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리스모의 푸치니

푸치니의 초기 오페라

정준극 2014. 10. 24. 08:53

푸치니의 초기 오페라

빌리-에드가-마농 레스코

 

[빌리] 푸치니의 첫 작품인 카프리치오 신포니카가 성공을 거둔지 얼마 후에 스승인 폰키엘리는 푸치니에게 '여보게, 자네 오페라를 하나 작곡해 보게나. 오페라 말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느날 폰키엘리는 자기의 빌라에서 열리는 사교모임에 푸치니를 초대하였는데 이 모임에서 폰키엘리는 푸치니에게 페르난도 폰타나(Fernando Fontana)라는 청년을 소개해 주었다. 폰타나는 재능있는 시인 겸 대본가였다. 푸치니와 폰타나는 새로운 오페라를 합작키로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빌리'(Le Villi)였다. 푸치니의 첫 오페라인 '빌리'는 1883년에 소초뇨(Sozogno)음악출판사가 주관하는 경연대회에 제출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889년에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이 작곡경연대회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우승을 차지한바 있다.) 푸치니의 '빌리'는 소초뇨 작곡경연대회에서 입상을 하지는 못했다. 푸치니로서는 섭섭한 일이었다. 그래서 '빌리'는 경연대회의 입상 기념으로 공연되지는 못하고 이듬해인 1884년 5월 31일 폰키엘리 등의 주선으로 별도로 밀라노의 테아트로 달 베르메(Teatro dal Verme)에서 초연을 가졌다. 밀라노에서 유명한 악보출판사인 리코르디(G. Ricordi & Co)는 푸치니의 재능을 믿고서 무료로 '빌리'의 악보를 출판해 주어서 '빌리'의 초연을 지원했다. 밀라노 음악원의 동료들이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구성해서 초연의 음악을 연주했다. '빌리'의 초연은 성공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리코르디 출판사가 '빌리'의 판권을 구매하였다. 그후 푸치니는 원래의 1막 짜리를 2막으로 만들고 1막과 2막 사이에 간주곡을 넣은 것으로 수정했다. 이 수정버전은 이듬해인 1885년 1월 24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의 무대에 올려졌다. 그런데 리코르디는 이 수정버전의 스코어를 1887년이 되기까지 출판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수정버전의 공연을 은근히 방해했던 것인데 아마도 그들이 구매한 오리지널 버전이 더 공연되기를 바래서일 것이다.

 

'빌리' 무대

 

[에드가] 리코르디 출판사의 대표인 줄리오 리코르디는 푸치니의 '빌리'에 대하여 상당한 감동을 받았다. 리코르디는 젊은 사람이 참으로 오페라를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잘만하면 사업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푸치니에게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다. 푸치니는 '에드가'를 마음에 두었다. '빌리'의 대본을 썼던 폰타나가 이번에도 대본을 맡았다. 작업은 1884년부터 시작되어 1888년에 오케스트라 파트까지 완성되었다. '에드가'는 1889년 4월 21일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반응은 미안한 말이지만 별로였다. '에드가'는 겨우 세번 공연을 마친 후에 수정을 위해 무대에서 퇴장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줄리오 리코르디는 밀라노의 신문에 '푸치니의 음악적 재능은 뛰어난 것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안되지만 형편 없었던 것은 폰타나의 대본이었다'라며 푸치니를 옹호해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891년 9월 5일에 수정본이 푸치니의 고향인 루카의 테아트로 디 질리오(Teatro di Giglio)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가졌다. 이번에는 성공이었다. 푸치니는 이듬해에 원래 4막짜리를 3막으로 축소하여 다시 수정버전을 만들었다. 페라라에서 공연하여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이어 토리노에서 공연되었고 스페인으로 건너가서 공연되었다. 푸치니는 1901년에 이어 1905년에도 계속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지만 이들 수정버전들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코르디는 푸치니에 대한 개인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언젠가는 대히트를 기록할 위인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에드가'는 좋은 경험으로서 푸치니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준 것이었다. 주머니가 넉넉해지자 푸치니는 전에 피아노를 가르쳤던 여학생이었으니 이미 결혼까지 한 엘비라 제미냐니(Elvira Gemignani)와 야반도주를 하였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자 '젊은 사람이 그러면 쓰나!'라면서 푸치니에 대한 비난의 물결이 이어졌다. 리코르디의 동료들은 리코르디에게 '저런 바람둥이 푸치니하고는 관계를 끊으시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리코르디는 그건 개인문제이고 그가 오페라를 작곡해서 성공만 하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 리코르디는 푸치니에게 다음번 오페라가 나올 때까지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푸치니는 나중에 엘비라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엘비라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에드가'의 한 장면. 토리노 극장

 

[마농 레스코] 푸치니는 세번째 오페라인 '마농 레스코'를 착수하면서 대본은 자기가 직접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 '대본이 형편없었다'면서 대본가를 조롱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리코르디는 푸치니에게 루제로 레온카발로를 대본가로 받아 들이라고 설득하였다. 푸치니는 그건 곤란하다고 반대했다. 그후 겨우 대본가를 선정했지만 푸치니가 스토리를 계속 이랬다 저랬다 하는 바람에 네번이나 대본가를 교체해야 했다. '마농 레스코'의 대본을 겨우 완성한 사람은 나중의 두 사람, 즉 루이지 일리카와 주세페 자코사였다. '마농 레스코'는 1893년 2월 2일 토리노의 테아트로 레지오(Teatro Regio)에서 초연을 가졌다. '마농 레스코'는 푸치니의 오페라로서는 처음으로 계속 인기를 끈 작품이다. 그런데 우연이겠지만 베르디의 마지막 작품인 '활슈타프'가 초연을 가진 것은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가 초연을 가진지 1주일 후였다. '마농 레스코'는 1894년에 런던에서 공연되었다. 버나드 쇼는 '마농 레스코'를 본 후에 '푸치니야 말로 베르디의 후계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농 레스코'의 성공으로 루이지 일리카와 주세페 자코사는 푸치니의 후속 오페라 3편의 대본을 맡게 되었다.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이다. 참으로 신통하게도 이 세 오페라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이다. 아무튼 푸치니는 '마농 레스코'의 성공으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이름을 드높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에서 베르디 이후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간직하게 되었다.

 

마농 레스코 초연의 포스터. 1893년 2월 토리노의 레지오 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