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로메오(Tolomeo)
원제목: 이집트 왕 톨로메오(Tolomeo, re d'Egitto) - Ptolemy, King of Egypt(이집트 왕 톨레미)
헨델이 왕립음악원을 위해 작곡한 마지막 오페라
이집트 왕 톨로메오. 글리머글라스 오페라 공연. 2010년.
오페라 세리아인 '이집트 왕 톨로메오'는 헨델의 13번째 오페라로서 헨델이 왕립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을 위해 작곡한 오페라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다. 헨델은 1719년에 왕립음악원장으로 임명된바 있다. 왕립음악원은 오늘날의 런던콘서바토리와는 다른 기관으로 오래전에 문을 닫았다. '이집트 왕 톨로메오'는 헨델의 13번째 오페라라고 했지만 만일 다른 작곡가들과 공동으로 만든 '무치오 스케볼라'(Muzio Scevola)도 헨델의 작품으로 간주한다면 '이집트 왕 톨로메오'는 헨델의 14번째 오페라가 된다. 헨델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영국에서 오페라를 만들면 출연 성악가들을 다른 나라에서 1급으로 초청해서 공연효과를 보는 것이 하나의 패션이었다. 특히 카스트라토를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에서는 누구를 초청해서 공연하느냐가 대단한 관심꺼리였고 흥행의 열쇠였다. 헨델도 자기 오페라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정상급 성악가들을 출연시키느라고 무던히도 섭외를 했고 그들을 위해 별도의 음악을 주선해 주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집트 왕 톨로메오'에는 이 오페라가 이탈리아 스타일의 작품이고 이탈리아어 대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탈리아 출신의 정상급 성악가들이 섭외되어 출연했다. 1728년 4월 30일 런던 왕립극장에서의 초연에서는 주인공인 이집트 왕 톨로메오를 세네시노(Senesino)라고 더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의 카스트라토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디(Francesco Bernardi)가 맡았고 톨로메오 왕의 부인인 셀레우체(Seleuce)는 당대의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쿠쪼니(Francesca Cuzzoni)가 맡았으며 키프러스 왕 아라스페의 누이동생인 엘리사(Elisa)는 역시 당대의 소프라노 화우스티나 보르도니(Faustina Bordoni)가 맡아서 대단한 화제가 되었었다. 그리고 톨로메오 왕의 동생인 알레산드로(Alessandro)는 알토 카스트라토인 안토니오 발디가 맡았고 키프러스 왕 아라스페는 베이스 주세페 마리아 보스키(Giuseppe Maria Boschi)가 맡았다. 나중에 좀 더 설명하겠지만 뛰어난 소프라노들인 쿠쪼니와 보르도니는 런던에서 대단한 라이발이 되어 서로 누가 잘났느냐고 질투하다가 급기야는 무대에서 공연 도중에 치고 받는 싸움까지 벌인 에피소드가 있다. 아무튼 헨델로서 이렇듯 국제적으로 유명한 정상의 성악가들을 출연토록 하는 노력도 '이집트 왕 톨로메오'가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출연자 중심의 오페라를 만들지 않았고 대신에 음악 중심, 드라마 중심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오페라 '이집트 왕 톨로메오'의 원작은 이탈리아의 작가인 카를로 시기스몬도 카페체(Carlo Sigismondo Capace)의 '톨로메오와 알레산드로'(Tolomeo et Alessandro)이다. 톨로메오와 알레산드로는 고대 이집트의 톨레미 왕조의 사람들로서 형제간이다. 제목은 두 사람의 이름을 내세웠지만 주인공은 톨로메오이다. 톨로메오왕은 톨레미 9세라고도 부르는데 기원전 142년경에 태어나서 기원전 81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생애 동안 세번이나 잠시잠시 이집트의 왕이었다. 그런 연고로 그의 생애는 실로 복잡한 것이었다. 아무튼 톨로메오 9세의 생애를 소설식으로 만든 카를로 시기스몬도 카페체의 작품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니콜라 프란체스코 하임(Nicola Francesco Haym: 1678-1729)이라는 사람이 헨델을 위해서 오페라 대본으로 만들었다. 로마 출신으로 작곡가이기도 하고 극장 매니저이기도 하며 배우이기도 한 니콜라 프란체스코 하임은 헨델을 위해 '줄리오 체사레'(Giulio Cesare), '오토네'(Ottone), '플라비오'(Flavio), '타멜라노'(Tamerlano), '로델린다'(Rodelinda) 등의 대본을 썼고 조반니 보노치니를 위해서는 '아스티아네트'(Astianette), '칼푸르니아'(Calfurnia) 등의 대본을 썼다.
