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죄수(Il prigionier superbo) - The Proud Prisoner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의 3막 오페라
'하녀 마님'을 막간에 공연하여 대인기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라고 하면 옛날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나온 이탈리아 노래 '니나'(Nina: Tre giorno son che Nina)가 우선 생각난다. 페르골레지에 대하여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성모애상'(Stabat Mater)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오페라를 애호하는 사람이라면 18세기 이탈리아의 코믹 오페라의 모델이라고 하는 '하녀 마님'(La serva padrona)의 작곡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감동과 함께 일종의 존경심을 가질 것이다. 페르골레지는 참으로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작곡가이다. 그는 불과 2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보통 위대한 음악가 중에서 요절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우선 모차르트부터 생각한다. 모차르트는 35세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생각하는 작곡가로서 모차르트보다 더 일찍 세상을 떠난 위대한 작곡가들이 더러 있다. 슈베르트는 불과 31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벨리니는 34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수많은 뛰어난 작품들을 남긴 페르골레지는 불과 26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하늘도 무심하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신앙심이 돈독한 페르골레지는 주로 종교음악을 남겼다. 그의 '성모애상'(Stabat Mater)은 여러 작곡가들에 의한 '성모애상'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페르골레지는 오페라도 여러 편 남겼다. 가장 유명한 오페라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코믹 오페라의 대명사라고 할수 있는 '하녀 마님'이다. '하녀 마님'은 영리하고 재치있는 하녀 세르피나가 우여곡절 끝에 돈많은 주인 영감과 결혼하여 하루 아침에 하녀의 신분에서 주인 마님이 되었음은 물론 구두쇠 남편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서 돈을 쓰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쓰면서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18세기 초반의 사회 형편으로 볼 때에 '하녀 마님'은 서민 대중들로부터 대단한 박수를 받았다. 말하자면 서민들의 스트레스 해소용의 오페라였다. 어찌나 인기가 많았던지 이탈리아의 순회오페라단이 프랑스 등 인근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하녀 마님'을 공연하여 박수도 많이 받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런데 그 '하녀 마님' 때문에 프랑스에서 난리가 났었다. 1733년에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초연된 '하녀 마님'은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1752년에 이탈리아의 어떤 순회오페라단에 의해 파리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코믹 오페라이기 때문에 관례에 의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의 순수 오페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너무 판을 치자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결국은 장 바티스트 륄리, 또는 장 필립 라모가 만든 프랑스의 순수 오페라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탈리아의 코믹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오페라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래야 한다는데 대한 논장이었다. 프랑스의 순수 오페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진짜 오페라는 오페라 세리아(순수오페라)이므로 다른 스타일의 오페라는 별 볼일도 없거니와 그런 것은 만들면 안된다는 견해였다. 이탈리아의 코믹 오페라(오페라 부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페라라는 것은 웃고 즐기자는 것인데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신인지 뭔지 하는 존재들이 맨날 울고 짜는 것만 보아야 하느냐면서 오페라 세리아를 반대하였다. 아무튼 이들의 논쟁을 '부퐁 논쟁'(Querelle des Buffons: quarrel of the comic actors)라고 불렀다. 부퐁이라는 단어는 코믹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말한다. 그런데 밥먹고 별로 할 일도 없었던 프랑스의 프랑스 오페라 지지자들과 이탈리아 오페라 지지자들간의 논쟁은 실상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왕당파와 왕정타파를 외치는 부류간의 논쟁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본 블로그의 다른 항목에서 소개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거니와 그래도 한마디만 더 한다면 페르골레지의 '하녀마님'이라는 코믹 오페라가 프랑스의 혁명을 앞당기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로스메네
페르골레지의 오페라 세리아인 '자랑스러운 죄수'를 소개코자 하는 마당에 '하녀 마님'에 대한 이야기로 너무 많은 지면을 차지했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하지만 '하녀 마님'을 소개한 이유는 이 오페라가 '자랑스러운 죄수'의 공연 중간에 관객들이 심심하지 말라고 막간으로 공연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관객들의 기분전환을 위해서 막간에 다른 오페라를 간단히 공연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그런 막간공연작품을 인터메쪼(Intermezzo)라고 불렀다. '자랑스러운 죄수'는 3막이나 되는 비교적 긴 작품이므로 혹시 관객들이 지루하게 생각할지 모르므로 2막이 끝나고 3막이 시작되기 전에 단막의 코믹한 '하녀 마님'을 공연한 것이다. 그런데 미리 말하는 사항이지만 개평과 같은 '하녀 마님'이 본 공연작품인 '자랑스러운 죄수' 보다도 더 인기를 끌어서 그 후로는 '하녀 마님'을 단독으로 공연하게끔 되었으니 그것도 기록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 인기최고의 '하녀 마님'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졌고 이어 다른나라에까지 수출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탈리아 순회공연단이 파리를 위시하여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며 공연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른바 '부퐁 논쟁'이라는 것이 일어나서 난리도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사족이지만 '부퐁 논쟁'(또는 '부퐁 전쟁'이라고 할만큼 격렬한 논쟁이었음)은 프랑스 전역에서 2년 동안 지속되었다.
