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디바와 디보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디보들 - 2

정준극 2014. 7. 1. 14:37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디보들 - 2

 

○ Lucia di Lammermoor(람메무어의 루치아) - 에드가르도

에드가르도는 우연히 루치아의 목숨을 구해준다. 그로부터 두 사람은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집안은 원수처럼 지내고 있는 관계이다. 루치아의 오빠인 엔리코는 쇠퇴해가는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루치아를 부유한 아르투로와 결혼시킨다. 분노한 에드가르도가 루치아를 배신자로 내몬다. 루치아는 정신이상을 일으켜 결혼의 초야에 신랑 아르투로를 칼로 찔러 죽인후 자기도 숨을 거둔다. 루치아의 죽음을 알게 된 에드가르도는 루치아의 진심을 의심했던 자기를 비난하면서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비극, 또 비극이다. 1835년 9월 26일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의 초연에서는 에드가르도를 프랑스의 유명한 테너인 길베르 뒤프레(Gilbert Duprez: 1806-1896)가 맡았다. 뒤프레는 흉성을 이용한 하이 C 창법을 개발하여 크게 인기를 끌었던 테너이다.

 

최초의 에드가르도인 프랑스의 길베르 뒤프레

 

○ Madama Butterfly(나비부인) - 핀커튼

'나비부인'의 남자 주인공인 핀커튼은 일본 나가사키에 정박하고 있던 미해군 함선의 장교이다. 영어로는 루테난트(Lieutenant)로 되어 있다. 미국 해군에서는 대위를 루테난트라고 부른다. 대개의 외국 군인들은 일본에서 복무하는 동안 현지처를 데리고 살았던 것이 개항기 일본의 상황이었다. 핑커튼도 일본 복무기간을 무료하게 지내기 싫어서 중매장이를 통해 어린 게이샤와 형식상의 결혼을 한다. 얼마후 핀커튼은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미국에서 케이트라는 여자와 결혼한다. 나가사키에서 이제나 저제나 남편 핀커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초초상에게는 어느덧 세살짜리 아들을 하나 두게 되었다. 미국에 있던 핀커튼은 초초상이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양자로 입양하기 위해 일본을 다시 찾아온다. 그제서야 핀커튼이 미국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초초상은 아들 돌로레의 행복을 위해 자기가 사라지기로 결심하고 자결한다. 1904년 2월 17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을 가진 '나비부인'에서 핀커튼은 베로나 출신의 테너인 조반니 체나텔로(Giovanni Zenatello: 1876-1949)가 맡았다. 체나텔로는 원래 뛰어난 드라마틱 테너였으나 핀커튼 이후에는 리릭 테너로서 세계의 사랑을 받았다. 여러가지 에피소드 중에 체나텔로는 마리아 칼라스를 처음으로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에 소개했다는 사실은 흥미있는 일이다. 1947년에 베로나에서 공연되는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에 출연토록 주선해 준 것이다. 그로부터 마리아 칼라스의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핀커튼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 조반니 체나텔로

 

○ Manon(마농) - 슈발리에 데 그류

마스네의 '마농'이 1884년 1월 19일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되었을 때 마농의 애인인 슈발리에 데 그류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는 장 알렉상드르 탈라자크(Jean-Alexandre Talazac: 1851-1896)였다. 프랑스의 보르도 출신으로 파리음악원을 나왔으며 오페라 코미크에서의 데뷔는 1881년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이었다. 이어 1883년에는 '라크메'의 초연에서 제랄드를 맡았으며 1884년에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최초의 데 그류를 맡았고 1888년에는 '이스의 왕'(Le roi d'Ys)의 초연에서 밀리오를 맡았으며 1890년에는 '삼손과 델릴라'의 파리 초연에서 삼손을 맡았다. 이만하면 대단한 테너가 아닐수 없다. 어째서 그렇게 유명해졌는가 하면 우선 그의 음성이다. 순수하고 찬란하다는 평을 받은 음성이다. 아름다운 고음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노래를 스타일있게 불렀다. 그리고  외모도 당당했다. 이밖에도 알렉상드르 탈라자크가 주로 맡았던 역할은 조셉(메울의 조셉), 타미노(마술피리), 페르낭(라 화보리트), 빌헬름 마이스터(미뇽), 라울(위그노) 등이었다.

