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SUM) - 나는 존재한다(I am)
막스 리히터의 실내 오페라
미국 신경과학자 데이빗 이글맨의 베스트 셀러 바탕
독일 출신 영국 작곡가인 막스 리히터
'숨'(SUM)이라는 오페라가 있다. 실은 오페라인지 현대 발레 작품인지, 또는 현대적 실험 드라마인지 확실치 않지만 음악을 맡은 막스 리히터(Max Richter: 1966-)가 실내 오페라라고 규정하였으므로 그런 줄 알고 있는 작품이다. '숨'(sum)이라고 하니까 '합계'라는 뜻인줄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은 라틴어로 '나는 존재한다'는 뜻의 sum 이다. 우리가 잘 아는 Cogito ergo sum(코기토 에르고 숨: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라는 말에 나오는 바로 그 sum 이다. 이 오페라의 플롯은 미국의 신경과학자 겸 작가인 데이빗 이글맨(David Eagleman: 1971-)이 쓴 '숨: 사후의 40가지 이야기'(Sum: Forty Tales from the Afterlives)를 바탕으로 했다. 책의 제목이 너무 길기 때문에 오페라에서는 간단히 '숨'(Sum)이라고만 했다. 2009년에 나온 데이빗 이글맨의 이 책은 베스트 셀러였다. 어찌나 인기를 끌었던지 23개 언어로 번역되었을 정도였다. 이 책의 내용은 제목이 보여주듯 사람이 세상을 떠난후 다음 세상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40가지 이야기로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오페라에서는 40가지 이야기를 다 소화할수 없으므로 그 중에서 12가지 이야기만을 선별해서 스토리를 꾸몄다. 죽은 후의 삶에서 무슨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에 경험했던 모든 것을 다시 경험한다는 것이다. 다만, 경험했던 일들을 유형별로 묶어서 한꺼번에 경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 살면서 매일 몇 시간씩 잠을 잤던 것을 죽은 후의 삶에서는 그렇게 잠을 잤던 시간을 모아서 한꺼번에 잠을 잔다는 것이며 또 다른 일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별 일도 다 있다. 별 일이야 소설이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지만 그걸 오페라로 만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별 일이다.
원작자인 데이빗 이글맨. 현재느 베일러의과대학(Baylor College of Medicine)에서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오페라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발레에 더욱 가깝다. 현대 발레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안무는 영국의 세계적인 현대 무용 안무가인 웨인 맥그레거(Wayne McGregor)가 맡았다. 웨인 맥그레거는 실험적 무용으로 명성이 높은 사람이다. 그는 전부터 작곡가인 막스 리히터와 여러번 협동하여 일을 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별로 어려움 없이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 실험적 안무를 창안하는 무용가와 실험적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가 만났으니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누구도 짐작하기 어렵다. 그저 모두 처음 시도하는 실험적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런데 웨인 맥그레거는 지금까지 여러 작품의 안무를 맡았지만 실내 오페라의 안무는 '숨'이 처음이다. 조명이나 무대 설치 등을 맡은 사람들도 영국에서는 내노라하는 실험적 예술가들이다. 실내 오페라(Chamber opera)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출연하지 않는다. 그저 너댓명이 나올 뿐이다. 그런데 오페라이면서도 성악가들이 노래를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대사가 음악보다 더 중요시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숨'을 오페라라기 보다는 '종합극장'(Total theater)라고 불렀다. 여기서 극장(theater)이라는 말은 건물이 아니라 공연예술의 한 장르를 말한다. 실내 오페라 '숨'은 2012년 5월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있는 린베리 스튜디오에서 초연을 가졌다.
