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디바와 디보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프리마 돈나들 - 1

정준극 2014. 6. 30. 08:49

오페라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프리마 돈나들 - 1

초연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당대의 성악가들

33편의 스탠다드 오페라를 중심으로...영원히 기억될 이름들

 

 

○ Aida(아이다) - 아이다(Aida)

베르디의 '아이다'는 1871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카이로의 케다이브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그때 타이틀 롤인 아이다는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의 소프라노인 안토니에타 아나스타시 포쪼니(Antonietta Anastasi-Pozzoni: 1846-1914)가 맡았다. 포쪼니는 1864년 밀라노에서 로시니의 '젤미라'를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할 때에 젤미라를 맡아서 오페라계에 데뷔하였고 그후 파우스트, 라 화보리타, 모세와 바로, 구글리엘모 텔(귀욤 텔) 등에 출연하여 오페라 소프라노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한 사람이다.

 

아이다의 이미지를 창조한 안토니에타 포쪼니

 

○ La Bohème(라 보엠) - 미미(Mimi)

푸치니의 '라 보엠'은 1896년 2월 1일 토리노(튜린)의 테아트로 레지오(왕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푸치니와 절친한 젊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를 맡았다. 프리마 돈나인 미미는 토리노 출신의 소프라노 체시라 페라니(Cesira Ferrani: 1863-1943)가 맡았다. 체시라 페라니는 미미의 이미지를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푸치니의 또 다른 걸작인 '마농 레스코'의 초연에서도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하여 세계의 오페라사에 이름을 남겼다. 체시라 페라니가 오페라 무대에 처음 데뷔한 것은 1887년 토리노에서 '카르멘'의 미카엘라를 맡은 것이었다. '라 보엠'의 미미와 '마농 레스코'의 타이틀 롤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그는 이후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하면서 오페라에 출연하였고 나중에는 프랑스에서도 활동했다.

 

미미의 이미지를 창조한 체시라 페라니

 

○ Carmen(카르멘) - 카르멘(Carmen)

비제의 '카르멘'은 파리 오페라 코미크에서 1875년 3월 3일 초연되었다. 초연에서의 카르멘 역할은 보통 갈리 마리라고 불리는 메조소프라노 셀레스탱 갈리 마리(Celestine Galli-Marie)가 맡았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15세 때에 갈리(Galli)라는 조각가와 결혼했다. 그로부터 갈리 마리라는 이름을 가졌다. 갈리 마리는 루앙에서 발프의 '보헤미아 소녀'에 출연하였는데 마침 파리 오페라 코미크의 에밀 페랭이라는 감독이 갈리 마리를 보고 파리로 스카웃했다. 그로부터 갈리 마리는 오페라 코미크의 프리마 돈나로서 사랑을 받았다. 갈리 마리는 '카르멘'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보다 앞서 토마의 '미뇽'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갈리 마리는 1875년 6월 2일 오페라 코미크에서의 저녁 공연에서 3막의 카드 점을 치는 장면을 공연하는 중에 누가 메모를 전하며 비제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카드 점에는 마침 '죽음'의 카드가 나왔다. 갈리 마리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무대 뒤로 나가자마자 실신했다. 갈리 마리는 그 다음날까지도 실신 상태여서 그 다음날의 공연은 취소될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제가 실제로 세상을 떠난 시간은 '카르멘'의 공연 도중이 아니라 그날 늦은 밤이었다. 그러므로 갈리 마리가 카드 점을 보았을 때에는 아직 살아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카르멘의 이미지를 창조한 프랑스의 메조소프라노 갈리 마리

 

○ Cavalleria Rusticana(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산투짜(Santuzza)

마스카니를 하루 아침에 유명하게 만들어 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1890년 5월 17일 로마의 테아트로 코스탄치에서 초연을 가졌다. 초연에서 산투짜의 이미지를 창조한 소프라노는 이탈리아 몬차(Monza) 출신의 젬마 벨린치오니(Gemma Bellincioni: 1864-1950)였다. 젬마 벨린치오니의 부모는 모두 성악가였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성악 레슨을 받았다. 베르디는 1886년에 젬마 벨린치오니가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를 맡아 공연하는 것을 보고 연기력이 뛰어나다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음성에 대하여는 별로 감동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베르디가 젬마 벨린치오니를 칭찬하자 다음 해에 초연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를 맡길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젬마는 오히려 무대에서 그의 히스테리적인 행동, 꾹꾹 눌러 말하는 듯한 거친 대사, 무대를 압도하는 연기 등으로 새로 선을 보이고 있는 베리스모 오페라에 적합하다는 평을 받았다. 남편인 테너 로베르토 스탸노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초연에서 투리두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산투짜의 젬마 벨린치오니

