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디바와 디보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디보들 - 1

정준극 2014. 7. 1. 14:33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디보들 - 1

 

 

○ Aida(아이다) - 라다메스

라다메스는 바로(파라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이집트의 전도유망한 청년 장군이다. 바로는 하나뿐인 딸 암네리스와 라다메스를 결혼토록 하여 라다메스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까지 한다. 그런데 라다메스는 느닷없이 암네리스 공주의 하녀로 새로 들어온 아이다를 사랑한다. 아이다는 이집트의 적국인 에티오피아의 공주였으나 전쟁에서 져서 포로로 잡혀와 암네리스 공주의 하녀가 되었다. 물론 신분을 감춘 채이다. 오페라 '아이다'에서 라다메스는 이집트의 영광을 대표한다. 막이 오르면 라다메스가 아이다를 찬양하는 '청아한 아이다'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모든 오페라 아리아 중에서 가장 힘들다는 평을 받고 있는 곡이다. 왜냐하면 전주도 없이 무반주로 노래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대에 처음 등장해서 긴장해 있는 테너에게 전주도 없이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은 특별한 일이다. 그래서 테너를 혹사한다는 얘기를 듣는 곡이다.

 

'아이다'는 두번의 초연을 가졌다. 하나는 1871년 12월 24일 카이로의 케디비알 오페라 하우스에서였다. 이때 라마메스는 피에트로 몬지니(Pietro Mongini: 1830-1874)가 맡았다. 두번째 초연은 이듬해인 1872년 2월 8일 밀라노의 라스칼라에서 였다. 라다메스는 주세페 판첼리(Giuseppe Fancelli)가 맡았다. 피에트로 몬지니는 로마 출신으로 처음에는 베이스로 시작하였으나 23세 부터는 제노아에서 테너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1955년에는 루치아의 에드가르도로 파리 데뷔를 하였다. 1857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아킬레 페리의 '비토르 피사니"(Vittor Pisani)의 초연과  도니체티의 '안나 볼레나' 초연에 출연하였다. 이듬해에는 라 스칼라에 진출하여 로시니의 '귀욤텔'에서 아르놀트를 불렀다. 이어 런던에서 '몽유병자'의 엘비노를 불렀고 또한 베르디의 '시실리의 저녁기도'의 런던 초연에서 아리고를 맡았다. 라 스칼라로 돌아온 그는 '일 트로바토레'의 만리코를 맡아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주로 베르디 오페라의 테너 역할로서 사랑을 받았다.

 

최초의 라다메스인 테너 피에트로 몬지니

 

○ Il barbiere di Siviglia(세빌리아의 이발사) - 피가로/알마비바 백작

로시니 최대 걸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1816년 2월 20일 로마의 테아트로 아르젠티나에서 초연을 가졌다. 초연에서 피가로는 바리톤 루이지 참보니(Luigi Zamboni: 1767-1837)가, 알마비바 백작은 테너 마누엘 가르시아(Manuel Garcia: 1775-1832)가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볼로냐 출신의 루이지 참보니는 당대 최고의 부포 베이스 바리톤이었다. 1791년(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에 치마로사의 Il fanatico burlato로서 오페라 무대에 진출하였다. 이후 나폴리, 파르마, 베니스, 로마 등지에서 주로 발렌티노 휘오라반티(Valentino Fioravanti)의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인 피가로를 맡게 된 것은 그가 뛰어난 부포 베이스 바리톤이기도 했지만 로시니와는 가족간에 오랜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알마비바 백작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 마누엘 가루시아는 스페인의 세빌리아 출신이다. 그러므로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출연자로 적격이다. 그는 1808년에 파리로 진출하여 '그리셀다'(Griselda)로서 파리의 오페라 무대를 첫 장식했다. 그는 그때 이미 오페라 작곡가로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나폴리에 정착하여 살면서 로시니 오페라에 주로 출연했다. 그는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초연에도 출연했지만 로시니의 '영국여왕 엘리사베타'(Elisabetta, regina d'Inghilterra)의 초연에도 출연했다. 마누엘 가르시아는 음악가족이다. 큰딸은 유명한 메조소프라노 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libran)으로 나중에 로시니와 결혼하였다. 둘째 딸은 당대 최고의 드라마틱 스타인 폴랭 비아르도(Pauline Viardot)였다. 그리고 아들 마누엘 파트리코 로드리게즈 가르시아는 처음에 바리톤이었으나 나중에 유명한 성악교사가 된 사람이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피가로의 이미지를 창조한 베이스 바리톤 루이지 참도니와 알마비바 백작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 마누엘 가르시아

