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에피소드

이국적 배경의 오페라 총정리 - 2

정준극 2014. 6. 25. 09:25

이국적 배경의 오페라 총정리 - 2

남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 북부, 그리고 아메리카를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들

 

 

○ 스리랑카(세일론)

 

오페라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남성 듀엣을 꼽아 보라고 하면 아마 비제(George Bizet: 1838-1875)의 오페라 '진주잡이'(Les pêcheurs de perles)에 나오는 테너-바리톤 듀엣인 '성스러운 사원에서'(Au fond du temple saint)일 것이다. 일명 '진주잡이의 듀엣'(The Fishermen's Duel)이라는 곡이다. 스리 랑카(세일론)의 어떤 어촌에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추르가와 나디르 두 진주잡이 사나이가 우정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비제의 '진주잡이'는 원래 무대를 멕시코로 삼으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어쩐 일인지 스리 랑카로 바뀌게 되었다. 아마 동양에 대한 신비함을 더하기 위해서인듯 하다. '진주잡이'가 1863년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되었을 때 비제는 겨우 25세의 청년이었다. 남부 아시아를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 중에서는 '진주잡이'가 세계 무대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다.

 

비제의 '진주잡이'. 추르가는 레일라와 친구 나디르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추르가도 레일라를 깊이 사랑했었다.

 

○ 티벳

 

미국의 피터 리버슨(Peter Lieberson)이 1991년에 완성했지만 2013년 9월에 가서야 캘리포니아의 롱비치에 있는 공원에서 초연을 가진 '게사르 왕'(King Gesar)은 티벳이 무대이다. 게사르 왕은 고대 티벳의 전설에 등장하는 용감한 전사이며 링 왕국의 왕이다. 그는 이 세상에 악마와 마귀들이 권세를 잡고 인간들을 노예로 부리자 하늘나라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서 악마와 마귀들을 물리치고 서로 갈라져 있던 왕국들을 통일하여  티벳을 만들었다고 한다. 게사르 왕의 생애에 대한 대서사시는 티벳의 고전일 뿐만 아니라 세계 문화 유산이다. 리버슨은 일찍이 '아쇼카의 꿈'을 만들어서 신비한 불교철학을 소개코자 하였으며 그의 두번째 오페라가 '게사르 왕'이다. 리버슨은 일찍이 티벳 불교에 심취한바 있다.

 

피터 리버슨의 '게사르 왕'. 리버슨은 이 오페라를 캠프화이어 오페라라고 불렀다.

 

○ 인도

 

인도를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는 여러 편이 있다. 라크메(들리브), 아쇼카의 꿈(리버슨), 사비트리(홀스트), 그리고 그림자 없는 부인(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이 대표적이다. 프랑스의 레오 들리브(Léo Delibes: 1836-1891)의 '라크메'(Lakme)는 무대가 19세기 중반의 인도이다. 인도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다. 라크메는 아름다운 인도 처녀의 이름이다. 브라만의 고승인 닐라칸타의 딸이다. 브라만은 인도 4성계급의 최상위로서 승려 계급을 말한다. 라크메에는 오페라 듀엣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하는 Vien, Mallika, dome epais, le jasmin(보라, 말리카, 자스민으로 덮힌 돔을)이 나온다. 라크메와 하녀 밀리카가 부르는 듀엣으로 '꽃의 2중창'이라고 부르는 곡이다. 그것보다 더 유명하고 더 아름다운 곡이 나온다. 라크메가 시장거리에서 종을 딸랑거리면서 부르는 Ou va la jeune indoue(젊은 인도 여인은 어디로 갔는가?)이다.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곡이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정수이다. 오페라 아리아 중에서 가장 어려운 아리아의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오페라 '라크메'는 인도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장교 제랄드와 라크메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것이다.