 

○ Cosi fan Tutte(여자는 다 그래) - 도라벨라/휘오르딜리지(Dorabella/Fiordigligi)

모차르트의 '여자는 다 그래'는 1790년 1월 26일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이었다. 비엔나에서는 휘오르딜리지와 도라벨라 자매를 누가 맡느냐는 것으로 벌써부터 관심이 많았다. 그전에 공연된 '후궁에서의 도주'에서 콘스탄체를 당대의 소프라노 카테리나 카발리에리가 맡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가 휘오르딜리지를 맡지 않겠느냐는 소문이 있었지만 휘오르딜리지의 역할은 이탈리아 페라라 출신으로 비엔나에 와서 활동하고 있는 아드리아나 페라레세(Adriana Ferrarese: c 1775-1804)가 맡게 되었다. 아드리아나는 비엔나에 와서 주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수잔나를 맡으면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La Ferrarese 라고도 불렸다. 그만큼 유일하다는 의미였다. 결혼 후에는 아드리아나 페라레세 델 베네(Adriana Ferrarese del Bene)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기도 했다. 아드리아나 페라레세는 베니스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비엔나에 오기 전에 런던에서 활동했다. 런던에서는 도메니코 치마로사의 오페라 등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에서 주인공 역할들을 맡았다.

 

'여자는 다 그래'에서 휘오르딜리지의 이미지를 창조한 아드리아나 페라레세

                    

도라벨라를 맡은 루이스 비유느브(Louise Villeneuve: 1771-1799)는 비엔나에 와서 어떤 발레단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1786년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보고 오페라 소프라노로 방향을 바꾸기로 결정한 케이스이다. 루이스는 비엔나에서 빈첸테 마르틴 이 솔러의 '디아나의 나무'(L'arbore di Diana)에서 아모레를 맡아서 인기를 끌었다. 원래 아모레의 역할은 루이사 라스키라는 소프라노가 맡도록 되어 있었으나 사정상 갑자기 루이스 비유느브로 바뀌었다. 루이스는 매력적인 모습과 감각적인 연기, 그리고 아름다운 음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나중에  모차르트는 루이스를 위해 도메니코 치마로사의 오페라 '두 사람의 남작'(I due baroni)의 아리아를 만들어 주었고 이어 빈첸테 마르틴 이 솔러의 '마음씨 좋은 구두쇠'(Il burbero di buon cuore)의 아리아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에는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에 별도의 아리아 등을 만들어서 무대에서 부르도록 포함시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모차르트는 '여자는 다 그래'의 도라벨라를 루이스 비유느브를 염두에 두고 작곡을 했고 실제로 루이스가 그 역할을 처음 맡게 되었다. 특히 '여자는 다 그래'의 2막에 나오는 도라벨라의 아리아는 루이스를 아모레라고 간주하여 작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설에는 루이스가 휘오르딜리지를 맡은 아드리아나의 실제 동생이라는 얘기도 있었으나 근거는 없다.

 

 

○ Don Carlo(돈 카를로) -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Elisabeth de Valois)

베르디의 '돈 카를로'는 1867년 3월 11일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되었다.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와 결혼을 약속했으나 정략적으로 돈 카를로의 아버지인 펠리페 2세와 결혼하게 된 프랑스의 공주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의 이미지는 벨기에 출신의 소프라노 마리 콘스탄스 사스(Marie-Constance Sasse: 1834-1907)가 창조했다. 사스는 1860년대와 1870년대에 파리 오페라의 대표적 소프라노였다. 사스의 아버지는 벨기에 육군의 군악대장이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스는 겐트음악원을 거쳐 밀라노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데뷔는 1852년 베니스에서 베르디의 '리골레토' 중 질다로였다. 사스는 파리 오페라에서 '돈 카를로'(돈 카를로스)의 초연에서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여인'(마이에르베르)의 초연에서 셀리카를 맡았고 바그너의 '탄호이저'가 파리에서 초연될 때에 엘리자베트를 맡았다.

