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도니체티의 '칼레 공성' - 124

정준극 2014. 7. 10. 21:41

칼레 공성(L'assedio di Calais) - The Siege of Calais

게타노 도니체티의 첫번 프랑스 스타일 그랜드 오페라

백년 전쟁 중의 영국군의 칼레 공성에 대한 이야기

프랑스의 애국심, 영국의 자비심 골고루 부각

 

'칼레 공성'(Le Siège de Calais). 1838년 프랑수아 에두아르 피코(François-Édouard Picot: 1786-1868) 작. 정치인들 '애국 애국'하지만 14세기 칼레 시장이었던 외스타셰보다 더 훌륭한 애국자도 없을 것이다.

 

14세기로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전 유럽을 흔들어 놓았던 일이 있었다. 1337년에 시작하여 1453년에 막을 내린 이른바 '백년 전쟁'(The Hundred Years War)이다. 백년전쟁은 역사상 가장 오랜기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직접적으로는 영국의 플라타게네트 왕가(House of Plantagenet)와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House of Valois)가 일으킨 전쟁으로 실은 영국이 프랑스의 왕관을 차지하고자 벌인 전쟁이다. 백년전쟁에서는 프랑스의 구국처녀 잔다크가 활동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이다. 백년전쟁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하루 종일 걸리기 때문에 이만 생략키로 한다. 다만, 이 기간에 벌어졌던 영국의 칼레 공성이 특별하기 때문에 나중에 여러 형태의 예술작품으로 표현되었으며 도니체티는 오페라로 만들기까지 했다. 프랑스 칼레는 영국군의 공성이 장기화 되자 굶주림으로 죽어 나가는 시민들이 속출하는 등 피해가 커서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항복을 한다. 영국은 칼레의 항복을 받아 들이는 조건으로서 다시는 다른 도시에서도 그런 항거가 일어나지 않도록 경고를 주는 의미에서 칼레 시민의 대표들을 처형키로 한다. 그런데 도니체티의 '칼레 공성'은 당시 프랑스 오페라들이 해피 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 패션이므로 해피 엔딩으로 끝나도록 만들었다. 사족이지만 '칼레 공성'을 기념하는 것으로 오페라도 오페라지만 오귀스트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The Burgher of Calais: Les Bourgeois de Calais)은 칼레 공성에 따른 이야기를 표현한 조각작품으로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은 백년전쟁 때 칼레 시민들이 보여준 희생을 표현한 작품이다. 런던의 빅토리아 타워 가든스.

 

'칼레 공성'이 예술작품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시작은 프랑스 작가로서 아카데미 프랑세의 존경받는 회원이었던 피에르 로랑 뷔레트 드 벨로이(Pierre-Laurent Buirette de Belloy: 1727-1775)의 '칼레 공성'(Le Siège de Calais)이라는 작품으로부터이다. 이 작품은 7년 전쟁이 끝난 후에 완성된 것이다. 7년 전쟁 후에는 유럽에서 나라마다 애국심이 고양되었지만 특히 프랑스에서 더욱 그러했고 그러한 조류를 타고 이 소설이 나왔다. 칼레 공성 이야기는 애국적인 내용이어서 대단한 호응을 받았지만 비평도 있었다. 볼테르 같은 사람은 결국 영국에게 패배 당한 이야기인데 그것을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프랑스에서 7년 전쟁 후에 애국심을 고취하는 조류가 세차게 흐르게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오지는 못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드 벨로이가 '칼레 공성'을 쓴지 반세기 후에 위베르(Hubert)라는 사람이 드 벨로이의 '칼레 공성'을 바탕으로 '생피에르의 외스타셰'(Eustache de Saint-Pierre) 또는 '칼레 공성'(Le siege de Calais)이라는 희곡을 내 놓았다. 위베르는 필립 자크 라로슈(Philippe-Jacques Laroche)의 펜 네임이다. 외스타셰는 백년 전쟁 중 칼레 시장의 이름이다. 이 작품은 드 벨로이의 작품보다 더 혁명적인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위베르의 연극은 이탈리아 대본으로 만들어져서 이탈리아에서 공연되었고 이 연극에 감명을 받은 위대한 대본가 살바토레 카마라노(Salvatore Cammarano: 1801-1852)가 오페라 대본을 썼다.