 

○ La Beheme(라 보엠) - 로돌포

'라보엠'에서 시인 로돌포의 이미지를 처음 창조한 테너는 이탈리아의 에반 고르가(Evan Gorga: 186501957)이다. 리릭 테너인 고르가는 이탈리아 중부 브로코(현재의 브로코스텔라)에서 태어나 1894년에 칼리아리(Cagliari)에서 베르니의 '에르나니'의 타이틀 롤을 맡아 그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끈 인물이다. '에르나니'에 출연하게 된 것은 원래 에르나니를 맡았던 프란체스코 타마뇨가 갑자기 아파서 출연하지 못하게 되어 대타로 급히 출연했던 것이다. 그후 '라 보엠'의 로돌포를 맡게 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로돌포로서 이탈리아의 여러 극장에 출연하였다. 그는 빌헬름 마이스터(미뇽), 르 슈발리에 데 그류(마농), 프리츠 코부스(친구 프릿츠) 등에 출연하여 사랑을 받았다. 그는 1899년, 34세 때에 베로나에서 로돌포를 다시 맡아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후 갑자기 오페라 출연을 포기하고 은둔하였다. 이유가 무었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는 유명한 예술품 수집가였다. 특히 악기수집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대공황과 2차 대전으로 소장품의 거의 절반 이상을 팔아서 생활비로 써야 했다. 나중에 그는 더 이상 팔지 않고 모두 이탈리아 정부에 기증했다. 이들은 현재 로마의 갈레리아 보르게세에 전시되어 있다. 이탈리아 정부는 비록 그가 고악기들을 기증했지만 그의 생활이 빈곤한 것을 알고 매입하는 것으로 절차를 취했고 또한 종신 연금을 지급키로 했다.

 

'라 보엠'에서 로돌포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 에반 고르가

 

○ Carmen(카르멘) - 돈 호세

비제의 '카르멘'이 1875년 3월 3일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되었을 때 주인공인 돈 호세는 파리 출신의 테너인 폴 레리(Paul L'herie: 1844-1937)가 맡았다. 그로인하여 폴 레리는 오페라의 역사에서 돈 호세의 이미지를 창조한 인물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폴 레리는 19세 때에 오페라 코미크에서 메울의 '조세프'(요셉)으로 오페라에 데뷔했다. 이어 마스네의 '바잔의 돈 세사르'(Don Cesar de Bazan)에서 타이틀 롤, 생 상스의 '노란 공주'(La princesse jaune)에서 코르넬리스, 레오 들리브의 Le roi l'adit의 베누아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비제와 레리는 '카르멘' 공연을 준비하면서 서로 죽고 못사는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남이 보던 말던 세이느 강에서 수영을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레리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바리톤이 되었다. 바리톤으로서의 첫 공연은 라 스칼라에서 '돈 카를로스'의 이탈리아어 버전에서 포사를 맡은 것이었다. 이어 그는 런던에도 상당기간 체류하였다. 런던에서는 주로 추르가(진주잡이), 리골레토, 제르몽, 루나 백작, 알퐁스(라 화보리트) 등을 맡아 노래했다. 바리톤으로서 그는 마스키나의 '친구 프릿츠'에서 랍비 다비드의 이미지를 창조했고 이어 프랑크의 '훌다'에서 구들레이크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이렇듯 그는 여러 오페라의 초연에서 주인공들의 이미지를 창조하는데 바뻤지만 오늘날 그는 최초의 돈 호세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최초의 돈 호세인 폴 레리

