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냐디 라츨로(Hunyadi László) - 라츨로 후냐디(László Hunyadi)
헝가리 국민오페라의 아버지 에르켈 페렌츠의 대표작
헝가리의 국민적 영웅 야노스 후냐디의 사랑과 애국 이야기
'후냐디 라츨로'의 피날레 장면
에르켈 페렌츠(Erkel Ferenc: 1810-1893)는 헝가리 낳은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이다. (그의 이름은 영어식으로는 페렌츠 에르켈이지만 헝가리식으로는 에르켈 페렌츠이다. 헝가리는 이름을 쓸 때에 우리나라처럼 성(姓)을 앞에 두고 이름을 나중에 쓴다. 그래서 후냐디 라츨로도 헝가리식으로는 라츨로 후냐디라고 써야 한다.) 에르켈은 10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그중에서 '방크 반'(Bánk bán)과 '라츨로 후냐디'(László Hunyadi)는 헝가리의 오페라 연혁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다. 라츨로 후냐디(1431-1457)는 헝가리의 위대한 정치가 겸 군인의 이름이다. 그는 헝가리의 위대한 애국자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헝가리가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 속에서 위대한 국가로서 다시 태어날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준 인물이다. 위대한 에르켈 페렌츠가 위대한 라츨로 후냐디를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를 작곡했으니 위대한 작품이 아닐수 없다. 전체 4막의 '라츨로 후냐디'는 공연 시간이 약 2시간 10분이다. 베르디와 푸치니에 귀가 익어 있던 우리로서는 헝가리의 오페라를 제대로 감상할 기회가 없어서 모르고 지내왔다. 어떤 사람들은 헝가리에서 무슨 훌륭한 오페라가 나오겠느냐고 만만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한번 듣고 두번 듣고 보니 너무나 좋은 음악이었다. 아름답고 활기에 넘친 음악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작품이었다. 에르켈의 음악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헝가리의 민속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페어분코스(verbunkos)라고 불리는 무곡을 사용한 것이 그렇다.
가라 백작이 딸 마리아에게 라츨로 후냐디와의 결혼을 파기하고 왕과 결혼하라고 설득하고 있다.
'라츨로 후냐디'는 에르켈 페렌츠의 두번째 오페라이다. 1843년에 완성되어 이듬해인 1844년 1월 27일 부다페스트의 페스티 넴체티 마쟈르 친하즈(Pesti Nemzeti Magyar Szinház: Hungarian Theatre of
Pest: 페스트 헝가리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말로 표현할수 없는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1844년이면 오스트리아가 제국이 되어 페르디난트 1세가 황제로 있던 때였다. 페르디난트 1세를 뒤를 이은 프란츠 요셉 1세는 1848년에 황제가 되어 1916년까지 무려 68년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통치했다. 오페라 '라츨로 후냐디'의 대본은 헝가리의 작곡가 겸 대본가 겸 배우인 베니 에그레시(Béni Egressy: 1814-1851)가 썼다. 원작은 뢰린츠 토드(Lörinc Tóth)가 쓴 극본이다. 대표적인 아리아는 마리아가 부르는 Nagy eg 라는 곡이다. La Grange 아리아라고 부르기도 하는 곡이다. 에르켈 페렌츠가 이 아리아를 소프라노 안느 라 그레인지(Anne La Grange)를 위해 썼기 때문이다. 헝가리 출신의 소프라노 실비아 사스(Sylvia Sass)가 부른 것도 뛰어나지만 1907년에 미국의 드라마틱 소프라노인 릴리안 노르디카(Lillian Nordica)가 부른 것이 아직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헝가리 출신의 미클로사 에리카(Miklosa Erika)가 부른 것도 있다.