 

슈발리에 데 그류의 이미지를 창조한 알렉상드르 탈라자크

 

○ Le Nozze di Figaro(피가로의 결혼) - 피가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라고 하면 베이스 베누치가 생각날 정도로 이탈리아의 베이스 프란체스코 베누치(Francesco Benucci: c. 1745-1824)의 이름은 영원히 살아 있다. 베누치는 1786년 5월 1일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터에서 '피가로의 결혼'이 처음 공연되었을 때 타이틀 롤인 피가로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이탈리아 리보르노 출신인 베누치는 이탈리아의 여러 곳에서 오페라 부포에 출연하여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오페라 세리아보다는 오페라 부파가 대중들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런데 1783년 비엔나의 요제프 2세 황제가 이탈리아 부파를 주로 공연하는 새로운 오페라단을 설립하고 멤버들을 영입하는 중에 베누치도 섭외가 되어 비엔나로 오게 되었다. 베누치는 10년이 넘게 황제의 오페라단에 있으면서 주로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에서 바소 부포(basso buffo)의 역할을 맡아 큰 인기를 차지했다. 가장 사랑을 받은 역할은 1792년에 비엔나에서 공연된 치마로사의 '비밀결혼'(Il matrimonio segreto)에서 제로니모였다. 모차르트는 요제프 황제의 오페라단을 위해 세편의 중요한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 세편의 오페라에서 베누치는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피가로의 이미지를 창조했고 '돈 조반니'에서는 레포렐로의 이미지를 창조했으며 '여자는 다 그래'에서는 구글리엘모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최초의 피가로이며 최초의 레포렐로이고 최초의 구글리엘모인 프란체스코 베누치

 

○ Norma(노르마) - 폴리오네

1831년 12워루 26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벨리니의 '노르마'에서 노르마의 비밀 남편인 폴리오네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는 도메니코 돈첼리(Domenico Donzelli: 1790-1873)이었다. '노르마'에서 폴리오네는 골(Gaul)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총독이었다. 골 족들에게 있어서 로마인들은 압제자들이며 원수였다. 그런 상황인데 골 족들이 신봉하는 드루이드교의 최고 여사제인 노르마가 압제자 로마 총독과 비밀리에 사랑하여 두 아들까지 두었다는 것은 목숨을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도메니코 돈첼리는 1800년대 초반부터 약 40년 동안 이탈리아 전역은 물론, 파리와 런던에서도 대인기를 차지하고 있던 테너였다. 그의 음성은 강건하기도 했지만 감칠맛이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노래를 불러야 감칠 맛이 있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수 없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테너라고 하면 돈첼리였다. 로시니는 돈첼리를 위해 '토르발도와 도를리스카'(Torvaldo e Dorliska)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돈첼리가 주인공인 토르발도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나폴리에서 주로 활동하던 돈첼리는 1816년에 라 스칼라로 진출했다. 그리하여 '노르마'의 폴리오네를 맡을수 있었다.

 

'노르마'에서 폴리오네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 도메니코 돈첼리

 