헨델의 오페라 '이집트 왕 톨로메오'는 간단히 '톨로메오'라고 부른다. 마치 모차르트의 '크레테 왕 미트라다테'를 간단히 '미트라다테'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오페라 '톨로메오'는 이탈리아식 표현이고 원래 이집트에서는 톨레미 또는 프톨레미라고 부른다. 오페라 '톨로메오'는 헨델이 43세 때인 1728년 4월 30일 런던의 왕립극장(King's Theater)에서 초연되었다. 수정본은 1730년과 1733년에 공연되었다. 당시에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다. '톨로메오'는 오페라 세리아라고 분류하지만 헨델은 드라마 페르 무지카(Dramma per musica)라고 불렀다. 근대에서의 리바이발은 1938년 6월 독일 괴팅겐에서 시작되었다. 그후에는 바로크 오페라들이 거의 공연되지 않았던 시대여서 '톨로메오'도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들어와서 바로크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자 '톨로메오'도 간헐적이지만 무대를 장식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1996년 할레에서의 '헨델 페스티발'에서 공연되었고 2006년에는 잉글리쉬 투어링 오페라(English Touring Opera)가 공연했고 2010년에는 역시 미국의 글리머글라스 오페라(Glimmerglass Opera)가 공연했다.
글리머글래스 오페라의 공연. 아라스페 왕이 셀레우체에게 접근하자 엘리자가 충고를 주고 있다.
독일의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청년시절에 이탈리아에 가서 공부도하고 작곡도 하며 지내다가 1711년, 26세의 젊은 나이에 런던에 정착하였다.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처음으로 런던에 가져온 사람이다. '리날도'(Rinaldo)이다. '리날도'는 열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런던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대유행을 이루었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솔로 아리아가 뛰어나서 인기를 끌었다. 당대의 최고 성악가들이 이탈리아 스타일의 아리아를 부르면 사람들은 감동해서 박수를 쳤다. 헨델은 1719년에 왕립음악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왕립음악원은 일종의 오페라단으로서 런던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만들어서 공연하는 임무를 지닌 기관이었다. 헨델은 오페라를 작곡할 뿐만 아니라 출연 성악가들은 선정하고 섭외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본토의 오페라를 가져와서 런던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편집하는 일도 했다. 헨델은 왕립음악원을 위해서 여러 오페라를 작곡했다. 어떤 것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만 또 어떤 것은 별로 박수를 받지 못했다. 카스트라토 세네시노와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쿠쪼니가 헨델의 오페라들에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그러던 중 1726년에 왕립음악원은 이탈리아에서 화우스티나 보르도니를 초청해서 데려왔다. 왕립음악원의 면모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제 왕립음악원의 두 프리마 돈나들, 즉 쿠쪼니와 보르도니는 왕립음악원의 해외 공연에 함께 나가서 공연하여 왕립음악원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그런데 런던에서의 상황은 달랐다. 결국은 두 사람의 극성 팬들 때문에 서로가 극심한 라이발 의식으로서 신경전을 벌였다. 그런 대결 및 비난은 1727년 6월 6일 왕립극장에서 보논치니의 '아스티아나테'를 공연하는 중에 절정을 이루었다. 두 소프라노는 함께 무대에 올라서 있고 객석에는 왕족들의 모습도 보였다. 갑자기 객석에서 두 라이발의 팬들이 서로 야유를 퍼붓더니 급기야 주먹다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무대에 있던 두 소프라노는 가만히 있을수 없어서 서로 비난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주고받더니 나중에는 서로 뺨을 때리며 육체적인 싸움으로 변하였다. 물론 오페라 공연은 중단되었다. 그래도 돈내고 입장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합창단을 급히 무대로 내보내어 마지막 파트의 합창을 부르도록 하고 막을 내렸다. 이 스캔들은 도하 신문들에 알만한 사람들이 그러면 되느냐는 내용의 풍자와 핀잔과 함께 대서특필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런던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인기가 이탈리아 출신의 소프라노들과 함께 동반 하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계속 작곡했고 계속 세네시노와 쿠쪼니와 보르도니를 위한 작품을 썼다. 