 

○ Cavalleria Rusticana(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투리두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1890년 5월 7일 로마의 코스탄치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남자 주인공인 투리두는 테너 로베르토 스타뇨(Roberto Stagno: 1840-1897)이 맡았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초연에서 산뚜짜는 스타뇨의 부인인 젬마 벨린치오니(Gemma Bellincioni)가 맡아 화제를 뿌렸다. 스타뇨는 시실리의 팔레르모 출신으로 이탈리아 베리스모 오페라의 해석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사람이다. 밀라노에서 성악 공부를 한 그는 1862년에 리스본에서 오페라 데뷔를 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는 물론, 스페인과 포르투갈,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나중에는 미국과 남미에서도 활발한 오페라 활동을 했다. 그는 그야말로 당대 유럽 오페라 극장의 주도적인 테너였다. 그의 음성은 부드럽고 따듯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57세라는 나이로 제노아에서 심장질환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투리두의 이미지를 창조한 로베르토 스타뇨

 

○ Les contes d'Hoffmann(호프만의 이야기) - 호프만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가 1881년 2월 10일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주인공인 호프만은 보르도 출신의 테너 장 알렉산드르 탈라자크(Jean-Alexandre Talazac: 1851-1896)가 맡았다. '호프만의 이야기'는 오펜바흐의 유일한 비극이며 오펜바흐는 극중에서 세번의 이상한 사랑의 감정을 갖는 시인이다. 장 알렉산드르 탈라자크는 서정적인 테너로서 사랑을 받았다. 그는 호프만 이외에도 1884년 마스네의 '마농'에서 낭만과 쾌락을 추구하는 슈발리에 데 그류, 1883년 들리브의 '라크메'에서 영국군 장교인 제랄드, 그리고 에두아르 랄로의 '이스의 왕'(Le roi d'Ys)에서 밀리오를 맡아 이들의 처음 이미지를 창조했다.

 

호프만의 이미지를 창조한 장 알렉산드르 탈라자크

 

○ Cosi fan tutte(여자는 다 그래) - 페란도/줄리엘모

오스트리아 대공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요제프 2세는 음악애호가였다. 그는 작곡도 했다. 그는 1783년에 새로운 오페라단을 설립했다.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전문으로 공연하는 오페라단이었다. 이를 위해 당대의 유명한 오페라 성악가들을 초빙하였다. 베니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이스 바리톤 프란체스코 베누치(Francesco Benucci: c 1745-1824)도 초빙되었다. 영국 출신의 소프라노 낸시 스토레이스(Nancy Storace)도 초빙되었다. 베누치와 스토레이스는 나중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초연에서 각각 타이틀 롤인 피가로와 수잔나를 맡았으니 그것은 역사에 기록되는 사항이다. 그건 그렇고, 황제의 오페라단은 첫 공연으로서 1783년 4월에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La scuola de'gelusi(질투 수업)을 무대에 올렸다. 프란체스코 베누치가 부포 역할인 블리시오를 맡아서 대인기를 끌었다. 평론가들은 '베누치의 노래와 연기는 참으로 자연스럽다. 이만한 공연은 비엔나의 오페라 역사에서 처음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 공연을 보았던 모차르트도 베누치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버지, 오페라 부파가 비엔나에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어요. 황제의 새로운 오페라단이 살리에리의 작품을 처음 공연하였는데요 부포가 특히 좋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베누치라고 합니다'라고 썼다. 그 베누치가 1790년 모차르트의 '여자는 다 그래'에서 줄리엘모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대성공이었다. 이후 베누치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주로 출연하며 모차르트의 오페라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여자는 다 그래'에서 줄리엘모의 이미지를 창조한 베이스 바리톤 프란체스코 베누치. 최초의 피가로이기도 하다.