○ Otello(오텔로) - 오텔로

베르디의 '오텔로'는 무대에 올려지기 전부터 대단한 관심을 받은 작품이다. 베르디가 '아디아' 이후 16년만에 내놓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내노라하는 성악가들과 지휘자들은 서로 자기가 '오텔로'의 초연에서 역할을 맡던지 지휘를 맡게 되기를 열망했다. 그런데 베르디는 이미 주역들과 지휘자를 내정해 놓았다. 가장 핵심이 되는 오텔로는 라 스칼라의 주도적 테너인 프란체스코 타마뇨(Francesco Tamagno: 1850-1905)가 맡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실망이 컸지만 타마뇨는 당대 최고의 테너였기 때문에 누구도 아무말 하지 못했다. 타마뇨는 유럽은 물론, 미주에서도 공전의 성공을 거두며 오페라에 출연한 인물이다. 타마뇨는 전생애 동안 26개국에서 오페라에 출연했다. 타마뇨는 '오텔로' 이외에도 베르디의 1881년도 '시몬 보카네그라' 버전에서 가브리엘레 아도르노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창조했다. 타마뇨는 '오텔로'에서 드라마틱한 테너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시몬 보카네그라'에서는 '베니스의 무어인'보다는 더 서정적이고 세련된 음성을 들려주었다. 타마뇨는 또한 1884년에 '돈 카를로스'의 이탈리아어 버전의 초연에서도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이밖에 타마뇨가 초연에 출연했던 작품들은, 카를로스 고메스의 '마리아 튜도르'(1879), 아밀카레 폰키엘리의 '탕자'(Il figliuol prodigo: 1880)와 '마리온 델로르메'(marion Delorme: 1885), 레온카발로의 '메디치'(I Medici: 1899), 이시도레 데 라라의 '메살라네'(Messaline: 1899) 등이다. 타마뇨가 즐겨 맡았던 오페라의 역할들은 만리코(일 트로바토레), 돈 알바로(운명의 힘), 에르나니, 폴리우토, 아르놀드(귀욤 텔), 장 드 레이덴(예언자), 라울(위그노), 바스코 다 가마(아프리카의 여인), 로베르(악마 로베르: Robert le diable), 엘레아자르(유태 여인: La Juive), 아이다, 삼손(삼손과 델릴라), 알림(라호르의 왕), 세례 요한(에로디아드) 등이다.

 

오텔로의 이미지를 창조한 프란체스코 타마뇨

             

○ Pagliacci(팔리아치) - 카니오

카니오는 유랑극단의 단장으로 같은 극단의 여자배우인 네다의 남편이다. 그런데 네다는 마을 청년인 실비오를 좋아하고 있다. 질투의 화신이 된 카니오는 연극 중에 네다도 죽이고 실비오도 죽인다. 관중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연극이라고 생각해서 박수를 쳤으나 나중에는 진짜 살인인 것을 알고 놀란다. 마지막으로 카니오가 관중들에게 '연극은 끝났습니다'(La Commedia è finita)라고 소리치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팔리아치'가 1892년 5월 21일 밀라노의 테아트로 달 베르메에서 초연되었을 때 팔리아쵸(어릿광대)인 카니오는 파르마 출신의 테너 휘오렐로 지로(Fiorello Giraud: 1870-1928)가 맡았다. 지로의 아버지도 테너였다. 오페라 무대에 진출한 휘오렐로 지로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저 멀리 남미까지 가서 활동했다. 첫 오페라 데뷔는 1891년에 이탈리아의 베르첼리에서 '로엔그린'으로였다. 이듬해인 1892년에 그는 밀라노로 진출하였고 그 해에 '팔리아치'의 주역을 맡는 행운을 안았다. '팔리아치'의 카니오로 성공한 그는 그로부터 세계에 카니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로 그는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리릭 테너 또는 스핀토 테너의 역할을 맡았으며 나중에는 좀 더 무거운 바그너 테너도 맡았다. 예를 들면 '신들의 황혼'의 라 스칼라 초연에서 지그프리트를 맡은 것이다.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의 카니오의 이미지를 창조한 휘오렐로 지로

 

○ Rigoletto(리골레토) - 리골레토/만토바 공작

프랑스 칼레에서 태어났지만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바리톤 펠리체 바레시(Felice Varesi: 1813-1889)가 1851년 3월 11일 베니스의 라 페니체에서 초연을 가진 '리골레토'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바레시는 베르디와 동갑이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바레시는 주로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바리톤 역할을 맡았다. 바레시는 1834년 바레세에서 도니체티 등 벨칸토 작품의 바리톤으로서 오페라 경력을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플로렌스, 모데나, 로마, 페루지아, 게노아 등지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라 스칼라 진출은 1841년이었고 이듬해인 1842년부터는 5년 동안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극장에서 활동했다. 그는 비엔나에 있으면서 도니체티의 '샤뮤니의 린다'에서 안토니오의 이미지를 창조했고 '맥베스'의 비엔나 초연에도 출연했다. 바레시는 '음악의 신사'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매우 지성적이고 훌륭한 맨너의 인물이었다. '리골레토' 초연에서 만토바 공작의 이미지를 창조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테너 라파엘레 미라테(Raffaele Mirate)였다.