현대무용 안무가인 웨인 맥그레거
데이빗 이글맨의 오리지널 소설의 오프닝을 소개코자 한다. 별 내용도 아니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죽은 후에 살아 있을 때의 경험을 다시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들을 그룹별로 새로운 순서로 만들었다. 2개월은 집 앞의 거리에서 운전하느라고 소비한다. 섹스와 관련하여서는 무려 7개월을 보낸다. 눈을 뜨지 않고 잠을 자는 것은 30년이나 된다. 화장실에 앉아서 잡지를 뒤적이는 시간은 5개월이다. 평생동안 건강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아팠던 경우가 있으므로 그것도 한꺼번에 아프기로 한다. 전체가 27시간이다. 뼈가 부러지고 상처가 생기는 등의 아픈 것도 포함한다. 그리고 여성이라면 출산의 고통도 포함된다. 이렇게 한꺼번에 아프고 나면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아픈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평생을 지낼수 있으니 따지고 보면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다고 정말로 아픈 시간을 제외한 모든 세월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67일은 슬퍼하고 비탄에 빠져시 지낸다. 손톱을 깎는 시간은 평생에서 6일에 해당한다. 무얼 사기 위해서 또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은 평생에서 18개월이나 된다. 무얼 잃어버리고 찾느라고 애쓰는 시간은 평생에서 15개월이나 된다. 2년이라는 세월은 심심하게 보낸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할일 없이 밖을 내다본다든지 공항 터미널에서 연결편 비행기를 기다리는 한심한 시간들을 합산해 보면 그렇다. 평생에서 책을 읽는 시간은 1년이 된다. 별로 많은 것도 아니다. 샤워하는 시간은 200일에 해당한다. 사후의 세계에서 200 시간이나 마라톤 샤워를 한다면 끔찍한 일이기는 하다. 흥미 있는 것은 평생에서 2주 동안은 '내가 죽은 후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것을 생각하느라고 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77시간은 정신이 혼란스런 입장에서 보낸다. 또한 한 시간은 남의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으로 보낸다.
3주는 '이러면 안되는데'라며 자기가 잘못 했다는 생각으로 보낸다. 거짓말 한 시간은 전체가 2일 정도가 된다. 6주는 건너가는 길 앞에서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며 보낸다. 7시간은 구역질을 하면서 보낸다.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은 평생에서 14분이다. 3개월은 세탁을 하면서 보낸다. 15시간은 글을 쓴다든지 서류에 서명을 하면서 지낸다. 서실상 서명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많다. 크레딧 카드를 사용하고 나서 서명하는 것도 포함된다. 2일은 구두끈을 매느라고 보낸다. 식당에서 팁을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은 토털 3일이다. 무슨 옷을 입을까라고 주저하는 시간은 무려 51일이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다든지 또는 무슨 연설을 들을 때에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척하며 보내는 시간은 9일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살면서 돈을 세는 경우가 많다. 평생에서 2주간은 돈을 세느라고 보낸다. 18일은 냉장고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살펴보느라고 소비한다. 34일은 누구를 기다리느라고 보낸다. TV에서 광고를 보는 시간은 합계 6개월이다. 4주간은 무얼 골똘히 생각하느라고 보낸다. 주로 자기가 어떻게 하면 시간을 유용하게 보낼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보낸다. 평생에서 3년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느라고 보낸다. 음식 먹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지만 보통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5일은 단추를 잘못 채워서 다시 채운다든지 지퍼가 잘 안되어서 다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보낸다. 그리고 4분간은 평생에서 했던 일을 그룹별로 나누어서 한꺼번에 하도록 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며 보낸다. 결국 평생을 통해 잠 잘 것을 한꺼번에 자고, 먹을 것을 한꺼번에 먹는 등은 말도 안되는 일이며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대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축복을 받는 일인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운데의 사각형 피트에 연주자들이 들어가 있고 사방의 벽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서 콤퓨터 그래픽에 의한 형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란베리 스튜디오에 설치한 공연장소의 구성도 특이하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지하에 있는 공연 공간이다. 우선 지정 좌석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앉으면 곤란하다. 안내하는 사람들이 이쪽에 앉으세요, 저쪽에 앉으세요라며 대충 구역을 안내해 준다. 그곳의 아무데나 앉으면 되지만 앞에 있는 의자 세개는 예약되어 있어서 앉으면 안된다. 의자들은 마치 권투 경기장처럼 가운데의 사각형 연주자석을 두고 사방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방의 벽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서 공연 중에 콤퓨터 그래픽에 의한 형상들이 끊임 없이 투사되고 있다. 스크린은 가제와 같은 천으로 되어 있다. 아무튼 일반적인 무대라는 것이 없다. 관중들은 앉아 있으라는 대로 앉아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다렸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런데 잠시후에 관객들이나 마찬가지로 평상복을 입은 사람 셋이서 마치 늦게 와서 미안한듯 문을 열고 들어와서 바로 예약되어 있는 그 세 자리에 앉는다. 불이 꺼지더니 잠시후에 다시 들어온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연기가 마치 짙은 구름처럼 펼쳐 있다. 그동안에 연기만드는 기계로 연기를 뿜어냈던 것이다. 드디어 악기가 연주된다. 마치 몸 속의 뼈다로 떨게 만들 정도의 베이스 음향이다. 무겁고 깊숙한 소리이다. 관중들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꺼내고자 하는 소리와 같았다. 하프가 연주되고 날카롭고 차가운 감각의 전자악기도 연주된다. 조명이 세 명의 예약석 사람들만을 비춘다. 그 중의 한명이 깊은 바리톤 소리로 무어라고 소리친다. 소리친다기 보다는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바리톤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는 바리톤이 옆에 없는 듯이 관심을 두지 않고 행동한다. 시선도 멀리에만 고정하고 있다.
