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칼레 공성(The Siege of Calais)
Le Siege de Calais - L'assedio di Calais - Belagerung von Calais
'칼레 공성'을 그린 그림. 버질 마스터 작.
'칼레 공성' 사건은 비록 오래전인 14세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역사적으로 기억에 남는 사건이어서 그런지 예술의 세계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영국군에 의한 프랑스의 칼레 공성 때에 칼레 시민들이 보여준 단호한 애국정신이 세월을 초월해서 높은 찬양을 받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하여 '칼레 공성' 스토리는 소설이나 연극으로 만들어졌고 심지어는 오페라로도 만들어졌다. 도니체티가 '칼레 공성'(L'assedio di Calais)이이 그것이다. 오페라가 있는가 하면 발레작품도 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안무가인 루이지 헨리가 발레작품으로 만든 것도 있다. 그런가하면 유명한 조각작품도 있다. 로댕이 '칼레의 시민들'(Les Bourgeois de Calais)은 누구나 잘 아는 작품이다. '칼레 공성'을 그림으로 남긴 경우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버질 마스터, 프랑수아 에두아르 피코, 장 드 와브랭 등이 칼레 공성을 주제로하여 위대한 미술 작품을 남겼다. 칼레 공성은 1346년 9월 4일부터 시작하여 1347년 8월 3일에 끝난 사건이다. 우리나라는 이때 고려 충목왕 시절로서 이성계에 의한 조선 개국이 있기 45년 전이다. 원나라가 그저 하라는 대로 하고 지내던 시기였다. 칼레 공성은 백년 전쟁(1337-1453)의 초기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백년전쟁은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왕권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여서 시작된 전쟁이다. 백년 전쟁이라고 해서 꼭 100년 동안 일어났던 전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116년간 지속된 전쟁이었다. 그것을 편의상 100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영국의 에드워드가 프랑스의 왕관까지도 차지하려고 전쟁까지 불사했는가? 프랑스에서는 1328년에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 적자가 없었던 관계로 국왕부재의 사태에 이르른다. 샤를르 6세는 987년부터 프랑스를 통치해 온 카페Capet)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 샤를르 6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자기가 샤를르 6세의 선대왕인 공정왕 필립(Philip the Fair)의 손자가 되므로 자기야 말로 카페 왕조를 계승할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공정왕 필립은 샤를르 6세의 아버지였으므로 에드워드는 샤를르 6세의 조카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들은 다른 나라에서 왕을 지내고 있는 사람을, 더구나 가장 싫어하는 영국왕을 프랑스의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하면서 이리저리 따지다가 새로 필립 6세라는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필립 6세는 카페 왕조가 아닌 발루아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필립 6세로 인하여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가 발루아 가문의 필립 6세를 왕으로 추대하자 즉각 반발을 하고 자기야 말로 적법한 프랑스 왕통인데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아느냐면서 거듭 프랑스의 왕관을 요구하였다. 에드워드가 그렇게 주장한 것은 그가 카페 왕조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지만 만일 필립 6세를 프랑스의 왕으로 인정하면 자기는 프랑스의 영토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영주이기도 하므로 그렇다면 필립 6세의 봉신(封臣)이 되므로 가만히 있다가는 프랑스에 복종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에 과감히 자기의 요구를 내세웠던 것이다. 어째서 에드워드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냐하면 에드워드는 실제로 프랑스 영토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프랑스는 얼마전부터 스코틀랜드의 브루스 부족을 지지해 왔다. 브루스 부족은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무던히도 영국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참에 프랑스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아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필요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영국은 프랑스 북부의 플란더스를 영국의 영토로 만들고 싶어했다. 플란더스는 명목상으로 프랑스에 종속되어 있지만 양모 무역 때문에 실제로는 영국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기왕에 플란더스를 영국의 소속으로 만든다면 무역으로 양측 모두 이익을 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싫어하는 입장이므로 언제라도 기회만 있으면 전쟁을 일으킬 셈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런 모든 배경으로 인하여 영국이 프랑스에 대하여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피할수 없는 것이 되었다.