 

'돈 카를로'에서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의 이미지를 창조한 마리 콘스탄스 사스

 

○ Don Giovanni(돈 조반니) - 돈나 안나/돈나 엘비라/체를리나(Donna Anna/Donna Elvira/Zerlina)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는 비엔나에서 초연되지 않고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극장(현재의 에스테이츠 극장)에서였다. 비엔나 초연은 이듬해인 1788년 5월 7일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서였다. 프라하 초연에서는 돈 조반니의 세 여인, 즉 돈나 안나, 돈나 엘비라, 체를리나를 테레사 사포리티(Teresa Saporiti: 1763-1869), 카테리나 미첼리(Katherina Micelli), 카테리나 본디니(Caterina Bondini)가 각각 맡았다. 비엔나 초연에서는 멤버가 크게 달랐다. 돈나 안나는 모차르트의 처형인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 돈나 엘비라는 '후궁에서의 도주'에서 콘스탄체의 이미지를 창조했던 카테리나 카발리에리(Caterina Cavalieri), 그리고 체를리나는 루이자 몸벨리(Luisa Mombelli)가 맡았다. 프라하의 돈나 안나인 테레사 사포리티는 밀라노 출신으로 외국출장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오페라단에 입단하여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프라하 등지를 방문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공연에 참가하였다. 그래서 프라하에도 가서 '돈 조반니'의 공연에 출연했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테레사 사포리티를 프라하 공연 전부터 잘 알고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2막의 만찬 장면에서 돈 조반니가 Ah che platto saportio!(아 얼마나 맛있는 음식인가? 아 케 플라토 사포르티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테레사 사포리티의 이름을 사포르티오(맛있다)라는 단어에 비유해서 웃기게 만드느라고 그런 대사를 넣었다는 얘기가 있다.

 

'돈 조반니'에서 돈나 안나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레사 사포리티

 

○ Eugene onegin(유진 오네긴) - 타티아나(Tatiana)

차이코브스키의 '유진 오네긴'(예프게니 오네긴)은 1879년 3월 29일 모스크바의 말리(Maly)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타티아나의 이미지는 동부 러이사의 보로네시 출신인 마리야 클리멘토바(Mariya Klimentova: 1856-1946)이 맡았다. Mariya Klimentova-Muromtseva라고도 한다. 마리야는 모스크바음악원에 다닐 때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이론 클래스에서 참가하였다. 마리야는 1880년에 모스크바음악원을 졸업한 해에 구노의 '파우스트'에서 마르게리트를 맡아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였다. 마리야는 볼쇼이에 8년 동안 있으면서 러시아의 대표적인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마리야는 생페터스부르크의 마리인스키, 프라하의 국립오페라극장 등에서도 활약했다. 마리야는 주로 차이코브스키의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유진 오네긴'의 편지의 장면에서 마리야 클리멘토바. 차이코브스키의 제자였다.

 

○ Fidelio(휘델리오) - 레오노레(Leonore)

베토벤은 '휘델리오'를 세번이나 수정한 끝에 최종버전을 만들었다. 첫번째 버전은 1805년 11월 20일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에서 무대에 올려졌다. 두번째 버전은 그로부터 1년 후인 1806년 3월 29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버전은 첫 버전이 나온지로부터 무려 9년 후인 1814년 5월에 선을 보였다. 여주인공인 레오노레(휘델리오)는 세번의 초연 모두 오스트리아의 안나 밀더(Anna Milder: 1785-1838)가 맡아서 휘델리오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안나 밀더는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콘스탄티노플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대사 부인의 시녀였다. 안나는 다섯살 때에 식구들을 따라 부카레스트로 갔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번역가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터키 전쟁의 여파로 부카레스트를 떠나서 살다가 결국은 비엔나에 정착하였다. 안나가 열살 때였다. 안나는 비엔나에서 음악적 재능을 개발하였다. 안나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그리스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였다. 사람들은 안나의 음성을 '순수한 금속과 같은 소리'라며 찬사를 보냈다. 슈베르트는 안나에게 '술라이카'라는 가곡을 헌정하였다. 안나는 안나(폴랭) 밀더 하우프트만(Anna (Pauline) Milder-Hauptman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안나 밀더