 

아우렐리오의 부인 엘레오노라와 어린 아들

                  

나폴리 출신의 카마라노는 도니체티를 위해 '람메무어의 루치아' '로베르토 드브러' 등의 대본을 썼고 베르디를 위해서는 '일 트로바토레' '루이자 밀러' 등 여러 편의 대본을 제공한 사람이다. 당시 드 벨로이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발레도 있었다. 카마라노의 대본으로 도니체티가 완성한 오페라 '칼레 공성'(L'assedio di Calais: 라세디오 디 칼레)은 1836년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사실은 도니체티가 프랑스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키 위해 만든 오페라이지만 초연은 나폴리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도니체티는 생전에 약 85편의 오페라를 남겼는데 '칼레 공성'은 그중에서 49번째 작품이 된다. 도니체티의 '칼레 공성'은 당시 이탈리아 왕국의 모후인 마리아 이사벨라(Maria Isabella)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칼레 공성'은 도니체티가 산 카를로 극장을 위해 작곡한 오페라 중에서 13번째의 것이며 대성공을 거둔 '람메무어의 루치아'의 바로 다음에 공연된 것이다. '칼레 공성'은 초연 이후 같은 시즌에 16회의 공연을 가졌다. '칼레 공성'은 당시 프랑스 오페라의 패션인 해피 엔딩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영국 여왕이 영광을 받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 왕실, 특히 모후에 대한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해석할수가 있어서 도니체티는 이탈리아 국왕으로부터 치하를 받았다. 그러다가 '칼레 공성'은 1840년 갑자기 세계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칼레 공성'이 다시금 모습을 보인 것은 무려 150년이 지난 1990년 베르가모의 도나체티 페스티발에서였다.

 

칼레 시민들의 비참한 생활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외스타셰(에우스타치오 데 생피에르: Eustachio de Saint-Pierre: Bar) - 칼레의 시장

- 아우렐리오(Aurelio: MS) - 칼레 시장의 아들

- 엘레오노라(Eleonora: S) - 아우렐리오의 부인

- 조반니 데르(Giovanni d'Aire: T) - 칼레의 시민

- 자코모 데 위상(Giacomo de Wisants: T) - 칼레의 시민

- 피에트로 데 위상(Pietro de Wisants: Bar) - 칼레의 시민

- 아르만도(Armando: B) - 칼레의 시민

- 에두아르도 3세(Eduardo III: Edward III: Bar) - 영국 왕

- 이사벨라(Isabella: S) - 영국 왕비

- 에드먼드(Edmund: T) - 영국군 장군

- 영국군 스파이(Un Incognito: B)

 

아우렐리오의 역할은 이른바 무지코(musico)가 부른다. 무지코는 남성의 역할이지만 여성이 맡는다. 바지역할이다. 여자가 남자 역할을 맡는 것은 카스트라토가 사라진 후에 하나의 패션이 되었다. 그러나 무지코(복수는 무지치)는 도니체티 시대로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도니체티는 아우렐리오의 역할을 테너가 맡도록 작곡코자 했다. 그러나 나폴리 극장측이 당시의 유행대로 무지코가 맡도록 부탁해서 그렇게 작곡했다. 그러므로 '칼레 공성'에 나오는 6중창은 여성들이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힘찬 감동이 부족하다. 역사 기록에는 칼레의 시민으로 희생을 자청한 사람들이 일곱명으로 되어 있으나 오페라에서는 여섯 명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외스타셰 시장과 그의 아들 아우렐리오를 제외하면 칼레 시민은 네명이 된다. 여기서 시민이라고 하면 일반 농부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 출신의 시민을 말한다.