그런데 이들 카스트라토와 소프라노들은 관중이 많던 적던 천문학적 숫자의 출연료를 받았지만 정작 작곡자인 헨델은 별로 만족할 만한 작곡료를 받지 못했다. 더구나 오페라 작곡자는 관중의 수에 따라 보수가 책정되기 때문에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인기가 시들해지자 헨델의 수입은 더욱 줄어들수 밖에 없었다. 또한 관객의 급감은 결국 왕립음악원에 막대한 재정결핍을 안겨주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1728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왕립음악원(왕립오페라단)은 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델은 임프레사리오인 존 제임스 하이데거(John James Heidegger)와 파트너가 되어 계속 이탈리아 오페라를 만들었다. 하이데거는 헤이마켓에 있는 왕립극장을 임대해 놓았기 때문에 임대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무슨 오페라든지 무대에 올려야 했다. 헨델은 런던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부활시켜댜 한다는 염원으로 이탈리아에 가서 새로운 소프라노를 스카웃해서 왔다. 세네시노, 쿠쪼니, 화우스티나는 모두 유럽의 다른 곳과 계약을 맺어 런던을 떠났다. 그래서 새로 초청한 소프라노가 안나 스트라다(Anna Strada)였다. 헨델의 대본가인 파올로 롤리는 어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헨델은 안나 스트라다가 이미 헨델을 떠난 두 여자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른다고 말했다. 헨델은 보르도니에 대하여 사실상 한상 만족하지 못했고 쿠쪼니는 되도록이면 속히 잊고 싶어했던 여자였다'라고 썼다. 이후, 안나 스트라다는 헨델의 오페라에서 프리마 돈나로서 큰 활약을 했다.
톨로메오와 셀레우체. 글리머글래스 오페라
오페라의 주인공인 톨로메오 9세는 아버지 톨로메오 8세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왕이 된 사람이다. 풀네임은 톨레미 9세 소터 2세이며 별명으로는 라티로스(Lathyros)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이름은 피스콘(Physcon)이고 어머니는 클레오파트라 3세였다. 톨레메오 8세는 세번이나 이집트 왕의 자리에 있었다. 기원전 116년으로부터 110년까지 6년 동안, 109년부터 107년까지 2년 동안, 88년부터 81년까지 7년 동안이다. 중간에 공백이 있는 기간에는 그의 동생인 톨레미 10세 알렉산더가 왕으로 있었다. 아버지 톨로메오 8세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는 아들 톨로메오 9세의 섭정이 되어 공동으로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간의 사정은 이러하다. 톨로메오 9세는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4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섭정인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는 새로 왕비가 된 딸 클레오파트라 4세를 쫓아내고 대신 망내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아들 톨레메오 9세를 결혼시켰다. 사실상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는 아들 톨레미오 9세까지 죽이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대신 왕좌에서 쫓아내어 작은 아들 알레산드로를 왕좌에 앉히고 자기는 계속 섭정으로 권세를 누렸다. 그러다가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알수 없어서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는 톨레메오 10세가 된 작은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축출하고 전에 쫓아냈던 큰아들 톨레메오 9세를 다시 불려들어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세상이 묘하게 돌아가서 쫓겨난 작은 아들 톨레메오 10세가 세력을 규합하여 왕궁에 처들어와서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를 죽이고 다시 왕좌를 차지했다. 다시 왕이 된 톨로메오 10세는 어떤 전쟁에 나갔다가 그만 전사했고 쫓겨났던 톨로메오 9세가 다시 왕이 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다. 톨로메오 9세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왜냐하면 다시 왕이 된 톨로메오 9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금으로 만든 비석을 철거하고 대신 유리로 만든 것을 세워놓았다. 톨로메오 9세는 금으로 만든 비석을 녹여서 금화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이 분노하여서 톨로메오 9세를 살해하였던 것이다.