 

레오 들리브의 '라크메'

 

뉴욕 출신의 피터 리버슨(Peter Lieberson: 1946-2011)의 '아쇼카의 꿈'(Ashoka's Dream)은 인도의 왕 아쇼카에 대한 얘기를 담은 오페라이다. 아쇼카(Ashoka Maurya)는 BC 3세기경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이루 군주이다. 그리하여 인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아쇼카의 제국은 현재 인도의 거의 전지역은 물론,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의 일부까지 세력을 뻗친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아쇼카는 무력에 의한 전쟁의 비참함을 깊이 통탄하여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와 관용과 인내의 정치를 실현코자 했다. 그리하여 곳곳에 절을 짓고 불교를 정리하였으며 스리 랑카, 태국, 버마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총애하던 왕비를 잃고 고독과 번민 속에서 지내다가 새상을 떠났다. 그는 사후에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

 

피터 리버슨의 '아쇼카의 꿈'

 

영국의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Holst: 1874-1934)의 오페라 '사비트리'(Savitri)는 힌두교 사상에 의한 내용이다. 사비트리는 나무꾼 사티야반의 아내이다. 사비트리와 사티야반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인도 서사시집인 마하바라타(Mahabharata)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느날 사비트리는 죽음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죽음은 사비트리의 남편 사티야반을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 사티야반은 절망에 빠져 있는 아내 사비트리에게 두려움은 환상(마야)에 불과하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죽음이 사티야반을 찾아오자 몸에서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 그 자리에 쓰러진다. 사비트리 절망 중에 있으면서도 혼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사비트리의 따듯한 환영에 감동하여 사티야반을 되돌려 보내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티야반이 깨어난다. 죽음에서 깨어난 사티야반은 '죽음은 환상이야'라고 말한다.

 

홀스트의 '사비트리'. 죽음이 사비트리의 남편 사티야반을 데리러 왔으나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정으로 맞아 들이는 사비트리의 마음에 감동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부인'(Frau ohne Schatten)은 이해하기 힘든 신화이다. 음악도 이해하기 힘들다. 무대는 태평양에 있는 어떤 섬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인도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는 아니다. 다만, 나중에 이 섬나라의 황제의 부인이 되는 여인이 인도의 왕 케이코바드의 딸이라는 인연이 있을 뿐이다. 어느날 이 섬나라의 왕이 매사냥을 갔다가 영양 한 마리를 잡아오는데 영양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고 왕은 그 여인과 결혼한다. 여인은 실은 정령들의 왕 케이코바드의 딸로서 그림자가 없다. 그래서 아이를 잉태할 수 없다. 정령들의 왕 케이코바드는 사자를 섬나라에 보내어 왕비가 열두 밤 안에 그림자를 얻지 못하면 정령의 나라로 불러들일 것이며 황제는 돌로 변할 것이라고 전한다. 바그너 스타일의 라이트모티브가 무던히도 얽혀 있는 가운데 오케스트라는 계속해서 앞으로의 일을 암시한다. 왕비가 다른 백성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자기 그림자를 찾아야 한다는 허황된 꿈을 후회하는 장면이 이 오페라의 하이라이트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부인'. 왕비 역의 카렌 후프슈토트(Karen Huffstodt). 1997 제네비 그랑 테아터. 왕비는 우주에 살고 있는 존재이므로 음성도 초인간적이고 우주적이어야 한다. 바그너의 브륀힐데와 같은 압도적인 음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쥘르 마스네의 '라호르의 왕'(Le roi de Lahore)도 인도가 배경이다. 라호느는 지금은 파키스탄 제2의 도시이며 편잡지방의 주도이지만 예전에는 인도에 속해 있으면서도 독립왕국이었다. 그러다가 무슬림이 점령하게 되어 옛 무굴제국의 수도로서 영화를 떨쳤었다. 그래서 '라호르의 왕'이라고 하니까 파키스탄이 배경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오페라의 스토리가 진행될 당시에는 라호르가 인도의 영향을 받고 있는 독립왕국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 오페라는 19세기초, 프랑스 사람들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이 팽배해 지고 있을 때에 나온 작품이다. 동양의 신비성, 이국적인 장면,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는 힌두교의 얘기등이 얽혀서 흥미를 갖게 하는 작품이다. 라호르 왕국의 젊은 왕인 알림은 인드라 사원의 아름다운 여사제 나이르(시타)와 사랑에 빠진다. 나이르는 여사제로서 순결한 처녀로 살기로 서약했지만 알림 왕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억제할수 없다. 알림 왕의 수석 보좌관인 신디아 역시 아름다운 여사제 나이르를 한번 보고 깊은 정념에 사로잡힌다. 알림 왕과 나이르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신디아는 나이르를 만나 사랑을 고백한다. 나이르는 당연히 냉담하게 거절한다. 그리하여 나이르에 대한 신디아의 정념은 증오로 변한다. 신디아는 부하들과 함께 알림을 왕좌에서 축출하고 대신 왕이 된다. 알림은 전쟁터에서 중상을 입고 결국 나이르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다. 그러나 인드라 신이 알림을 불쌍하게 여겨서 세상에 환생시켜준다. 알림이 살아 돌아온 것을 본 신디아는 백성들에게 알림은 유령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신디아로부터 결혼 협박을 이겨내지 못한 나이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인드라 신은 알림을 다시 혼령으로 만든다. 알림과 나이르는 인드라의 낙원에서 재회한다. '라호르의 왕'은 1877년 파리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되었다.  