 

외스타셰 시장을 포함한 여섯 명의 칼레 시민들이 칼레 시민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될 것을 다짐하고 나선다.

 

'칼레 공성'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영국과 프랑스간의 백년전쟁은 1337년에 시작되었는데 칼레 공성 사건은 그로부터 9년 후인 1346년의 있었던 일이다.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오페라로 만든 것인데 흥미로운 것은 에드워드 3세의 부인의 이름이 실제로는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이지만 오페라에서는 이사벨라로 나온다는 것이다. 아마 노래를 부를 때 필리파라는 발음보다는 이사벨라라는 발음이 더 쉽기 때문에 그렇게 고쳤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에드워드 3세의 부인의 이름을 이사벨라라고 한 것은 아무리 드라마하고 해도 이상한 일이다. 영국군의 칼레에 대한 공성은 1346년에 시작되었지만 오페라에서는 그 이듬해인 1347년이 무대이다. 제1막은 영국군 진영이다. 아우렐리오가 성벽을 타고 내려와서 영국군 진영에 숨어 들어가서 빵 몇 덩어리를 훔친 후에 다시 성벽을 타고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아우렐리오가 어쩌다가 소음을 내자 영국군이 잠들어 있던 영국군이 깨게 된다. 1막은 영국군이 자기들 진영에 잠입한 아우렐리오(Aurelio: 실제 이름은 Aurèle)를 잡으려고 추격하면서 부르는 합창으로 시작한다. 아우렐리오는 칼레 시장 외스타셰(유스타셰)의 아들이다. 아우렐리오는 굶주리고 있는 가족들을 보다 못해 먹을 것을 훔치려고 성밖의 적진으로 몰래 스며들어갔던 것이다.

 

속상해 하고 있는 아우렐리오

 

칼레의 시민들이 외스타셰와 만나고 있다. 시민들은 '도와주시오, 먹을 것을 주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소. 오직 남아 있는 것은 조국 프랑스에 대한 사랑 뿐이오'라고 소리친다. 외스타셰는 아들 아우렐리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소리친다. 에우렐리오의 부인인 엘레오노라가 들어와서 '모든 것을 잃었어요. 아버지의 아들도 나의 남편도 모두 잃었어요.'라면서 남편 아우렐리오가 적진으로 들어갔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잡혔거나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엘레오노라라는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귀족 여인으로서 가장 적당한 이름인 것 같아서 그렇게 붙인 모양이다. 하기야 오페라에서는 엘레오노라, 또는 짧게 불러서 레오노라라는 이름이 단골처럼 등장한다. 이 말을 들은 외스타셰의 절망에 넘친 칸타빌레가 Le fibre, oh Dio! m'inverste, Orrida man di gelo!(저 무서운 냉혈의 손이여, 오 신이시여, 나의 육신을 그러는데 외스타셰 시장에게 충성을 다하는 시민 조반니 외스타셰 데르(Giovanni d'Aire)가 들어와서 아우렐리오가 적진에서 붙잡히지 않고 도망쳐 나왔다고 전한다. 외스타셰와 엘레오노라의 카발레타가 Un instante i malo obblio, Dell' orrenda e lunga guerra(한 순간에 모든 근심을 덜었네, 이 무서운 전쟁에서)이다. 잠시후 아우렐리오가 아들 필리포와 함께 나타난다. 모두 기쁨에 넘친다.