 

'여자는 다 그래'의 초연에서 페란도(Ferrando)의 이미지를 처음 창조한 테너는 이탈리아 출신의 빈첸조 칼베시(Vincenzo Calvesi: 1777-1811)이다. 로마와 드레스덴 등지에서 활동하던 그는 1785년에 비엔나의 황제의 오페라단에 합류하여 그로부터 거의 10년 동안 비엔나에서 오페라 무대를 압도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음성을 '타고난 감미로운 음성, 유쾌하고 낭랑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실로 뛰어난 테크닉의 리릭 테너였다. 그는 나중에 로마에서 오페라 임프레사리오로 활약하였다.

 

'여자는 다 그래'에서 페란도의 이미지를 창조한 이탈리아 출신의 리릭 테너 빈첸조 칼베시

 

 

○ Faust(파우스트) - 파우스트

괴테의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를 프랑스의 샤를르 구노가 오페라로 만든 '파우스트'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인 파우스트의 이미지를 창조한 사람은 프랑스 툴루스 출신의 테너인 조셉 테오도르 데지레 바르보(Joseph-Théodore-Désiré Barbot: 1824-1879)이다. 파리에서 유명한 마누엘 가르시아(아들)로부터 성악을 공부한 그는 1848년 파리 오페라에 데뷔하였고 그후 파리에 정착하기 보다는 10여년 동안 볼로냐, 토리노, 밀라노, 로마, 나폴리 등 이탈리아 각지에서 오페라에 출연하며 활동했다. 그러다가 파리에 잠시 돌아와서 1859년 3월 19일 파리의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무대에 올려진 구노의 '파우스트'의 초연에 참가하였다. 원작이 너무나 유명한 것이기 때문에 오페라 '파우스트'도 대단한 관심을 끌었으며 따라서 바르보도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파우스트'의 초연을 끝낸 그는 다시 이탈리아와 러시아 등지를 다니면서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이 때에는 부인인 소프라노 카롤린 바르보 두브리(Caroline Barbot-douvry)와 함께 여행하면서 오페라에도 함께 출연했다. 카롤린 바르보 두브리는 1862년 제정러시아의 생페터스부르그에서 베르디의 '운명의 힘'(La forze del destino)가 초연을 가졌을 때 레오노라의 이미지를 창조한 소프라노로서 역사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파우스트'의 이미지를 처음 창조한 테너 조셉 테오도르 데지레 바르보

 

○ Don Carlo(돈 카를로) - 돈 카를로

베르디의 '돈 카를로'(돈 카를로스)는 처음 1867년 3월 11일에 파리오페라에서 초연을 가졌고 그후 여러번의 수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1884년 1월 10일 라 스칼라에서 모던 버전의 초연을 가졌다. 파리에서의 초연은 프랑스어 대본이었고 그 후에는 이탈리아어 대본으로 주로 이탈리아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가졌다. 파리 초연에서는 타이틀 롤을 프랑스의 테너 장 모레르(Jean Morère: 1836-1887)가 맡았고 라 스칼라에서의 모던 버전 초연에서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위대한 테너 프란체스코 타마뇨(Francesco Tamagno: 1850-1905)가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장 모레르는 프랑스 남서부 오트 갸론느 지방 출신으로 툴루스에서 성악공부를 시작하였고 계속해서 파리음악원에서 공부했다. 그가 파리 음악원을 졸업할 때에는 성악부분의 세가지 최우수상을 받았다. 가곡, 오페라 아리아, 민요에서였다. 그의 음성은 예쁘고 기분 좋은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어떤 평론가는 맛갈스럽다고 표현했다. 그는 가진 소리가 좋았지만 테크닉에 있어서도 뛰어났다. 그는 1861년 파리 오페라에서 '일 트로바토레'로서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돈 카를로'는 장 모레르로 인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864년에 빅토르 시그(Viictor Sieg: 1837-1899)의 칸타타 '아이반호'(Ivanhoe)의 초연에서 아이반호의 역할을 노래했다. 이 작품은 빅토르 시그의 프리 드 롬(Prix de Rom) 수상작이다. 장 모레르의 말년은 불행하였다. 그는 1871년에 보불전쟁의 여파로 정신질환의 증세를 보여 툴루스의 정신병원에 입원되었다. 그렇게 5년을 보낸던 중 1886년에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장 모레르는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이듬해인 1887년에 세상을 떠났다.