'자랑스러운 죄수'
'자랑스러운 죄수'는 1733년 9월 5일 나폴리의 테아트로 산 바르톨로메오에서 초연되었다. 대본은 제나로 안토니오 페데리코(Gennaro Antonio Federico)가 썼다고 하는데 그는 프란체스코 실바니(Francesco Silvani)라는 대본가가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Francesco Gasparini: 1668-1727)의 1704년도 오페라인 La fede tradita e vendicata(배반 당한 믿음, 사실이 밝혀지다)를 위해 쓴 대본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프란체스코 실바니는 당대에 뛰어난 재능의 대본가로서 그의 La fede tradita e vendicata 대본으로 안토니오 비발디와 안토니오 비오니(Antonio Bioni: 1698-1739)가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만든 일이 있다. 다시 '자랑스러운 죄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오페라는 페르골레지가 작곡한 오페라 세리아로서는 두번째의 것으로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샤를르 6세의 황비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Empress Elisabeth Christine: 1691-1750)의 42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페르골레지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그리하여 1733년 9월 5일에 나폴리에서 기념공연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나폴리에서 샤를르 6세 황비의 생일 축하 공연을 가지게 된 것은 당시 나폴리 왕국도 스페인왕위계승전쟁(1701-1714)의 여파로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6세의 관할 아래에 들어가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비는 샤를르 6세와의 사이에 세 딸을 두었다. 큰 딸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이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로레인의 스테픈 프란시스와 결혼하여 생산한 자녀 중에서 열다섯번째가 유명한 마리 앙뚜아네트이다. 더구나 '자랑스러운 죄수'와 '하녀 마님'이 2본 동시로 나폴리에서 1733년에 공연하게 된 것은 그 전해인 1732년 11월에 나폴리 일대에 지진이 닥쳐와서 나폴리에 있는 극장들도 상당수가 파손되었으나 이듬해인 1733년에 복구되어 재개관하게 되었기에 그것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당시 19세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나폴리 지진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1733년 9월에 나폴리를 방문했으므로 '자랑스러운 죄수'는 그러한 계기를 위해 공연되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가 테아트로 산 바르톨로메오에서 이들 오페라를 관람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비. 페르골레지의 오페라 '자랑스러운 죄수'는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위촉된 작품이다.
'자랑스러운 죄수'는 나폴리 초연 이후 이탈리아에서 몇차례 더 공연이 있었느나 그후 이탈리아 사람들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에 대한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 때문에 더 이상 공연되지 못하고 책장 속에 묻혀 있게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제적인 오스트리아의 군주 역할을 할 때에 이탈리아의 밀라노공국, 만투아공국, 파르마공국, 피아첸차공국, 과스탈라공국이 모두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등에 업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우산 아래에 있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과 이탈리아의 통일을 바라던 당시의 이탈리아로서는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관련된 오페라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 번 보다가 그냥 책장 속에 넣어둔 것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 첫 공연은 나폴리 초연으로부터 무려 260여년이 지난 1997년 9월 이탈리아 제시(Jesi)에 있는 테아트로 페르골레지에서였다. 다만, 스코어는 페르골레지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마르첼로 파니(Marcello Panni)라는 사람이 수정한 것을 사용했다. 그 다음에 공연된 것은 2009년 9월 역시 테아트로 페르골레지에서였다. 이번에도 오리지널 스코어를 클라우디오 토스카니(Claudio Toscani)라는 사람이 수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리바이발 때에 오케스트라의 악기는 18세기 초반의 악기들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자랑스러운 죄수'의 무대
'자랑스러운 죄수'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고트족의 왕 메탈체(Metalce: Cont), 노르웨이의 왕 소스트라테(Sostrate: T), 소스트라테 왕의 딸인 로스메네(Rosmene: Cont) 공주, 덴마크의 왕자인 비리다테(Viridate: S castrato), 노르웨이 왕국 첫 군주인 클레아르코 왕의 딸 에리클레아(Ericlea: S), 에리클레아를 사랑하는 보헤미아의 왕자 미치스다(Micisda: S) 등이다. 위에서 보는 대로 남자 역할들을 여성이 맡았다. 고트족의 왕도 콘트랄토가 맡도록 했고 덴마크 왕자인 비리다테도 소프라노 카스트라토가 맡도록 했으며 보헤미아의 왕자 미치스다도 소프라노가 맡도록 했다. 당시에는 소프라노 또는 콘트랄토가 남아 돌아가서였을까? 스토리는 대단히 복잡다단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트족의 왕인 메탈체는 자기의 권세를 강화하기 위해 라이발인 노르웨이 왕 소스트라테를 갑자기 공격하여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다. 이와 함께 메탈체는 소스트라테의 아름다운 딸인 로스메네 공주를 사랑을 차지하려고 한다. 로스메네틑 아버지인 소스트라테 왕처럼 자존심이 강하고 남에게 굽힐줄 모르는 여자이다. 로스메네는 폭군 메탈체의 청혼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랑스러운 죄수'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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