 

아우렐리오는 아버지 외스타셰에게 무슨 희망이 남아 있느냐고 묻는다. 외스타셰는 칼레의 시민들을 위해 항복하는 길 밖에 없다고 말한다. 밖에서는 칼레의 시민들이 외스타셰 시장에게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갈피를 못잡고 혼란에 빠져 있다고 하면서 비난하는 소리가 들린다. 외스타셰는 밖으로 나가서 시민들을 만나 상황을 설명코자 한다. 일부 극단적인 시민들이 외스타셰를 살해할 기세로 다가선다. 아우렐리오를 비롯한 몇 명의 병사들이 그들을 제지한다. 그러자 외스타셰는 그들에게 자기 가슴을 내보이면서 어서 단검으로 찌르라고 말한다. 난동을 부리던 사람들은 외스타셰의 그같은 용기에 감동하여 뒤로 물러선다. 얼마후 밝혀진 사실이지만 시민들을 선동해서 난동을 부리게 만든 뒤에는 영국이 보낸 간첩이 있었다.

 

2막은 그날 밤이다. 아우렐리오의 부인인 엘레오노라가 하나님께 칼레를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아우렐리오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난다. 아우렐리오는 꿈에서 본 죽음과 피에 대하여 노래를 부른다. 다음날 아침, 시청에서 회의가 열린다. 칼레를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의논하는 모임이다. 일부 시민대표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고 주장한다. 일부 시민들은 영국군에게 항복해서 칼레가 파괴되고 수많은 시민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방지하자고 주장한다. 그 때 에드워드 왕의 사자가 도착한다. 에드워드 왕의 사자는 만일 칼레가 항복한다면 받아들이겠다고 전하며 다만, 귀족 출신의 시민 여섯 명을 처형하겠는데 이는 프랑스의 다른 반항적인 도시에 대하여 경고를 보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아우엘리오는 에드워드의 사자에게 그런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모두 죽도록 싸우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외스타셰는 아울레리오를 조용히 하라고 제지하고 영국군의 사자에게 '에드워드 왕의 조건을 수락한다'고 전해 달라고 말한다.

 

칼레 시민들이 외스타셰 시장의 숭고한 결의에 순종하고 있다.

 

외스타셰 시장은 시민들에게 여섯 명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여인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해서 전체 시민들이 받을 고통에 비하면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자기의 이름을 가장 먼저 리스트에 올려 적는다. 아우렐리오도 리스트에 들어가겠다고 주장하지만 외스타셰가 가문을 위해서 그러지 말라고 말린다. 시민들 중에서 너도나도 처형 당할 리스트에 포함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중에는 조반니 데르도 포함되어 있다. 모두들 그들의 용기와 희생 정신에 크게 감동한다. 아우렐리오는 아버지 외스타셰를 얼싸 안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여섯 명의 명단을 기리는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함께 죽는다'(Morremo insieme)이다. 외스타셰는 스스로 죽음을 자청한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어 기도를 드리자고 말한다. 그러자 시민들 모두 무릎을 꿇어 함께 기도를 드린다.

 

O sacra polve, o suol natio(오 성스러운 땅이여, 오 조국이여)

E giunta l'ora...per sempre addio(이제 영원한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도다)

Onde salvarti ne andiamo a morte(그대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죽음의 길을 가노라)

benedicendo la nostra sorte(우리의 운명을 축복해 주시라)

E quando accolti nel ciel saremo(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날)

Del sangue in premio domanderemo(우리는 우리의 피흘림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리라)

Che volga il ciglio sul franco regno(주의 눈이 프랑스 영토를 긍휼히 여기시면)

In sua pietade il re dei re(세세토록 왕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리라)

 

적진에 잠입했다가 살아 돌아온 아우렐리오를 동료들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3막은 영국군 진영이다. 에드원드 왕은 무척 기쁘다. 마침내 세개의 왕관, 즉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의 왕관이 자기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의 아리아는 다음과 같다.

