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리스모의 푸치니

엘비라와 줄리아와 안토니오

정준극 2014. 10. 26. 03:55

결혼과 바람

엘비라와 줄리아와 안토니오, 그리고 도리아

 

푸치니는 루카에 있을 때인 1884년, 그가 26세의 청년일 때에 유부녀인 엘비라 제미냐니(Elvira Gemignani)와 좋아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엘비라 제미냐니는 푸치니로부터 한때 피아노를 레슨 받았던 여인이었다. 엘비라는 결혼 전에 엘비라 본투리(Elvira Bonturi)라는 이름이었으나 나리스코 제미냐니라는 사람과 결혼하는 바람에 엘비라 제미냐니가 되었다. 엘비라의 남편인 나리스코 제미냐니는 그야말로 '죄송합니다. 후회합니다'라는 말을 모르는 바람둥이였다. 그러다보니 엘비라의 결혼생활이 행복할리가 없었다. 젊은 푸치니는 불행하게 보이는 엘비라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금치 못했다. 사랑은 동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밀회에 밀회를 거듭하였다. 엘비라는 푸치니의 아이를 임신하였다. 엘비라가 점점 만삭의 모습을 보이자 두 사람은 더 이상 루카에서 지낼수 없어서 작심하고서 루카를 떠났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에 가서 아이를 낳으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에 엘비라는 남편 나리스코와의 사이에서 딸 둘을 두고 있었다. 푸치니와 엘비라는 큰 딸인 포스카만을 데리고 루카에서 야반도주하여 함께 살기 시작했다. 1886년에 아들 안토니오가 태어났다. 1886년이면 구한말의 우리나라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는 배재학당이 처음 문을 열었던 해가 된다. 아들까지 두었기 때문에 푸치니와 엘비라는 당연히 결혼을 해야 했지만 선뜻 그러지 못했던 것은 로마 가톨릭에서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도저히 말도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푸치니와 엘비라는 그저 엘비라의 남편인 나리스코가 죽기만을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1903년에 나리스코가 어떤 유부녀와 바람을 피다가 그 여인의 남편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엘비라는 하늘이 자기를 도와주었다고 믿었다. 나리스코가 죽자 엘비라는 비로소 푸치니와 결혼식을 올릴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 안토니오도 사생아가 아니라 푸치니의 법적인 아들로 등록할수 있었다.

 

나중에 푸치니의 정식 부인이 된 엘비라 제미냐니

 

생각해 보건대 역사상 수많은 작곡가 중에서 푸치니만큼 멋있게 생긴 사람도 없을 것이다. 베르디도 그저 그렇게 생겼고 바그너도 그저 그렇게 생겼지만 푸치니는 누가 보더래도 잘 생겼다. 체격도 좋은데다가 콧수염도 멋있게 길러서 아주 신사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푸치니는 자동차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이 많았다. 당시로서는 사치에 속하는 취미였다. 또한 푸치니는 사냥을 즐겨했다. 호수에서 편하게 지내는 오리들을 사냥하기를 특히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푸치니는 유행의 첨단을 걸을 만큼 멋쟁이였다. 멋있게 생긴데다가 멋을 아는 사람이었고 더구나 세상이 알아주는 유명한 작곡가였으므로 주변에는 그를 추종하는 여인들이 많을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한다하는 성악가들, 특히 소프라노들은 푸치니가 새로 오페라를 만들면 주역을 하고 싶어서 푸치니에게 이런 저런 형태로 접근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에는 작곡가가 캐스팅의 권한을 거의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유명해지는 것은 작곡가의 손에 달려 있었으니 그만하면 알만한 일이다. 그리하여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고 난 후에 작곡가와 여주인공이 친밀하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아무튼 푸치니와 섬싱이 있었던 여성 소프라노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들은 다음의 네 사람이었다.

 

소프라노 마리아 예리차와 푸치니. 비엔나에서. 마리아 예리차는 투란도트로 인기를 끌었다.

 

첫번째는 오늘날 체코 공화국의 브르노 출신인 마리아 예리차(Maria Jeritza: 1887-1982)였다. 인물도 뛰어난데다가 성악가로서의 재능도 훌륭한 여인이었다. 마리아 예리차는 비엔나 오페레타의 주인공으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푸치니의 '투란도트'로서도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두번째 여인은 역시 체코 공화국의 프라하 출신인 에미 데스틴(Emmy Destinn: 1878-1930)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메트로폴리탄의 프리마 돈나가 된 에미 데스틴은 '황금서부의 아가씨'에서 미니의 이미지를 창조한 소프라노였다. 에미 데스틴은 토스카로서도 유명했다. 세번째 여인은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의 체시라 페라니(Cesira Ferrani: 1863-1943)이었다. 1896년에 '라 보엠'이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을 때 주인공인 미미의 이미지를 창조했던 소프라노였다. 체시라 페라니는 미미 이전에 '마농 레스코'의 이미지도 처음으로 창조했었다. 네번째 여인은 루마니아 출신의 하리클레아 다르클레(Hariclea Darclee: 1860-1939)였다.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오페라 중의 하나인 '토스카'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미조의 소프라노였다. 푸치니가 이들 유명 프리마 돈나들과 애정행각을 벌였던 것은 세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어서 심심하면 맥주를 마시면서 안주로 인구에 회자되었었다.