1840년대의 페스트 헝가리 극장. '라츨로 후냐디'는 이 극장에서 1844년에 초연되었다.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라츨로 5세(V. László: T) - 헝가리의 왕(라디슬라우스 5세)
- 에르체베트 칠라지(Szilágyi Erzsébet: S) - 야노스 후냐디의 미망인
- 라츨로 후냐디(László Hunyadi: T) - 야노스 후냐디의 아들
- 마티아스 후냐디(Mátyás Hunyadi: MS) - 라츨로 후냐디의 동생
- 미클로스 가라(Gara Miklós: B) - 팔라틴 백작(count palatine: 자기 영토 안에서 왕권의 일부를 행사할 수 있었던 중세의 영주)
- 마리아(Gara Mária: S) - 팔라틴 백작의 딸
- 울리크 실레이(Cillei Ulrik: Bar) - 섭정
- 로츠고니(Rozgonyi: Bar) - 장교
마리아와 라츨로 후냐디의 약혼
스토리는 1456-57년에 헝가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바탕을 둔 것이다. 오토만 터키의 침공으로부터 헝가리를 지켜낸 위대한 장군 야노스 후냐디가 세상을 떠나자 권력은 평소 그가 죽기만을 기다리던 그의 적들에게 넘어간다. 새로 왕이 된 라츨로 5세는 심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어느덧 주변에는 간신배들만이 진을 치게 된다. 간신배들은 왕에게 야노스의 아들들을 죽여서 후환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야노스의 큰 아들인 라츨로 후냐디는 헝가리 군대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다행히 라츨로 후냐디의 측근들이 그에게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미리 경고를 하여 피신함으로서 목숨을 보전한다. 음모가 성사가 되지 않자 왕은 라츨로 후냐디와 그의 동생인 마티아스 후냐디와 우정을 다짐하며 유화정책을 쓴다. 왕으로서는 아직도 세상 떠난 야노스 후냐디를 따르는 인물들이 많으므로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왕이 의외로 친근하게 접근하자 야노스 후냐디의 미망인인 에르체베트는 저러면서 실은 두 아들의 목숨을 노릴 것 같아서 말할수 없이 근심한다. 그런데 왕은 라츨로 후냐디의 약혼녀인 마리아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왕은 마리아의 아버지인 가라 팔라틴 백작에게 마리아가 라츨로 후냐디 대신에 자기와 결혼 할수 있게 해 달라고 설득한다. 팔라틴 백작은 왕에게 라츨로 후냐디가 살아 있는 한 마리아가 왕과 결혼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왕은 마침내 라츨로 후냐디를 수색하여 체포한후 감옥에 가두고 반역죄를 뒤집어 씌어서 사형에 처하고자 한다. 마리아가 라츨로 후냐디의 석방을 위해 아버지 백작에게 간청하고 왕에게도 간청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침내 병사들이 라츨로 후냐디를 사형장으로 끌고온다. 라츨로 후냐디의 목은 사형집행인이 네번째 내려처서야 겨우 자를 수가 있었다.
페어분코스 춤을 추는 사람들
******************
라츨로 후냐디의 아버지인 야노스 후냐디는 원래 트란실바니아의 총독이었으며 나중에는 헝가리 왕국의 섭정을 지낸 인물이다. [라츨로(László)는 라틴어인 라디슬라우스(Ladislaus)의 헝가리식 표기이다.] 야노스 후냐디는 오토만 터키가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 용감하 맞서서 싸워 그들이 헝가리의 영토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도록 한 구국의 영웅이다. 야노스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 아들이 라츨로이고 둘째 아들이 마티아스이다. 마티아스는 훗날 헝가리의 왕이 된다. 큰아들 라츨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투의 현장을 따라 다녔다. 그러다보니 전략에도 유능하게 되고 전투에도 용감하게 되어 장병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저 유명한 1448년의 코소보전투에는 17세의 젊은 나이로 참가하여 커다란 전공을 세워서 장교로서 인정을 받는다. 그후 한때 헝가리 군대를 떠나서 지낸 일이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 대신에 세르비아 군의 총사령관인 게오르게 브란코비치의 볼모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라츨로 후냐디는 아버지 야노스에게 있어서 귀중한 아들이었다.
