 치게트바르 전투를 소재로 삼아 서사시 또는 소설을 쓴 시인와 작가들은 터키인을 잔혹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고 그리고 비난하였다. 니콜라 즈린스키 가문 출신의 사람으로서 시인과 작가들은 특히 그러했다. 그러나 터키인들을 일부러 악마처럼 그리지 않은 작품들도 있다. 케네스 클라크의 '문명'는 터키인들을 인간적인 면에서 그렸다. 예를 들어서 타타르의 델리만과 술탄 술레이만의 아름다운 딸인 쿠밀라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터키인을 악마처럼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크로아티아의 용맹한 전사이면서 시인인 라바오 비테초비츠(Pavao Vitezovic: 1652-1713)도 치게트바르 전투에 대서사시를 남겼다. 그의 서사시인 '잘 있거라 치게트'(Odilijenje sigetsko)는 니콜라 즈린스키를 짓밟은 오토만 터키인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다. 이 서사시의 마지막 파트에는 '묘비'(Tombstone)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치게트바르 전투에서 산화한 크로아티아 병사들과 터키 병사들에 대하여 애도를 표현하는 파트이다. 전사한 양쪽 병사들을 공평하게 추모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반 자이츠의 1876년도 오페라인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는 대단히 유명한 작품으로 아작까지도 크로아티아 국민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차지하고 있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크로아티아 병사들의 합창인 '우 보이, 우 보이'(싸우러 가자, 싸우러 가자)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애국적인 노래로서 크로아티아 국민으로서 만일 이 노래를 모른다면 말이 안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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