 

○ Die Fledermaus(박쥐) - 로잘린데/아델레(Rosalinde/Adele)

요한 슈트라우스는 여러 오페레타를 작곡했지만 그중에서 제일은 '박쥐'이다. 1874년 4월 5일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에서의 로잘린데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출신의 유명한 마리 가이스팅거(Marie Geistinger: 1836-1903)가 맡았고 아델레는 카롤리네 샤를르 히르슈(Caroline Charles-Hirsch)가 맡았다. 머리 가이스팅거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박쥐'의 초연에서 로잘린데의 이미지를 창조한 오스트리아의 마리 가이스팅거

 

○ Der fliegende Holländer(방랑하는 네덜란드인) - 젠타(Senta)

바그너의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은 1843년 1월 2일 드레스덴 호프오퍼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에서 달란트의 딸 젠타(Senta)는 당대의 소프라노 빌헬미네 슈뢰더 드브리앙(Wilhelmine Schröder-Devrient: 1804-1860)이 맡았다.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빌헬미네는 아버지가 테너 프리드리히 슈뢰더이며 어머니가 여배우로 유명한 조피 슈뢰더였다. 그러므로 말하나마나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 노래도 뛰어났고 연기력도 뛰어났다. 여기에 뛰어난 미모로서 사랑을 받았다. 빌헬미네가 세상을 떠난 후 '어떤 여가수의 비망록'(Memoiren einer Sängerin)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빌헬미네의 섹스 생활을 자세히 그린 책이다. 독일어로 된 가장 유명한 에로서적이다. 

 

빌헬미네 슈뢰더 드브리앙

 

○ Il Barbiere di Siviglia(세빌리아의 이발사) - 로지나(Rosina)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로시니 최고의 걸작이다. 벨칸토 오페라의 금자탑이다. 1816년 로마의 테아트로 아르젠티나(아르젠티나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주인공인 피가로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인 로지나의 이미지는 볼로냐 출신의 소프라노 겔트루데 리게티(Geltrude Righetti: 1793-1862)가 창조했다. 그의 이름은 어떤 때는 겔트루데 조르지 리게티(Geltrude Giorgi-Righetti)라고도 쓴다. 남편의 이름이 조르지였기 때문이다. 겔트루데 리게티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음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명랑한 성격이었다. 그는 로시니 오페라의 여주인공으로 가장 적합했다. 그래서 '라 체네렌톨라'가 초연될 때에 안젤리카의 이미지를 창조하기도 했다. 겔트루데 리게티는 개인 사정으로 오페라 무대를 일찍 떠나 여생을 조용하게 보냈다. 오늘날 로지나의 역할은 메조소프라노가 맡는 경우가 더 많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의 이미지를 창조한 겔트루데 리게티

 

○ Der Freischutz(마탄의 사수) - 아가테(Agathe)

베버의 '마탄의 사수'는 1821년 6월 18일 베를린의 샤우슈필하우스(연극회관)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에서 삼림관 쿠노의 딸인 아가테는 체코 출신의 소프라노 카롤리네 자이들러 브라니츠키(Karoline Seidler-Wranitzky: 1790-1872)가 맡았다. 카롤리네는 작곡가 안톤 브라니츠키의 딸이다. 삼촌이 파울 브라니츠키도 작곡가이다. 카롤리네는 우아한 용모와 아름다운 음성으로 사랑을 받았다. 베를린의 '마탄의 사수' 초연에서 아가테의 사촌인 앵헨은 베를린 출신의 소프라노 겸 배우인 요한나 오이니케(Johanna Eunicke: 1798-1856)가 맡았다.