 

L'avvenir per me fia tutto(앞날엔 나를 위한)

Un trionfo, una vittoria(승전과 승리뿐)

Francia, Scozia and Albione(프랑스,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

Un sol freno reggerà(하나의 굴레로 다스려지리라)

Il balen di tre corone(찬란한 세개의 왕관들이)

Sul mio capo spenderà(나의 머리 위에서 빛나리)

 

팡파레와 함께 합창 소리가 힘차게 들린다. 이사벨라 왕비의 도착이다. 이사벨라 왕비는 혼자의 힘으로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고 온 것이다. 필리파가 아니라 이사벨라로 되어 있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바와 같다. 모두들 에드워드와 이사벨라의 영광을 찬양한다. 잠시후  외스타셰를 포함한 여섯 명의 칼레 시민들이 교수형의 이슬이 되기 위해 나타난다. 이들은 조국 프랑스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다. 칼레 시민들과 이들 여섯 명의 가족들이 에드워드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지만 에드워드는 왕으로서 한번 약속한 말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다는 태도이다. 외스타셰는 시민들과 가족들에게 구차스럽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아우렐리오가 사랑하는 부인 엘레오노라와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노래를 부른다. 이 시점에서 무대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관중들도 이미 손수건을 꺼내어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마침내 죽음을 각오한 여섯 명의 시민들도 함께 눈물을 흘린다. Al supplizio ne traete(우리를 고통으로 데려가소서)이다. 영국군은 칼레 시민들의 눈물 겨운 희생 정신에 크게 감동한다. 이사벨라 왕비가 에드워드 왕에게 이 불쌍한 사람들의 목숨을 보전해 달라고 간청한다. 에드워드가 왕비의 주청을 가납하여 칼레 시민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모두들 에드워드 왕의 자비를 찬양한다.

 

영국군의 공성에 항거하는 칼레 시민들

 

'칼레 공성'은 도니체티가 시도한 첫번째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의 작품이다. 어떻게  해서 도니체티가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에 도전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도니체티는 파리의 이탈리아극장(Theatre-Italien)에서 1835년 3월에 '마리노 팔리에로'(Marino Faliero)를 공연하였다. 도니체티는 파리 국립오페라극장(갸르니에 극장)에서 그의 작품을 공연하고 싶었다. 파리는 당시 유럽에서 오페라의 중심지였고 파리 오페라극장은 더구나 그 중심에 있었다. 도니체티 자신도 파리 오페라극장을 세계에서 가장 존귀한 극장이라며 높이 평가했으니 그런 곳에서 자기의 작품을 공연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파리 오페라극장은 프랑스의 위대함과 영광을 나타내는 작품을 우선적으로 공연하는 전통이 있었다. 외세에 저항하는 프랑스의 불굴의 정신을 표현한 작품을 공연하는 것을 하나의 전통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도니체티는 마음 속으로 '칼레 공성'에 대한 스토리를 오페라로 만들면 파리 사람들도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칼레 공성'은 이미 이탈리아에서 루이지 마르키오니라는 사람이 연극으로 만들어서 나폴리 등지에서 인기를 끌며 공연되고 있었고 여기에 루이지 헨리라는 사람이 발레 작품까지 만들어져서 더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카마라노에게 '칼레 공성'에 대한 오페라 대본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도니체티는 '칼레 공성'에 프랑스 오페라의 핵심 요소인 발레를 추가하지 않을수 없었다. 디베르티세망(divertissement)이다. 도니체티가 발레를 마련한 데에는 아마 1835년에 산 카를로에서 루이지 헨리의 발레를 보고 상당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의 중간에 오페라의 스토리와 별로 관계도 없는 발레를 넣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칼레 공성'이 공연될 때에는 삭제를 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별도로 공연토록 했다. 말하자면 더블 빌의 공연이었다. 또 하나 프랑스의 전통은 프랑스의 오페라에서는 이탈리아에서 처럼 프리마 돈나라는 개념이 크게 도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여주인공이 등장하면서 아리아를 불러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 보통인데 프랑스 오페라에서는 그런 전통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프랑스 오페라에서는 여주인공의 역할이 전체 오페라에서 남자 주인공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칼레 공성'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외스타셰 시장이며 그의 아들인 아우렐리오가 똑 같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고 아우렐리오의 부인인 엘레오노라 또는 나중에 등장하는 영국 왕비 이사벨라 등은 그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니체티는 프랑스의 그런 전통에 반하여서 주인공을 테너 대신에 이탈리아의 오래된 관습인 무지코를 사용하였다. 아우엘리오를 바지역할로 삼은 것이다. 어째서 그랬을까? 당시 나폴리의 산 카를로에는 주역 테너들이 서너명이 있었지만 도니체티의 생각으로는 그 중에서 어느 누구도 아우렐리오의 역할에 합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할수 없이 메조소프라노를 기용했던 것이다.