 

어릿광대 꼽추인 리골레토의 이미지를 창조한 바리톤 펠리체 바레시

 

○ Tosca(토스카) - 카바라도시

푸치니의 '토스카'에서 화가 카바라도시의 처음 이미지는 이탈리아 롬바르디 출신의 테너 에밀리오 데 마르키(Emillio De Marchi: 1861-1917)가 창조하였다. 데 마르키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테너였다. 그러나 그 시대의 다른 성악가들과는 달리 레코드를 남기지 않아서 오늘날 그의 이름은 거의 잊혀져 있지만 1900년 1월 14일 로마의 테아트로 코스탄치에서 '토스카'가 초연되었을 때 카바라도시를 맡았다는 사실은 오페라의 역사에서 길이 남아 있는 사실이다. 오페라 테너로서 처음 데뷔한 것은 밀라노의 테아트로 달 베르메에서 알프레도(라 트라비아타)를 맡은 것이었다. 라 스칼라 진출은 1898년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이탈리아어 버전의 초연에서 슈톨칭을 맡은 것이었다. 라 스칼라에서의 성공을 푸치니가 눈여겨 보았다. 그래서 카바라도시로 피컵하였다. 그때 신예 카루소가 카바라도시를 맡고 싶어했으나 푸치니는 결국 경험이 많은 데 마르키를 선택하였다.

 

'토스카'에서 카바라도시를 처음 맡은 테너 에밀리오 데 마르키

 

○ La Traviata(라 트라비아타) - 알프레도 제르몽

모든 오페라의 초연에서 주역을 맡은 성악가들이 성공을 거두어 찬사를 받는 것은 아니다. 1853년 3월 6일 베니스의 라 페니체극장에서 초연을 가진 '라 트라비아타'의 경우가 그러하다. 비올레타는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Fanny Salvini Donatelli)가 맡았고 알프레도는 로도비코 그라치아니(Lodovico Graziani: 1820-1885)가 맡았으며 제르몽은 바리톤 펠리체 바레시(Felice Varesi)가 맡았다. 세 사람 모두 야유를 받았고 비난을 받았다. 비올레타의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가 가장 많은 야유를 받았다. 그때 그는 이미 38세의 중년이었고 더구나 몸이 뚱뚱해져서 도무지 갸냘픈 비올레타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패니 살비니 도나텔리보다 펠리체 바레시가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도무지 목소리가 그게 아니올시다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알프레도의 로도비코 그라치아니도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 때만은 형편없어서 야유를 받았다. 베르디도 알프레도에 대하여 대실망이었다. 베르디는 그라치아니에 대하여 '대리석처럼 차갑다. 그리고 단조롭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후 그라치아니는 베르디의 다른 오페라에 출연해서 상당한 박수를 받았으니 아마 '라 트라비아타'의 초연 때에는 일진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로도비코 그라치아니는 페르모 출신으로 형제 3명이 모두 잘 알려진 성악가들이었다. 특히 망내 동생 프란체스코 그라치아니는 뛰어난 바리톤으로서 유럽 각지에서 명성을 날린 사람이었다. 로도비코 그라치아니는 평소에 음성이 맑고 분명하며 바이브레이션이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드라마틱한 재능은 부족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라 스칼라에의 데뷔는 1847년 도니체티의 '돈 세바스티안'으로였다. 그후 파리, 런던, 비엔나 등지에서 활동했다.

 

'라 트라비아타'의 초연에서 알프레도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 로도비코 그라치아니

 