관중석에 앉아 있던 성악가가 일어나서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른다. 또 다른 여성 성악가도 돌아다닌다.
사방의 벽에 설치되어 있는 스크린에는 처음에는 콤퓨터 그래픽이 나오더니 그후부터는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모습, 기차역, 복잡한 거리, 끝없이 이어지는 줄, 타래처럼 꼬여진 실들, 지도, 사람들의 얼굴, 수학기호들, 그리고 수많은 리듬기호들이 나온다. 1940년대 초반에 페르난드 레거와 맨 레이 또는 한스 리히터의 영화장면을 보는 듯하다. 성악가들은 데이빗 이글맨의 스토리에서 일부들을 발췌하여 노래한다. 어떤 때는 혼자서 노래를 부르지만 또 어떤 때는 셋이서 함께 부르기도 한다. 노래라기 보다는 대사를 읊는 것 같고 무슨 지시를 하는 것 같다. 다음 스토리는 우리가 살아 있을 때의 시간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어떤 행동을 얼마 동안 했는지 리스트를 만드는 일이다. 소프라노는 우리가 30년을 자면서 보냈는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는지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소프라노는 2년 동안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며 지냈고 14일간은 순수한 기쁨을 누리며 지냈다는 얘기도 한다. 다른 여자도 '14일간 순수한 기쁨을 누리며'라는 노래를 함께 부른다. 처음에는 뭐가 무언지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으나 조금 지나니까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지 알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 초연에 참석했던 어떤 관중의 얘기이다.
공연장. 가운데에 사각형의 연주자들 자리가 있을 뿐, 다른 무대는 없다.
세 명의 성악가들은 빈 공간을 이러저리 돌아다닌다. 의자가 놓여 있는 줄 사이로도 왔다갔다 한다. 빈자리가 있으니까 잠시 앉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다니면서 사람들을 붙잡기도 한다. 관중들과의 상호작용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관중들과의 대화를 그런 식으로 모색한 것이다. 작은 공간에 있는 관중들이나 출연자들은 모두 하나의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성악가들이 아무 관중이나 그 옆에 앉아서 자기들의 얘기를 들려주거나 또는 노래를 부를 때에는 관중들이 당황하는 눈치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무대와 객석이 엄연히 분리되어 있어서 관중들은 그저 관람만 하면 되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아서 당황하고 어색해하는 편이다. 공연이 마무리가 될 즈음에는 성악가들이 사이드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어디론가 사라진다. 갑자기 스크린에는 두명의 댄서들이 꽉차게 비쳐진다. 이제부터 웨인 맥그레거의 안무에 의한 춤이다. 두 댄서들은 서로의 몸을 끊임없이 교차시킨다. 두 댄서들이 한참이나 이상하리만치 특이한 몸짓으로 춤을 춘 후에 성악가들이 다시 나타나서 관객들과 어울린다. 성악가들은 하얀 작은 봉투들을 들고 와서 관객들에게 나누어 준다. 관중들 중에서 봉투를 받은 사람들이 궁금해서 열어보니 그 안에는 오리지널 소설에서 발췌한 스토리가 메모지에 프린트 되어 들어 있다. 아무튼 특이한 연출법이었다. 각자가 받은 메모지의 내용은 서로 다르다. 관객들은 다른 사람의 메모지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기 궁금해서 기웃거린다. 그것도 연출의 일부분이었다.
막스 리히터와 웨인 맥그레거의 합작인 '숨'은 이른바 '제3의 문화'(Third Culture)의 전형적인 예이다. '제3의 문화'라는 것은 과학과 예술의 경계가 점치 모호해 지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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