 

돈 카를로의 이미지를 창조한 장 모레르

 

○ Don Giovanni(돈 조반니) - 돈 조반니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에서의 '돈 조반니' 초연에서 돈 조반니의 이미지를 창조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바리톤 루이지 바씨(Luigi Bassi: 1766-1825)이다. 루이지 바씨는 돈 조반니 하나의 역할로서 오페라의 역사에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되었다. '돈 조반니'가 비엔나가 아닌 프라하에서 초연될 때의 타이틀은 Il Dissoluto Punito(난봉꾼이 벌을 받다)였다. 그리고 부제가 Don Giovanni 였다. 이듬해인 1788년 5월 7일에 비엔나에서 공연되었을 때에 타이틀이 '돈 조반니'로 굳혀졌다. 비엔나 공연에서의 타이틀 롤은 역시 이탈리아의 바리톤인 프란체스코 알베르타렐리(Francesco Albertarelli)였다. 그리고 유명한 베이스 바리톤 프란체스코 베누치가 프라하와 비엔나 초연에서 모두 레포렐로를 맡았다. '돈 조반니'의 프라하 초연은 프라하극장(Teatro di Praga)에서 있었다. 현재의 Estates Theater(Stavovske divaldo)이다. 루이지 바씨는 22세 때에 프라하 초연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알마비바 백작을 맡아서 호평을 받은 경력이 있다. 루이지 바씨는 모차르트를 대단히 존경하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차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반드시 '헤르 모차르트'(모차르트 선생)라고 하면서 존경의 마음을 표시했다. 프라하 사람들은 루이지 바씨와 모차르트 모두에 대하여 행복한 감정을 가졌다. 프라하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Mozard 라고 자기들 식으로 부르면서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프라하 사람들은 프라하국립극장의 임프레사리오인 도메니코 과르다소니에게 제발 모차르트에게 부탁해서 프라하 사람들을 위한 오페라 한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새로운 오페라의 주인공은 루이지 바씨가 맡았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내세웠다. 과르다소니는 곧바로 비엔나에 있는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에게 연락해서 프라하 사람들의 염원을 모차르트에게 전달토록 했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모차르트의 새로운 오페라인 '돈 조반니'가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으로 만들어져서 1787년 프라하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갖게 되었다. 물론 타이틀 롤은 루이지 바씨가 고려되었다. 바씨로서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더 훌륭하게 자기의 재능을 보여주고 싶었다. 모차르트는 바씨를 위해 Finch'han dal vino(포도주를 마시며: 샴페인의 노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바씨는 이 아리아를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의 재능을 십분 발휘할수 있는 다른 아리아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La ci darem la mano(손에 손을 잡고)이다. 체를리나와의 듀엣인 이 노래는 실로 바씨를 위해 작곡된 것이다. 바씨는 모차르트가 La ci darem을 작곡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다섯번이나 고치도록 했다. 한번 작곡한 것은 거의 손을 대지 않는 모차르트로서 La ci darem을 다섯번이나 손질 했다는 것은 예외 중에서도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후 바씨는 라이프치히에서 '파파게노'를 불렀다. 그러나 연기력은 나무랄데 없이 훌륭했지만 소리는 전과 같지 않아서 문제였다. 결국 바씨는 은퇴를 결심했다.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극장에서의 '돈 조반니' 초연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는 돈 조반니(루이지 바씨).