 

마스네의 '라호르의 왕'에서 시타와 알림

 

○ 이락(바벨론)

 

독일의 페터 코르넬리우스(Peter Cornelius: 1824-1874)가 '바그다드의 이발사'(Der Barbier von Bagdad)라는 오페라를 만든 것이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 한 편을 바탕으로 작곡자 자신이 대본을 썼다. 1858년 바이마르에서의 초연은 프란츠 리스츠가 직접 지휘하고 무대 감독을 맡은 것이었다. 바그다드의 판사인 바바 무스타파에게는 마르지아나라는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다. 바바 무스타파가 어찌나 과잉보호를 하는지 뭇 남자들이 얼씬도 하지 못한다. 부자이면서 핸섬한 누레딘이 우연히 마르지아나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하지만 접근할수가 없어서 상사병에 걸린다. 여기에 바그다드의 이발사인 아부들 하싼이 감초처럼 등장한다. 옥신각신, 우여곡절 끝에 누레딘과 마르지아나가 태수의 축복 속에 결혼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코르넬리우스의 '바그다드의 이발사'. 벅스턴 페스티발에서.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은 현재의 이락에 있었다고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시나르 왕국에 있었다는 것이다. 바벨탑을 세운 사람은 시나르 왕국의 님로드 왕이었다고 한다. 님로드는 노아의 증손자이며 함(Ham)의 손자가 된다. 바벨이라는 말은 '신의 문'(Gate of God)이란 뜻이라고 한다.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를 러시아의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 1829-1894)이 2막의 오페라로 만들었다. 루빈슈타인의 '바벨 탑'(Der Thurm zu Babel)은 1870년 독일의 쾨니히스버그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루빈슈타인은 이 오페라를 종교 오페라(Geistliche Oper: Sacred Opera)라고 불렀다. 님로드 왕은 하늘에 닿을수 있는 높은 탑을 짓기로 한다. 아브라함이 님로드를 크게 책망하자 분노한 님로드는 아브라함을 타오르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도록 한다. 사람들이 탑을 거의 완성하고 바알신을 찬양하자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탑을 부셔버린다. 님로드와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진다. 천사와 악마들이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는 내용이다. 루빈슈타인은 이밖에도 종교오페라로서 '마카베우스', '그리스도'를 작곡했다.

 

피에터 브뤼겔(아버지)의 '바벨탑'.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소장.

 

로시니의 '세미라미데'(Semiramide)도 이락(바빌로니아)를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이다. 1823년 베니스의 라 페니체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에서 타이틀 롤은 카탈라니아 출신으로 바로 전 해에 로시니와 결혼한 소프라노 이사벨라 콜브란이 세미라미데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대본은 볼테르의 '세미라미스의 비극'(La tragédie de Sémiramis)를 바탕으로 했다. 세미라미데는 주전 2천녕 경 바빌론의 니노 왕이 서거하자 왕비로서 제국의 후계자를 결정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이 오페라에는 아시리아군 사령관인 아르사체도 나오고 인도왕 이드레노도 나온다. 그리고 무대에는 바알 신전과 바빌론 궁전, 그리고 전설적인 바빌론의 공중정원도 등장한다.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그랜드 오페라이다. '세미라미데'는 로시니의 마지막 이탈리아 오페라이다. 그후 로시니는 프랑스로 가서 지내며 파리의 관중들을 위한 오페라를 작곡하다가 홀연히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여생을 즐겼다.