○ Tristan und Isolde(트리스탄과 이졸데) - 트리스탄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무대에 올리기가 힘든 작품으로 알려졌다. 바그너는 '트리스탄'을 파리에서 초연을 갖고 싶어했다. 파리는 19세기에 유럽 오페라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그너는 파리 오페라에서의 '탄호이저' 무대가 재난으로 끝나자 파리는 안되겠다고 생각했가. 그래서 1861년에 독일의 칼스루에에 제안을 했다. 그러는 중에 바그너는 혹시 '트리스탄'을 위한 성악가들을 비엔나의 궁정오페라에서 선정할수 있을 까해서 비엔나를 찾아갔다. 비엔나의 궁정오페라는 '트리스탄'을 비엔나에서 초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우선 주인공인 트리스탄은 테너 알로이스 안더가 후보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트리스탄의 역할에 도무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트리스탄'은 비엔나에서 무려 70회의 리허설을 가졌지만 결국 비엔나로서는 곤란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트리스탄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 루드비히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그보다도 '트리스탄'을 공연하기 위해서는 예산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때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가 자금을 대겠다고 제안했다.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를 무척 존경해서 그동안 재정적 후원을 많이 했었다. '트리스탄'은 뮌헨에서 초연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한스 폰 빌로브가 지휘자로 선정되었다. 그때 바그너는 한스 폰 빌로브의 부인인 코지마와 그렇고 그런 사이여서 사실 그 남편을 '트리스탄' 초연의 지휘자로 삼는 것이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정했다. 그런데 1865년 5월 15일로 예정되었던 '트리스탄'의 초연은 갑자기 연기될수 밖에 없었다. 이졸데를 맡은 말비나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가 목이 쉬어서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거의 한 달 후인 6월 10일에 초연을 가질수 있었다. 뮌헨에서 태어난 헬덴테너 루드비히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Ludwig Schnorr von Carolsfeld: 1836-1865)가 트리스탄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의 부인인 말비나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가 이졸데를 맡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난 7월 21일에 루드비히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가 정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초연 이후 그는 고작 트리스탄을 네번 불렀을 뿐이었다. 트리스탄의 역할을 혼신을 다 해서 맡는 바람에 그만 심신이 극도로 지쳐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트리스탄'은 정말로 공연하기에 힘든 작품인것 같다. 왜냐하면 1911년에 '트리스탄'을 지휘하던 펠릭스 모틀이 지휘 도중에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었고 1968년에는 지휘자 조셉 킬버스(Joseph Keilberth)도 지휘를 하다가 쓰러져 죽었기 때문이다. 두 지휘자는 우연인지 모르지만 2막을 지휘하다가 쓰러져서 세상을 하직했다. 한편, 이졸데를 맡은 말비나는 남편 루드비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너무 절망하여서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비나는 남편 루두비히가 세상을 떠난 후 38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뮌헨 초연에서 트리스탄을 맡은 루드비히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와 이졸데를 맡은 말비나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부부. 루드비히는 초연 이후 겨우 네번 더 트리스탄을 부른후 너무 지쳐서 세상을 떠났다.

             

○ Il Trovatore(일 트로바토레) - 만리코

1853년 1월 19일 로마의 테아트로 아폴로에서 초연된 '일 트로바토레'에서 만리코는 카를로 보캬르데(Carlo Baucardé: 1825-1883)가 맡았다. 플로렌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오리진의 테너이다. 그는 처음에 투스카니 대공궁의 요리사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그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면서 어찌나 노래를 잘 불렀던지 다른 요리사들이 '잘한다. 잘해! 요리사로서 아깝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테너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는 주로 나폴리의 산 카를로에서 활동했다. 베르디의 세 오페라가 산 카를로에서 처음 공연될 때에 모두 주역으로 출연했다. '첫 십자군의 롬바르디인'에서는 아르비노를, '맥베스'에서는 말콤을, '산적들'에서는 카를로를 맡았다. 그후 그는 이탈리아 전역은 물론, 유럽의 각지에서 인기리에 오페라에 출연했다. 베르디가 '일 트로바토레'를 작고하고 있을 때에 사람들은 베르디에게 '보갸르데가 훌륭하니 한번 기용해 보심이 어떠하신지요?'라고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베르디도 보갸르데를 상당히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우선 음성이 드라마틱하여 후보로서 손색이 없었고 특히 하이 C 를 쉽게 내는 재능이 있어서 호감을 주었다. 보캬르데의 만리코는 대성공이었다. 한편, '일트로바토레'가 프랑스어 버전으로 파리에서 초연되었을 때에는 루이 게이마르(Louis Guéymard)가 만리코를 맡았다.

