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리스모의 푸치니

베르디 이후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정준극 2014. 10. 23. 21:01

베르디 이후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4대에 걸친 음악 가정 출신

 

피아노 앞의 자코모 푸치니. 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 빌라인것 같다.

 

자코모 푸치니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여러 파트에서 소개하였기에 또 다시 소개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치니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재조명함으로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재차 파악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어서 차제에 부연하는 것이다. 푸치니는 베르디 이후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푸치니의 초기 작품들은 19세기 후반의 전통적인 이탈리아 로맨틱 오페라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중기 이후에는 새로운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인 베리스모에 중점을 두고 발전시킨 것들이다. 20세기 이탈리아 베리스모 작곡가로서는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조르다노, 폰키엘리, 볼프 페라리, 그리고 푸치니 등 여러명을 거명할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푸치니야 말로 이탈리아 베리스모 오페라의 가장 주도적인 작곡가였다.

 

루카의 산 미켈레 성당. 정면 상단에 미켈레(미하엘) 대천사가 세워져 있다. 푸치니는 이 성당에 속한 신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베리스모(Verismo)라는 말은 '사실주의'(Realism)라는 뜻이다. 베리스모라는 단어는 이탈리아어의 베로(Vero)에서 나온 말로서 베로는 '진실'이라는 의미이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베리스모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나온 후기 낭만주의의 양식의 한 장르를 말한다. 한편, 그 시대에 다른 나라에서도 사실주의적인 오페라가 나왔다고 해도 베리스모 오페라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 시대의 이탈리아 오페라만을 베리스모 오페라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베리스모 오페라 작곡가들로서는 피에트로 마스카니(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루제로 레온카발로(팔리아치), 움베르토 조르다노(안드레아 셰니에), 그리고 자코모 푸치니(토스카, 외투)를 들수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 중에서는 '토스카'와 '외투'가 베리스모를 대표하는 작품들이지만 '나비부인'과 '황금서부의 아가씨'도 베리스모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간주한다. 이들 작곡가들은 19세기 말 에밀 졸라, 헨리크 입센 등 자연주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이들의 사상을 자기들의 오페라에 반영코자 노력했다. 이탈리아에서 베리스모 스타일의 오페라가 처음 시도된 것은 1890년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부터였다. 그후 베리스모 오페라는 1900년대에 피크를 이루었다가 1920년대에 어느덧 새로운 다른 스타일의 오페라에 밀려서 기울어졌다. 베리스모 오페라의 특징은 과거 낭만주의에서 볼수 있는 역사적 내용 또는 신화적인 내용을 거부하고 사실적인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채택한 것에 있다. 특히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서민계층의 삶을 주제로 삼기를 즐겨했다. 그래서 스토리가 어느때는 천박하고 야비하기도 하며 폭력적이기도 하다. 한편, 베리스모라는 용어는 다만 이들 오페라 작곡가들에만 국한하지 않고 당시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젊은 학파'(giovane scuola)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작품을 말하기도 한다.]

 

'토스카'의 한 장면. '토스카'는 푸치니의 대표적인 베리스모 오페라이다.

 

푸치니는 1858년 이탈리아 북부의 투스카니 지방에 있는 루카(Lucca)에서 태어났다. 푸치니의 풀 네임은 자코모 안토니오 도메니코 미켈레 세콘도 마리아 푸치니(Giacomo Antonio Domenico Michele Secondo Maria Puccini)이다. 웬 이름이 이렇게 기나고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하나씩을 가져왔기 때문에 길게 된 것이다. 원래 이름은 그렇게 길지만 통상적으로는 자코모 푸치니라고 부를 뿐이다. 푸치니의 오리지널 긴 이름 중에서 처음에 나오는 자코모는 그의 고조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푸치니의 이름과 똑 같은 자코모 푸치니이다. 그래서 고조 할아버지인 자코모 푸치니를 첫번째 푸치니,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인 자코모 푸치니를 두번째 푸치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번째 이름인 안토니오는 그의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며 세번째인 도메니코는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고 네번째인 미켈레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에서 가져 온 것이다.

 

루카의 푸치니 생가. 현재는 푸치니 기념관이다. 집 앞의 광장에 푸치니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푸치니는 아버지 미켈레 푸치니와 어머니 알비나 마기(Albina Magi)의 일곱번째 자녀이다. 미켈레는 대천사 미하엘의 이탈리아식 표현이며 마기는 저 유명한 동방박사들을 일컫는 단어이니 아무튼 푸치니의 부모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고 볼수 있다. 푸치니의 가문은 대대로 루카에서 음악활동을 하였다. 말하자면 루카의 음악 왕조였다. 푸치니의 고조 할아버지인 자코모 푸치니(1712-1781)는 루카에 있는 산 마르티노 대성당(Cattedrale di San Martino 또는 Duomo San Martino)의 지휘자(maestro di cappella)였다. 푸치니의 증조 할아버지인 안토니오 푸치니가 첫번째 자코모 푸치니의 뒤를 이어 산 마르티노 대성당의 지휘자로 활동했고 그의 뒤를 푸치니의 할아버지인 도메니코 푸치니가 이어 받았으며 그의 뒤를 이어 푸치니의 아버지인 미켈레 푸치니가 대성당의 지휘자로 활약했다. 그러므로 푸치니 가문과 루카의 산 마르티노 대성당은 대단히 깊은 관계에 있다. 무려 124년이란 세월 동안 대를 이어서 산 마르티노 대성당의 지휘자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푸치니의 고조 할아버지인 자코모, 증조 할아버지인 안토니오, 할아버지인 도메니코, 아버지인 미켈레는 모두 볼로냐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물론 어떤 분은 일단 볼로냐에서 음악공부를 한 후 다른 곳에 가서 더 공부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할아버지인 도메니코는 한동안 조반니 파이시엘로(Giovanni Paisiello: 1740-1816))에게서 공부하였다. 조반니 파이시엘로는 나폴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곡가로서 거의 100편에 이르는 오페라와 기타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긴 사람이다.