 

로시니의 '세미라미데'. 1994 로시니 페스티발

              

○ 이란(페르시아)

 

현재의 이란은 과거에 페르시아(파사)라고 불렀으며 한 때는 아시리아(앗수르) 제국에 속하기도 했다.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는 의외로 많이 있다. 페르시아는 이스라엘과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동방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왕래가 많았기 때문인듯 싶다.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페르시아 여왕 팔미라'(Palmira, regina di Persia: 1795)를 작곡했고 헨델은 '페르시아 왕 시로에'(Siroe, re di Persia: 1728), 그리고 크세르크세스 1세에 대한 이야기인 '세르세(Serse: 1738)을 작했다. 프란체스코 카발리가 '페르시아 공주 스타티라'(Statira principessa di Persia)를, 휴고 웨이스갈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에스더'를, 그리고 영국의 아서 설리반은 '페르시아의 장미'(The Rose of Persia)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한스 베르너 헨체의 '후푸새와 효행의 승리'(L'Upupa und der Triumph der Sohnesliebe: The Hoopoe and the Triumph of Filial Love)라는 오페라도 페르시아가 배경이다. 그리고 독일의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가 오라토리오 '페르시아에서 해방된 유대민족'(La Liberatrice del Popolo Giudaico nella Persia: 또는 L’Esther : 1773)을 작곡했다. 이 오라토리오는 간혹 무대에서 오페라처럼 의상을 입고 연기를 가미하여 공연되기도 한닫.

 

페르시아의 스타티라 공주가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고 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는 비엔나에 있으면서 10여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삼은 '팔미라'이다. 이 오페라는 코믹한 요소와 영웅적인 요소를 혼합한 것으로 역시 군주의 영광을 찬양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795년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고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에게는 어여쁜 팔미라 공주가 있다. 괴물이 팔미라 공주를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한다. 팔미라를 아내로 삼겠다는 것이다. 다리우스 왕은 누구든지 괴물을 물리치는 사람이 공주와 결혼할수 있다고 세상에 공포한다. 이에 이집트 왕 알데라노, 스키티아 왕 오론테, 인도 왕 알치도로가 과감하게 괴물과 싸워 죽이겠다고 나선다. 결과는? 잘 모르겠다. 조지 프리데릭 헨델의 오페라 '페르시아 왕 시로에'는 1728년 런던의 킹스테아터와 독일 브라운슈봐이크에서 동시 공연되었는데 그후 어찌된 일인지 스코어가 분실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거의 2백년이 지난 1925년에 독일의 게라(Gera)에서 스코어가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된 작품이다. 시로에(또는 Kavadh 2세, Sheroya) 기원후 약 6백년경 페르시아의 사산조 왕으로서 부왕에게 반기를 들어 부왕을 축출하고 왕좌를 차지한 인물이다. 헨델의 오페라는 시로에(시로에스)가 왕좌를 차지하기 까지의 음모와 갈등, 그리고 사랑을 다룬 것이다.

 

헨델의 또 다른 걸작 오페라인 '세르세'는 기원전 약 5백년에 페르시아를 통치했던 세르세 대왕(크레스크세스: Xerxes: 아하수에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1738년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헨델은 세르세를 카스트라토를 위해 작곡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메조소프라노가 맡는다. 이 오페라의 1막에 나오는 세르세의 아리아 Ombra mai fu(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라르고(Largo)라는 빠르기 지시가 있으므로 보통 '라르고'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곡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세르세 대왕은 우연히 로밀다를 보고 마음에 흡족하여 왕비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로밀다는 세르세의 동생인 아르사메네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여기에 로밀다의 여동생인 아탈란타도 아르사메네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세르세 대왕에게는 아마스트레라는 정혼자가 있다. 아마스트레는 세르세가 로밀다 때문에 자기를 기피하자 남장을 하고 세르세에게 접근하여 세르세를 설득하여 마음을 돌려보고자 한다. 이런 저런 과정을 보면 이건 마치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튼 결론은, 세르세가 약혼녀인 아마스트레를 버리고 로밀다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을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아마스트레는 세르세가 제안하는 왕비의 자리를 거절한다. 그리고 물론 로밀다는 아르사메네와 결혼한다.