 

만리코의 이미지를 창조한 카를로 보캬르데

 

○ Turandot(투란도트) - 칼라프

푸치니의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사후인 1926년 4월 25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투란도트는 당대의 소프라노 로사 라이사(Rosa Raisa)가 맡았고 칼라프 왕자는 테너 미구엘 플레타(Miguel Fleta: 1897-1938)가 맡았다. 미구엘 플레타는 스페인 아라곤 출신이다. 20세기에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테너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미구엘 플레타야말로 칼라프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적극 추천했다. '투란도트'의 초연은 푸치니에 대한 추모의 정으로 크나큰 관심을 끌고 치루어졌다. 미구엘 플레타는 유럽과 미국, 그리고 남미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떨친 테너였지만 라 스칼라의 칼라프로서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는 1919년에 데뷔하여서 1935년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을 활동하였고 무대에서 은퇴한 후 3년을 지내다가 1938년에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은퇴후에 빈곤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최초로 네순 도르마를 부른 테너 미구엘 플레타

 

○ Un ballo in maschera(가면무도회) - 리카르도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는 원래가 스톡홀름이 배경이지만 당국의 검열 때문에 보스턴으로 변경되었다. 그래서 1839년 2월 17일 로마 테아트로 아폴로에서의 초연은 보스턴 배경이었다. 출연진의 이름도 상당히 바뀌어졌다. 원래는 구스타보 왕이지만 보스턴 세팅에서는 리카드로로 바뀌었다. 리카르도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는 게타노 프라스키니(Gaetano Fraschini: 1816-1887)였다. 이탈리아의 파비아 출신인 그는 1837년 파비아에서 도니체티의 '람메무어의 루치아'에서 아르투로로 데뷔한 이래 30여년 동안 세계의 여러 곳에서 주로 베르디와 도니체티의 오페라에 등장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특히 베르디의 오페라와 많은 인연이 있었다. 5편의 베르디 오페라에서 주인공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알지라'(1845)에서 자모로, '해적'(Il corsaro: 1848)에서 코라도, '레냐뇨 전투'(La battaglia di Legnano: 1849)에서 아리고, '슈티펠리오'(Stiffelio: 1850)에서 타이틀 롤, 그리고 '가면무도회'에서 리카르도였다. 베르디와 도니체티는 테너로서 프라스키니를 '부드러우면서 섬세하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프라스키니는 영웅적인 바리톤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출연하는 도니체티의 오페라가  생명력을 얻어 장수할수 있었고 베르디의 오페라는 더욱 상승기류를 탈수 있었다. 실로 그는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도니체티에서 베르디로 이관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가면무도회'의 리카르도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 게타노 프라스키니

 

○ Die Zauberflöte(마술피리) - 타미노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 고귀하고도 청아하며 서정적인 타미노 왕자의 이미지는 체코 출신으로 비엔나에서 활동하고 있던 테너 베네딕트 샤크(Bemedikt Schack: 1758-1826)가 창조하였다. 보헤미아(현재의 체코공화국)의 미로티체 출신인 그는 하이든이나 마찬가지로 어릴 때에 프라하 대성당의 소년합창단원으로 활동하다가 변성기가 되자 작곡에 뜻을 두어 작곡도 하면서 테너로서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당시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였다. 프라하에서 지내던 샤크는 의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1775년에 비엔나로 왔다. 그러나 음악에 뜻을 두어 작곡과 성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스승은 유명한 카를 브리베르트(Carl Friberth)였다. 테너로서 그는 실제로 하이든의 아이젠슈타트 멤버가 되어 하이든의 오페라에도 출연을 하였다. 그는 1786년에 에마누엘 쉬카네더의 순회극단 멤버가 되었다. 그리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의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극단을 위해 징슈필을 작곡하기도 했고 테너로서 징슈필에 출연도 했다. 이 극단은 1789년에 비엔나에 정착하여 그로부터 비덴극장에서 연극과 징슈필을 공연했다. 이때로부터 샤크는 모차르트와 친밀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친분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모차르트는 시간만 있으면 아침에 샤크네 집을 찾아와서 함께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모차르트는 샤크가 옷을 갈아 입는 동안 기다리면서 샤크가 작곡해 놓은 악보들을 살펴보다가 고쳐주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직접 멜로디를 만들어 넣어주기도 했다. 그러므로 샤크의 오페라 중에서 어떤 부분들은 모차르트의 솜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마술피리'의 공연을 끝내고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샤크는 린츠로 가서 지내다가 다시 뮌헨으로 갔다. 그때 쯤해서 샤크의 음성이 쇠퇴해져서 결국 은퇴하였고 연금을 받아 근근히 지내다가 뮌헨에서 세상을 떠났닫.

 

쉬카네더 순회극단의 공연장면. 가운데 청년이 베네딕트 샤크. 타미노의 이미지를 창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