 

    

왼쪽으로부터. 미니의 이미지를 창조한 에미 데스틴, 마농 레스코의 이미지를 창조한 체시라 페라니. 미미의 이미지도 창조했다. 토스카의 이미지를 창조한 루마니아의 하리클레아 다르클레.

 

이렇듯 푸치니의 여성편력이 화려하므로 부인인 엘비라로서는 전천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결혼한 입장인데 하루 아침에 남편을 잃을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보니 부부싸움을 하는 날도 많았다. 엘비라는 푸치니가 가정에 성실치 못하며 계속해서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엘비라의 의부증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엘비라라고 쓰고 질투라고 읽기를 좋아했다. 물론 푸치니도 바람에 있어서는 카사노바 정도는 못되지만 언필칭 상당한 수준이었다. 1905년쯤해서 푸치니의 집에는 16세의 귀여운 아가씨인 도리아 만프레디(Doria Manfredi)가 하녀 겸 가정부로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푸치니의 개인 운전기사인 텔로 만프레디의 여동생이었다. 텔로는 도리아가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집에서 쉬고 있는지라 푸치니에게 말해서 하녀로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도리아는 주로 푸치니의 서재 등을 청소하는 당번이었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이 서재에서 은밀하게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자 엘비라는 사람이 좀 참으면 좋은데 그러지 못하고 1909년에 도리아가 남편인 푸치니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앞에서 순진무구한 도리아를 공공연히 비난했다. 도리아는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참지못하다가 마침내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 도리아가 처녀인지 아닌지를 가리기 위해 해부가 이루어졌다. 처녀로서 죽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엘비라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 5개월 5일간을 감옥에 갇혀야 하는 선고를 받았다. 푸치니로서는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아무리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엘비라가 부인이고 또한 아들 안토니오의 어머니인지라 도리아의 가족들과 협상을 해서 위자료를 주기로 하고 그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도리아 만프레디. 푸치니의 부인인 엘비라의 비난을 견디다 못해서 자살했다.

 

그런데 아주 최근인 2007년에 도리아와 관련된 사건에서 새롭게 밝혀진 것이 있었다. 푸치니가 도리아와 모종의 관계를 가졌던 것이 아니라 도리아의 사촌인 줄리아라는 아가씨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푸치니와 줄리아 사이에서 아들이 하나 태어났으며 그 아들은 나중에 가난에 지쳐서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의 딸이 아직 생존해서 푸치니가 줄리아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푸치니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80년이 지난 싯점에서 비로소 그 편지들을 공개했고 편지들의 내용 중에 줄리아와의 관계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 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푸치니와 줄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안토니오라고 했다. 푸치니와 엘비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도 안토니오였으니 이상한 인연이다. 아무튼 줄리아가 낳은 안토니오가 나중에 결혼해서 나디아라고 하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나디아가 그동안 푸치니의 편지들을 간직하고 있다가 공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디아는 푸치니의 손녀가 된다. 그러면 푸치니와 줄리아의 관계에서 도리아의 역할을 어떤 것이었는가? 두 사람의 서로 주고 받는 편지들을 전달하는 역할만 맡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도리아 사건, 줄리아와의 은밀한 관계 등등은 푸치니의 말년 작곡활동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작곡에 별로 진척이 없었다. 그래서 '투란도트'를 미완성으로 남겼다는 얘기다. 하지만 '투란도트'에서 불쌍한 하녀 류(Liu)라는 인물을 개발해 냈다. 비극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이다. 어찌보면 도리아의 운명과 같다.

 

  

푸치니와 깊은 관계에 있었던 줄리아 만프레디. 아들 안토니오를 낳았다. 푸치니와 엘비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도 안토니오이므로 혼돈하지 말기를! 옆의 사진은 나디아. 푸치니의 손녀가 된다. 안토니오의 딸이다. 나디아와 푸치니의 모습은 누가 보더래도 닮았다. 특히 눈 언저리가 닮았다. 도리아-줄리아 사건은 별도로 좀 더 자세히 설명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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