 

○ L'Elisir d'Amore(사랑의 묘약) - 네모리노

'남몰래 흘리는 눈물'(Una furtiva lagrima)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격으로 사로잡은 네모리노의 이미지를 처음 창조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테너 지안바스타 제네로(Gianbattista Genero)였다. 지안바티스타 제네로는 미성의 리릭 테너로서 네모리노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도니체티는 제네로의 감정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랑의 묘약'을 거의 다 완성해 놓고 마지막 순간에 '남몰래...'를 추가하였다. 오늘날 '사랑의 묘약'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의 하나가 되었고 이 오페라에 나오는 '남몰래...'는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아리아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랑의 묘약'은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로서 자리를 잡을 정도이니 이 오페라가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지는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사랑의 묘약'의 초연에서 네모리노를 맡은 지안바티스타 제네로에 대하여는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자세한 경력을 알수 없지만 도니체티가 그를 대단히 염두에 두어서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를 맡도록 한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테너였는지 알수 있다. '남몰래...'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카루소의 공로도 크다. 카루소는 1902년에 처음으로 '남몰래...'를 취입하여 이 아리아를 널리 전파하는데 기여했다. 이어 카루소는 1904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초연에서 네모리노를 맡아 '남몰래...'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후 세계 정상의 테너들이라고 하면 이 아리아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테노레 레제로의 대명사인 베냐미노 질리, 부드럽고 가벼운 음성의 티토 스키파, 그리고 주세페 디 스테파노, 카를로 베르곤치, 니콜라이 겟다, 루치나오 파바로티, 플라치도 도밍고, 괴스타 윈버그, 로베르토 알라냐, 롤란도 빌라존, 라울 에르난데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네모리노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역할을 맡았다. '사랑의 묘약'은 1832년 5월 12일 밀라노의 카노비아나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사랑의 묘약' 초연에서 지안바티스타 제네로(네모리노)와 주세페 프레쫄리니(둘까마라)

 

○ Eugene onegin(유진 오네긴) - 유진 오네긴

차이코브스키의 '유진 오네긴'(예프게니 오네긴)은 1879년 3월 29일 모스크바의 말리(Maly)극장에서 초연되었고 1881년 1월 23일에는 볼쇼이 극장에서 본격 초연되었다. 말리에서는 주인공인 오네긴을 바리톤 세르게이 길리오프(Sergey Gilyov)가 맡았고 볼쇼이에서는 바리톤 파벨 코클로브(Pavel Khokhlov)가 맡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이력소개 자료가 부족하여서 어떤 경력의 사람들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Fidelio(휘델리오) - 플로레스탄

베토벤의 '휘델리오'는 1805년 11월 20일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에서 초연을 가졌고 그후 두어번의 수정을 거쳐 마지막 수정본은 초연으로부터 9년 후인 1814년 5월 23일 비엔나의 케른트너토르극장에서였다.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는 베토벤이 한동안 한쪽 방에서 기거했던 일도 있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의 초연에서는 정치범으로 투옥되어 있는 플로레스탄을 테너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뎀머(Friedrich Christian Demmer: 1772-1835)가 맡았고 케른트너토르극장에서의 초연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의 줄리오 라디키(Giulio Radichi)가 맡았다.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뎀머는 쾰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쾰른돔의 성가대원으로 활약하였으며 23세 때에 베츨라르라는 헤센중부의 도시에서 '마술피리'의 타미노로 오페라 데뷔하였고 이어 비엔나로 와서 테아터 안 데어 빈에 정착하였다. 이어 그는 1824년에 비엔나 궁정극장의 앙상블로 선정되어 여러 오페라에 출연하였으며 가장 찬사를 받았던 역할은 프랑수아 아드리앙 부엘듀의 '파리에서 온 요한'(Johann von Paris)였다. 그는 테아터 안 데어 빈과의 인연과 또한 테너로서 사람들의 인기를 차지한 결과로 1805년 '휘델리오'의 초연에서 플로레스탄을 맡게 되었다. 그후 그는 그라츠와 프라하에서 활동하다가 나이가 들어 은퇴하였다.