프랑스는 영국에 비하여 영토도 넓고 인구도 많았지만 중앙집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군사작전을 수행하는데에도 문제가 많았고 더구나 전쟁경비를 세금으로 거두어 들이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반면에 영국은 프랑스에 비해서 여러 면이 조직적이었다. 군대의 지도권이 수립되었고 병사들의 무기도 프랑스보다 우수한 것이었다. 특히 영국은 롱보우라고 불리는 긴활을 이용한 전투에 있어서 다른 어느 나라 군대보다도 우수했다. 백년전쟁은 세가지 국면에서 치루어졌다. 첫번째는 플란더스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에드워드는 플란더스에 대한 영국의 양모 수출을 전면 중단조치했다. 그로 인하여 플란더스의 상인들과 무역업자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고 문을 닫아야 하는 경제적 위기에 빠졌다. 결국 플란더스의 도시들은 에드워드를 프랑스의 왕으로 인정하는 선언을 하고서야 양모 무역을 재가할수 있었다. 이들은 영국과 동맹조약을 맺고 영국에 대하여 성실하겠다는 정도에서 더 나아가 충성을 다짐하였다. 에드워드는 이처럼 플란더스에 교두보를 확보하자 프랑스 침공을 위한 구체적인 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에드워드의 첫 승리는 1340년 1월 슬러리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을 물리친 것이다. 이로써 에드워드는 영불 해협에서 영국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플란더스가 생각만큼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 플란더스는 아무래도 프랑스와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는 더 이상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프랑스와 휴전협정을 맺었다.
에드워드는 비록 프랑스와 휴전협정을 맺었지만 성질이 가만 있지를 못하는 것이어서 1346년에 평화협정을 없던 일로 하고 군사를 동원해서 노르만디를 침공했다. 에드워드의 영국군은 노르만디의 도시들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크레시(Crecy)에서 대승을 거두어 노르만디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이쯤해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에드워드의 선단이 우선 급한대로 부상병들과 전리품들을 싣고 이미 칼레 지역에서 영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후퇴할 방법이 없어서 노르만디에 남아 있어야 했다. 에드워드의 군대는 플란더스의 교두보로 일단 집결키로 했다. 이들은 플란더스로 행군해서 가는 중에 프랑스군과 조우하게 되었다.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영국군은 장비가 우수했고 더구나 긴활부대의 활약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기병과 보병은 여지없이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 더구나 프랑스 군대는 지휘력이 부족해서 방어에만 급급했었다. 에드워드의 영국군은 예정대로 칼레로 퇴각할수 있었다. 그러나 칼레 요새를 함락하지는 못하고 외곽에서 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영국군은 빈번한 전투로 인하여 지쳐있었기 때문에 칼레를 공격할 기운이 나지 않기도 했다.
칼레 요새는 바다를 등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부가 2중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성안의 중심지에는 또 다른 요새가 있는데 그 요새도 역시 별도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는 곳이었다. 실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영불 해협의 한 가운데에 있는 프랑스의 칼레는 바로 에드워드가 생각하고 있던 그런 항구였다. 에드워드는 칼레를 함락하며 수중에 넣으면 영국군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칼레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과연 칼레는 난공불락이었다. 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해도 양진영의 병력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칼레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영국군은 보병, 기병, 해군 등을 포함해서 전체 3만 4천의 병력인데 칼레 성내의 군사는 시민군까지 합하여 7천 내지 8천이었다.