 

'마탄의 사수' 초연에서 아가테의 이미지를 창조한 카롤리네 자이들러 브라니츠키

 

○ Le Nozze di Figaro(피가로의 결혼) - 수잔나/백작부인(Susanna/Countess)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은 1786년 5월 1일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오페라의 사실상 여주인공인 백작부인의 하녀 수잔나는 영국 출신의 소프라노 낸시 스토레이스(Nancy Storace: 1765-1817)가 맡아서 첫 이미지를 창조했다. 사실상 모차르트는 낸시 스토레이스를 위해 수잔나의 음악을 작곡했다. 그래서 초연을 위한 리허설 중에 낸시가 '이 부분은 좀 다르게 고쳐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면 모차르트는 두말하지 않고 낸시에게 맞게 수정하였다. 혹자는 낸시와 모차르트가 애인사이였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두 사람은 친밀하게 지냈다. 낸시는 하이든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하이든이 나중에 영국을 방문할 때에도 사전에 낸시의 자문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까지 있다. 하이든은 낸시를 위해 칸타타 한 곡을 작곡했다. Miseri noi 라는 제목의 칸타타라고 한다. 런던 출신인 낸시는 어릴 때부터 노래의 천재소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노래를 잘 불렀다. 낸시는 오페라 주인공이 되기로 결심하고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가서 공부를 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77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정상의 소프라노로서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가 1783년에 베니스에 있을 때 비엔나로부터 요제프 2세 황제가 새로운 이탈리아 오페라단을 구성하니 합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비엔나로 가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수잔나를 맡게 된 것이다. 백작부인(로지나)의 이미지는 이탈리아 플로렌스 출신의 소프라노 루이사 라스키(Luisa Laschi: 1763-c 1789)가 처음 창조했다. 루이사 라스키의 초상화는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실루에트만이 남아 있어서 소개한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수잔나의 이미지를 창조한 낸시 스토레이스. 오른쪽은 백작부인의 이미지를 창조한 이탈리아의 소프라노 루이사 라스키.

 

○ L'Elisir d'Amore(사랑의 묘약) - 아디나(Adina)

오늘날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레퍼토리 중의 하나인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은 1832년 5월 12일 밀라노의 테아트로 델라 카노비아나에서 초연을 가졌다. 프리마 돈나인 아디나는 독일 마인츠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비네 하이네페터(Sabine Heinefetter: 1809-1872)가 맡았다. 뛰어난 미모와 아름다운 벨칸토 음성을 자랑하는 하이네페터는 아디나의 이미지를 창조하므로서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하이네페터는 불과 15세 때인 182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페터 리터(Peter Ritter)의 '만다린'(Der Mandarin)으로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작곡가 루이 슈포르( Louis Spohr)가 그를 카셀 오페라의 종신멤버로 계약토록 권유했다. 그러나 카셀에만 머무를수 없어서 1829년 파리로 무조건 떠났고 1842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파리의 테아트르 이탈리엔에서 프리마 돈나로서 활동했다.

 

'사랑의 묘약'에서 아디나의 이미지를 창조한 소프라노 자비네 하이네페터

 

○ Les contes d'Hoffmann(호프만의 이야기) - 올림피아/안토니아/줄리에타(Olympia/Antonia/ Giulietta)

자크 오펜바흐의 유일한 비극인 '호프만의 이야기'에는 여주인공이 세명이 등장한다. 기계인형인 올림피아, 노래를 잘 부르지만 병약한 안토니아, 그리고 베니스의 고급창녀인 줄리에타이다. 이 세 역할은 통상 한 사람의 소프라노가 맡지만 사정에 따라 각기 다른 소프라노들이 맡기도 한다. '호프만의 이야기'는 1881년 2월 10일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에서 세 여주인공의 역할은 프랑스 칼레 출신의 소프라노 아델르 이사크(Adele Isaac: 1854-1915)가 맡았다. 아델르 이사크는 1813년 파리에서 빅토르 마쎄이ㅓ '자네트의 결혼'(Les noces de Jeannette)로 오페라에 데뷔하였고 오페라 코미크 첫 출연은 1873년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에서 마리를 맡은 것이었다. 그후 파리 갸르니에의 프리마 돈나로서 활동하였는데 주로 맡은 역할은 오펠리아(햄릿), 마르게리트(파우스트), 아델레(박쥐), 체를리나(돈 조반니) 등이었다. 1883년에는 '카르멘'이 파리에서 처음으로 리바이발 되었을 때 타이틀 롤을 맡아 명성을 떨쳤다.

 

1881년 파리 오페라 코미크에서 '호프만의 이야기'가 초연되었을 때 올림피아/안토니아/줄리에타를 맡았던 소프라노 아델르 이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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