 

 

프랑스 오페라의 또 다른 특징은 스토리의 반전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또는 다른 나라의 오페라에서는 스토리가 순리대로 흐른다. 예를 들어서 '람메무어의 루치아'를 보자. 에드가르도와 루치아의 사랑은 처음부터 비극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루치아도 죽고 에드가르도도 죽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프랑스 오페라에서는 마지막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 점은 당시 나타나기 시작한 구원 오페라(rescue opera)에서 여실히 볼수 있다. '칼레 공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연히 처형 당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칼레의 시민들이 에드워드 왕의 자비로 죽지 않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헌편, '칼레 공성'을 통하여 프랑스는 고귀한 애국심을 보여주었으며 영국은 자비심을 보여주었다. 두 나라 모두 자존심에 손상을 입지 않은 작품이었다. 산 카를로에서의 초연은 11월 29일이었다. 세번째 공연이 있던 날에는 도니체티가 관중들의 환호에 응답하여서 여섯 번이나 무대에 나가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관중들이 적었다. 왜냐하면 당시 나폴리에는 콜레라가 침입했기 때문에 모두들 조심하느라고 극장에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니체티는 '칼레 공성'을 파리 오페라에서 공연되기를 바래서 작곡을 했지만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니체티의 생전에 파리 오페라에서 공연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도니체티는 평소에 친분이 있던 테너 길베르 뒤프레(Gilbert Duprez)에게 편지를 보내어 '칼레 공성'이 파리 오페라에서 공연될 수 있도록 어떻게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길베르 뒤프레는 8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다가 얼마전에 파리로 돌아가 파리 오페라의 스타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길베르 뒤프레는 나폴리에 있을 때 도니체티의 '람메무어의 루치아'의 초연에서 에드가르도를 맡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길베르 뒤프레가 도니체티의 편지를 분명히 받았을 터인데 아무런 회신도 없었다. '칼레 공성'은 1836년 11월 19일에 초연된 이래 그해 말까지 산 카를로에서 15회의 공연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3막이 소란만 할뿐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해 왔다. 3막에서는 이사벨라 왕비의 도착을 축하하는 댄스 장면이 하일라이트이지만 이야말로 소란말 할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모두 변함없이 3막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837년 7월의 산 카를로 공연에서는 변화가 있었다. 도니체티는 3막을 좀더 인상적으로 만들기 위해 발레와 합창 피날레를 삭제하고 대신 보다 전통적인 아리아로서 피날레를 장식토록 했다. 엘레오노라가 부르는 Questio pianto che sul ciglio, E l'eccesso del contento(나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기쁨에 넘치는 눈물이다)로 대체하였다. 그런데 산 카를로의 극장장이 자기의 허락도 없이 그렇게 고쳤다고 하며 불평을 하는 바람에 도니체티는 극장장의 구미에 맞게 또 다시 수정을 할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나폴리를 떠나기 전에는 어떤 수정도 하지 않았다.