톨로메오 9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죽임을 당하자 그의 딸인 베레니체 3세(Berenice III)가 왕위에 올랐다. 베레니체 3세는 톨로메오 9세와 두번째 부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톨로메오 9세의 첫번째 부인은 그의 큰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4세였으며 두번째 부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그의 작은 여동생이었다. 톨로메오 9세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여왕이 된 베레니체 3세는 고작 1년 동안 왕좌에 있었다. 베레니체 3세는 그의 양아들인 알렉산더와 결혼하도록 강요를 당했다. 알렉산더는 톨레미 11세 알렉산더 2세라는 이름으로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왕이 된 알렉산더는 얼마 후에 양어머니 겸 부인인 베레니체 3세를 살해하였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연극에도 나오고 영화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는 궁금증이 생길수가 있다. 세계 최고의 미인이라는 클레오파트라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말한다. 그러므로 클레오파트라 3세로부터 4대 이후에 태어난 톨레미오(톨레미) 왕조의 인물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원전 69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30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39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계산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로마의 율리우스 케사르(줄리어스 시저)의 정부였으며 나중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마크 안토니)의 정부였으나 옥타비안(아우구스투스)이 처들어오자 체포당해서 치욕을 당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해서 독사가 물도록 하여 자살한 바로 그 여자이다. 클레오파트라라는 말은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뜻이다. 클레오(Kleo: Cleo)는 '영광'(Glory)라는 뜻이며 파트라(patra)는 '아버지의'라는 의미이다. 아무튼 오페라에서는 톨로메오의 이같은 사실적 스토리는 나오지 않고 거의 픽션에 가까운 내용들이다.
톨로메오와 셀레우체
오페라 '톨레메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장소는 이집트가 아니라 키프러스(사이프러서)이며 시기는 기원전 108년 경이다. 톨로메오 9세는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가 둘째 아들인 알레산드로(나중에 톨레메오 10세)를 왕좌에 앉히기 위해 톨로메오 9세를 폐위시키고 키프러스에 은신하여 지내고 있다. 오페라 '톨로메오'는 역사적인 사실과는 달리 소설적이다. '톨로메오'는 복수, 욕망, 실연, 헌신, 그리고 마침내는 화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1막] 막이 오르면 키프러스의 어떤 외딴 해변이다. 톨로메오(톨로메오 9세를 말함)가 난파되어 겨우 목숨을 건진 동생 알레산드로를 만난다. 알레산드로는 어머니 클레오파트라의 비밀 지시에 의해 형인 톨로메오를 죽이고자 키프러스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파선되어 겨우 키프러스의 해변에 상륙한 것이다. 알레산드로는 그런 엄청난 임무를 띠고 왔지만 정작 형인 톨로메오를 만나자 차마 그를 죽일수가 없다. 알레산드로는 그 자리에서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잠이 든다. 당시 키프러스의 왕 아라스페는 클레오파트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므로 키프러스에 은신하고 있는 톨로메오의 신변도 위험한 형편이다. 그래서 톨로메오는 오스민이라는 터키식 이름으로 위장해서 지내고 있다. 그때 해변에 아라스페 왕의 누이동생인 엘리사 공주가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잠들어 있는 알레산드로를 발견한다. 잠에서 얼핏 깨어난 알레산드로는 자기 앞에 있는 엘리사가 여신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엘리사에게 사랑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엘리사는 실은 오스민이라고 하는 신분을 알수 없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엘리사는 사실 예쁘게는 생겼지만 조금 경박한 면이 있다. 엘리사는 마침 근처에 있던 오스민을 보고 반가워서 말을 나누지만 어쩐지 오스민이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오스민은 멀리 이집트에 두고 온 부인인 셀레우체(셀루스)를 깊이 사랑하여 잊지 못하고 있으므로 아무리 키프러스 왕의 여동생이라고 해도 오스민(톨로메오)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잠시후에 셀레우체가 등장한다. 