 

'휘델리오'를 작곡할 당시의 베토벤. 1804년 초상화

 

○ Die Fledermaus(박쥐) - 아이젠슈타인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는 1874년 4월 5일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남자 주인공인 가브리엘 폰 아이젠슈타인(Gabriel von Eisenstein)은 테너 야니 치카(Jani Szika: 1844-1916)가 맡았다. 헝가리의 페스트 출신인 야니(또는 야노스)는 뛰어난 배우 겸 테너이지만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한 의학도였다. 그러다가 테너에 대한 재능을 떨쳐 버릴수가 없어서 의학공부를 집어 치우고 페스트의 독일극장에서 배우로서 무대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후 1866년부터 비엔나의 테어터 안 데어 빈에 전속되어서 1880년까지 거의 20년을 지냈다. 이때 '박쥐'의 아이젠슈타인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그후 그는 베를린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노래하는 배우로서 말년을 보내다가 비엔나로 돌아와서 1차 대전이 끝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 Der fliegehende Holländer(방랑하는 네덜란드인) - 네덜란드 선장

바그너의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은 1843년 1월 2일 드레스덴의 호프오퍼(궁정오페라극장)에서 바그너 자신의 지휘로 초연을 가졌다. 초연에서 네던란드인 선장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베이스 바리톤 요한 미하엘 배흐터(Johann Michael Wächter: 1794-1853)가 맡았다. 그는 1819년 그라츠에서 돈 조반니로서 무대 데뷔를 하고 이어 1827년 드레스덴 호프오퍼에 합류하여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특히 바그너의 베이스 바리톤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어 드레스덴에서 세 편의 바그너 오페라의 초연에 참가했다. 1842년 '리엔치'에서 오르시니를 맡았도 1843년에는 네덜란드인 선장을 맡았으며 1845년에는 '탄호이저'에서 비터롤프를 맡은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베흐터의 노래를 듣고 '이 시대 최고의 바리톤이다. 그만큼 완성된 성악가는 없을 것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부인은 메조소프라노 테레세 배흐터 비트만으로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의 초연에서 메리 역을 맡았다.

 

바그너 베이스 바리톤인 요한 미하엘 베흐터.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에서 네덜란드 선장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 Der Freischütz(마탄의 사수) - 막스

베버의 '마탄의 사수' 초연에서 삼림관 보조인 막스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는 프러시아 프뢰덴발트 출신의 하인리히 슈튀머(Heinrich Stümer: 1789-1856)였다. 그는 1811년 베를린의 호프오퍼에서 '후궁에서의 도주'의 벨몬테로서 오페라에 데뷔한후 무려 20년 동안 베를린 호프오퍼의 전속 테너로서 활동하였다. 그가 주로 맡았던 레퍼토리는 플로레스탄(휘델리오), 벨몬테(후궁에서의 도주), 알마비바(피가로의 결혼), 막스(마탄의 사수) 등이며 특히 글룩의 작품에는 전적으로 출연하였다.

 

'마탄의 사수' 스케치. 앉아 있는 사람이 막스

 

○ Lohengrin(로엔그린) - 로엔그린

바그너의 '로엔그린'은 1850년 8월 9일 봐이마르의 슈타츠카펠레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세기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이고 나중에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이 된 코지만의 아버지인 프란츠 리스트가 지휘했다. 타이틀 롤인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은 비엔나 출신의 테너인 카를 베크(Karl Beck: 1814-1879)가 맡았다. 카를 베크는 오페라 테너가 되기 전에  비엔나에서 알아주는 제과점의 제빵사였다. 주로 맛있는 과자나 파이를 만들었다. 그는 '로엔그린'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이후 1852년에는 베를리오즈의 '벤베누토 첼리니'의 프랑스 이외 지역에서의 초연에서 타이틀 이미지를 창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쯤해서 성대에 이상이 생겨서 더 이상 노래를 부르기가 힘들어서 은퇴하고 비엔나로 돌아가 합스부르크 궁정의 제빵주임으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로엔그린의 이미지를 창조한 비엔나 출신의 테너 카를 베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