 

헨델의 '세르세'. 베를린 코미셰 오퍼

 

구약성경 '에스더'에 나오는 파사(페르시아)제국의 에스더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미국의 휴고 웨이스갈(Hugo Weisgall: 1912-1997)이 3막 오페라로 만들었다. 1993년 10월에 뉴욕시티오페라가 초연했다. '에스더'는 유태여인 에스더가 파사제국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의 왕비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총리대신 하만이 유태인들을 몰살하려는 음모를 사전에 차단하고 사악한 하만을 징계하는 영웅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에스더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인하여 파사제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그후로도 오래도록 안전하게 살수 있었다. 유태인들은 에스더에 의한 유태인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부림절(Purim)을 경축하고 있다. 에스더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들은 과거에 더러 있었다. 웨이스갈은 팔레스트리나, 헨델, 다리우스 미요와 함께 에스더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이다.

 

웨이스갈의 '에스더'. 유대소녀 에스더는 파사제국의 아하수에로의 마음에 들어 왕비가 되었고 그로 인하여 파사제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대량학살되는 것을 미리 막았다.

 

사보이 오페라로 유명한 영국의 아서 설리반이 이번에는 전통의 콤비인 윌리엄 길버트의 대본 대신에 베이실 후드(Basil Hood)의 대본으로 '페르샤의 장미'(The Rose of Persia)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1899년 사보이극장에서 초연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부제는 The Story Teller and the Slave(이야기꾼과 노예)이다. 부자인 하산은 페르시아에서의 안락하고 평온한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 그에게는 무려 25명의 부인이 있다. 하산은 숫자를 잘 못 세는 바람에 26번째 부인을 필요없다고 나가라고 해서 25명의 부인을 거느리게 되었다. 하산은 손님 대접하기를 좋아한다. 떠돌이 이야기꾼인 유수프가 알바 꺼리가 없을까하고 하산의 집을 찾아온다. 술탄의 여자 노예중에서 네명이 심심하기도 하고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서 변장을 하고 거리에 나왔다가 유수프와 일행이 되어 하산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네 명의 여자 노예 중에 '만발한 장미'(Rose-in-Bloom)는 실은 술탄이 가장 총애하는 부인이다. 그리고 '마음의 욕망'(Heart's Desire)는 가장 예쁜데 유수프를 만나자마자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래서 이런 저런 재미난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이 '페르시아의 장미'이다.

 

독일의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 1926-2012)가 작곡한 '후푸새와 효행의 승리'(L'Upupa und der Triumph der Sohnesliebe)는 오페라의 장르에서 동화오페라로 구분되는 작품이다. 페르시아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이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지체 높은 사람(아마 총리대신 정도)이 매일 자기에게 놀러오는 후푸새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만지려 하자 그 다음부터는 찾아 오지 않는다. 그래서 세 아들에게 어서 가서 후푸새를 찾아 오라고 명령한다. 두 아들은 핑게만 대고 찾으러 가지 않지만 막내 아들은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후푸새를 찾으며며 게다가 아름다운 아가씨(실은 공주)도 만나 함께 아버지에게 돌아와 축복을 받는다는 얘기이다. 아버지는 셋째 아들에게 어서 공주와 결혼하라고 재촉하지만 셋째 아들은 또 무엇을 찾으로 가야 한다면서 다음에 결혼하겠다며 떠난다. 사람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는지 또 다시 궁금증을 갖게 해준다. '후푸새와 효행의 승리'는 2003년 8월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베를린의 도이치 오퍼와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레알이 공동 제작하였다.