셀레우체가 어떻게 해서 키프러스의 외딴 해변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치고, 셀레우체 역시 신분을 숨기기 위해 델리아(Delia)라는 가명을 쓰고 있다. 델리아는 절망 중에 남편 톨로메오를 그리워하다가 문득 해변의 저 쪽에 있는 톨로메오를 발견한다. 델리아는 너무나 놀랍고 반가워서 톨로메오를 향해 뛰어가려고 하는데 그러나 그때 아라스페 왕이 나타나는 바람에 델리아는 사랑하는 남편 톨로메오를 눈 앞에 두고서도 어쩔수 없이 몸을 숨긴다. 그런데 하기야 드라마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아라스페 왕은 델리아(셀레우체)를 마음에 두고 어떻게 하면 델리아를 손에 넣을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막을 알고 있는 델리아는 아라스페 왕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 몸을 숨긴 것이다. 아라스페 왕은 델리아를 자기의 부인으로 삼는 상상을 하며 어서 델리아가 자기 앞에 나타나서 자기의 고통을 덜어주기를 생각하는 것으로 1막의 막이 내린다.
[2막] 톨로메오는 아라스페 왕이 자기의 부인인 셀레우체, 즉 델리아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을 알고 속이 상해서 어찌할줄 모른다. 더구나 그런 그에게 아라스페 왕의 딸인 엘리사가 사랑한다는 심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자 잘못하다가는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래서 톨로메오는 엘리사에게 자기의 정체는 오스민이 아니라 실은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였으나 추방당하여 여기에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엘리사는 과연 톨로메오의 말을 믿어야 할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입장에서 우선 델리아를 데려다가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한다. 병사들이 델리아를 아라스페 왕의 앞에 데려온다. 물론 아라스페 왕은 델리아가 이집트의 왕비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셀레우체(델리아)가 아라스페 왕의 앞에 끌려오는 것을 본 톨로메오는 '아니 셀레우체가 여긴 웬 일인가?'라며 깜짝 놀란다. 톨로메오는 이것이 분명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혹시 생시라고 생각해서 셀레우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한번 크게 선언한다. 사람들은 '아니 저 톨로메오가 어째서 델리아를 보고 사랑하느니 어쩌니 하는가?'라며 크게 의아해 한다. 셀레우체는 만일 자기가 톨로메오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톨로메오에게 크게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여 저기 있는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톨로메오를 부인한다. 오페라에서는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 대본에는 괄호 안에 하고 싶은 말을 넣는 경우이다. 셀레우체는 오매불망하던 남편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수 밖에 없는 괴로운 심정을 노래한다.
톨로메오는 다시 한번 엘리사에게 그를 사랑할수 없다고 밝힌다. 엘리사는 델리아가 분명히 톨로메오를 보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에 톨로메오가 자기의 사랑을 회피하기 위해 둘러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분노한다. 톨로메오가 나가고 알레산드로가 등장한다. 알레산드로는 엘리사를 보고 물불 가리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엘리사는 알레산드로에게 만일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톨로메오를 죽여달라고 말한다. 알레산드로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른다. 한편, 셀레우체는 자기의 운명이 너무나 가혹한 것 같아서 비탄의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를 듣고 저쪽(실은 무대 뒤)에서 톨로메오가 마치 메아리 치듯 두 사람의 난관을 사랑으로 극복하자고 말한다. 그때 아라스페가 셀레우체가 혼자 있는 것을 알고 갑자기 나타나서 셀레우체를 겁탈하려고 한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본 톨로메오는 도저히 참을수가 없어서 뛰쳐나와 아내 셀레우체를 보호한다. 톨로메오는 그제서야 자기와 셀레우체의 신분을 밝힌다. 분노한 아라스페는 두 사람을 어떻게든지 처벌하겠다며 사라진다. 톨로메오와 셀레우체는 어찌하여 서로의 사랑이 서로의 운명을 저주받게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한다.
