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리스모의 푸치니

푸치니의 후기 작품

정준극 2014. 10. 25. 10:07

푸치니의 후기 작품

황금서부의 아가씨-제비-3부작, 그리고 투란도트

 

푸치니는 1904년 라 스칼라에서 '나비부인'의 초연을 가진 이후 어찌된 셈인지 전처럼 작곡에 열중하지 않았다. 아마 자동차 사고 후유증 때문인듯 싶다. 그러는 중에 1906년에는 절친한 친구로서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의 대본을 썼던 주세페 자코사가 세상을 떠났다. 1909년에는 부인 엘비라 사건이 터져서 곤혹을 치루었다. 엘비라는 하녀인 도리아가 푸치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생각해서 없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퍼트렸고 그 때문에 도리아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서 자살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1912년에는 오래전부터 푸치니의 친구 겸 후원자였던 줄리오 리코르디가 세상을 떠났다. 결국 오페라 작곡가로서 푸치니의 경력도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푸치니 집의 하녀였던 도리아 만프레디. 23세의 나이로 푸치니의 부인인 엘비라가 퍼트린 공연한 소문에 견디지 못해서 자살을 했다.

 

[황금서부의 아가씨]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푸치니에게 오페라 한 편을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되도록이면 미국적 내용의 오페라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푸치니는 데이빗 벨라스코(David Belasco)의 희곡을 바탕으로 '황금서부의 아가씨'(La fanciula del West)를 완성했다. 1910년 12월 10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초연에서는 당대 최고의 테너인 엔리코 카루소와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인 에미 데스틴(Emmy Destin)이 주인공들인 딕 존슨과 미니의 역할을 맡았다. 지휘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맡았다. 토스카니니는 당시 메트에 객원지휘자로 와서 있었다. '황금서부의 아가씨'는 메트로폴리탄이 역사상 처음으로 초연을 가진 작품이었다. 그런데 '황금서부의 아가씨'는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음악 스타일이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푸치니의 다른 오페라들, 예를 들면 '라 보엠'이나 '토스카'에서처럼 모든 사람의 기억에 남을 아리아가 없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어떤 평론가는 '미국적인 톤이 결여되어 있다'면서 비판하였다. 그래서 비록 정상의 성악가들이 출연한 것이었지만 초연 이후에 별로 공연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황금서부의 아가씨'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들이 여러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진보적인 하모니 언어라든지 리듬의 복합성이다. 이런 시도들을 이탈리아 형식에 융합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아리아가 없다고 하지만 3막에서 딕 존슨의 아리아인 Ch'ella mi creda libero e lontano(내가 자유의 몸이 되어 멀리 있다는 것을 그녀가  믿도록 하라)은 지금도 콘서트의 스탠다드 레퍼토리로 되어 있다. 1차 대전 중에 이탈리아 병사들은 이 아리아를 소리 높이 부르면서 스스로들 사기를 높혔다고 한다.

 

1900년 메트로폴리탄 공연. 딕 존슨에 엔리카 카루소, 미니에 에미 데스틴

 

[제비] 푸치니는 주세페 아다미의 대본으로 '제비'(La rondini)의 스코어를 2년 동안의 작업 끝에 1916년에 완성했다. 초연은 이듬해인 1917년 3월 27일 몬테 칼로의 그랑 테아트르에서였다. 이 오페라는 원래 비엔나의 칼테아터(Carltheater)가 의뢰한 것이었다. 그러나 1914년에 1차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비엔나에서의 공연이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평소에 푸치니를 후원하였고 그의 스코어들을 출판해 주었던 리코르디 회사가 '제비' 스코어의 출판을 거절하는 일이 벌어졌다. 출판사의 운영은 푸치니와 절친했던 줄리오 리코르디가 세상을 떠난 후에 줄리오 리코르디의 아들인 티토 리코르디가 맡아서 운영하고 있었다. 티토는 '제비'의 스코어를 보고서 Bad Lehar 라고 말했다. 레하르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음악이라는 의미였다. 리코르디 출판사와 라이발 관계에 있는 로렌초 손초뇨(Lorenzo Sonzogno)가 '제비'를 기쁘게 맡겠다고 나섰다. 손초뇨는 '제비'를 몬테 칼로에서 초연되도록 주선했다. '제비'는 푸치니의 오페라 중에서 별로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치니는 '제비'에 대하여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푸치니는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제비'의 스코어를 가다듬는 노력을 기울였다.  푸치니는 '제비'를 원래 오페라라기 보다는 오페레타로 마음에 두고 작곡하였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대화체의 대사를 모두 제외하고 오페라처럼 레시타티브 형태를 취하였다. 그런데도 오페레타적인 자취가 남아있다. 현대의 어떤 평론가는 '제비'를 '왈츠의 선율이 계속 이어지는 작품이며 여기에 팝 스타일의 멜로디와 함께 지난 날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하는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말하자면 오페레타 스타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평론가는 '제비'의 주인공들의 설정이나 스토리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또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지적하고 '제비'는 오페레타가 아니라 오페라라고 거들었다.

 

'제비'의 한 장면

 

[3부작] 푸치니의 3부작인 '외투'(Il tabarro), '수녀 안젤리카'(Suor Angelica), '자니 스키키'(Gianni Schicchi)는 1918년 뉴욕에서 초연을 가졌다. 각각 단막의 오페라들이다. '외투'는 마치 파리의 귀뇰극장(Le Théâtre du Grand-Guignol)의 무대에 올려지는 공포물과 같은 내용이다. '수녀 안젤리카'는 센티멘탈한 비극이다. '자니 스키키'는 코미디이다. 이 세 편의 오페라 중에서 '자니 스키키'가 가장 자주 공연되고 있다. '자니 스키키'에 나오는 아리아인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외투'. 로열 오페라 하우스

 

'수녀 안젤리카'. 로열 오페라 하우스

 

'자니 스키키'. 로열 오페라 하우스

 

[투란도트] 푸치니는 '투란도트'를 '투란도'라고 발음하였다. 푸치니의 마지막 작품이다. 대본은 카를로 고찌(Carlo Gozzi)의 희곡을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후두암 수술을 받기 위해 브뤼셀로 갔고 수술 후에 병세가 악화되어 이윽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마지막 두 장면은 완성하지 못했다. 마지막 두 장면은 푸치니의 제자인 프랑코 알파노가 푸치니가 해 놓은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성했다. '투란도트'의 음악은 5음계 모티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동양적인 향취를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투란도트'에는 '황금서부의 아가씨'와는 달리 훌륭한 아리아들이 여러 곡이 나온다.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일 것이다.

 

'투란도트'. 베이징국가대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