에드워드의 군사들은 1346년 9월에 칼레로 진격해 왔다. 다행히 칼레의 성벽과 해자는 쉽사리 파괴되거나 넘을 수가 없었다. 성내의 군사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영국군을 방어했기 때문에 수차례에 걸친 공격에도 성을 넘을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장기전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해서 성주변에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에드워드의 지구작전은 영국에 있는 귀족들이나 상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런 연고로 에드워드는 보충병과 보급품들을 영국과 플란더스로부터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칼레 목조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늘어나느니 칼레측의 사상자였다. 영국군이 칼레를 포위하고 공격을 늦추지 않자 프랑스의 필립 6세가 군대를 끌고 와서 칼레를 구원코자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필립 6세는 영국군의 보급 루트를 차단코자 했으나 그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까운 병사들만 희생되었다. 칼레 성내에서는 음식물이 급격히 부족하게 되었다. 시민들은 심지어 쥐까지 잡아 먹어야 했다. 먹는 물이 더 걱정이었다. 6월 25일에 프랑스 보급선이 포위망을 뚫고 칼레에 접근코자 했으나 영국 함대에 걸려서 꼼짝 없이 도망가야 했다. 그런가하면 프랑스에 충성을 보내는 선원들이 외지로부터 몰래 식료품을 가지고 칼레 시민들에게 전달하곤 했지만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영국군은 무려 두달 동안이나 공성을 풀지 않았지만 성과는 거의 없었다. 칼레 방어의 프랑스군 사령관이 필립에게 보낸 밀서에 의하면 이제 성내에서 먹을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은 사람의 시신밖에 없다고 했다. 필립은 7월에 전마선 일곱척에 먹을 것을 싣고 칼레에 전하려고 했으나 보급품 전부를 영국군에게 빼앗겼다. 칼레의 프랑스군 사령관은 최후의 각오로서 어린이와 노약자 500 명을 성밖으로 내보내 영국군으로부터 먹을 것을 얻어 먹도록 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어린이와 노약자들이 자기들 진영으로 걸어오는 것을 허학하지 않았다. 그래서 5백명의 어린이와 노약자들은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성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아 결국 모두 성벽아래에서 굶어 죽을수 밖에 없었다. 최악의 비극이었다.
11월에 접어 들어서 영국군은 대포와 긴 사다리 등 공성장비를 확보할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성벽을 무너트리지는 못했다. 에드워드는 이듬해 2월에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고 다만 포위만 하여 성내의 시민들이 굶주림에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프랑스 보급선이 칼레 항구에 도착하여 성내로 보급품을 전달코자 했으나 한번은 성공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영국군의 철통같은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프랑스의 필립 왕은 계속 병사들을 추스려서 영국군을 공격했으나 영국군의 병력이 워낙 우세하였고 더구나 영국군은 광활한 늪지를 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으로서는 공격이 그만큼 어려웠다. 6월이 되어 성안에 있는 칼레 사람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바닥이 나서 극심한 고통을 겪기 시작했다. 프랑스 함선이 식료품을 싣고 칼레로 행선하였으나 중간에 영국군 함선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되돌아 가야 했다. 칼레는 당장의 조치로 어린이와 노인 수백명을 성밖으로 내보내 영국군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돌보아 주기를 바랬고 성안에는 싸울수 있는 남자와 여자들만 남아 있도록 했다. 나중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영국군이 성밖으로 내보내진 어린이와 노인들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결국 프랑스 어린이와 노인들 수백명은 성밖 들판에서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어떤 버전에 따르면 에드워드가 자비를 베풀어 이들을 수용하여 먹을 것을 주고 각자에게 어디든지 마음대로 가라고 통행증을 주었으며 여비도 조금씩 주었다고 되어 있다.
8월 1일에 칼레는 성안에서 불을 질러 연기로서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근처에 있던 필립 왕은 프랑스 진지들을 모두 파괴토록 하여 전쟁 장비들이 나중에 영국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칼레에 입성한 에드워드는 자비를 베풀어서 성내의 시민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도로 했다. 오페라에서는 이사벨라 왕비가 에드워드에게 칼레 시민 대표들의 목숨을 보전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되어 있으나 기록에는 왕의 신하들이 그렇게 요청했다고 되어 있다. 에드워드는 칼레 시민들에게 비록 조금이나마 먹을 것을 주고 어디든지 떠나도록 했다. 칼레는 그로부터 거의 2백 년동안 영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영국은 칼레를 대륙 침공의 교두보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메리 1세 때에 이번에는 프랑스가 칼레를 공성하여 1558년에 프랑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1880년에 칼레는 오귀스트 로댕에게 당시 용감함과 애국심을 보여주었던 칼레 지도자들의 동상을 제작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1889년에 칼레에 로댕의 Les Bourgeois de Calais(The Burgehers of Calais)가 완성되었다. 똑 같은 조각 작품이 런던의 빅토리아 타워 가든스에도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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