 

루카의 산 마르티노 대성당(두오모). 푸치니가 어린 시절에 소년성가대원으로 노래를 불렀고 청소년 시절에는 오르간 부연주자로 활동했다.

 

푸치니의 선조들은 산 마르티노 대성당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지휘자로서 활동했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교회음악들을 작곡했다. 그리고 푸치니의 할아버지인 도메니코는 오페라도 작곡했다. 아버지 미켈레는 약소하지만 1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아버지 미켈레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상당히 명망있는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1864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례식은 마치 사회장과 같아서 수많은 시민들이 참석해서 애도했다. 미켈레 푸치니의 장례식에서는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인 조반니 파치니(Giovanni Pacini)가 진혼곡을 지휘했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푸치니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산 마르티노 대성당의 지휘자 겸 작곡가가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 미켈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푸치니는 겨우 여섯살의 어린이였기 때문에 가문의 직업을 수행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푸치니가 산 마르티노 대성당과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어린 푸치니는 소년성가대의 멤버로서 노래를 불렀고 나중에는 오르간 부연주자가 되었다. 푸치니는 루카에 있는 산 미켈레 신학교에서 일반 교육을 받았으며 대성당 신학교에서도 공부를 했다. 푸치니가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한 것은 그의 삼촌인 포르투나토 마기(Fortunato Magi)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푸치니는 1880년에 루카에 있는 파치니음악학교를 졸업했는데 이때 삼촌인 포르투나토 마기도 푸치니와 함께 음악공부를 했다. 푸치니는 이어 카를로 안젤로니(Carlo Angeloni)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오페라 '라 왈리'로 유명한 알프로데 카탈라니(Alfredo Catalani)도 카를로 안젤로니의 제자였다.

 

밀라노음악원 학생시절의 푸치니

 

그후 푸치니는 밀라노에 가서 음악공부를 할수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왕비였던 마르게리타의 장학금을 받아서였다. 푸치니의 또 다른 삼촌인 니콜라스 체루(Nicholas Ceru)라는 사람도 푸치니의 밀라노 학비를 지원해 주었다. 밀라노에서 음악공부를 할때 아밀카레 폰키엘리와 안토니오 바찌니(Antonio Bazzini)가 주로 그를 지도했다. 푸치니는 밀라노음악원에서 3년 동안 공부했다. 그리고 1880년, 21세 때에 미사곡을 작곡했다. '4성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미사곡'(Messa a 4 voci con orchestra: 1878-1880)으로 혹은 '영광미사'(Missa di Gloria)라고 부르는 곡이다. 이 때 작곡한 푸치니의 미사곡은 대단히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하기야 그의 선조들이 오랫동안 교회음악과 관련을 맺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훌륭한 미사곡을 작곡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푸치니는 밀라노음악원의 졸업작품으로서 '카프리치오 신포니카'(Capriccio sinfonica)라는 오케스트라 작품을 작곡했다. 푸치니의 스승인 폰키엘리와 바찌니는 이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특별히 밀라노음악원의 학생연주회에서 연주토록 했다. 밀라노에서 발간되는 페르세베란차(Perseveranza)가 푸치니의 '카프리치오 신포니카'를 중요하게 소개했다. 이로써 푸치니는 비록 나이는 젊지만 밀라노 음악계에서 유망주로서 각광을 받았다.

 

푸치니가 공부했던 밀라노음악원. 현재는 주세페 베르디 콘세르바토리오

 

푸치니는 생전에 11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최소한 3편은 푸치니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다.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이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인기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당시에 이탈리아에서 피어오른 베리스모라는 시대적 사조에 편승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푸치니의 오페라들이 모두 베리스모 작품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베리스모 오페라가 처음으로 대중들의 마음 속에 파고 든 것은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였다. 그러므로 푸치니의 작품 중에서 '카발레리아...'이전에 나온 '빌리'와 '에드가'는 베리스모와는 사실상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푸치니의 작품 중에서 순수한 의미의 베리스모 오페라는 '토스카'와 '외투'라고 보고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 중에서 어떤 것은 베리스모이고 어떤 것은 베리스모가 아닌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푸치니의 오페라는 모두 베리스모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라고 내세웠다. 그런가하면 다른 일부 학자들은 푸치니의 순수 베리스모 오페라로서는 이미 알려진대로 '토스카'와 '외투'이고 그밖에 굳이 베리스모에 포함시키고자 한다면 '나비부인'과 '황금서부의 아가씨'라는 얘기다.

 

'토스카'. 아마릴리 니짜. 푸치니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베리스모 작품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