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리스모의 푸치니

푸치니의 중기 오페라

정준극 2014. 10. 25. 09:57

푸치니의 중기 오페라

라 보엠-토스카-나비부인, 그리고 교통사고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 아들 안토니오와 함께. 토레 델 라고에서.

 

[라 보엠] '마농 레스코'로 성공을 거둔 푸치니가 다음으로 내놓은 작품이 '라 보엠'이다. 4막의 오페라로서 1851년에 나온 앙리 뮈르저(Henri Murger)의 소설 '보헤미안들의 생활'(La Vie de Boheme)을 바탕으로 삼은 작품이다. '라 보엠'은 1896년 토리노(튜린)에서 초연을 가졌다. 이미 거장으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초연의 지휘를 했다. '라 보엠'은 초연을 가진지 몇 년도 안되어서 유럽의 내노라 하는 극장에서 계속 공연되는 오페라로서 성장했다. 영국에서도 공연되었고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공연되었다. 아마 세계적으로 단기간 내에 이만큼 인기를 끈 오페라도 없을 것이다. 그보다도 '라 보엠'은 오늘날까지 세계의 오페라 무대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다. 오페라 '라 보엠'은 스토리를 뮈르저의 '보헤미안들의 생활'에서 가져왔다고 하지만 실제로 오페라의 내용과는 상당한 다름이 있다. 젊은 주인공들이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있는 내용과 나중에 여주인공 미미가 죽는 내용등이 원작과는 다른 점이다. 푸치니가 청년 시절에 밀라노에서 살 때의 경험이 '라 보엠'을 만드는데 많은 영감을 제공했다는 얘기도 있다. 푸치니는 밀라노음악원 학생시절과 '마농 레스코' 이전의 기간에 마치 오페라에 등장하는 보헤미안들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가난에 힘겨워하는 생활을 했다. 돈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였으며 방 세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물론 푸치니는 로마에 있는 자선단체인 Congregazione di carita(Congregation of Charity)로부터 매달 약간의 후원금을 받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한창 때의 청년으로서 굶주린 배를 채울수가 없었다. 더구나 멋이라고 하면 푸치니를 따라갈 사람이 없는데 돈이 없어서 옷도 제대로 사입지 못하였으니 그 고통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무튼 그래서 푸치니는 전당포를 제집 드나들 듯이 하면서 생활비를 끌어다 쓰곤 했다. 나중에 푸치니 전기작가들인 웨이클링 드라이(Wakeling Dry)나 에우제니오 체키(Eugenio Checchi)와 같은 사람들도 밀라노에서 푸치니의 가난했던 생활이 '라 보엠'에 나오는 청년 예술가들의 가난한 생활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체키는 푸치니가 학생시절에 적었던 일기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의하면 푸치니는 학생 시절에 4명의 친구들과 함께 저린 청어 한마리를 가지고 저녁을 대신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장면은 '라 보엠'의 4막에 나오는 주인공 예술가들의 생활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었다. 푸치니 자신도 나중에 학생 시절을 회상하면서 '나는 보헤미안처럼 살았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머리 속에는 오페라 작곡에 대한 생각만 가득차 있었다'라고 말했다.

 

'라 보엠'의 주인공들인 네명의 보헤미안과 같은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 철학자, 음악가, 화가 그리고 시인.

 

[토스카] '라 보엠' 다음으로 나온 작품이 '토스카'이다. 1900년 1월에 로마에서 초연되었다. '토스카'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푸치니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베리스모 작품이다. 일반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여기에는 폭력까지도 포함된다. 푸치니는 1889년에 빅토리앙 사르두(Victorien Sardou)의 연극인 '토스카'를 보고서 그것을 오페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푸치니는 악보출판가로서 자기의 후원자인 줄리오 리코르디에게 편지를 보내 제발 사르두를 만나서 오페라로 만들수 있는 승인을 받아 달라고 간청했다. 푸치니는 편지에서 '내가 필요로 했던 모든 것을 토스카에서 볼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과장된 내용도 없고 억지로 웅장하게 보여야 하는 장면도 필요 없으며 많은 분량의 음악도 필요하지 않는 작품입니다'라고 썼다. '토스카'의 음악은 주인공마다 특색있는 음악을 부여해 준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와 흡사한 표현이다. 어떤 사람들은 푸치니가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푸치니의 오페라에는 푸치니만의 음악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것은 푸치니만이 알수 있는 일이다.

 

'토스카'에서 토스카(마리아 칼라스)와 스카르피오.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나비부인] '나비부인'은 1904년 2월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은 비참할 정도로 실패작이었다. 아마도 리허설을 충분히 하지 못해서인듯 싶다. 푸치니는 '나비부인'을 라 스칼라에서 당장 철수시키고 수정버전을 만들었다. 1904년 5월에 브레시키아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가졌다. 푸치니는 '나비부인'을 계속 수정했다. 다섯번째 버전은 1907년이 마무리했다. 그것이 오늘날 세계가 사랑하는 스탠다드 버전의 '나비부인'이다. 물론 1904년의 오리지널 버전도 간혹 공연되고 있다.

 

'나비부인'. 푸치니가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게 완성되었다.

 

[교통사고] 1903년 2월 25일, 푸치니는 부인 엘비라와 아들 안토니오와 함께 루카에서 토레 델 라고로 차를 타고 가는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큰 고통을 겪었다. 운전은 전용 기사가 했다. 갑자기 차가 길에서 벗어나서 몇 미터 아래로 굴렀다. 차가 굴러 떨어질 때에 엘비라와 안토니오는 다행히 차에서 벗어나서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 운전 기사는 나중에 차에서 빠져나왔는데 부상이 심했다. 그런데 푸치니는 차에 깔려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뼈가 몇 군데 부서졌고 차의 한쪽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마침 근처에 있던 의사와 또 다른 한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려고 달려 왔다가 차에 깔린 푸치니를 보고 가까스로 구출했다. 푸치니는 곧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부상의 정도가 심해서 그후 몇 달이나 계속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한편, 병원에서 이런 저런 검사를 받는 중에 당뇨가 심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뜻하지 아니한 사고와 건강상의 다른 문제들로 인하여 '나비부인'의 완성이 지체되었다.

 

푸치니는 차에 대한 패션이 남달랐다. 왼쪽으로부터 푸치니의 의붓 딸인 포스카(엘비라가 전남편에게서 낳은 딸), 푸치니 집의 하녀인 도리아 만프레디, 푸치니, 부인 엘비라, 포스카의 딸과 함께 신차 시승을 하고 있는 푸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