 

헨체의 '후푸새와 효행의 승리'의 한 장면

 

○ 터키

 

터키의 음악은 15세기 이후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페라에서도 터키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들이 더러 있고 또는 터키 풍의 음악을 인용한 작품들도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가 있고 로시니의 '마오메토 2세'(Maometto secondo)가 있다. 로시니는 '이탈리아의 터키인'(Il turco in Italia)라는 오페라도 작곡했지만 이 오페라는 제목만 그렇지 실은 배경이 이탈리아의 나폴리이다. 다만, 터키 사람들이 나폴리까지 와서 겪는 모험과 사랑과 사건들이 내용이기 때문에 흥미를 던져 줄 뿐이다. 하이든은 1775년에 L'incontro improvviso(우연한 만남)이라는 오페라를 남겼다. 내용은 '후궁에서의 도주'와 비슷하여서 크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는 모차르트가 요제프 2세 황제의 부탁을 받고 작곡한 독일어 대본의 오페라이다. 시기는 18세기이며 장소는 터키에 있는 파샤의 저택이다. 파샤는 터키정부의 고위 관리를 말한다. 콘스탄체와 콘스탄체의 영국인 하녀인 블론드는 배를 타고 어디를 가다가 터키 해적에게 납치되어서 파샤의 하렘에 팔려간 신세이다. 콘스탄체의 약혼자인 벨몬트가 하인 페드리요와 함께 콘스탄체를 구출하기 위해 터키로 간다. 파샤의 저택에는 파샤의 경호대장과 같은 오스민이 있어서 하렘의 여인들도 감시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벨몬트와 하인도 오스민에게 잡혔는데 나중에 파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벨몬트 일행을 석방했으며 그리하여 콘스탄체와 블론드도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오페라에는 당시 비엔나 사회에서 유행하던 터키풍의 의상과 음악과 춤이 풍성하게 등장하므로 우선 눈요기로서도 훌륭한 작품이다. '후궁에서의 도주'는 1782년 비엔나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모차르트가 청운의 뜻을 품고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에 온지 1년 후의 일이다. 그때 모차르트는 26세의 청년이었다.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 파샤의 하렘

                 

로시니의 '마오메토 세콘도'는 원작이 바이런 경의 The Siege of Corinth(고린트 공성)이다. 이 작품을 이탈리아의 안나 에리초(Anna Erizo)가 산문극본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페라 대본이 만들어진 것이다. '마오메토 2세'는 1820년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로시니는 나중에 '마오메토 2세'를 로시니는 마오메토2세를 Le siege de Corinthe(코린트 공성)이라는 타이틀로 개작하였다. 수정본의 ‘코린트 공성’에서는 네그로폰테를 그리스로 옮겼다. 그리스독립전쟁 당시의 환경을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오메토2세'가 나폴리에서 처음 공연될 때에는 터키군이 베니스를 침공하여 함락시키는 내용으로 되어있었으나 그후 베니스에서 공연될 때에는 베니스군사들이 터키군을 몰아내고 승리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해피엔딩을 보여주었다. 이 오페라의 시기는 1476년이며 장소는 베니스공국의 식민지인 네그로폰테이다. 1476년은 역사적으로 네그로폰테가 터키의 침공을 받아 함락된 해이다. 베니스공국의 총독인 파올로 에리쏘는 아름다운 딸 안나가 베니스군의 칼보장군과 결혼하기를 바란다. 칼보장군은 터키의 침공에 대비하여 베니스공국을 지킬  용감한 장수이다. 그러나 안나는 코린트에서 만난 우베르토라는 늠름한 사람을 사랑한다. 나중에 우베르토는 터키의 마오메토2세 왕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안나는 고국에 대한 의무와 사랑사이에서 갈등한다. 터키는 베니스공국의 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안나는 의무를 위해 칼보장군과 결혼한다. 곧이어 터키가 네그로폰테를 노도와 같이 침공하여 함락시키자 안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는 내용이다.

 

로시니의 '마오메토 2세'. 마오메토 2세가 고린도를 점령한 후 죽어가고 있는 안나를 붙들고 슬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