[3막] 알레산드로는 어머니 클레오파트라가 세상을 떠났다는 편지를 받는다. 알레산드로는 클레오파트라가 그의 잔인함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고 믿는다. 아라스페는 알레산드로가 중얼거리는 말을 알레산드로가 형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하며 나아가 톨로메오를 죽이고자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자기의 손으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해석한다. 생각은 자유, 망상은 해수욕장이다. 아라스페는 자기야말로 알레산드로의 소원을 들어 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톨로메오와 셀레우체에 대하여 질투의 심정으로 복수할 생각이다. 한편, 엘리사는 셀레우체를 만나서 톨로메오를 자기에게 양보하라고 강요한다. 그렇지 않으면 톨로메오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될것이라고 위협한다.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톨로메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를 다시 거부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죽는 길 밖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 옆에 있는 독약을 마시고 죽는다. 한편 멀리 숲에 나갔던 알레산드로는 톨로메오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비탄에 빠져 있는 셀레우체를 위로하며 셀레우체와 톨로메오가 재결합을 이루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때 아라스페가 병사들에게 톨로메오의 시신을 들려서 나타난다. 아라스페는 알레산드로에게 톨로메오의 시신을 보여주며 마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한다. 아라스페는 셀레우체가 마침내 자기의 소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엘리사가 나타나서 톨로메오가 마신 독약은 실은 잠자는 약이라고 하면서 톨로메오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는 셀레우체를 죽이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엘리사는 셀레우체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할 생각이다. 그러한 때에 드디어 톨로메오가 잠에서 깨어난다. 알레산드로는 셀레우체를 톨로메오에게 인도하며 이제 비로소 남편과 아내가 다시 결합하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이어 알레산드로는 어머니 클레오파트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톨로메오가 진정한 이집트의 왕이라고 선표한다. 오페라는 모두들 용서함을 받고 고통이 기쁨으로 변했다는 내용의 사중창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막을 내린다.
***************************
[잉글리쉬 투어링 오페라] (English Touring Opera: ETO)
1979년에 창단된 영국의 오페라단이다. 처음에는 '오페라 80'(Opera 80)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했다. 그러다가 1992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ETO는 영국예술위원회(Arts Council England)의 후원을 받고 있다. 물론 개인이나 기업체의 후원도 받고 있다. ETO는 영국에서 오페라 공연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지역들을 찾아 다니며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글리머글라스 오페라] (Glimmerglass Opera)
글리머글라스 페스티발이라고도 부르는 미국의 오페라단이다. 1975년에 창설되었으며 뉴욕주 코퍼스타운(Cooperstown) 북쪽 13Km 지점에 있는 오체고 호수(Otsego Lake)의 앨리스 부슈 오페라 극장(Alice Busch Opera Theater)에서 매년 오페라 페스티발을 갖는다. 글리머글라스 페스티발은 미국에서 두번째로 규모가 큰 오페라 행사이다. 페스티발은 여름에만 개최하며 대체로 네편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다. 글리머글라스는 희귀 오페라, 신작오페라, 잘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의 공연으로 유명하다.
'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 > 화제의 30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시니의 파스티셰 '로버트 브루스' - 129 (0) | 2014.08.15 |
---|---|
퍼셀의 '인디안 여왕' - 128 (0) | 2014.08.08 |
탄 던의 '무단팅' - 126 (0) | 2014.07.19 |
알비노니의 '오로라의 탄생' - 125 (0) | 2014.07.18 |
[참고자료] 칼레 공성(The Siege of Calais) (0) | 2014.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