 

 

1837년 7월 6일의 리바이발에서는 1막과 2막만 공연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이틀 후인 7월 8일에는 3막 대신에 다른 사람의 발레가 공연되었다. 도니체티는 나폴리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듬해인 1838년에는 세번 더 공연이 있었다. 그리고 1939년에는 계획만 되어 있다가 한번도 공연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1840년 2월에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한번 더 공연이 있었는데 1막과 2막만 공연되었다. '칼레 공성'은 도니체티가 가장 공을 들여 만든 성숙한 오페라 중의 하나인데 나폴리에서만 38회의 공연을 기록하고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니체티의 오페라로서 초연된 극장에서만 여러번 공연되었다가 소리도 없이 종적을 감춘 경우는 아마 '칼레 공성'이 유일할 것이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1988년에 오페라 라라(Opera Rara)가 런던에서 3막 버전으로 공연했고 1990년에는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페스티발에서 공연되었으며 1991년에는 아일랜드의 웩스포드 페스티발에서 역시 3막 버전이 공연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최초의 공연은 1998년 글라스고에서였다. 그후 몇 군데에서 공연이 되었고 계획도 되었으나 2013년에 잉글리쉬 투어링 오페라가 영국 주요 도시를 순방하면서 공연한 것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잉글리쉬 투어링 오페라의 공연은 1막과 2막을 공연한 것이었고 여기에 3막의 몇 몇 장면을 1막과 2막에 짜 넣은 것이었다.

 

 

[주요 노래 리스트]

1막 1장 (3막이 삭제된 경우에) 에드워드의 아리아 L'avvenir per me fia tutto, Un trionfo, una vittoria(나의 영광을 위한 모든 장애물들이 마침내 극복되었도다)

1막 2장 외스타셰의 절망에 찬 칸타빌레 Le fibre, oh Dio! m'inverste, Orrida man di gelo!(무섭고 냉정한 손이여, 오 신이여, 나의 육신에게 고통을 주소서)

1막 2장 외스타셰에 이어 엘레오노라의 카발레타 Un instante i mali obblio, Dell' orrenda e lunga guerra(한 순간에 고통을 잊었도다 길고도 무서운 전쟁에서)

1막 2장 아우렐리오의 아리아에 이어 칸타빌레 Al mio cor oggetti amati, Vi congiunga un solo amplesso(나의 가슴에 안게 하소서 내가 사랑하는 모든이들을 하나로 품게 하소서)

1막 2장 아우렐리오의 카발레타에 이어 조반니, 엘레오노라, 외스타셰의 앙상블 Giamma del forte ardir non langue(우리의 용기는 결단코 스러지지 않으리)

1막 2장 외스타셰에 이어 세 그룹의 앙상블: 아우렐리오, 엘레오노라, 조반니 , 아르만도, 자코모, 피에트로 Che s'indugia? In questo petto(무엇이 너를 멈추게 하는가?) 앙상블: Plebe ingrata, non e questi, Il tuo padre il tuo sostengno(배은망덕한 사람, 이 자는 아버지가 된 적이 없단 말인가?)

2막 1장 엘레오노라의 아리아 Breve riposo a lui condede il sonno(잠시나마 눈을 붙여 쉬도록 하소서)

2막 1장 아우렐리오 Io l'udia chiarmarmi a nome(그의 눈물과 두려움 속에서), 엘레오노라 Rio presagio! ...amato figlia(사악한 징조여! 사랑하는 아들아)

2막 2장 아우렐리오의 아리아 Esci, e sappi chi t'invta(가라! 가서 누가 그를 보냈는지 물어보라. 우리의 증오와 그의 조건을)

2막 2장 6중창 O sacra polva, o suol natio(오 귀중한 땅, 우리의 조국)

3막 1장 L'avvenir per me fia tutto, Un trionfo, una vittoria(나의 영광을 위한 모든 장애는 마침내 극복되었도다)

3막 2장 아우렐리오에 이어 모은 사람들 Raddopia i baci tuoi, Parte di me piu cara(사랑하는 나의 한 부분, 다시 키스를 해다오, 다시 다시)

3막 2장 이사벨라의 아리아 Di re giglia, vincitrice, Io mi postro(왕의 딸로서, 승리자로서, 나는 당신 앞에 굴복하나이다)

3막 2장 합창 Fin che i secoli vivranno, Le tue laudi un eco avranno(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당신에 대한 찬양은 메이라쳐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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