라츨로 후냐디 초상화
라츨로는 정치적으로도 헝가리를 위해서 많은 헌신을 했다. 1452년에는 21세의 청년 장교로서 헝가리 사절단을 인솔하고 비엔나에 가서 섭정왕인 프레데릭 5세로부터 새로 즉위하는 헝가리 왕인 라디슬라우스 5세에 대한 지지를 약속받기도 했다. 그같은 공적으로 인하여 라츨로는 이미 1453년에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영주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라디슬라우스 왕의 섭정으로 있는 울리크가 특별히 그러했다. 울리크는 다른 궁신들과 음모를 꾸며 라츨로 후냐디를 반역으로 몰았다. 그리하여 라츨로는 1455년에 헝가리 의회에서 모든 공직을 벗어버리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라디슬라우스 왕으로서 라츨로 후냐디를 무조건 내칠수는 없었다. 얼마후 왕은 라츨로 후냐디에게 화해의 제스추어를 보낸다. 그리하여 라츨로 후냐디는 왕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마리아와 정혼할수 있게 된다. 마리아는 역시 팔라틴인 가라 라츨로의 딸이다.
1456년에 야노스 후냐디가 50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그러자 야노스의 정적인 울리크가 다시 일어나서 이번에는 라츨로 후냐디를 탄핵하여 제거코자 한다. 울리히의 주장은 야노스가 헝가리 왕실에 막대한 금액의 빚을 지고 있으니 갚으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후냐디 가문은 빚을 갚기 위해 모든 재산을 처분해도 턱없이 부족하므로 결국 멸문이 되어야 할 입장이다. 라츨로는 1456년 10월에 열린 헝가리 의회에서 울리크의 주장을 당당하게 반박하여 울리크로부터 사과를 받아냈다. 이에 울리크는 라츨로 후냐디와 거짓으로 화해를 한다. 다만, 화해의 조건으로 후냐디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성과 영토를 왕실에 헌납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라츨로 후냐디로서는 그것만저 거부하겠다고 주장할 형편이 아니었다. 라츨로 후냐디는 첫번째 조치로서 현재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 있는 난도르페에르바르 요새를 포기하였다. 라츨로 후냐디는 그 요새의 사령관이었고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라츨로 후냐디는 휘하 병사들은 물론 용병들까지도 모두 해산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같은 조치가 있는 다음날 아침, 라츨로 후냐디의 부하들이 섭정 울리크를 암살하였다. 어떤 상황에서 암살 당하였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다. 라츨로 후냐디는 울리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군마 담당이 되어 봉사하기 시작했다. 라츨로 후냐디는 1457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라디슬라우스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까지 헝가리 군대의 군마 담당이었다.
야노스 후냐디
라츨로 후냐디가 모든 직위를 버리고 스스로 군마 담당이 되자 라디슬라우스 왕은 크게 당황한다. 아직도 많은 장병들이 라츨로 후냐디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며 백성들도 라츨로 후냐디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디슬라우스 왕은 라츨로 후냐디의 어머니인 에르체베트를 테메스바르(Temesvár)에서 만나 앞으로 후냐디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한다. 라디슬라우스 왕은 그런 약속의 일환으로 라츨로 후냐디를 왕실의 재정책임자로 임명하고 아울러 헝가리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라츨로 후냐디는 왕의 그런 조치를 아무런 악의가 없는 것으로 믿고 받아 들인다. 그리하여 다음날 왕을 수행하여 부다(Buda)로 떠난다. 그러나 라디슬라우스 왕은 부다에 도착하자마자 근위병들을 시켜서 라츨로 후냐디를 반역죄로 체포토록 한다. 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라츨로 후냐디는 미리 준비된 각본에 따라 별다른 법적 절차도 생략된채 사형선고를 받는다. 라츨로 후냐디는 다음 날인 1457년 3월 16일에 참수되었다. 라츨로 후냐디는 헝가리가 새로 태어나기 전에 죽었지만 그는 헝가리가 새로운 나라로 일어서는데 밑거름의 역할을 하였다.
라츨로 후냐디가 모든 직위를 버리고 군마 담당으로 떠나려 하자 휘하 장병들이 못내 섭섭해 하고 있는 장면
á ó é
'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 > 화제의 30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르카단테의 '두 명의 피가로' - 108 (0) | 2014.05.13 |
---|---|
막스 리히터의 '숨'(SUM) - 107 (0) | 2014.05.09 |
아울리스 살리넨의 '레드 라인' - 105 (0) | 2014.05.08 |
스튜워트 월레이스의 '접골사의 딸' - 104 (0) | 2014.05.07 |
로리 레이트맨의 '주홍글씨' - 103 (0) | 2014.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